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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삼연(2004-06-09 18:31:51, Hit : 8715, Vote : 1235
 http://www.samgookji.com
 이데올로기 각축전이된 삼국지--2 (민경욱)
그는 서구 소설을 본받은 한국소설이 점점 실제 삶과 유리되어감으로써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변적인 문학으로 전락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한국소설은 당대의 독자와 소통하는 언어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삼국지처럼 독자들이 오래도록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작품이야말로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지를 자신의 창작 모델로 삼습니다. 이처럼 창작자의 입장에서 삼국지를 옹호하는 주장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자 : 당신은 소설 ‘열한번째 사과나무’는 대중소설이 아니란 말인가.
이용범 : ‘열한번째 사과나무’는 중간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선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작가들을 중간문학 작가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선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본격문학은 이데아로 가기 위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야 할 이데아가 있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도 내용은 멜로다. 그러나 거기엔 이데아가 있다. 그러나 하루키의 허무주의는 이데아와 고통이 없다. 그렇다고 포르노소설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나는 중간소설이라고 부른다. 나의 이번 소설도 중간소설이라 할 수가 있다.(····)
기자 : 대중소설과 본격소설을 나누는 당신의 기준 같은 것이 있을텐데.
이용범 :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을 가르는 하나의 잣대는 탄탄하고 개성있는 문장이다. 요즘 소설에서 자연스럽지 못하고 가공적인 억지 문장을 많이 본다. 또한 영어 번역투의 국적불명 문장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런 소설들도 본격문학이라고 치장되는 게 현실이다.(···) 또 한편으론 소설을 어렵게 쓰는 작가들도 있다. 나는 어려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잣대는 상업주의다. 민중문학도 넓게 보면 대중문학이다. 민중문학이 계몽주의적인 반면 일반 대중문학은 상업주의적인 것이 다르다.
기자 : 그럼 누가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을 가르는가.
이용범 : 사실 몇백부 나가지도 않는 문학잡지들이 메이저를 형성하고, 그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게 문제다.(···) 그러나 그들은 문단을 좌지우지한다. 평론가들이 편집위원이라는 형태로 거기에 가세했다. 그들 출판사에서 나오는 소설들은 과대포장되기 일쑤다.
기자 : 가장 훌륭한 소설을 꼽는다면.
이용범 : ‘삼국지’를 꼽겠다. 삼국지는 나관중의 소설이 아니다. 그는 대표집필자다. 주로 연희형태로 공연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정서와 세계관을 모두 담게 됐다. 물론 본격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삼국지가 무슨 본격문학이냐’고 코방귀를 뀔 것이다. 앞으로는 대중․본격문학을 나누지 않고 움베르토 에코 스타일의 소설을 쓰고싶다. 소설가는 이야기꾼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을 소설로 써야 한다.(윤성노, 「문학논쟁 지핀 ꡔ열한번째 사과나무ꡕ」(작가 이용범과의 인터뷰), ꡔ경향신문ꡕ 2001년 4월 19일자)
2001년 초반 조선일보 지면에서 벌어진 대중문학 논쟁의 당사자인 이용범은 이 인터뷰에서 본격문학 대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불만을 제기합니다. 그는 이러한 대립구도에는 이미 우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작가의 다양한 창작을 방해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아울러 이분법적인 잣대를 가지고 문단을 지배하는 평론계 주류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의 말속에는 독자에 대한 믿음이 엿보이는데, 이는 옹호론 전자의 공통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비평적 기준에 의한 평가보다는 자신들의 책을 사주는 독자에 의한 직접적인 평가를 더 신봉하는 그들의 입장은 독자에 대한 지나치게 전폭적인 신뢰라는 점에서 대중에게 냉소적인 비판론자와 똑같이 편향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대중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단면적인 이해이며, 또한 물리적인 판매량과 작품의 질적 가치를 무조건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물론 작품의 가치라는 개념 또한 ‘합의’된 것이라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다음은 옹호론 후자입니다.
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지 않는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책이 있다. 바로 삼국지다. 중학교 1학년때 처음 읽기 시작해 대학 졸업때까지 족히 열 번은 읽었으리라.
그런데 삼국지를 과연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냐를 놓고 종종 논란이 인다. 신의와 명분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야심가들을 영웅으로 미화하고 상대를 속여 궁지에 몰아넣는 용병술을 가르치는 책을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권해서는 안된다는 우려와 삼국지의 진짜 교훈은 정의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진 충신절사들의 무용담 속에 숨어 있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삼국지에 그려진 세태를 연상하게 된다. 어제의 적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기를 밥먹듯 하며 주변의 가까운 한두 사람에게 그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약속도 아니고 전 국민을 상대로 공언한 맹세를 한 점 부끄럼 없이 뒤집는 우리네 정치인들.(···) 이 엄청난 모순 앞에서 동물행동학자인 나는 종종 동물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 하신 공자님 말씀은 늘 선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혹 벌어지는 악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면 배울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악행이 선행보다 더 만연돼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칭송 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과연 악에서 선을 끌어내라는 가르침이 효과가 있을까.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삼국지를 권한다. 다른 많은 동물들과는 달리 도덕적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묘한 동물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것이다.(최재천, 「인간과 동물-삼국지를 읽는 사회」, ꡔ한국일보ꡕ 2000년 8월 30일자)
동물학자인 그는 작금의 현실 정치를 동물 사회에 빗대어 비판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비판론 전자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삼국지를 정치적 관점에서 폄하하는데 비해, 그는 그래도 삼국지가 가지는 현실적 유용성을 인정합니다. 이 때 삼국지는 오늘날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 역할을 합니다. 다음은 소설가로 입신한 뒤 현실 정치에도 몸담고 있는 이의 말입니다.
삼국지가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을 풍미하게 된 데는 앞서든 사실 외에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줄거리가(···)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둘째,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을 통해 각기 다른 유형의 인간상을 보여 주어 인간 연구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셋째, 이 소설에 전개되는 전략이나 정치적인 술수 또는 처세의 지혜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현실과 부합되고 있다.
현대를 인간 경영의 시대라고 한다. 이를 위하여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훈이나 선인들의 경험에서 인간 경영의 지혜를 얻으려 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동서고금을 통한 교훈은 현실성을 띠고 있어 오늘날에도 우리 인생에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의 전통적인 도덕 관념이 읽는 이들에게 삶의 본보기를 드러낸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통솔학과 인간학의 보고(寶庫)인 삼국지를 통해서 현대 사회와 인생을 슬기롭게 경영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선 고전으로 흔히 홍길동전이나 춘향전, 심청전 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삼국지는 우리의 예와는 다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삼국지를 이야기로 전해 듣거나 또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항상 호흡하며 자란다.(···) 한마디로 삼국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적인 면에서 최고의 걸작품이요, 철학 교본이며 병서였으며 인간 경영 처세술의 지침서였다.(···) 부언하여,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항상 참다운 용기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번쩍이는 지혜와 사고(思考)를 길러 주는 생(生)의 길잡이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내가 삼국지를 처음 대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이웃집 청년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낡은 삼국지는 내겐 충격적인 이야기책이었다. 거대한 중국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인간의 역사가 저리도 장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내가 독서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낡은 삼국지 덕분이었고 결국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한 것도 삼국지였던 것 같다.(김홍신, 「작가의 말」, ꡔ삼국지ꡕ제1권, 대산출판사, 1997, 11-13쪽)
이 글은 자신이 평역한 책의 서문이므로 광고성 글에 나타나는 특유의 과장된 서술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의 골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그는 삼국지를 살아있는 고전으로 봅니다. 또한 그는 삼국지를 읽고 그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삶의 길잡이(또는 처세술)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과거의 허구 작품이 오늘날의 현실에 부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은 다 좋은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그의 글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말미에서 그는 자신에게 미친 삼국지의 영향을 말합니다. 그 또한 삼국지를 선호하는 다른 작가들처럼 통속작가의 꼬리표를 달아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반적으로 삼국지 옹호는 대중성 옹호와 어느 정도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껏 삼국지를 번역한 작가는 원래부터 대중작가이거나 또는 삼국지 번역을 계기로 대중문학에 투신한 것으로 폄하되어 왔습니다. 박종화, 정비석, 이문열, 김홍신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평가가 타당한지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작년에 삼국지를 출간한 조성기와 현재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중인 장정일, 그리고 출간준비 중인 황석영의 경우에는 앞으로 어떠한 평가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다. 이문열 : 문제의 핵심
겉으로 드러난 논리만 보면 비판론 전자는 옹호론 후자와, 비판론 후자는 옹호론 전자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정작 실제 논쟁은 비판론 전체와 옹호론 전자 사이에서, 그것도 매우 치열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의 중심에는 이문열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있습니다.
삼국지에 관한 언급 가운데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는 자리에는 늘 그가 있습니다.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인 평역 삼국지의 저자이자, 일간지에 종종 정치성 평론을 기고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그는 삼국지 논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비판론 전자는 이문열을 위시한 보수(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극우) 논객을, 비판론 후자는 이문열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비서구적이고 대중적인 소설을 그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전자는 이문열의 정치관을, 후자는 이문열의 문학관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옹호론 전자는 문학적인 측면에서(때로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이문열의 작품을 옹호하는 이들입니다.
먼저 비판론 전자인 진중권의 말입니다.
얼마 전 ꡔ조선일보ꡕ를 읽다가 문득 이인화가 말하는 “동아시아의 서사적 전통”이라는 게 ꡔ삼국지ꡕ 같은 걸 가리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인화의 문학적 전범 이문열의 말이다.
“물론 삼국지에는 ····· 음모나 속임수와 배반이 있고 잔혹과 비정이 있다. 그것은 흔히 영웅이라고 불리는 그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행태가 되어 있어 자칫하면 그래야만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사려 깊게 읽으면 그것들은 결국 금지규범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웅은 무슨 짓을 해도 정당화된다고 우기는 이인화. 스승님의 말씀대로 ꡔ삼국지ꡕ를 “조금만 사려 깊게 읽”었더라면 그게 “금지 규범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텐데·····.
“만약 우리 정치인들이 삼국지를 읽고 나쁜 것만 배웠다면 그것은 삼국지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삼국지를 잘못 읽은 탓이다. 귤과 같은 종자가 강북에 심겨져 탱자를 맺는 것이며”
즉 스승님 말씀인즉, 이인화는 “탱자”라는 얘기다. 하지만 “탱자”도 열매는 열매. 한 가지는 제대로 배웠다. 이문열의 말이다.
“자신이 충성을 서약했던 대상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기꺼이 피를 뿌리고 죽어간 수많은 충신절사들은 삼국지의 갈피갈피를 수놓는 꽃이다.”
잘 읽어 보라. “삼국지의 갈피갈피를 수놓는 꽃”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가 아니라, “자신이 충성을 서약했던 대상”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죽어 갔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얘길 읽으며 “갈피갈피”에서 감동을 받는 모양이다. 이상한 감성이다. 이렇게 “갈피갈피”에서 받은 감동에 겨워, 이인화는 가미가제가 되었던 것이리라.(진중권, ꡔ내 무덤에 침을 뱉으마!ꡕ1권, 개마고원, 1998, 113-114쪽; 120-121쪽의 발언도 참고하기 바랍니다)
진중권은 논적인 이인화의 지적 후견인으로 이문열을 지목하고, 우리가 도입부에서 읽어보았던 신문 기고문을 비틀어 두 사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문열과 이인화의 사상은 그가 공격하는 조선일보(인용한 그의 글 모두 조선일보에 기고된 이문열의 글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와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강준만 또한 이와 유사하게 ꡔ이문열과 김용옥ꡕ(2001, 인물과 사상사)에서 이문열의 사상관을 호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문열 본인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자제합니다.
그들이 이문열을 위시한 보수 논객을 비판하는 것은 이들의 사상이 근대적 가치(흔히 ‘상식’으로 대표되는)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판론자는 더 나아가 삼국지는 그 자체가 현실을 왜곡한 허구에 불과하므로, 옹호론자가 얘기하는 ‘현실을 알게 해주는 교과서’가 아니라 전통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처세술서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합니다. 봉건적 사고방식을 미화하여 반동적인 체제를 결국 용납하게끔 유도하는 고전의 대표가 바로 삼국지인 것입니다.. 삼국지 연재를 앞둔 장정일 씨는 “평역본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이문열씨의 평역 삼국지는 1980년대 운동권을 비토하며 썼다고 본다”면서 “시대가 바뀐만큼 새롭게 해석한 삼국지가 나와야 한다”고 집필배경을 설명했다.(정천기, 「이인화-장정일 등 고전소설 재해석」부분, ꡔ연합뉴스ꡕ 2002년 11월 14일자)


다음은 비판론 후자인 김화영과 이문열과의 대담 일부입니다.
김화영 : 우리나라에는 왜 장편 대하소설이 많을까요? 신문 연재라는 제도가 있고, 일단 장기간에 걸친 대량 연재로 자기 이름을 독자의 머릿속에 넣어주고 싶어하는 작가가 있기 때문이지요, 연속극처럼. 그때의 수동적인 독자들은 문학적 비판 의식이 별로 없어요. 최초의 평가는 비평가가 아니라 수준 높은 다수의 독자가 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과장되게 얘기하면 대하소설의 오랜 관행이 한국 작가들을 소모전으로 몰아붙인 셈이죠. 하기야 대하소설을 통해서 활달한 문체를 연마할 수 있었던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프랑스에서는(····) 전 국민이 베스트셀러 한 권에만 매달리지는 않아요. 30만 부 옆에는 3만 부, 2만 부, 혹은 몇천 부의 개성 있는 책들, 스테디셀러가 많아요. 건실한 교육이 만들어 놓은 독자층 덕분이죠. 독자가 자기 나름의 다양한 취향과 판단에 따라서 자기의 작가를 계속 읽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특급 베스트셀러도 한 3년만 지나면 완전히 잊혀져버려요. 제목도 작가도···· ꡔ삼국지ꡕ는 안 그렇지만.(김화영·이문열, 「90점이 아닌 70짜리 문학은 가라」, ꡔ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ꡕ, 민음사, 2001-대담은 5월 16일-, 165-167쪽)
김화영 : 보통 게으른 독자가 좋아하는 작가는 안도감을 주는 작가죠. 내가 아는 걸 다시 멋있게 말해 주는 사람. 그런데 저들이 요구하는 건 내가 보지 못한 것,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낯선 모습을 낯설게 말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방식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 그런 걸 말해요.(···) 나는 우리 문학이 그런 쪽에도 좀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이문열 : 그 불편함을 다른 말로 바꾸면 충격이겠죠. 특히 낯선 자신을 만나는 것 같은 충격. 어떻게 보면 서구 현대 문학의 보편적인 추구가 대개 그런 것 같은데요, 그건 아주 중요한 방향이고 문학이 그것을 안고 가야 하지만, 반드시 그게 문학의 전부가 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것이 소설 쓰기의 어떤 고정적 명제, 절대적 가치처럼 되어버린다면, 일반 독자들과의 괴리가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김화영 : 사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작품을 내가 강조하는 건 지금 그게 많이 결핍되어 있다 싶어서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아까 이문열 선생이 말한 그런, 서양에서 유행하는 이론을 성서나 되는 것처럼 따라갈 것도 없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랜 서사 전통을 잘 이어받아서, 그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만의 서사 전통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이문열 : 저 같은 경우는 사실 출발할 때부터 그 부분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첨단의 현대 소설 이론이 서사성을 무시하는 걸 은근히 불만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스토리텔러를 이야기꾼으로 번역해 소설가에게 욕설처럼 쓰는 우리 풍토를 말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탄탄한 구성을 가진 서사성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174-176쪽)
이문열 : 과연 소설이란 그렇게 쓰는 수밖에 없는가, 특히 소설을 이안 와트처럼 정의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거기다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되살아나는 핏줄 속의 소설 전통이 한 고집으로 고개를 들어 교술(敎述) 쪽으로 기울게 하더군요. 근래에 와서는 한국의 소설 전통에다 중국 쪽의 산문 전통을 보태 동아시아 서사 구조란 말을 써보기도 하고요.
김화영 : 근데 동아시아 서사 구조란 것이 과연 뚜렷하게 있기는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기엔 좀 헐렁한 구조 아닌가. 난 고전 비판적이야.(191-192쪽)
이 대화에서 서양 근대소설을 옹호하는 비판론 후자와 동양의 전통작품을 신봉하는 옹호론 전자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이러한 대립은 비평가 대(對) 창작자라는 입장 차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김화영은 삼국지 같은 작품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를 근대에 들어와도 여전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즉, 계몽되지 못한) 독자와 작가 탓으로 돌리며, 이문열은 동양의 전통문화와 실제 창작의 논리에 무지한 서구지향의 비평가를 은근히 꼬집고 있습니다.
김화영은 물론 맹목적으로 서구 근대소설을 신봉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그는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전통적 형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 소설을 보다 제대로 연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앞서 언급했던 칼럼에서 많은 작가들이 삼국지를 다시 쓰는 풍조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사실 방금 인용한 부분의 전반부에서 그는 교묘한 화법으로 슬쩍 이문열을 비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의 대담은 대가급답게 비교적 생산적인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 편입니다.
이와 관련해, 1994년 이인화와 장정일의 대담에 의해 촉발되어 2년여 동안 여러 계간지를 통해 벌어졌던 ‘동아시아 문화론(또는 대중문학론)’논쟁. 아래 목록은 고미숙이 제공한 해당 글들 목록 가운데 몇 가지를 빼고 더한 다음 이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 이인화·장정일, 「UR시대의 문화논리」, ꡔ상상ꡕ(1994년 봄호)
2-1 서영채, 「문화산업의 논리와 소설의 자리」, ꡔ소설과 사상ꡕ(1994년 여름호)[ꡔ소설의 운명ꡕ, 문학동네, 1996 : 1을 비판]
2-2 윤지관, 「상품인가 물건인가」, ꡔ창작과비평ꡕ(1994년 여름호)[ꡔ리얼리즘의 옹호ꡕ, 실천문학사, 1996 : 1을 비판]
3 김탁환, 「소설가의 자리」, ꡔ상상ꡕ(1994년 가을호)[ꡔ소설중독ꡕ, 살림, 1996 : 1을 옹호하면서 2-1의 오독을 지적]
4 윤지관, 「문학·권력·민주주의」, ꡔ실천문학ꡕ(1994년 가을호)[ꡔ리얼리즘의 옹호ꡕ : 이인화 비판]
5-1 김탁환, 「독자의 왕국」, ꡔ상상ꡕ(1994년 겨울호)[ꡔ소설중독ꡕ : 4를 비판]
5-2 류철균, 「근대문학의 엘리트 문화적 성격」, ꡔ상상ꡕ(1994년 겨울호)[윤지관 비판]
6-1 임규찬, 「새로운 현실상황과 문학의 길」, ꡔ문학동네ꡕ(1995년 봄호)[ꡔ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ꡕ, 창작과비평사, 1997 : 5-2를 비판]
6-2 윤지관, 「현시기 비평의 기능」, ꡔ창작과비평ꡕ(1995년 봄호)[ꡔ리얼리즘의 옹호ꡕ : 5-1과 5-2에 대한 비판]
7 정재서, 「대중문학의 전통적 동기」, ꡔ상상ꡕ(1995년 여름호)[ꡔ동양적인 것의 슬픔ꡕ, 살림, 1996 : 6-2를 비판]
8-1 방민호, 「대중문학의 복권과 민족문학의 갱신」, ꡔ실천문학ꡕ(1995년 가을호)[ꡔ납함 아래의 침묵ꡕ, 소명출판, 2001 : 5-1과 5-2를 비판]
8-2 고미숙, 「새로운 중세인가 포스트모던인가」, ꡔ문학동네ꡕ(1995년 가을호)[ꡔ비평기계ꡕ, 소명출판, 1999 : 5-1과 5-2를 비판]
9 김탁환, 「비평의 운명」, ꡔ상상ꡕ(1995년 겨울호)[ꡔ진정성 너머의 세계ꡕ, 살림, 1996 : 8-1과 8-2에 대한 반박]
10 고미숙, 「대중문학론의 위상과 전통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ꡔ문학동네ꡕ(1996년 여름호)[ꡔ비평기계ꡕ : 7과 9를 비판]
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인화와 김탁환을 위시한 ꡔ상상ꡕ지의 비평가들을 한 편으로, 그리고 이들을 비난하는 젊은 비평가들을 나머지 한 편으로 한 이 논쟁은 시기상으로 삼국지 논의보다 먼저 벌어졌는데, 그 전개 양상이 이 글의 논의 구도와 너무나 비슷해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삼국지 논의는 이 논쟁의 축소 후속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 논쟁에 참가했던 ꡔ상상ꡕ지 계열은 이문열 옹호론자로, 반대편의 비평가들은 대부분 노골적인 이문열 비판론자로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도 삼국지 논의의 판박이였습니다.
내용상으로도 이 논쟁은 옹호론 전자 대 비판론 전체와의 대결이었습니다. 논쟁의 와중에 상업주의(문화산업)와 대중성의 문제, 비평가와 독자의 역할 등에 대한 양 진영의 입장은 극단적으로 달랐으며, 더 나아가 전통시기 문학과 근대 문학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문학에 대한 전망 역시 서로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문학관의 대립 정도가 아니라 거의 세계관의 대립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서로 상반된 상황인식을 보였지만, 과연 이 논쟁을 통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ꡔ상상ꡕ지 계열은 문단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전통을 작위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 이들의 주장에 경청할 만한 내용이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무리한 논지 전개로 인해 자멸해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들을 비판했던 비평계 주류는 수적 우세와 상대적인 논리성 우위에 힘입어 상대의 주장을 제압하긴 했지만, 몇몇을 제외하고는 정말 깊게 다루어져야할 쟁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당위를 앞세운 비판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논쟁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내용이 비평계 전반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아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아쉽게도, 이 논쟁에는 삼국지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결정적으로, 결론 부분까지 다 쓰고 전체를 퇴고할 즈음 해당 글들을 읽었기 때문에 더 자세히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논쟁을 읽고 나서도 이 글의 논지를 바꿀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중문학론 논쟁은 삼국지 논의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별도의 글이 필요합니다).
다시 본래의 화제로 돌아와서, 이 이문열이라는 인물의 글과 행동은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혼란을 줍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입장에 서있는 인물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최명에게 점잖게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는 독법을 설파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강준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파를 대변하는 선동적인 정치 발언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또 문단에서는(최근에는 사회 전반에까지) 그의 작품이 지니는 전통성과 대중성(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작품이 표방하는 정치관)을 둘러싸고 설왕설래 고성이 오고갑니다. 문제를 다시 삼국지에 국한시켜보면 좀 더 명확해질 것 같지만, 다음의 글을 읽어보면 그의 생각이 꼭 순전한 옹호론 전자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4년 4개월에 걸친 곤혹스러운 작업은 끝났다. 내가 여기서 곤혹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 작업이 순수한 문학적 창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업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반드시 그게 시간과 재능의 낭비였던 것 같지도 않다. 세월이 가면 똑같은 내용이라도 표현하는 방식과 이해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이제 이 땅에서 번역되거나 재구성된 삼국지는 대개가 한 세대 가까이 오랜 것이 됐다. 삼국지가 이 이상 더 읽혀서는 안 될 책이라면 모르되, 그게 아니라면 이 작업은 이 시대의 누군가가 해야 했다.(이문열, 「삼국지를 평역하면서」, ꡔ삼국지ꡕ, 민음사, 1988)
비판론 후자와 옹호론 후자가 교묘히 뒤섞인 이 글에서 우리는 삼국지에 대한 2차 발언(또는 담론)을 분석해온 지금까지의 방법이 가진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1차 텍스트인 그의 평역 삼국지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우리는 작가의 정치관과 작품간의 함수 관계 및 작품과 이데올로기의 상관 관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발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삼국지를 말하는가
삼국지에 대한 지식인들의 언급을 모으면서 저는 삼국지만큼 신문지상에 단골로 등장하는 전고(典故)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사 논평에서부터 TV 프로그램 설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기사에 삼국지가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삼국지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저에게도 새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회 생활 전반에 삼국지가 구석구석 다 침투해 있는 것을 보고 나니, 자라나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기성 세대가 삼국지를 필독서로 권장하는 이유가 쉽게 납득이 됩니다. 만약 삼국지를 읽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신문이 제공하는 주류 사회의 화제(話題)에 쉽게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지만, 삼국지의 경우에는 사실상 읽기를 강요당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삼국지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약호(略號)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자주 공공 지면에서 삼국지를 인용합니다. 물론 많은 예화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삼국지 자체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를 통해 삼국지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널리 읽히는 사회에 대해 발언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정치·문화적 입장을 개진한다는 점에서 삼국지를 둘러싼 의견 다툼은 그러므로 곧 그 영역에서의 헤게모니 싸움입니다. 수없이 많은 주장 가운데 저는 편의상 가상 속의 두 진영을 설정했고, 이 두 입장이 서로 극명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그들의 주장을 정리했습니다. 아쉽게도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서로의 이해를 돕는 진지한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발언을 관찰한 결과, 당대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적 문맥 내에서 삼국지가 지니고 있는 위상을 지식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삼국지관은 보통 사람들의 삼국지관과 어떻게 다른지,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세부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대부분의 논자는 삼국지가 동아시아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따라서 삼국지에 대한 태도는 우리 안에 살아있는 전통에 대한 태도와 거의 같습니다. 삼국지를 비판하는 사람은 삼국지 속에서 이제는 청산해야할 전통을 발견한 것이고, 삼국지를 옹호하는 사람은 삼국지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용한 전통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지에 대한 관점은 근대에 대한 관점과도 상당부분 비슷합니다. 비판론자의 대부분은 근대적 가치 가운데 몇몇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옹호론자의 상당수는 근대적 가치 체계가 과연 유효한 것인지 회의합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삼국지는 일반 독자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작품이지만 지식인에게는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합니다. 정치적인 기준에서도, 문학(또는 미학)적인 기준에서도, 삼국지는 오늘날 지식인들의 요구 수준에 미달합니다. 삼국지가 다루고 있는 세계와 그 논리는 철저히 과거의 것이며, 바로 이 점이 지식인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오늘날의 현실이 삼국지 속의 과거와 별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식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삼국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저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지금껏 서구편향적인 독서 교육을 받아왔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야 비로소 동양 고전을 읽기 시작한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서구와 완전히 같아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의미에서의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틀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동양의 고전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는 것은 이제 거의 무망한 일이 되었습니다. 삼국지가 불후의 고전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동서와 고금에 두루 해박한 논리를 가지고 삼국지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삼국지에 관한 지식인들의 발언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일찍이 호적과 전현동(錢玄同)은 서신교환을 통해 삼국지와 전통 부정의 문제를 결부시켜 논의한 바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비판론과 옹호론 후자의 의견차이를 엿볼 수 있으며, 근래에도 역사학자 전목(錢穆)이나 소설가 왕몽같은 이가 삼국지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ꡔ胡適古典文學硏究論集ꡕ, 上海古籍出版社, 1988, 717-734쪽(또는 勞舒 選編, ꡔ三國說林ꡕ, 江西敎育出版社, 1999, 39-44쪽); 錢穆, ꡔ現代中國學術論衡ꡕ, 三聯書店, 2001, 119-120쪽(또는 ꡔ中國文學論叢ꡕ, 三聯書店, 2002, 57-8쪽·187쪽·209쪽도 참고할 만 합니다.); 王蒙, 「三國演義裏的前現代」, ꡔ心有靈犀ꡕ, 人民文學出版社, 2001.
이러한 글들 또한 의례히 공공성이 짙은 지면에 발표된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고전소설 작품의 정치도구화 현상과 함께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본 사실과 허구의 관계(민경욱)
이데올로기 각축전이 된 삼국지 (민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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