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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삼연(2004-06-07 15:29:59, Hit : 9189, Vote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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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 각축전이 된 삼국지 (민경욱)
이데올로기 각축전이 된 삼국지 : 당대 한국의 삼국지 해석


                                                                                                      민경욱  글

삼국지는 읽을 가치가 있는가
1997년 11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 교수의 기고문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일찍이 ꡔ소설이 아닌 삼국지ꡕ(조선일보사)라는 책을 간행할 정도로 삼국지 매니아였던 그였지만, 그 글에서는 반대로 삼국지를 읽고 배워서는 안 된다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다음은 기자가 정리한 기고문의 요약입니다.
나는 삼국지에 대한 책까지 쓴 일이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 선거 판을 보고 삼국지를 배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삼국지는 난세에 대권을 잡기 위해 못된 지혜를 짜내 싸우는 전쟁이야기다. 조조는 인면수심, 유비는 철저한 기회주의자, 제갈량은 권모술수의 대가이다. 삼국지는 또한 인간사나 국가의 흥망을 모두 천명에 돌리고 있다. 이것은 될 대로 되라는 위험한 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 이런 책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꼭 읽어야 할 고전인 양 소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요즘 정치가들이 속임수에 능한 기회주의자들인 것은 삼국지를 읽고 배워서 그런가?
얼마 후, 같은 지면에 평역 삼국지의 저자 이문열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 글의 골자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히 요즘 정치판은 삼국지 시대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지 자체를 금서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은 아무래도 도를 지나친 것 같다. 물론 삼국지에는 음모와 속임수와 배신이 있고 잔혹과 비정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사려 깊게 읽으면 그것들은 결국 금지 규범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삼국지에는 직접적인 징벌의 형태로든 간접적인 비난의 형태로든 대가 없이 성공하는 악은 없다. 만약 우리 정치인들이 삼국지를 읽고 나쁜 것만 배웠다면 그것은 삼국지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삼국지를 잘못 읽은 탓이다. 그 논객의 논리대로라면 읽지 않아야 할 책이 하필이면 삼국지뿐이겠는가.
당시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던 탓인지, 이 논쟁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는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해 언급한 글. 최원식, 「지식인사회의 복원을 위한 단상」, ꡔ문학의 귀환ꡕ, 창작과비평사, 2001, 406쪽; 진중권, ꡔ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ꡕ제1권, 개마고원, 1998, 113-114쪽; 최헌, 「序」, ꡔ최근 삼국지연의 연구동향ꡕ(정원기 지음), 중문, 1998, 3쪽.
을 먼저 접했고, 정작 문제가 되었던 문장은 나중에 읽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문학의 본령을 이해하지 못한 다소 도발적인 주장에 맞서 작가가 매우 세련된 솜씨로 반박한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넘어갔습니다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겉으로 드러난 주장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글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접근해볼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글이 어떤 관점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고, 또 어떠한 맥락에서 독자들에게 읽혀지는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투박한 언사와 논리를 구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최명이 하고 싶었던 말은 삼국지 속의 인물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를 오늘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삼국지를 읽고 난 뒤 최종적으로 그 속의 가치관을 거부합니다. 삼국지는 더 이상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문열은 작품을 읽고 나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더구나 삼국지는 최명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러한 처세술을 유지하면 결국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문학개론 수준의 상식적인 반론을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최명이 실제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에 대한 반박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삼국지에서 각기 다른 교훈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은 일단 논의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같은 삼국지에서 서로 다른 주제를 뽑아내는 현상에 대한 텍스트 내적인 설명을 저는 석사논문에서 시도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글이 소통하지 못한 것은 각자의 글 속에 담긴 기본 전제와 목적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가운데 이문열의 생각이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통념과 더 부합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최명에 대해 최원식처럼 “이 위대한 소설을 그처럼 천박하게 이해하는 칼럼필자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고전 작품을 빌려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도 나름의 독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강좌에서도 말했듯이 삼국지는 소위 순문학 작품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 정치 색채가 탈색되기 마련인 세련된 문학적 방식으로만 삼국지를 다루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저는 개인적으로 순수문학작품이 누리는 정치적 면책특권이야말로 부당하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순문학주의 또한 암암리에 일종의 정치적 의미를 띠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저는 테리 이글턴이 ꡔ문학이론입문ꡕ의 결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더구나 두 사람의 글이 학술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신문지면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삼국지를 정치적 중립지대에 놓고 논의할 여지는 사라지게 됩니다. 소수의 전문가만이 읽는 논문과 불특정 다수가 읽어볼 수 있는 기고문의 사회적 위상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보통 공개적인 지면에서 지식인은 자신의 전공지식을 가지고(또는 자신의 전공지식이 가지는 권위에 기대어) 사회 현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발언하는데, 이는 다수의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설령 비정치적 소재만을 다룬다 할지라도 지극히 정치적인 담론 행위입니다.
아무튼 이 일화는 삼국지에 대한 지식인들의 발언 태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요즘에도 신문과 비평논문의 지상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삼국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그 속에 자신의 주장을 담는 것입니다. 이때 삼국지는 일반적인 작품 감상에서처럼 그 자신이 글의 대상이자 목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필자의 주장을 개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또는 작품과 세상을 잇는 매개물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삼국지를 규정하는 바를 통해 역으로 그들이 평소 지니고 있는 사상적 성향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삼국지에 대한 발언은 곧 그 사람의 정치적 문화적 입장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양상을 좀 더 살펴보고, 그 속에서 삼국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지를 권하는 사회에 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적 지형도
요 몇 년 동안 삼국지에 대해 지식인들이 발언한 사례의 빈도를 살펴보면, 평소에는 간간이 지속적으로 나오던 것이 몇몇 계기가 마련되면 이를 바탕으로 활발히 논의가 이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점차 산발적으로 줄어드는 모습이 반복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몇몇 계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가 방금 보았던 1997년의 최명·이문열 논쟁과 2001년 조성기의 번역본 출간으로 비롯된 삼국지 출판 논쟁입니다.
글의 성격을 보면, 신문에 발표된 글은 대체로 시의성(時宜性)이 강한 논쟁적 모습을 보이는 반면에 다른 지면에 실린 내용들은 상대적으로 일회성 언급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글도 좀 더 살펴보면 상당수는 그 맥락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실은 논적을 겨냥한 발언인 경우도 꽤 있습니다.
저는 삼국지를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수많은 발언 가운데 비교적 삼국지 자체에 대한 평가가 많이 드러나는 것 위주로 논의를 진행하려 합니다. 그러면 삼국지에 대한 지식인들의 발언을 우선 비판론과 옹호론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삼국지 비판론
삼국지 비판론은 대략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대부분 정치적 자유주의자 및 좌파 성향의 소장파 인물이 한 발언으로, 이들은 철저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삼국지를 부정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삼국지는 당대의 부정적인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수구봉건 전통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삼국지 속의 세계관이 오늘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삼국지를 폄하합니다. 이 점에서 이들의 삼국지 비판은 현실 정치의 구태(舊態)를 삼국지에 빗대어 비판하는 입장과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다만, 삼국지에 대한 그들의 평가와 그들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는 문학관을 쉽게 동일시할 수는 없는데,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비판이 기본적으로 전략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후자는 서구의 근대소설 또는 동양 고전이라는 기준에 입각해 삼국지를 폄하합니다. 인문계열 교수인 이들은 삼국지를 진지한 동서양 고전의 수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대중통속물로 봅니다. 이들의 글 속에는 그들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문학관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엘리트 문학 또는 옛 사대부의 전통(傳統) 문학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자에 비해 이들의 글은 상대적으로 정치색이 엷은 편이며 아울러 비교적 점잖은 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의 발언 또한 상당수는 문화적 역학관계를 고려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글을 읽기 전에 우리는 이 사회에서 평론가와 작가(서양과 동양, 또는 역사와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가 어떠한 위계질서로 맺어져 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비판론 전자의 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진중권이 쓴 칼럼의 일부입니다.
이문열이 최근에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히틀러 총통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의 독재와 작별하고, 그의 인종주의와 작별하고, 그의 유치한 정치예술과 작별하고…. 하지만 한 가지 그가 깜빡 잊은 게 있다. 바로 히틀러 정권의 가부장적 독재다. 이 요소와는 작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몰라서 그렇지 히틀러 역시 여성을 가정에 가두어놓았다. 그리고 남자 말 잘 듣고 애만 잘 낳아 잘 키우는 여인들에게 「히틀러 무터」라는 봉작을 내렸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얘기는 안 할까? 재미있는 현상이다. 「삼국지」같은 무협지나 읽으며 주군에게 몸 바쳐 봉사하는 얘기에서 감동이나 먹지 말고, 이제 제발 현대적 교양 좀 갖추었으면 좋겠다.(진중권, 「이문열의 잘못된 선택과 작별인사」, ꡔ경향신문ꡕ 1999년 11월 29일자 칼럼)
진중권은 이문열의 ꡔ선택ꡕ을 비판하면서 삼국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는 삼국지를 무협지와 동류로 놓고, 그것이 “현대적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고 폄하합니다. 이문열이 삼국지 평역자로도 유명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삼국지를 공격의 도구로 사용한 것은 매우 의도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박노자의 글을 보겠습니다.
대학 문 밖의 한국 사회가 내 눈에는 일종의 ‘혼전’양상으로만 보였다. 위에서 언급한 ‘유사 근대성’과 관련된 문제지만, 현재 서양과 대조적으로 사회제도나 정부기관, 정치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나 존경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사실을 나는 한국에 온 첫날부터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내가 만난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사회적으로 심한 박탈감을 느낀다고 토로하며 “이 사회에서는 정직한 방법으로 출세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주장했다. 출세를 생각하지 않고도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가끔 비도덕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특히 지나친 굴종이나 아첨, 또는 뇌물 증여 등)를 저질러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주장이었다.
제도에 대한 불신 못지않게 대인관계에서 드러나는 근원적인 경계의 자세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였다. 대인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전제는 “모든 사람이 타인과 관계하는 이유가 본인 이득의 극대화”라는 ꡔ삼국지ꡕ를 생각나게 하는 ‘생활의 지혜’였다(동양 고전을 일반적으로 많이 망각한 한국에서, ꡔ삼국지ꡕ가 유독 인기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박노자, ꡔ당신들의 대한민국ꡕ, 한겨레신문사, 2001, 170-171쪽)
박노자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삼국지의 세계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삼국지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투영된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이처럼 비윤리적인 사욕 추구, 그리고 불신을 바탕으로 한 암투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처세술을 삼국지와 연관짓는 생각은 수없이 많은 정치 칼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사회문화 전반에 확대시킨 주장은 조형준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문화의 기층은 삼국지적 멘탈리티에 사로 잡혀있다고 생각해요. 문화적으로 봉건주의 상태이고,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라는 생각입니다. 기본적으로 의리, 형제애, 충성, 신의, 명분, 정통성 등의 개념을 둘러싸고 문화가 빙빙 도는 것이죠.(조형준, 「또 다른 지식인 문화를 찾아서·권두좌담」, 현대사상 특별증간호 지식인 리포트3 ꡔ한국의 지식게릴라ꡕ, 민음사, 1999, 55쪽)
정치적인 이유로 삼국지를 폄하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그의 말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삼국지로 대표되는 세계관 및 가치관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마땅히 떨쳐버려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비판은 과감하게 정치적 올바름을 명분으로 내세워 삼국지 세계관이 지니는 효용성 및 도덕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달리 보자면, 특정 세계관과 결부되어 일종의 사회문화적 기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인 삼국지에 무리하게 정치적 독법을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비판론 후자의 예입니다. 먼저 도정일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소설(novel)이라는 형식 자체가 이전의 허구적 산문체 이야기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장르입니다. 한국 근대문학의 특색의 하나는 서양의 근대서사인 소설과 우리의 또는 동양적인 전통서사의 혼융입니다. 이 점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저로선 아직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신장르의 한국적 변용이라 보아야 할지, 아니면 우리 근대문학의 발전을 저해한 부정적 요인으로 보아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우리 작가들은 근대문학의 특성을 소화하는 훈련이 미흡했습니다. 이로 인해 옛날 이야기와 근대적 서사장비의 혼합처럼 보이는 작품이 많이 산출되어 왔습니다. 홍명희의 ꡔ임거정ꡕ은 전통서사적 이야기는 될 수 있지만 근대적 소설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지금도 한국 작가들에게 작가 수업의, 또는 소설쓰기의 전범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ꡔ삼국지ꡕ는 고교생의 필독서가 되어 있고 대학생들은 무협지나 보고 있습니다. ꡔ삼국지ꡕ, 무협지가 성장세대의 주 독서물이 되는 사회는 문화적으로 희망 없는 사회입니다. 이것도 인문교육의 실패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생각할 만한 문제인가를 알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문학교육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안 와트의 ꡔ소설의 발흥(The Rise of the Novel)ꡕ같은 책은 대학 문예창작과나 국문과의 필수 텍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왜 발생했는가를 아는 일은 소설쓰기의 기초입니다. 신세대 작가들은 장르에 관한 기초 교육도 없이 소설쓰기에 달려드는 것 같아요.(김우창·도정일, 「문학대담 : 21세기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ꡔ문예중앙ꡕ87호, 1999년 가을호, 20-21쪽)
도정일 또한 진중권과 마찬가지로 삼국지를 무협지와 동급에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맥락은 다소 다릅니다. 그가 겨냥하는 것은 ꡔ임꺽정ꡕ으로 대표되는 전통서사입니다. 그는 서구 근대소설 개념에 입각하여 전통서사가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젊은 작가들이 소설을 제대로 공부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와 같은 비평가들이 신춘 문예와 같은 신인 작가의 등용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이는 은근한 강권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유명 작가들의 삼국지 출간붐이 벌어진 2001년 말에 다시 제기됩니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발언은 각각 서양과 동양의 고전 개념에 비추어 삼국지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우선 서양 고전에 입각한 비판입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널리 알려진 ‘대하소설’의 단골독자로 자부할 입장이 못 된다. 이 나라 현대소설의 가난한 유산 가운데 상대적으로 큰 면적을 차지하는 ꡔ토지ꡕ, ꡔ장길산ꡕ, ꡔ태백산맥ꡕ, ꡔ객주ꡕ, ꡔ혼불ꡕ 등의 풍경이 내게는 대부분 낯설다.(···)
요즘엔 한다하는 작가들이 ‘삼국지’ 다시 쓰기 열풍에 휩쓸려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고전의 ‘번역’은 수동적인 노동이라고 우습게 여기면서 옛날 얘기의 ‘연의’는 창조, 혹은 역사해석이라고 우길 셈인가. 기이한 일이다. 싸구려 ‘패키지 여행’ 붐이 다시 시작된 것인가. 거듭되는 난세에 혼이 빠진 사람들에게 케케묵은 약육강식의 전술 전략과 모략의 처세술을 재교육시킬 셈인가. 아니면 이 나라를 망치기로 작정한 듯한 입시정책이 남긴 지적 정서적 폐허 속에서 궁여지책으로 등장한 ‘논술ꡑ의 소비자층을 목표로 친중국시장적 정서에 의탁하여 한 밑천 잡아볼 속셈인가. 하기야 이런 짐작은 옛날 학생잡지 ‘학원’에 연재되던 만화 ‘코주부 삼국지’의 부실한 독서가 그 ‘고전’에 대한 유일한 간접체험이었던 한 나태한 독자의 터무니없는 비아냥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는 ‘고전(classic)’이란 말을 들으면 여러 권에 걸쳐 느슨하게 구비치는 대하소설 보다는 비교적 짧고 견고한 단행본을 연상하게 된다. 그 말이 라틴어의 형용사 ‘classicus’에서온 것으로 ‘오랜 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아직 높이 평가되고 있는 문예작품’이라는 넓은 뜻을 가졌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고전이라면 나는 늘 절도, 이성, 규율을, ‘교실(class)에서 가르칠 가치가 있는 작가와 작품’을 먼저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고전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그 깊은 감동이 퇴색하지 않는 균형 잡힌 저작을 의미한다. 고전은 늘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어야 하는 작품, 잠들기 전의 느긋한 시간에 그 어느 한 페이지를 열어 다시 한번 음미해보고, 혼자 산길을 걸으면서 소리 내어 암송해보는 작품이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작품일 수밖에 없다. 누가 감히 대하소설을 거듭 읽거나 암송할 엄두를 낼 것인가. 거듭 읽고 분석하고 암송하면 그 감칠 맛이 새로워지고 그 의미의 폭과 진동이 커지기는커녕 어긋난 문장구조와 허황한 서사, 논리의 모순과 상상력의 가난이 드러나는 작품은 많다. 흥미위주의 모험소설이나 들큰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다시 읽거나 암송하는 사람은 없다. 이른 새벽에 선잠 깬 눈으로 보따리를 싸들고 또 새로운 여행지로 떠나기만 하는 장거리 패키지 여행을 어찌 고전의 여행이라 할 수 있으랴.(김화영, 「거듭 읽는 소설과 거듭 쓰는 소설」, ꡔ조선일보ꡕ 2001년 12월 14일자)
도정일과 마찬가지로 김화영은 전통서사와 친연성을 가지는 오늘날의 대하장편소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그러나 장회소설과 같은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전체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 반복해 읽기도 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대중의 상업적 기호에 영합하지 않는 진지한 작품을 써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발언은 ‘본격문학 대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발언 자체가 동양 전통 및 대중 문화에 대한 지식인의 기존 통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현상에 대한 신문 기자들의 출판 사회학적 접근. 이광표 외, 「왜 아직도 삼국지인가?」, ꡔ동아일보ꡕ 2000년 7월 27일자; 윤정훈, 「삼국지 백가쟁맹 시대」, ꡔ동아일보ꡕ 2001년 12월 4일자; 김현미, 「삼국지가 대입 논술 길잡이?」, ꡔ주간동아ꡕ(2001년 12월 14일 작성)
과 좋은 비교가 됩니다. 이어서 국사학자의 비판입니다.
모두 알만한 유명작가들이 창작에 쏟아야 할 시간과 노력을 ‘삼국지’ 번역에 쓰겠다는 데는 각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 곰곰 생각해 볼일이다.
‘삼국지’는 전쟁소설일 뿐 고전이 아니다. ‘삼국지’의 원본 격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중국 한나라 말 천하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분열되어 패권을 다투던 투쟁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온갖 권모술수와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는 약육강식의 묘사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삼국지’나 ‘손자병법’ 등이 필독서처럼 되어 있는 현실은 우리 시대가 전쟁의 시대임을 실감나게 한다.(····) ‘삼국지’를 많이 읽을수록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는 방법을 잘 터득하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사는 지혜와는 거리가 있다.
18세기 말 정조대왕은 ‘삼국지’, ‘수호전’ 등의 소설류를 패관소품(稗官小品)이라 하여 금기시하였다. 문체를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인심을 어지럽히고 사회기강을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문체를 순정하게 되돌림)정책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평화와 안정을 최고 가치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기본성격상 삼국지 같은 소설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정옥자, 「삼국지가 인기끄는 세상」, ꡔ동아일보ꡕ 2001년 12월 9일자)
김화영이 서구 근대 소설 및 고전 작품에 입각해 삼국지를 비판했다면, 정옥자는 명시적이진 않지만 동양 전통의 문장분류(지난 강좌에서 살펴본 바 있는 經·史·子·集)에 근거하여 삼국지를 폄하합니다. 문체반정 정책이 내세웠던 대외 명분을 그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이러한 점은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삼국지가 금지된 것은 그것이 사회의 정신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 아니고, 삼국지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그 대척점에 서있는 (그리고 당시의 정치 체제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나. 삼국지 옹호론
삼국지를 옹호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중에서 삼국지가 팔리는 양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에 대한 고찰은 뒤로 미루고, 우선 여기에서는 수적으로 열세인 삼국지 옹호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지 옹호론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골자만 놓고 보았을 때,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구분 역시 비판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장에 담긴 내용만을 가지고 구분한 것이 아니라(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평소 지니고 있는 사상적 경향과 그들의 현실적 위치를 모두 고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삼국지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는 교수 겸 비평가 및(또는 겸) 작가들로 이루어진 옹호론 전자는 서구 근대소설의 위세에 눌려왔던 전통 서사의 복권을 주장함으로써 서구 근대소설을 신봉하는 학계 및 비평계의 주류와 대립합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 때 비평계의 집중 포화를 맞았던 ‘동아시아 문화론’의 당사자입니다. 그리고 역시 이들 대부분은 근대 미학이 천시했던 대중성을 적극 옹호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주장만 보면 이들은 비판론 후자와 대립하지만, 실제 논쟁의 장에서는 비판론 전체와 대립합니다. 왜냐하면 비판론의 전자와 후자 모두 명시적이냐 암묵적이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 공통적으로 이들을 공격 대상으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옹호론 후자는 전자처럼 삼국지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삼국지의 가치를 긍정하는 지식인들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일반 애독자와 대동소이합니다. 삼국지를 읽는 것이 여전히 유익하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으로, 기본적으로 이들은 삼국지가 오늘날의 사회 현실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판론 전자처럼 정치적인 방식으로 삼국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품을 읽고 배울 점을 얻어내는 기본적인 독서법에 충실합니다. 그리고 옹호론 전자가 신념에 입각한 적극적인 옹호라면, 이들은 실용성에 입각한 소극적 의미에서의 옹호론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삼국지에 대해 말한 발언만 가지고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옹호론 전자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삼국지에 대한 이인화의 의견으로 그의 홈페이지 ‘새로 읽는 고전’ 코너에 올려져 있습니다.
ꡔ삼국지연의ꡕ(···) 인물 형상의 핍진성은 강렬하고 광범위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때문에 ꡔ삼국지연의ꡕ는 명대 초 홍치본이 성립된 이래 수많은 이본과 번역이 이어지면서 500여 년 간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읽혔다. 출사표의 미학은 서사 문학을 즐기는 동아시아인의 고유한 감수성을 형성했다.(···)
서구의 소설문법에서만 본다면 ꡔ삼국지연의ꡕ는 단순한 통속소설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이 일곱에 허구가 셋(實七虛三)이다”는 논평에서도 보듯이 이 소설은 문학적 상상력이 역사적 사실에 우위를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역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효용을 인정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이 소설의 문학성을 폄하하는 측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ꡔ삼국지연의ꡕ의 고전적 가치는 다른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소설은 ‘부르조아 계급의 대서사시’로 출발한 서구의 소설(Novel)과는 다르다. 동아시아의 소설은 사마천의 ꡔ사기· 열전ꡕ이라는 실존인물들의 영웅적 일대기로 시작하여 차츰 허구적인 인물들의 일대기를 포용해갔다. 말하자면 출발부터가 역사와 상상력의 결합이 이루어낸 문학 장르인 것이다. 이것이 허구를 통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요건이 서구의 소설처럼 적용될 수 없는 이유이다.
ꡔ삼국지연의ꡕ는 동아시아 문학의 고유한 영웅주의 미학을 내재하고 있다.(···) ꡔ삼국지연의ꡕ는 이같은 사적 유대로서의 의리를 한실 중흥이라는 공적 명분과 연결시킴으로써 허구와 사실, 문학과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세계관을 창출한다.
이같은 세계관은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물음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를 내장하게 된다. 공적인 명분이 사라질 때 이것은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 낭만적인 임협(任俠)과 무법(無法)을 거듭하며 쓸쓸히 스러져가는, 바람이나 달빛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 ꡔ수호지(水滸志)ꡕ가 된다. 나아가 현실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야붕과 꼬붕, 주군과 가신이라는 동아시아적 붕당(朋黨) 시스템으로 속악화되기도 한다. ꡔ삼국지연의ꡕ는 이같은 허무와 속악화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다. 이 기적적인 균형감각이야말로 송대 이후 발전한 서민계급의 지혜와 인생관을 응축하고 있는 이 소설의 순금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인화는 서구근대소설의 기준으로 삼국지를 재단하는 경향을 비난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의 시각으로 삼국지를 보아야함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몇 가지 논거를 들어 무협지와는 다른 삼국지의 ‘고전적 가치’를 옹호합니다. 이는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중문학자의 시각입니다.
비숍에 의하면 중국소설은 설화인(說話人,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대본 즉 화본(話本), 혹은 장회소설(章回小說)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의 발전상 심각한 제약이 있게 된다.(····) 비숍이 지적한 중국소설의 소설답지 못한 이러한 한계들은 간단히 서사구조와 주제상의 통일성(Unity) 및 정합성(Integrity)의 결여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주의에 기초한 서구 소설미학의 동아시아 전통소설에 대안 편견이며 부당한 간섭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비숍이 중국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내건 전제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종족주의적인 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일일이 반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왜, 오랜 세월 우리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후의 고전으로 찬탄되었던 ꡔ삼국지ꡕ, ꡔ수호전ꡕ과 같은 소설들이 근대 서구 소설론의 일방적 규준(規準)에 의해 하루 아침에 미숙한 소설로 전락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중국소설의 개념 및 기원문제를 사유하는 한 서구소설론의 진보와 근대성의 기획에 순진하게 동참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더 이상 문학상에 있어서 특정한 형식론과 목적론에 입각한 기원과 발전의 지배론에 함몰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퇴행의 시대인가? 소생의 시대인가? 생각컨대, 전자는 아직도 진보의 기획이 끝나지 않았다고(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지배가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고루한(?) 근대주의자의 탄식이리라. 강한 이야기성과 장회적(章回的) 장편성, 사전성(史傳性) 등을 새로운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소설들로부터, 부시시 깨어나는 옛 설화인들의 환영(幻影)을 보며 친애하는 비숍 교수에게 나는 중국소설을 다시 잘 읽어보라고 권유할 것이다.(정재서, 「다시 서는 동아시아 문학」, ꡔ동양적인 것의 슬픔ꡕ, 살림, 1996, 49-61쪽)
정재서는 서구소설론으로 삼국지 같은 작품을 재단하는 태도를 보다 강한 어조로 비판합니다. 또 거기서 더 나아가 삼국지에 대한 근대주의자의 편견을 동양 전통에 대한 무지 내지는 시대변화를 외면하는 아집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비판론 후자가 그렇게 비판했던) ‘강한 이야기성과 장회적 장편성, 사전성’으로 요약되는 전통 작품의 특징이야말로 오늘날의 소설가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이인화처럼 역사소설 창작을 겸하고 있는 비평가인 김탁환도 비슷한 주장을 제기합니다.
90년대 한국소설의 가장 큰 문제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점이다. 개별을 통해 총체를 보여주는 소설이 없다는 뜻이다. 문체는 단정하고 이야기의 앞뒤도 그럴 듯하게 맞취지고, 등장인물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데, 감동이 없다. 왜 감동이 없는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다.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것도 웅얼웅얼거리며 자신 없는 넋두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든 소설들을 찾아서 귀거래를 했다. 조금 더 부풀리면, 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소설을 읽으며 인생을 돌이켜보던 시절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3대를 이어오며 읽은 소설은 ꡔ삼국지연의ꡕ와 ꡔ수호전ꡕ과 ꡔ서유기ꡕ였다. 역자가 달라지고 책의 장정이 변했어도 여전히 이 소설들은 우리 집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미국인이라면 헤밍웨이의 소설일 것이고, 러시아인이라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 세 작품이 뿌리처럼 나를 지탱시켜왔다.(···) 그리고 나는 그 옆에 내가 대학원에서 읽은 조선후기 고전장편소설들을 꽂았다.
감동의 근원을 찾는 것이 곧 현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근원은 근원이고 현재는 현재라고 여기는 편이다. 현재를 근원을 통해 풀이하는 데는 치를 떤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내게는 추석이나 설마다 돌아가는 고향과도 같다. 잘 살아도 내 고향 못살아도 내 고향인 것이다. 고향을 잊지 않는 것은 내 삶의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나는 나 자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나의 독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소설을 쓴다. 내가 감동하지 않고 나의 독자들이 감동하지 않는 소설은 쓰레기다. 내가 바라는 최고의 소설은, 독자가 그 소설을 읽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소설이다. 우리 앞에 그런 소설이 있다.
ꡔ삼국지연의ꡕ만 예로 들어보자. 이 소설만큼 동양의 소설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되돌아보면 나 역시 이 소설을 여러 시간대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여러 판본으로 읽었다. 초등학교 시절, 동이 트기도 전에 몰래 일어나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인 고우영의 ꡔ만화 삼국지ꡕ를 읽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때는 박종화의 ꡔ삼국지ꡕ를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와서는 궁체로 필사된 ꡔ삼국지연의ꡕ를 부분부분 규장각에서 복사하여 읽기도 했다. 이문열의 ꡔ삼국지ꡕ를 독파한 것은 재작년 여름의 일이다. 읽을 때마다 이 소설은 내게 감동을 준다.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부푼 희망을 그리게 하고, 인간이란 얼마나 비열한 존재이며, 인간이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새삼 일깨운다. 섬세한 것도 좋고 미의식도 좋고 문체주의도 좋지만, 나는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ꡔ삼국지연의ꡕ와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ꡔ삼국지연의ꡕ를 아무나 쓰는가? 이토록 방대한 분량과 다양한 구성, 시공간의 적절한 배치, 개성적인 등장인물을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소설의 장인이 되는 것이다.(···) ‘작가주의’보다 ‘쟝르주의’로 가자는 나의 주장에는 이렇듯 이야기꾼을 향한 갈망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너는 ꡔ삼국지연의ꡕ와 같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는가?
대답은, 아직 아닙니다! 이다. 그러나 그렇게 쓰기를 포기한 것은 또한 아니다. 1998년에 발표했던 ꡔ불멸ꡕ4부작과 1999년 12월에 발표할 예정인 ꡔ허균, 최후의 19일ꡕ은 ꡔ삼국지연의ꡕ를 전범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ꡔ완월회맹연ꡕ이나 ꡔ전쟁과 평화ꡕ, 그리고 ꡔ삼국지연의ꡕ처럼,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소설, 인생을 가장 많이 닮은 소설, 독자를 감동시키는 소설을 쓰겠다는 희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을 풍족하게 꾸리고 싶다는 욕망을 어찌 접을 수 있겠는가.(김탁환, 「소설과 인생」, ꡔ오늘의 문예비평ꡕ1999년 겨울호)-------------------------계속




이데올로기 각축전이된 삼국지--2 (민경욱)
삼국지연의의 판본과 지은이를 둘러싼 문제(민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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