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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삼연(2004-01-05 17:44:41, Hit : 8618, Vote : 933
 http://www.samgookji.com
 우리 사회의 삼국지현상을 바라보며
                                                                       [글 머리에]
본 내용은 "중국의 창"이란 잡지에 실린 민경욱 선생의 글이다. "중국의 창"이란 잡지는 정삼연 회원들이 찾아볼만큼 지명도가 높은 책이 아니라는 노파심에서 본문을 게재하는 바이나, 혹 잡지사 측에 누를 끼치는 일이 있다면 하시라도 본문을 철회할 용의가 있음을 알린다. 잡지사 측에 심심한 양해를 구한다.
민경욱 선생은 서울대 중문과 에서 삼국지연의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해군사관학교에서 다년간 중국어를 강의했고 그 후 다시 서울대 중문과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삼국지 전문가이다. 지금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복단대학 중국고대문학연구센터에서 고급진수생자격으로 삼국지를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 기회가 허용하는 대로 민 선생의 삼국지 관련 문장을 소개하고저 한다.
정삼연 가족들의 성원을 기대한다.


                                        우리 사회의 삼국지현상을 바라보며
                                      - 최근 삼국지 번역본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


                                                                                                                    민경욱


1. 글을 시작하며
삼국지로 석사논문을 썼고 앞으로도 계속 삼국지에 대한 공부를 할 계획이지만, 솔직하게 말해 필자는 삼국지를 읽는 것보다는 삼국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을 더 즐긴다. 삼국지가 재미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속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을 때 얘기다. 일단 전문적 연구 영역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문학이란 엄격한 잣대에 의해 평가받게 되는데, 대개 삼국지는 문학사에 거론되는 작품 가운데 최악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또 정치 성향과 문화 취향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분리한다면 모를까, 현대를 살아가는 세련된 성인이라면 평소 삼국지를 즐겨 읽는다고 떳떳하게 말하기가 아무래도 좀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그에 비해 삼국지를 둘러싼 여러 현상(필자가 삼국지현상이라고 명명한)을 관찰하는 것은 재미도 있고 어느 면에서는 매우 유익하다. 가장 낮은 문학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삼국지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꼭 하기 마련이다. 그 내용을 잘 주워들으면 다른 방법에 비해 훨씬 손쉽게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지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작품이라기보다는 한 사회의 문화적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 역할을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삼국지를 도구로 이용하여 그 사회의 정신적 측면을 폭넓게 이해하는 방식의 연구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삼국지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정작 삼국지 자체에 대한 학술적 공력은 여전히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필자는 삼국지 자체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킬 목적으로 중국으로의 진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필자의 악취미(전공 공부를 방해하는)를 충족시켜 주는 현상이 끊이질 않는다. 몇 년을 주기로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어왔지만 특히 올해는 장정일의 삼국지 연재와 황석영 삼국지의 출간으로 더욱 소란스럽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작 문제가 되는 내용은 변함이 없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판만 계속 커지고 있는 상태다. 삼국지를 번역하는 명망 작가와 이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글을 쓰는 각 분야의 지식인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많이 팔까 어떤 식으로 한 번 이슈를 만들어낼까 고민하는 출판계와 언론매체 종사자들이 함께 우리 사회의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일찌감치 서두에서 필자의 경력과 능력을 솔직하게 밝힌 만큼, 이어지는 본론에서도 이 삼국지현상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가감 없이 서술해보려 한다.


2. 삼국지 번역본을 둘러싼 최근의 논의들
최근의 삼국지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문열 삼국지가 출간된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그 뒤에 나온 여러 원본완역본 류, 그리고 올해 나온 황석영과 장정일의 삼국지는 모두 이 이문열 삼국지의 영향 아래 확장 변형되어온 전체 삼국지판 안에다 놓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삼국지 번역본의 성격, 출판사의 광고기획 행태, 언론매체가 삼국지를 다루는 방식 등이 이문열 이후 삼국지판의 성격을 규정짓는 주요한 요소들이다.


2-1. 이문열 평역본
이문열 삼국지는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다가 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책읽기를 좋아하는 또래 사이에서 이문열 삼국지 읽기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는데, 덕분에 뒤늦게 필자도 고2였던 1992년 겨울 친구에게 한 질 빌려다가 단숨에 읽어버린 적이 있다.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으나, 기존의 삼국지와는 다른 평역이라는 새로운 형식과 고전작품에 걸맞은 작가의 문체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렇게 잘 팔리는 책도 보통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판매부수가 감소하기 마련인데, 이문열 삼국지는 뜻밖에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해방 후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작품 내적인 요인으로 평역이라는 형식의 독창성을 들 수 있다. 이문열 이전의 삼국지는 직역을 하든 아니면 적당히 의역을 하든지 간에 기본적으로는 모두 번역본이었다. 이러한 작품에서 번역자의 의견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문열은 아예 이야기 반, 자신의 논평 반으로 내용을 구성해버렸다. 그리고 번역본 대신 평역본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이러한 형식이 주는 효과는 의외로 커서, 독자는 객관적인 사건의 기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입심 좋은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설령 그가 말하는 의견이 맞던 그르던 그가 말하는 방식 자체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평론을 집어넣는 이 평역이라는 형식은 사실 모종강본(毛宗崗本)의 평점(評點)을 그가 창조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여러 삼국지 판본을 구별하는 구체적인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이문열은 대만 현지 조사와 전문가들의 도움 덕택으로 각 판본들의 주요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모종강본의 가장 큰 특징은 사건의 서술을 최대한 간결하게 다듬고, 대신 매 회의 앞 그리고 본문 사이사이에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의 평점을 집어넣은데 있다. 차이가 있다면 모종강본은 이러한 평점과 본문이 형태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데 비해 이문열 삼국지는 이를 한데 뒤섞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문열 삼국지가 지속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러한 형식상의 혁신이라는 점보다는 주로 작품 외적인 이유에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수석합격자들이 연쇄적으로 이문열 삼국지를 언급한 일화가 언론에 보도되자 출판사 측은 이를 광고에 적절히 활용했고, 이것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이문열 삼국지는 적어도 대중 독서계에서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고전의 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문열 삼국지의 대성공은 이후의 삼국지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많은 작가와 출판사들이 삼국지 시장의 무궁한 잠재력(주로 상업적)을 깨달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여러 서평담당 기자들도 그 이후 계속 삼국지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문열 이전에도 박태원(최영해), 박종화, 정비석 등 많은 작가의 삼국지가 있었지만, 일찍이 삼국지를 둘러싸고 이렇게 많은 말들이 오간 적이 있었을까 싶다. 이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 삼국지 담론은 그 내용에서도 종전처럼 지식인들의 단편적인 언급 위주에서 출판사의 적극적 광고기획과 출판담당 기자의 시장판세 분석으로 상당부분 대체되었다. 삼국지의 판매부수가 출판가의 끊임없는 화제가 되고,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될 때마다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확실히 이문열 이후의 일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삼국지는 이문열 삼국지를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어서 나온 원본 논쟁, 사상성 논쟁 등은 다들 이문열 삼국지의 형식과 내용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것들이다. 다만 필자는 이들의 문제제기가 과연 삼국지의 작품성과 시의성(時宜性)에 대한 진정한 고민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엄청난 성공에 대한 선망과 질시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때가 많다.
이 같은 동업자들의 경쟁의식 고취와는 별도로 이문열 평역본에 대해서는 오역문제가 줄기차게 제시된 바 있다. 일찍이 1999년 박정국이 몇 가지 오역의 실례를 지적했는데 대체로 이문열의 지식 부족에 기인한 사례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문열은 그의 주장이 작품의 “큰 흐름과는 무관한 자구 해석이나 뉘앙스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으며, 자신의 평역은 “평하여 엮었다”라는 뜻의 평역(評繹)이었다고 말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단어를 개발하면서까지 이문열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독해 능력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할 경우 이미 획득했던 권위를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이문열 삼국지는 삼국지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게 되면서 동시에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아무튼 독자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삼국지라는 인상을 심어놓았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허구이다.
사실 삼국지는 고전 작품 가운데 가장 쉬운 책이므로 번역하기 위해 최상급의 한문실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쉬운 문언과 고대 백화가 뒤섞인 삼국지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공부해야할 필요가 있다. 또 중국어를 모르면 삼국지 관련 주석서나 각종 고대문화 사전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번역이 어렵게 된다. 이문열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데 안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대충 번역했다는 사실은 리동혁이 출간한 <<삼국지가 울고 있네>>에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문열은 스스로의 문필력으로 획득한 부와 명성에 덧씌워진 학술적 권위(독자들의 착각에서 비롯된)를 정중히 사양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 성공에 뒤따라온 거품을 스스로 거부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삼국지 이후 이문열의 행보를 보면 성공 이후 작가로서의 자기 갱신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명성에 의해 얻어진 발언권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 논평하고 싶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 씁쓸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2-2. 소위 정본 및 완역본 류
대략 5질의 작품을 언급할 수 있겠다. 1984년 출판된 황병국의 <<원본 삼국지>>, 1990년에 나온 청년사의 <<정본 삼국지>>, 2000년에 재출간된 김구용의 <<정본완역 삼국지>>, 역시 2000년에 나온 정소문의 <<고본완역 삼국지>>, 2001년 조성기 정역 삼국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황병국과 김구용의 삼국지는 초판이 이문열 삼국지 이전에 출간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삼국지 또한 나머지 세 작품과 마찬가지로 책의 제목(또는 광고문안)이나 서문에서 자기야말로 제대로 옮겨진 삼국지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필자는 이들 삼국지의 명칭이 타당치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 번역본은 완역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지 3대 주요 판본으로는 한때 홍치본(弘治本)으로 불렸던 가정본(嘉靖本), 지전본(志傳本), 모종강본이 있는데, 이 가운데 문장의 우수성과 판본의 보급상태로 보았을 때 삼국지를 대표할 수 있는 판본으로는 아무래도 모종강본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삼국지 번역본 역시 일본어 중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모종강본을 대본으로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종강본의 가장 큰 특징은 평점이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부연설명하자면 각 회의 앞에는 장편의 논평이, 본문에는 짤막한 평문이 곳곳마다 들어가 있는데, 이러한 평점의 분량은 본문의 삼분의 이 가량 된다. 이 평점의 주된 내용은 삼분의 이 이상이 인물과 사건에 대한 논평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만이 오늘날 문학평론에 해당하는 작품 서술구조에 대한 분석이다. 그런데 정소문 삼국지가 매 회 앞의 논평을 일부 번역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번역본은 이 평점을 하나도 옮기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모종강본 평점의 전모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전통시기 모종강본은 평점이 덧붙여진 형태로 판매되었지 지금처럼 평점이 삭제된 본문만이 남아있는 형태로 팔리지는 않았다. 처음 모종강본에서 평점을 뺀 사람은 후스(胡適)로서, 그는 평점이 삭제된 모종강본의 최초 현대 활자본을 1920년에 출판했다. 그가 평점을 삭제한 이유는 평점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근대적 관념에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해서였다. 그 후로 평점은 오래 동안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다시 연구 대상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관심은 주로 대륙에서만 일어났다. 이는 아직 대만에는 대륙 공산화 이후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던 후스의 유풍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병국과 조성기 삼국지의 번역대본인 삼민서국판 삼국지 서문에 후스의 말이 최고 권위로서 인용되고(마치 한때 대륙에서 나온 고전 소설 관련 문헌에는 루쉰의 말이 무조건 인용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본문에는 극히 일부분의 평점만이 남아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문학 관념은 후스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기본적으로 서구의 문학 관념에 의존한다. 따라서 평점을 삭제한 판본이 정본이 아닐 이유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이의 제기를 인정한다. 하지만 정본이란 말은 그것이 원작자의 원본(正本)이거나 또는 원본에 가장 근접한 판본(定本)이라는 뜻이다. 즉, 원작자의 작품이 가장 위대하며 혹시 그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을 가장 잘 복원한 판본이 그 권위를 이어가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단 우리나라 삼국지의 번역대본이었던 책들은 대부분 정본이라 부르기 어렵다.
사실 삼국지는 서구적 맥락의 정본 개념에 부합하는 작품이 아니다. 우선 원작자가 나관중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길이 없는데다가, 2차 저작인 모종강본이 그 이전 판본에 비해 여러 면에서 비교 우위를 보이기 때문이다. 원본이 곧 정본일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기존 고정 관념은 삼국지를 이해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굳이 어폐를 감수하면서까지 어느 하나의 판본을 삼국지 정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그저 각 판본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우리말 번역본 역시 평점까지 다 번역한 다음 모종강본 완역본이라는 호칭을 단다면 모를까 현재의 호칭은 가당치도 않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또 다른 질문은 설령 삼국지 정본이 있다고 해도 이를 우리말로 옮기기만 하면 원본의 권위가 저절로 따라오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학술적으로도 정확하고 문장상으로도 예술성을 인정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삼국지는 정본이 되기 위한 학술적 기준치에는 모두 미달하고, 그저 문장력 하나 가지고 서로 우열을 다투고 있을 뿐이다. 사실 필자가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소위 정본 삼국지들이 자신의 삼국지야말로 원본과 가장 동일한, 따라서 가장 믿을 만한 표준 번역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 이 정본이란 말은 학술적 책임을 지고 한 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광고문구에 불과하다. 필자가 이들 번역본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본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번역본의 위상을 높여보려고 하는 이들의 시도는 전적으로 이문열 평역본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이처럼 출판사의 상업적인 고려에 의해 번역본 제목을 정했다는 것은 출판사 측이 담당하는 광고를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또 몇몇 출판사회학적 고찰을 보여준 기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서평 기자들은 이런 광고문안의 내용을 신문에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결과적으로 삼국지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들 번역본의 시장에서의 반응은 별로였다. 다른 분야의 책과 비교하면 무난한 성적일 수도 있지만, 경쟁 대상인 이문열 삼국지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판매량을 보였다. 그것은 당연하다. 평점과의 궁합을 고려하여 원문을 건조하게 가다듬은 모종강본에서 평점이 빠졌으니 재미가 있을 리 없다. 어떤 번역자는 입으로는 학술적인 번역본임을 외치면서도 원문에 있는 시와 설화인의 상투어를 빼기까지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평점본이 그 이전의 판본을 압도했던 과거의 경험에서 이미 예고된 일이다.
그러나 정작 뼈아픈 지적은 이들이 내건 정통(正統)이라는 정말 삼국지다운 단어 속에 들어있다. 필자는 삼국지를 번역한 작가들에게 정통성 있는 작품을 번역할 책임이 과연 작가에게 있는지 자문해볼 것을 권한다. 정본이 주는 정통성에 만족하면서 원문의 자구 하나하나 공들여 정확히 옮길 임무는 학자의 것이지, 아마추어 어학 실력을 가진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작가라면 정통성 있는 정본이 될만한 자신의 작품을 쓸 야심과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나관중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역사서 삼국지의 정통성이 창작 과정 동안 훼손될까 노심초사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하게도 역사 사실을 재료로 하여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완성해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주껏 이야기를 만들어내 독자를 감동시키는 것이 작가의 본령이라면, 그는 위대한 장인(匠人)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가였다. 그리고 이렇게 기존 권위에 기대기를 거부한 자세야말로 성공을 거둔 모든 삼국지의 공통된 비결이다.


2-3. 황석영과 장정일의 삼국지
장정일은 작년 11월부터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하면서 올해 3월에는 공저로 <<삼국지해제>>를 발간했다. 이에 뒤질세라 황석영은 올 7월에 삼국지를 내놓았다. 이 두 사람의 삼국지가 나오면서 삼국지판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이들은 그 이전의 작가에 비해 일단 훨씬 대형 작가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각각 문화계의 각 진영을 대표할 만한 상징성을 지닌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황석영은 이문열과 함께 정확히 문단의 좌우 세력을 각각 대표한다. 그리고 장정일은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세대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가다. 따라서 이전의 삼국지가 이문열 삼국지의 형식적 측면, 즉 본문 개작 및 번역 오류 등을 문제 삼아 원본에 충실한 번역을 차별성으로 내세웠다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문열 삼국지의 세계관을 극복하려고 한다. 이문열 삼국지의 보수적이고 패권주의적 관점이 주된 비판 대상이 되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이전의 어떤 삼국지보다도 출판사의 기획의도가 많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다만 출판사의 관심은 주로 상품성 제고 및 판촉 차원에 머무른 감이 있다. 아울러 사실 확인과 비판적 의견이 실종된 서평 관행의 고질(痼疾) 또한 사라지지 않았는데, 여기에 일방적인 편파 보도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출판사와 언론 매체가 삼국지 담론을 입맛대로 주도하였지만, 학계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발언권을 행사하기를 꺼렸다. 그 결과, 사실은 사라지고 서로 경쟁하는 광고만이 난무하는 폐해가 더욱 심해졌다.
장정일은 자신의 삼국지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론에는 해석 삼국지, 평설 삼국지 등으로 보도되었는데, 실제로 작품의 창작지침서에 해당하는 <<삼국지해제>>와 각종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가 과거의 역사적 실상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정치적 관점에 비춰서도 올바른 삼국지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합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식상으로는 삼국지의 기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문장 하나하나의 번역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장면을 재구성하는 소극적 개작본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의 주장만을 검토해 보았을 때, 만약 굳이 삼국지가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면 그의 방식이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삼국지는 문장의 번역이 중요한 작품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해석할지가 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라는 작품에 대한 그의 통찰력 또한 나무랄 데 없이 깊은 편이다. 그러나 현재 85회분까지 나온 그의 삼국지를 읽어본 결과, 그의 이상이 실제 작품에 실현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치려면 먼저 원작자가 사용한 재료에 대해 정통해야 한다. 특히 삼국지의 주 재료인 역사서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 재료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관중이 비틀어놓은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역사서 삼국지는 배송지의 주석이 상당 부분 빠져있다. 진수의 본문만큼이나 삼국지에 많이 사용된 배송지의 주를 알지 못하면 작가의 삼국지 재구성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관중의 시각을 거부하고 원 재료에 입각해 적극적인 개작을 하려고 해도 달리 사용할 밑천이 없으니, 결국 역사적 근거가 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몇몇 평자가 <<삼국지해제>>에 대해 학술적 파산선고를 내린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 담긴 분석과 발상 가운데 취할 점이 매우 많다고 생각하나, 배송지의 주석이 대부분 빠진 역사서 삼국지 번역본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문해독능력이 기반이 되지 않은 삼국지 재해석은 어쩔 수 없이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전공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들이 삼국지 관련 서적을 다 읽었다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학술적으로 가장 정확한 김문경과 정원기의 저서와 역서는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한계는 <<삼국지해제>>를 상찬했던 이인화의 서평에 잘 드러나 있다.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삼국지를 즐겨 읽는 것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삼국지의 매력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마다(또는 그러한 사건일수록 더) 화끈하게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고집한데 있다. 나관중은 자신의 주관적 진실에 맞추어 역사적 사실을 재조립했고, 그것이 이인화가 말하는 “솔직하고도 힘있는 이야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니 필자가 장정일 삼국지를 읽으면서 느낀 껄끄러운 기분은 머리와 가슴이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이질감 탓이다.
아울러 장정일 삼국지 연재와 <<삼국지해제>>출간을 전후하여 문화일보가 보여준 과장 보도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관행이고 또 이어서 다룰 황석영의 경우에 비하면 약과이므로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필자는 황석영 삼국지가 출간된 직후 언론매체가 보여준 호의적인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국민작가가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출간하고 언론은 이에 대해 찬사 일변도의 치사를 보내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장정일에 비해 배가 넘는 수량의 해당 기사 가운데 비판적인 시각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서평을 실은 매체는 한겨레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황석영 출간을 맞아 삼국지 세계를 조망하기 위해 만들어진 KBS <<TV 책을 말하다>>(2003.8.7)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이 고스란히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의 불공정성에 대해서는 한 인터넷 논객이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기 때문에 더는 이야기할 필요 없겠지만, 필자는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방송 시나리오와 황석영 삼국지 별책부록인 <<즐거운 삼국지 탐험>>(이 책에 실린 명사들의 글은 과연 뛰어난 사고를 보여주지만, 황석영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고 썼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광고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러나 과연 작가와 출판사가 주장하고 언론이 보도한 내용대로 황석영 삼국지가 새로운 표준 삼국지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추었는가.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황석영 삼국지의 번역대본인 인민문학출판사본은 인명과 지명 등의 여러 가지 착오를 수정한 정리본이지만 역시 원본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소한 오류를 수정한 것 말고는 삼민서국본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 많은 공력을 들였다고 하나, 냉정하게 말해 황석영 삼국지의 번역문은 기존의 김구용, 정소문, 조성기 삼국지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말하기 어렵다. 작가가 먼저 번역하고, 교열자가 나중에 작가가 저지른 학술적 착오를 수습하는 지금의 방식이 바뀌기 전에는 앞으로도 학술적 권위를 지닌 표준본이 되기란 요원하리라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실과는 다른 이 같은 일방적인 보도가 나온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황석영 삼국지는 그 자신의 삼국지라기보다는 출판사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기획 상품이다. 언론매체는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명성과 그의 뒤를 받치고 있는 창작과 비평사의 권위를 감히 의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광고전단지와 다를 것이 없는 보도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황석영 삼국지는 그 자체의 가치로서 평가받지 않고, 이미 획득한 이름값 또는 출판사의 든든한 인적 배경에 의한 과대평가를 받은 셈이다. 명색이 우리나라 사상계의 한 진영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근래에 와서는 문화계 전반의 헤게모니까지 획득한 집단이 이렇게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삼국지 번역 같은 안전한(그러나 진취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상업적 성공을 기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난감한 생각이 든다.
더구나 필자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황석영 삼국지의 특징이란 오로지 이문열 삼국지와 비교했을 때나 의미 있는 것인데도, 작가와 출판사 측은 명시적으로 이문열 삼국지를 지목하여 비판하지 않고 에둘러 비판하거나 또는 슬쩍 배제해버리는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황석영은 여러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물어보기 전에는 이문열 삼국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이마저도 정확한 언급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와 출간기획자인 최원식은 모두 박태원 삼국지 이후 맘에 들게 괜찮은 삼국지가 없었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삼국지의 정통 계보에서 이문열을 빼버린다. 어떤 대상을 언급하기 꺼려하면서 실제로는 그 대상이 거둔 성공과 지위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행태는 확실히 노회(老獪)한 것이다. 장정일이 여러 차례 이문열 삼국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보여준 당당한 태도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이문열은 그의 삼국지 서문 및 여러 인터뷰에서 순수 창작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계 수단을 도모했던 것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바 있다. 황석영도 매끈하게 써놓은 서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방송에서는 “노후 대책”이라는 표현으로 일말의 심경을 토로했다. 전혀 다른 이념과 성향을 가진 작가들이 돈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울러 필자는 작가들에게 이러한 고전 번역 작업은 시간과 재능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삼국지를 번역했던 작가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한 번 시작한 고전 번역은 계속 하게 되며 동시에 그의 작가적 역량은 급격히 스러져 갔음을 알 수 있다. 한 권짜리 <<황제를 위하여>>의 문학적 파괴력은 대하소설 <<변경>>을 훨씬 뛰어넘는다. 황석영이 열국지를 번역한들, 그것이 기존의 열국지와 무슨 차별성을 지닐 것이며, <<손님>>이 거둔 문학적 성취를 능가할 리도 없다. 아르바이트는 한 번으로 족하며, 앞으로 갈 길이 멀다.


3. 글을 마치며
이문열 이후 삼국지 출판 시장에 달려드는 작가와 출판사들은 정작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하지 않는 듯 하다. 그것은 삼국지는 어떤 성격의 책이고, 우리는 왜 그것을 즐겨 읽으며, 또 우리 사회에서 삼국지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 다시, 읽으면 도움이 되는 그 많은 책들 가운데 과연 삼국지는 몇 순위에 들어가는지 그리고 하고 많은 중국 고전 가운데 왜 유독 삼국지에만 독자가 몰리는지에 대한 의문을 추가할 수 있다. 상업성에 대한 고려를 잠시 제쳐두고 이러한 질문을 한 번만 더 고민해보았다면 지금까지의 묻지마 식 삼국지 중복 출판은 없었을 것이다.
삼국지가 동아시아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통속적인 문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삼국지가 고전 소리를 다 듣는 것을 보면 세월이 좋긴 좋다는 것을 실감한다). 근대 이후 삼국지가 상업성과 쉽게 결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삼국지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서양과 동양의 지식 가운데 어느 한 쪽의 것만 편향되게 배워왔다는 점이다. 지식뿐만 아니라 방법론에서도 동서양에 정통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또 지식인들이 통속문화에 대한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러니 서구화된 현대 사회에서 삼국지가 가지는 의의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 규정이 이루어지 못한 채 감정 섞인 찬반논쟁만 거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울러 삼국지에 대한 작금의 의제 설정 방식은 문제가 있다. 삼국지 담론을 출판사와 언론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단점은 그것이 상업성 및 흥미유발을 위한 의제 설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최근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삼국지, 나를 사로잡은 명장면>같은 기획물은 애초 삼국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보도가 되지 않아서일 뿐 삼국지를 싫어하는 사람도 엄연히 존재하는 데 말이다. 삼국지(또는 삼국지적 세계관)를 싫어하는 사람의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의 이유만큼이나 각양각색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삼국지를 거부한다. 삼국지 속의 가치관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까지 포괄할 수 있는 의제 설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삼국지를 즐겨 읽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삼국지 이야기에 미혹되어 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삼국지 인물의 시각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세상을 인식하는 절대적인 도구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필자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 이야기에 다시 우리 자신이 휘둘리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싶다. 특히 삼국지처럼 읽으면서 단순히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주는 작품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삼국지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서사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 글에서 삼국지를 둘러싼 우리 사회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욕망이 만만치 않게 들어차 있음을 강조하려 애썼다. 이제는 이 욕망이 가득 찬 현실에서 자유로운 다른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황석영삼국지" 문제가 많다(국민일보)
처세술의 달인, 사마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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