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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20 20:09:57, Hit : 3122, Vote : 251
 <공명의 선택> 22장 서천에 뜨는 해
공명의 선택 (249)…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1)
파서·파동 지방 평정―.

공명이 이끄는 제2차 서정군의 파촉행은 순조롭고 평탄했다.

예정대로 장비는 백제성에서 파군·덕양(德陽)에 걸친 파서 지역을 공략했고, 조운은 수로를 따라 강양(江陽)에서 건위(楗爲)에 이르는 파동(巴東) 지방을 점령하며 진군했다. 교묘한 진로였다. 이로써 성도 주변은 완전히 평정되었고, 유장은 섬에 갇힌 것처럼 고립되었다.

강릉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공명의 서정군은 낙성 바깥에서 고전하고 있는 유비 군과 합류했다.

공명을 본 유비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나 때문에 방 군사가 죽었소.”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서천을 평정하여 잘 다스리는 것이 방사원의 혼백을 달래는 길입니다.”

공명은 유비를 위로했다. 유비는 더더욱 공명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일었다.

―지도를 가져오너라.

방통의 영전에 분향을 하고 난 공명은 곧바로 서천 지도부터 찾았다. 장송이 주고 간 그 지도는 정확하고 세밀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던 공명은 이번에는 높은 언덕에 올라 낙성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성 동쪽에 걸려 있는 저 다리의 이름이 무엇이냐?”

항복한 촉병 하나가 대답했다.

“금안교(金雁橋)라고 합니다.”

“지금 낙성을 지키는 촉 장수들은 누구누구가 있소?”

이번에는 법정에게 물었다.

“유장의 아들 유순과 오의, 장임, 유괴, 오란, 뇌동 등이 있으며, 얼마 전 새로이 탁응(卓膺)과 장익(張翼)이 성도로부터 도착했습니다.”

“장수들 중 우두머리가 누구요?”

“유장의 사돈인 오의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략은 모두 장임에게서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법정의 대답에 공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올라탔다. 금안교까지 달려가 개울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살핀 후 영채로 돌아왔다.

황충, 위연은 물론 제2차 서정군 장수인 장비와 조운 등을 군막으로 불렀다.

“낙성은 쉽게 깨뜨리기 힘든 요새입니다. 먼저 오의와 장임을 사로잡은 후에 낙성을 취하도록 합시다. 내 방금 살펴보고 오니 금안교에서 남편으로 5, 6리쯤 내려가면 갈대밭이 나옵니다. 가히 군사를 숨길 만한 곳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각 장수들에게 임무를 부여할 테니 장수들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시행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일일이 장수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위연 장군은 창군(槍軍) 1천 명을 거느리고 갈대밭 왼편에 매복해 있다가 말탄 적병들만 골라 찍으시오.

―황충 장군께서는 칼과 도끼를 든 1천 군사를 데리고 갈대밭 오른편에 숨어 있다가 말에서 내리는 적병들을 도륙하시오.

―조자룡께서는 금안교 북편에 숨어 있다가 내가 오의와 장임을 유인하여 다리를 지나거든 얼른 다리를 끊어버리시오.

―이렇게 되면 오의와 장임은 반드시 산 동편 소롯길을 취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장익덕께서는 그 곳에 매복해 있다가 도망쳐오는 오의와 장임을 사로잡으시오.

제2차 서정군의 가세로 유비 군은 사기가 높았다. 공명의 영을 받든 장수들은 곧 군사를 거느리고 제각기 맡은 장소로 달려갔다. 공명 또한 오의와 장임을 유인하기 위해 군사를 데리고 진채를 떠났다.


공명의 선택 (250)…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2)
낙성의 서천 군은 그들대로 사기가 충천했다. 유장이 새로이 탁응과 장익을 원군으로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적병이 쳐들어옵니다.

여러 번의 싸움에서 결코 손해를 보지 않은 오의와 장임은 자신감을 가졌다.

―이번에야말로 유비와 공명을 한꺼번에 산골짜기에 묻어버려야겠다.

그들은 서로 의논한 끝에 유괴와 장익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들은 모든 장수와 함께 성을 나왔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이 성문을 나서 10여 리쯤 달렸을 때 앞에서 한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공명의 군사들이었다. 공명은 윤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있었다. 네 바퀴가 달린 수레를 탔다. 손에는 백우선을 들고 있다. 말로만 듣던 공명의 모습을 직접 본 오의와 장임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자가 조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제갈량이란 자로군.”

“꾀가 많은 자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런데 이상했다. 뒤따르는 군사들의 대오가 도무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손발이 맞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군사들을 오합지졸이라고 한다. 지금 공명의 군사들이 그러했다. 긴장했던 자신들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나름대로 병법에는 자신이 있는 장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 때 공명의 수레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백우선을 높이 들어 오의와 장임을 가리키며 외쳐댔다.

“조조는 백만 대병을 가지고도 내 이름 하나만 듣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그런데 너희들은 무엇을 믿고 항복하지 않느냐?”

터무니없이 자신만만하게 내뱉는 말을 흰소리라고 하던가. 조조 운운하며 항복을 권하는 공명의 말이 장임에게는 흰소리로 들렸다. 더욱이 공명의 군사들은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장임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흘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갈량은 군사 부리는 것이 신(神)과 같다고 하던데, 이제 보니 헛된 소문이로구나!”

오의가 조심하라고 말을 하려는데, 장임은 이미 손을 들어 돌격 명령을 내렸다. 단숨에 깨뜨려보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볼 것 없다. 제갈량을 사로잡는 자에게 천 금 상을 내리리라!”

촉병들이 일제히 앞으로 밀고 나갔다. 내지르는 함성이 산을 무너뜨릴 듯했다. 파도 같은 기세였다. 공명의 군사들은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 내빼기 시작했다. 공명도 사륜거(四輪車)를 버리고 말에 올라 금안교를 향해 달아났다.

사람에게는 이상한 심리가 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것이 자신을 유인하는 계책임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장임은 공명이라는 천하 제일의 기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나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호승지심에 빠졌다. 서두름은 아니었다. 냉정함을 잃었다. 상대방의 유인을 유인으로 보지 않고 빈틈으로 보았다. 기회라고 판단했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하면 공명이 그렇게 판단하게끔 만들었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결코 강함만으로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방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다. 곁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행동인데도 맞선 상대자는 공연히 허둥댄다.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이다.

싸움에 임해서 네 가지 범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있다.

경(驚)―놀라지 말라.

구(懼)―두려워하지 말라.

의(擬)―의심하지 말라.

혹(惑)―현혹되지 말라.

사계(四戒)이다.

장임은 이 네 가지 중 상대방의 유인책에 말려들었다. 혹(惑)에 빠진 것이다.

―공명을 이겼다.

라고 장임은 생각했다. 신이 나서 공명의 뒤를 쫓기에 바빴다. 오의도 어쩔 수 없이 장임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막 금안교를 건넜을 때였다. 돌연 함성이 크게 일며 왼편에서 유비가 달려나왔고, 오른편에서는 엄안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51)…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3)
장임은 비로소 아차 했다. 급히 군사를 돌려 물러나려 하였으나 조운이 이미 금안교를 끊어버린 뒤였다. 당황했다. 말머리를 돌려 강을 끼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북편 언덕에 조운이 군사를 벌려 세운 채 가로막고 있었다. 기겁을 했다. 이번에는 사계(四戒) 중 경(驚)에 빠졌다. 싸울 마음을 잃었다. 하는 수 없이 남쪽을 바라보고 달렸다.

5리쯤 달렸을까. 갈대숲이 나타났다. 무성했다. 한참을 달리는데 왼편에서 위연의 군사들이 달려나와 긴 창으로 말탄 장졸들만 노려 찔러댔다. 방향을 틀어 오른편으로 내뺐다.

그러나 그 곳에도 역시 황충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끼를 든 군사들이었다. 말의 다리만 찍어댔다. 말들이 거꾸러지고 군사들은 갈대숲으로 굴러떨어졌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황충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밧줄로 몸을 꽁꽁 묶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마병이 섬멸당한 것이다.

다급해진 것은 오의와 장임이었다. 그들은 아우성치는 보병대를 버리고 겨우 수십 기만을 거느린 채 동쪽 산길로 피해 달아났다. 그 때는 이미 혼이 반쯤 빠졌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정신없이 내닫는 중에 별안간 좌우 언덕에서 일성포향이 터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가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이놈, 장임아! 이제 어디로 달아날 테냐?”

장비를 본 장임은 오금이 저렸다. 두려움―구(懼)에 빠진 것이다. 칼을 휘두르려 하였으나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해 장비의 솥뚜껑 같은 손이 장임의 허리를 나꾸어챘다.

이를 본 오의는 더 이상 싸워보았자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말에서 내려 땅에 넓죽 엎드렸다.

“항복합니다.”

이로써 싸움은 완전히 끝이 났다.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승전고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유비는 진채 안의 막사 높은 의자에 앉았다. 그 옆에 공명이 섰다. 붙잡힌 촉장들이 차례차례 불려나왔다.
맨 처음은 오의였다. 무릎을 꿇자마자 유비를 향해 간청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밧줄을 풀어드려라!”

유비의 명에 오의는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이번에는 오란, 뇌동, 탁응 등이 불려나왔다. 그들 역시 항복의 절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장임이었다. 꼿꼿했다. 유비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달랬다.

“촉의 명장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대도 항복하는 것이 어떠한가?”

장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충신이 어찌 두 주인을 섬기겠는가?”

유비는 장임의 곧은 절개에 마음이 끌렸다. 더욱 은근히 권했다.

“천시(天時)라는 것이 있다. 항복하면 그대를 무겁게 쓰겠다.”

“지금 항복한다 해도 나는 뒷날 다시 내 본주인을 따를 것이다. 차라리 지금 나를 죽이는 것이 낫다.”

“…….”

“어서 죽이지 않고 뭘 하는가?”

그래도 유비는 선뜻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공명이 유비에게 조용히 권했다.

“그의 절개를 지켜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유비는 장임을 죽이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못내 애석함을 이기지 못했다.

“아름다운 죽음이로다!”

장임의 시체를 거두어 금안교 옆에 묻고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공명의 선택 (252)…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4)
다음 날이었다.

유비와 공명은 친히 선두에 서서 낙성을 향해 진군했다. 그 좌우로 엄안, 오의, 오란, 뇌동, 탁응 등 항복한 촉장들을 대동했다. 성을 지키고 있는 유순, 유괴 등에게 항복을 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낙성 앞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유순은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알고 성을 빠져나가 성도로 도망쳤고, 장익은 항전을 주장하던 유괴를 죽인 뒤였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난공불락이라고 여겼던 낙성이었다. 방통까지 잃어가며 어려운 싸움을 벌여왔었다. 그러나 그 끝은 너무나 싱거울 정도였다. 무혈입성이었다.

유비는 부성 때처럼 크게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군사들을 위무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 이유를 묻는 공명에게 유비가 대답했다.

“그 때 너무 일찍 축배의 잔을 든 것 같소. 시간이 갈수록 방 군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절감하오.”

“방사원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인자(仁者)의 군대’에 대해 말했지요. 편법을 성공시키고 나서  즐거워하는 자는 군자가 아니라고 말이오.”

“장자(莊子)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지요.”

“무슨 말입니까?”

“세 가지 칼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장자삼검(莊子三劍)’이라고 합니다.”

“장자삼검에 대해 말해보시오.”

“먼저 ‘천자(天子)의 칼’이 있습니다. 이 칼은 연(燕=춘추시대의 한 나라)을 칼끝으로 삼고, 제(齊)나라를 칼날로 삼고, 위(魏)나라를 칼등으로 삼고, 주(周)나라를 칼코등이로 삼고, 한(韓)나라를 손잡이로 삼은 칼입니다. 칼을 다룸에 있어서는 인의와 은덕으로 휘두릅니다. 따라서 이 칼 앞에서는 당할 것이 없고, 이것을 내리치면 버틸 것이 없으며, 위로는 구름을 헤치고 아래로는 땅을 끊습니다. 한 번 칼바람 소리에 제후들이 몸을 굽히고 천하가 항복하게 되지요.”

“좋은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무슨 칼이 있소?”

“‘제후의 칼’이 있습니다. 그 칼은 용기와 지혜가 넘치는 선비로 칼끝을 삼고, 청렴한 선비로 칼날을 삼고, 어질고 착한 선비로 칼등을 삼고, 충성스럽고 밝은 선비로 칼코등이로 삼고, 호걸스런 선비로 손잡이를 삼은 칼입니다. 그래서 이 칼을 가지면 앞에는 맞설 것이 없고, 이것을 휘두르면 막을 것이 없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아 군(君)·사(師)·부(父)를 따르고, 아래로는 대지의 뜻을 받아 사계절에 순응하고, 가운데로는 백성의 뜻을 알아 사방을 편안하게 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엇이오?”

“마지막으로 ‘서인(庶人)의 칼’이 있습니다. 이 칼은 풀어헤친 머리에 두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면서 서로 상대방의 심장이나 폐를 찌를 뿐입니다. 닭이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한 번 목숨이 끊어지면 다시는 쓰일 데가 없습니다. 군대로 치면 ‘용자(勇者)의 군대’에 해당하겠지요. 아마도 방사원은 이 장자삼검을 주공께 말씀드리려 했던 모양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오. 방 군사가 그립소.”

유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주공께서 그를 잊지 않는 한 방사원은 늘 주공의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공명이 조용히 말을 맺었다.

낙성 점령 후, 유비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민심은 곧 유비에게로 쏠렸다.

―다음은 면죽성(綿竹城)이오.

공명은 법정·팽양과 더불어 장비, 조운, 황충 등과 다음 일을 의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팽양이 나서서 말했다.

“면죽성을 지키는 장수는 이엄(李嚴)과 비시(費詩)입니다. 두 사람 모두 용병에 능한 장수들이지요. 아무래도 시일을 길게 잡고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황충의 두 눈이 빛났다.

“이엄이 면죽성에 와 있단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현령은 비시이지만, 얼마 전 유장이 원군으로 이엄을 면죽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소. 이엄은 전에 나와 함께 유표를 섬겼던 남양(南陽) 사람입니다. 비록 몸은 유장을 섬기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엄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이엄은 남양 태생으로 형주목 유표에게로 출사했었다. 유비의 인의와 덕망을 늘 흠모했으나 유표 때문에 인연을 맺을 기회가 없었다. 조조가 형주로 쳐들어왔을 때 그는 서촉과의 경계인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었다. 유종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서촉으로 달아나 유장에게 의탁했다. 유장은 그를 성도의 현령으로 임명하여 파촉의 수비를 맡겼다. 병법에 밝고 의기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황충의 말을 들은 공명은 크게 기뻐했다.

“제게 이엄을 항복시킬 좋은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노장군께서는 잠시 귀를 빌려주십시오.”

공명의 귓속말을 들은 황충도 이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군사의 영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며칠 후였다. 황충은 군사를 거느리고 면죽성 앞으로 나가 싸움을 돋우었다. 예상대로 이엄이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한때는 유표 밑에서 함께 일했던 두 장수였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눌 만도 하건만 황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이엄 또한 창을 꼬나잡고 늠름하게 짓쳐나와 황충과 맞섰다.


공명의 선택 (253)…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5)
두 장수의 무용(武勇)은 화려했다. 한참을 싸우는데 역시 나이가 들었음인가. 황충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엄이 신이 나서 그 뒤를 쫓았다.

황충은 산 속으로 말을 달렸다. 산길은 험하고 거칠었다. 좌우로는 높은 나무들이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었다. 이엄은 문득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머리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홀연히 일성포향이 터지면서 좌우 숲 속에서 유비의 군사들이 새카맣게 몰려나왔다. 일지군마의 대장은 위연이었다. 달아나던 황충도 어느 새 방향을 틀어 이엄을 향하고 있었다.

이엄은 정신이 어찔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언덕 위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는 본시 형주를 섬겼던 사람이 아니오? 어찌하여 밝음을 버리고 어둠을 좇으려 하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유황숙을 도와 천하를 위해 큰일을 도모해보심이 어떠하오?”

이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는 윤건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를 걸친 공명이 손에 쥔 백우선을 흔들며 서 있었다. 기가 죽었다. 부끄러움도 일었다.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그 때 황충이 가까이 다가와 정겹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정방(正方=이엄의 자)은 그 동안 무고하였소? 지난 일은 잊고 예전처럼 나와 함께 유황숙을 위해 일해봅시다.”

황충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엄은 마음 속에 큰 출렁거림이 이는 것을 느꼈다. 말에서 내렸다. 황충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받아만 주신다면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소이다.”

황충이 이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공명과 황충이 이엄을 데리고 유비에게로 가자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이엄은 감격했다. 오래 전부터 흠모해오던 유비가 아니던가. 유비 또한 형주 시절 이엄에 대한 명성을 들은 바 있었다. 비장군(裨將軍)의 직위를 내렸다.

이엄이 유비를 위해 계책을 내놓았다.

“제가 비시를 설득해 면죽성을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비시가 순순히 따르겠소?”

비시는 유장의 아내의 동생이었다. 유비가 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엄은 자신만만했다.

“비시가 비록 유장의 처남이라고는 하지만 저와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가서 달래면 말을 들을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병사들을 구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오? 어서 가서 비시를 달래보도록 하오.”

유비는 전혀 의심함 없이 이엄을 놓아보내 주었다.

이엄이 단기로 면죽성 안으로 들어갔다. 비시를 만나 그간의 일을 들려준 후 말했다.

“유황숙은 과연 덕이 높은 분이네. 자네도 나와 함께 유황숙을 섬기는 것이 어떤가?”

이미 유장에게서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다고 여기던 비시였다. 이엄의 설득에 그는 마음이 움직였다. 곧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낙성에 이은 또 한 번의 무혈입성이었다.

―면죽성을 지키던 이엄과 비시가 유비에게 항복했습니다.

유장은 눈앞이 어찔했다. 면죽성은 성도를 지키는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유비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유장의 마음을 더욱 암담하게 한 것은 장수들의 연이은 투항이었다. 촉중 제일의 명장이라 일컬어지던 엄안의 항복이 무엇보다도 큰 손실이었다. 오란, 뇌동, 이엄 등도 모두 유비에게 무릎을 꿇었다. 단순히 무릎을 꿇은 게 아니다. 창끝을 성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유비의 전력은 배로 강화되었고, 반대로 유장은 약화되어갔다.

‘사돈인 오의도, 처남인 비시마저 모두 나를 버렸다.’

이제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절망이었다.

‘차라리 나도 항복을 할까?’

이런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었다.

성도성 안의 항전파 막료들이 이러한 유장의 마음을 읽지 못할 리 없었다. 그 중 익주 태수 동화(董和)라는 사람이 있었다. 남군 지강(枝江) 사람으로 자를 유재(幼宰)라 했다. 제법 식견이 높은 선비였다.

동화는 유장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고 앞으로 나가 대응책을 올렸다.

“한중(漢中)의 장로에게 구원을 청하십시오. 그러면 유비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군사를 둘로 나누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틈을 노려 공격하면 유비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본시 장로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유비 군을 끌어들인 유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정반대로 유비를 막아내기 위해 장로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아무리 적과 동지가 조석간으로 변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와는 대를 이어오는 원수간이오. 그가 우리를 구해줄 리 없지 않소?”

유장의 말은 힘이 없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파촉이 망하면 한중도 위태로워집니다. 장로는 틀림없이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

“이제 성도는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우리가 살 길은 이제 하나뿐입니다.”

동화는 강력하게 진언했다. 유장이 생각하기에도 그 길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에게 구원을 청해봅시다.”

유성마 한 마리가 빠르게 성도성을 빠져나갔다.


공명의 선택 (254)…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6)
그 무렵, 한중의 장로는 몹시 분해하고 있다. 기껏 군사를 동원하여 익주를 향해 쳐들어가려던 참에 형주목 유비가 방해자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방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중이 위험하다.

공격 명령을 중지하고 군대를 수비 형태로 바꾸었다. 다행인 것은 유비가 가맹관에 머문 채 더 이상 북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익주를 칠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유비는 좀처럼 형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로는 답답했다. 그러할 때 장로에게 뜻밖의 장수가 투항해왔다. 관중십장 중 제일의 명장 마초(馬超)였다.

예전에 마초는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서량의 서쪽 지방, 즉 지금의 감숙성 일대로 쫓겨 달아난 바 있었다. 그 곳에서 그는 강족(羌族=티베트계의 소수 민족)을 규합하여 수시로 관중 땅 탈환을 위한 투쟁을 벌었다. 한때는 양주(凉州) 땅을 점령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을 자칭할 정도로 세력을 회복했으나, 끝내 기산(祁山) 전투에서 하후연(夏侯淵)에게 패해 갈 곳마저 없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뒤따르는 장수는 사촌동생 마대(馬岱)와 방덕(龐德)뿐이었다.

―잠시 한중 땅으로 피신해 익주를 노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대의 권고에 마초는 무릎을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 마초는 마대, 방덕 등을 거느리고 한중의 장로에게로 투항한 것이었다.

마초를 본 장로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한때 조조의 수염을 불태울 정도로 용맹이 뛰어난 마초가 아니던가. 그를 잘 이용하면 남쪽으로는 익주를 손에 넣고, 동북쪽으로는 조조를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환영하오.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벌였다. 자기의 딸을 마초에게 시집 보내 사위로 삼으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중 땅에도 만만치 않은 내부 세력이 있었다. 한중 태생의 장수 양백(楊柏)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외부인인 마초가 장로의 신임을 받아 세력을 잡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은밀히 장로를 찾아가 말했다.

―마초는 성품이 너무 잔혹합니다. 그가 이번에 하후연에게 쫓겨 도망쳐온 것도 그가 양주를 다스릴 때 인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귀한 따님을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우매한 군주가 그러하듯 장로도 귀가 엷었다. 양백의 말에 마초와의 혼담을 단념했다.

이 일을 마초가 알게 되었다. 불같이 노했다.

―잘 하면 장로의 사위가 되어 한중 땅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놈의 양백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쳤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보복을 하고야 말리라.
양백 또한 어떻게 하면 마초를 제거할 수 있을까 매일 궁리했다.
이러할 때 성도의 유장에게서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자가 당도했다. 사자는 익주 태수 동화였다.

동화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장로를 설득했다.

“우리 주공을 도와 유비를 물리쳐주신다면 서천의 20개 고을을 한중에 떼어드리겠습니다.”

2대에 걸친 원수지간이었다. 전혀 도와줄 이유가 없는 사이였다. 오히려 서천을 침략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장로가 아니던가. 그러나 20개 고을을 내준다는 말에 장로는 그러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 모습을 본 모사 염포(閻圃)가 다급히 나서며 간했다.

“유장은 주공의 대대 원수입니다. 땅을 떼어준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결코 군대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때 정청 한구석에 있던 한 장수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공께서는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제게 일지군마를 내주신다면 유비를 산 채로 잡아 20 고을을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모두들 놀라서 돌아보니 정서장군 마초였다. 마초가 이렇게 자청한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군사를 몰고 내려가 유비를 격파한 후 내친김에 성도까지 점령하여 서천을 차지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이러한 마초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장로는 크게 기뻐했다. 마초라면 능히 유비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그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었다.

‘잘 하면 이 기회에 서천을 손에 넣을 수 있겠구나.’

이것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하던가. 어찌됐든 장로는 기꺼운 마음으로 마초에게 2만 군사를 내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감독관으로 양백을 임명했다.

마초는 곧 군사를 점고한 후 가맹관을 향해 출발했다. 이 때 방덕은 병이 나서 한중에 남았고, 마대만이 마초를 따라나섰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유비는 면죽성에 머물러 있었다. 다소 초조한 기색이었다.

―군사를 내기 전에 항복 사절을 보내는 것이 순서일 듯싶습니다.
공명의 제안에 항복 사절을 보낸 것은 이틀 전이었다. 문안은 법정이 작성했다. 보내는 이도 법정의 이름으로 했다. 내용의 요지는 간단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여 항복하시어 일가를 보존하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면죽에서 성도까지는 하룻길이었다. 그런데 그 항복 사절이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거절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보아야 하겠지요?”


공명의 선택 (255)…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7)


유비도, 공명도 침울했다. 무혈입성을 원했다. 그것이 모양새가 가장 좋은 것이다. 결코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되었건 한왕실의 종친이 아니던가. 종실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았다는 평을 후대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덕이 부족하여…….

유장이 땅을 바치는 형식으로 서천 정벌을 마무리짓고 싶었던 유비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었다.

“혹시…….”

공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오?”

유비의 눈길이 공명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믿는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서천의 3분의 2가 이미 우리 땅이 되었소. 유익주가 믿을 것이 무엇이 남아 있겠소?”

“한중의 장로에게 구원을 요청할 법도 합니다.”

“장로는 유익주와 대대로 원수지간이오. 장로가 서천을 도와줄 리가 없질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전혀 엉뚱한 소식이 전해졌다. 성도성 안에 있던 촉군 태수 허정(許靖)이 유장 몰래 유비의 항복 사절과 접촉하여 투항하려다가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었다.

허정은 여남(汝南) 태생으로 일찍이 인물비평가로 이름이 높았던 허소(許邵)의 사촌형이다. 허소가 그를 시기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동탁 시절, 파군 태수에 임명되어 서천 땅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그 후 동탁 주살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한 후 중국 대륙의 최남단인 교지(交趾) 태수 사섭(士燮)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이 때 허정의 명성은 천하에 높았으므로 사섭은 그를 빈객으로 높여 후하게 대접했다. 그 후 유장이 그 이름을 듣고 허정을 초빙하였다. 허정은 교지를 떠나 촉으로 건너와 파군·광한 태수 등을 역임하다가 촉군 태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서천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인 허정의 투항 시도는 유장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런 만큼 분노도 컸다.

―허정도, 유비의 사자도 모두 감옥에 처넣어라. 유비를 물리친 후에 서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리라!

유장은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허정은 큰 선비였는데, 아쉽게 되었소이다.”

유비는 혀를 찼다.

“이제는 하는 수 없습니다. 군사를 동원하여 성도성을 포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명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마초의 침공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맹관이 위급합니다. 빨리 구원병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가맹관을 지키고 있는 장수는 맹달과 곽준(藿峻)이었다.

유비는 물론 공명까지도 얼굴빛이 크게 달라졌다. 한중의 장로가 유장을 돕기 위해 마초를 파견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좀처럼 마초의 빼어난 무예와 용맹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맹달과 곽준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유비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공명은 대답 대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공명이 이윽고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다는 말씀이오?”

“유장이 항복을 거절한 것은 역시 장로의 군대를 믿고서였습니다.”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질 않소?”

유비는 다소 실망스런 눈길로 공명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마초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유장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초를 막아내기도 힘들 터인데 그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다니요? 그게 말처럼 어디 쉽소?”

유비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공명은 빙긋 웃고 있었다.

“마초는 장로의 부하 장수로 만족할 인물이 아닙니다. 제게 이미 계책이 섰으니 주공께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가맹관으로 달려가십시오. 여기는 조운과 황충에게 맡겨두면 됩니다.”

미심쩍었으나 굳이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직책을 주면 온전히 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유비였다. 그것이 유비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더더욱 공명의 말이라면 바다를 산이라고 해도 믿는 터였다. 유비 군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조운과 황충을 제외한 모든 장수들이 가맹관으로 이동해갔다. 장비와 위연이 앞서 달려갔다.

선발대로 떠나가는 장비와 위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공명이 은밀히 황풍을 불렀다.

“한중을 다녀와야겠네.”

“마초에 대한 뒷조사입니까?”

황풍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맞았네. 특히 장로의 막료들과의 관계를 세밀히 알아보게. 틀림없이 파고들 틈이 있을 것일세.”

“그 밖의 다른 사항은?”

“없네.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게. 그 후의 일은 내가 처리하겠네.”

“그럼…….”

황풍이 조용히 사라져갔다.


공명의 선택 (256)…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8)


―싸움을 벌이되, 이기지도 말고 지지도 마시오.

떠나기 전, 선봉장 격인 장비와 위연에게 공명은 특별히 당부했었다.

―영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은 했지만, 두 장수의 마음은 이미 가맹관으로 치닫고 있었다. 관중십장 중 제일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마초였다. 한시바삐 그와 무예를 겨루어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비단 무장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오의 주유가 공명을 상대로 지략을 겨루어보려고 했던 것도, 서천의 지장인 장임이 공명을 이겨보려고 했던 것도 모두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해보려는 호승지심에서가 아니었던가.

―대관절 마초란 자가 얼마나 뛰어난 자인가.

확인해보고 싶었고, 나아가 그를 꺾어 자신의 무예와 용맹을 떨치고 싶은 욕심―이 때의 장비와 위연이 바로 그러한 심리였다.

가맹관에 당도한 장비는 곧 전투 준비를 갖췄다. 위연에게 5백 기를 내주어 적정(敵情)을 탐지해오게 했다. 위연은 장비보다 먼저 마초와 싸워보고 싶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맞은편에서 한 떼의 군마가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달려나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대장은 마초의 사촌동생 마대였다.

그런데 위연은 그 대장이 마초인 줄 알았다. 잘 되었다 싶어 칼춤을 추며 달려나갔다. 마대가 이에 응했다.

두 장수는 한데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10합쯤 싸웠을까. 마대는 힘에 부치는 듯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연은 신바람이 났다. 놓칠세라 쫓는데 별안간 마대가 말 위에서 몸을 돌리더니 화살을 한 대 날렸다. 예기치 않은 반격이었다. 화살은 정확하게 위연의 왼편 팔뚝에 와서 꽂혔다. 아차 싶었다.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이번에는 마대가 위연의 뒤를 쫓았다. 위연은 급했다. 가맹관을 바라보고 힘껏 달렸다.

겨우 성문 앞에 당도했을 때, 한 장수가 창을 꼬나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을 한 장비였다. 위연은 얼른 장비 뒤로 숨었다.
장비가 위연을 쫓아 달려온 마대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너는 누구냐?”

“나는 서량 장수 마대이다.”

장비는 그가 마초가 아닌 것에 실망했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까짓 놈은 필요없다. 빨리 돌아가 마초에게 일러라. 연인 장비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마대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네가 어찌 나를 그리 작게 보느냐?”

광분한 듯 소리치며 창을 들어 장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10여 합에 마대는 힘이 부쳤다. 하는 수 없었다. 몸을 빼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비가 마대의 뒤를 쫓으려 하는데, 문득 관(關) 위에서 한 사람이 소리쳐 만류했다.

“아우는 멈추어라!”

돌아보니 후진으로 출발했던 유비였다. 아마도 그들이 마대와 싸우고 있는 사이 당도한 모양이었다. 공명도 그 옆에 서 있었다. 장비는 하는 수 없이 마대를 그대로 놓아보내고 관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면서 마초가 군사를 이끌고 가맹관 앞으로 쳐들어왔다. 전날 마대로부터 장비에 관한 얘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유비는 친히 관 위로 올라가 마초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에는 사자 형상을 한 투구를 썼다. 갑옷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위에 흰색 전포를 걸치었다. 눈이 부셨다. 위엄과 기세가 하늘까지 뻗치는 듯했다. 적장이지만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단 같은 마초[錦馬超]’라고 하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장비는 시기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초를 꺾어보려는 마음이 앞서 있던 그였다. 창을 꼬나들며 씨근덕거렸다.

“나가 싸우겠소.”

“잠깐 기다려라. 지금 나가면 다친다. 예기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다.”
공명의 계책이 아니었다. 유비는 진심으로 마초가 탐이 났다.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성 아래에서는 마초가 계속해서 싸움을 돋우고 있고, 성 위에서는 장비가 씨근덕거리며 마초와 싸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서로들 노려보며 눈싸움만 벌였다.

그러는 사이 오후가 되었다. 아무리 싸움을 돋우어도 반응이 없자 마초와 그 군사들은 서서히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시들한 표정이 되었다.
이를 본 유비가 마침내 장비에게 싸움을 허락했다.

“5백 기만 거느리고 나가 싸워보아라.”

장비는 신바람이 나서 관 아래로 뛰쳐나갔다. 마초도 새삼 기운이 나는지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나왔다. 군사들을 활 한바탕 거리로 물러나게 했다. 일 대 일의 싸움이었다.

두 장수는 곧 한덩어리가 되어 찌르고 막고 베고 치고 하였다. 말들이 길게 울음을 터뜨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창과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천상의 음악소리 같았다. 백여 합이 넘었으나 승부가 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성 위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유비는 다시 한 번 감탄을 토해냈다.

“과연 마초는 범 같은 장수다!”

또다시 백여 합을 싸웠다. 그래도 여전히 두 장수는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말들이 지쳐 싸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늘 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유비는 두 장수 모두 다칠까 염려가 되었다. 급히 징을 쳐서 장비를 불러들였다.



공명의 선택 (257)…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9)


“조금만 더 싸웠으면 마초를 사로잡을 수 있었는데 형님께서는 공연한 짓을 하셨습니다.”

장비가 땀을 닦으며 투덜대었다.

다음 날 장비와 마초는 또 싸움을 벌였다. 그 다음 날도 또 맞섰다. 이렇게 닷새를 계속 싸웠으나 여전히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마침내 공명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한중으로 염탐을 나갔던 황풍이 돌아온 것이다.

―군사님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황풍은 한중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보고했다.

공명은 곧 유비를 찾아갔다. 마침 유비도 공명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잘 오시었소. 마초는 참으로 훌륭한 장수요. 어떻게 하면 그를 내 사람
으로 만들 수 있겠소?”

공명이 빙긋 웃으며 비로소 자신의 계책을 밝혔다.

“듣자 하니 한중의 장로는 한령왕(漢寧王)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그 모사 양송(楊松)은 뇌물을 좋아하는 자라 합니다. 비밀히 양송에게 사람을 보내 뇌물을 듬뿍 안겨준 후 장로로 하여금 마초를 의심케 하면 마초는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때 다시 사람을 보내 마초를 회유하면 쉽게 주공에게로 넘어올 것입니다.”

유비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손건이라면 능히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유비는 즉시 손건을 불러 공명의 지시를 받게 했다.

이튿날, 손건은 몰래 가맹관을 빠져나갔다. 수레에 금은보화를 잔뜩 실었다. 품속에는 유비의 친서가 들어 있었다.

금은보화가 실린 수레를 보자 양송은 입이 벌어졌다. 그는 양백의 형이기도 했다. 마초를 제거할 뜻을 품고 있었다. 손건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즉시 손건을 데리고 장로에게로 갔다. 장로는 유비의 친서를 받아들었다.

―한령왕에 오르게 해주겠습니다. 가맹관의 마초 군을 철수해주십시오.

장로는 의심의 눈길로 손건을 내려다보았다.

“유현덕의 지위는 겨우 좌장군에 불과하오. 그런 그가 어찌 나를 한령왕이 되게 할 수 있단 말이오?”

양송이 손건 대신 대답했다.

“유현덕은 천자의 황숙입니다. 그 정도쯤은 황제께 주청할 수 있습니다.”

“알겠소. 유현덕의 제안을 수락하겠소.”

장로는 즉시 마초에게 사람을 보내 가맹관에서 철수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양송은 사람을 풀어 한중 지역에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마초는 회군하는 즉시 딴 마음을 먹고 한중을 공격할 것이다.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놀란 것은 장로였다. 그는 곧 양송을 불러 물었다.

“마초가 역심을 품은 모양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양송이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마초는 진작부터 주공을 섬길 마음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공의 아우 되시는 장위(張衛)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관문을 굳게 지키고 마초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장로는 양송이 시키는 대로 장위에게 군사를 내주어 요소마다 굳게 방비하게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곤란한 것은 마초뿐이었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를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하던가.


공명의 선택 (258)…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10)


―성공이다.

공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비를 찾아가 말했다.

“마초는 그물에 갇힌 물고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건져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를 보내면 좋겠소?”

“마초는 큰 고기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건져올리기조차 힘듭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유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군사께서는 나의 팔다리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함부로 적진에 보낼 수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되오.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여느 때와 달리 유비는 단호했다. 방통을 잃은 바 있는 유비였다. 만일 자신이 더 강경했더라면 방통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공명만은 안 된다.’

이 일을 놓고 유비와 공명이 한창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데 면죽성에서 사자가 도착했다.

“조자룡 장군께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느닷없는 편지에 유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편지를 뜯어 읽어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유장의 막료였던 또 한 명의 인재가 유비에게 투항을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

“밖에서 주공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셔오너라.”

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들어왔다. 눈빛이 강렬했다. 입술은 얇고 붉었다. 일매지게 다문 모습이 여간 다부지고 날카로워보이지 않았다.

“이회(李恢)라고 합니다.”

자는 덕앙(德昻), 건원군 유원(兪元) 태생이다. 유장이 유비를 맞이하기 위해 부성으로 향하려 할 때 황권과 함께 만류하다가 파직을 당한 인물이었다.

유비도, 공명도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공명이 은근히 이회에게 물었다.

“공은 유익주에게 유황숙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유황숙에게 오시려 하는 게요?”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회는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공명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옛말에 슬기로운 새는 나무를 가려 둥지를 틀고, 어진 신하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전에 유장에게 권한 것은 그가 주인이었기 때문이었으나 그는 어리석게도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패망할 것입니다. 썩어 잘려나갈 나뭇가지에 어찌 둥지를 틀 수 있겠습니까. 이에 비해 유황숙께서는 어질고 덕스러운 명성이 촉 중에 자자합니다. 반드시 튼튼한 나뭇가지가 될 것이라 믿었기에 이렇게 의지하러 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득실만을 좇는 현실론자의 변명 같았으나, 이상하게도 이회의 말이 공명에게는 조금도 얄팍하게 들리지 않았다.

“좋은 말씀이오. 선생께서 이제 우리 주공을 찾아왔으니 반드시 유익한 계책을 마련해오셨을 줄 압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어릴 적부터 숙부 제갈현에게 가르침을 받아온 공명 역시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선물 보따리를 요구했다.

이회는 잠시 유비와 공명을 바라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듣자 하니, 지금 마초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모양입니다. 옛날에 제가 농서(  西)에 있을 때 잠깐 그와 사귄 적이 있습니다. 한 번 마초를 찾아가 항복을 권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공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마치 유비와 공명의 대화 내용을 듣고 오기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목마른 자에게 필요한 것은 한 바가지의 물이 아니던가. 그 제안에 가장 기뻐한 것은 유비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 마초를 달래려던 참이었소. 잘 되었습니다. 선생은 마초를 어떻게 달랠 작정이시오?”

이회가 곧 속삭이는 말로 유비와 공명에게 계책을 들려주었다. 좀처럼 기쁨을 내색하지 않는 공명이 무릎까지 쳐가며 좋아했다.

“선생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오.”

“그러면 지금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유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서 이회는 마초의 진영으로 향했다.


공명의 선택 (259)…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11)


‘믿을 자가 하나도 없다.’

그 무렵, 마초는 부쩍 신경질적이었다. 한령 태수 장로의 회군 명령은 마초를 어리둥절케 했다. 이제 막 유비 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려던 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회군이라니?’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회군할 길마저 막혀버렸다는 점이었다. 장로의 아우 장위가 한중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철통같이 막고 길을 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째서?

마초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역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마대가 군사들 사이에 나도는 풍문을 마초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누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냐?

―누구긴 누굽니까? 형님이지요.

―내가?

마초는 눈을 크게 뜬 채 어이없어하였다.

갈 곳을 잃었다. 내친김에 독립하여 유비 군을 무찌르고 서천을 차지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선뜻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하나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장비―.

무시무시한 장수였다. 아니, 훌륭한 장수였다. 닷새를 연속해서 싸웠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평생 처음 만나보는 호적수였다.

“관우는 더 뛰어난 장수라고 합니다.”

마대가 옆에서 유비 군의 장수들을 추어올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이라기보다는 감탄의 눈길이었다. 한 번 장비에게 혼쭐이 난 마대는 출전하기를 꺼렸다.

“관운장에 대해서는 나도 소문을 들었지.”

마초가 중얼거렸다.

“유현덕은 덕스러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믿을 자는 아무도 없네. 모두들 가식과 위선의 껍데기를 뒤
집어썼을 뿐이지.”

조조도, 장로도, 유장도, 유비도 다 똑같은 인물이라고 단정내리고 있는 마초였다. 자조(自嘲)와 회한의 웃음을 흘렸다. 그 때 군막을 지키는 군사가 들어와 보고했다.

“유비 진영에서 이회라는 사람이 찾아와 장군을 뵙겠다고 합니다.”

마초는 이회의 얼굴을 금방 떠올렸다. 유장 밑에서 독우 벼슬을 하던 옛 친구가 아니던가. 유비를 영접하려던 유장을 만류하다가 노여움을 사 파직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유비 진영이라고 했더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투항한 모양이로구나. 이회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 여기 온 것도 틀림없이 나를 달래려는 목적에서일 게다.”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마대가 물었다.

“어쩌긴? 해치워버려야지. 너는 무장 군사 20명을 데리고 장막 뒤에 숨어 있거라. 내가 신호를 하거든 단숨에 달려나와 칼로 찍어 목을 베도록 하라.”

“유비는 인덕이 높은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신중히 생각하시어 행동하십시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나도 일단은 이회의 말을 들어볼 작정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마대가 군사 20명을 데리고 장막 뒤에 숨자 마초는 이회를 들어오게 했다.

호랑이굴이라면 호랑이굴이었다. 그런데도 이회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군막 안으로 들어와 마초의 맞은편 의자에 꼿꼿이 앉았다.

“마맹기(孟起=마초의 자)는 그 동안 잘 있었소?”

이회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마초는 냉랭했다. 관옥같이 흰 얼굴에 차가운 위엄이 서렸다. 거만하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곳에 왔는가?”

그러자 이회도 말투를 바꾸어 거만하게 대답했다.

“내 오늘 그대를 위해 특별히 세객(說客)이 되어 왔노라!”

마초의 누에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내 칼집 속에서는 새로 갈아넣은 서리 같은 보검이 울고 있다. 네 말이 조금이라도 이치에 어긋나면 이 칼로 네 목을 베어버리겠다.”

으름장이었으나 이회는 오히려 고개를 젖혀가며 껄껄껄 웃었다.

“하하하……. 우습구나, 맹기여. 오히려 화가 코밑에 닥친 것은 그대이건만, 누구의 목을 벤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인가. 내 목을 베기 전에 먼저 그대의 목이나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하시게.”

“나에게 화가 닥쳤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해가 한낮이 넘으면 기울어지고, 달도 차면 이지러지는 법이네. 그대는 한낮의 해인가, 기울어지는 해인가?”

“…….”

“지금 그대는 조조와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간이 되었고, 한중에 와서는 양송·양백 형제 하나 제거하지 못해 장로에게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아닌가.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대가 갈 곳은 없네. 이러고도 어찌 남의 목 운운한단 말인가. 그런 큰소리는 이제 통하지 않네. 천하 사람들이 웃을 것일세.”

독설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공명의 선택 (260)…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12)


패장은 말이 필요없다. 이회의 입에서 자신의 신상 얘기가 나올 때부터 기세가 꺾인 마초였다. 그는 이제 이회를 윽박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풀 꺾였다. 마초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대 말이 옳소이다. 나는 이제 갈 곳이 없소.”

“내 말이 옳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장막 뒤에 매복한 무장 군사들을 물리치지 않는가?”

마초는 깜짝 놀랐다.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가득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매복 군사들을 꾸짖어 물리쳤다.

그제야 이회도 얼굴빛을 부드럽게 바꾸며 은밀한 어조로 본론을 꺼냈다.

“유황숙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오. 나는 이 사람이 성공할 것이라 단언하오. 내가 유장을 버리고 유황숙을 선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외다. 그대는 어찌하여 천하에 용맹을 떨치면서도 장로 같은 자에게 의지하여 수모를 당하고 있소? 당장에 어둠을 버리고 밝은 길을 찾아 나서시오. 만일 그대가 유황숙에게로 간다면 이는 위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길이요, 아래로는 일신의 공명(功名)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오.”

이회의 말에 마초는 캄캄하던 눈앞이 일시에 환해지는 것 같았다.

―살 길을 찾았다.

이런 마음이었다.

“내가 어찌해야 좋소?”

이제는 매달리듯 물었다.

“당장에 양백을 불러 목을 베고 나와 함께 유황숙에게로 가면 되오. 유황숙께서는 이미 그대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소이다.”

“알겠소. 그대 말대로 하리다.”

마초는 곧 사람을 시켜 양백을 불러오게 했다. 양백이 들어오는 순간 마초의 보검이 빛을 뿜었다. 양백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목이 잘려 저세상으로 갔다.

이어 그는 마대와 함께 군사를 몰아 가맹관으로 향했다.

유비가 관 앞에까지 나와 마초를 맞이했다. 마초는 감격하여 유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초는 이제 밝은 주인을 만났습니다. 마치 안개를 헤치고 밝은 햇살을 보는 듯합니다.”

유비 옆에 서 있던 공명이 그런 마초를 빙긋 웃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유비 군은 다시 이동했다. 목적지는 성도성―.

가맹관에는 계속 맹달과 곽준을 남겨놓았다. 장로의 침공에 대비해서였다.
면죽성에서 조운, 황충과 합류했다. 공명은 마초를 불러 그들에게 인사시켰다. 장비는 이미 마초와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황충이오.”

“조운이외다.”

마초의 입에서는 아―, 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두 사람 모두 천하에 용맹을 떨치고 있는 맹장들이 아니던가.

그 때 마침 유장의 부하 장수 유준(劉晙)과 마한(馬漢)이 군사를 거느리고 면죽성으로 쳐들어왔다. 유비가 여전히 가맹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서였다. 마초와 인사를 나누던 조운이 몸을 일으켰다.

“마맹기는 잠깐만 기다리시오.”

장비와 황충, 마초 등은 정청에 앉아 계속해서 서로간에 경험담을 얘기했다. 마초가 농서 땅의 강족에 대해서 한창 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 조운이 다시 돌아왔다. 나간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두 손에 두 개의 목이 들려져 있지 않은가. 바로 촉장 유준과 마한의 목이었다.

“귀환하신 주공에게 바칠 선물이외다.”

조운이 호탕하게 웃었다. 조운의 그 같은 솜씨에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마초였다. 조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뛰어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마초를 향해 공명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떻소, 마맹기께서도 주공을 위해 좋은 선물을 바칠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솜씨를 자랑해보고 싶었던 마초였다.

“영만 내리십시오. 당장에 성도성을 함락해 바쳐올리겠습니다.”

“굳이 칼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무엇입니까?”

“내일 아침 군사를 몰고 성도성 앞으로 나가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고 돌아오십시오.”

공명의 지시 사항은 간단했다. 마초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그뿐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장이 구원군인 줄 알고 성문을 열어주어도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저 성 아래서 항복만 권하십시오. 그것이 장군이 주공께 드리는 가장 값진 선물일 것입니다.”

마초는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주공께서는 피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도성 백성들의 마음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공명의 마음이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보탤 것이 있다면 공명은 성도성 점령 후의 다스림을 계산에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명의 선택 (261)…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13)


군사 행동으로 유장을 굴복시키면 민심을 다스리는 데만 엄청난 시간을 소비할 것이 분명했다.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10년 넘도록 반유비파의 저항에 부딪칠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이다. 어쩌면 조조나 손권의 공격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붕괴될지 모른다.

하지만 항복 형식이라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우선 많은 관리들을 그대로 부릴 수가 있다. 반유비파의 저항도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다. 2, 3년이면 내부를 안정시킬 수가 있다. 그래야 조조나 손권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충분히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삼분의 계’는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 천하 통일이 아니겠는가. 전쟁이 없는 땅,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땅―공명의 꿈이었다.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있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넘겨받는 형식이어야 한다.
이러한 공명의 깊은 마음을 마초가 어찌 알랴마는, 무혈입성을 원하고 있는 공명의 말만은 알아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초는 이미 감복하고 있었다. 부신 눈으로 공명을 쳐다보았다.

다음 날이었다.

마초는 공명이 시킨 대로 군사를 몰고 성도성을 향해 달려갔다.

―정서장군 마초.

은색의 기치를 앞세웠다.

여전히 사자 모양의 투구에 은빛 갑옷을 입었다. 흰색 전포가 바람에 휘날렸다. 멀리서 보아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마초 특유의 무구(武具)였다.

성도성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도 그 기치와 복장을 알아보았다.

―구원군이다. 마초의 구원군이 성도를 돕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성도에서는 아직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구원군이 온다는 보고에 유장은 친히 성문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마초였다.

“성문을 열라!”

유장이 영를 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성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마초는 성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익주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마초가 말 위에 앉아 성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나 여기 있소. 말씀해보시오.”

유장이 성벽 위로 상체를 내밀었다. 마초가 채찍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나는 본시 장로의 군사를 빌려 익주를 구하려고 이 곳으로 왔소이다만, 누가 알았겠소. 장로는 양송의 참언만 믿고 도리어 나를 해치려 들었소. 그래서 나는 유황숙에게 항복을 했소이다. 유익주께서도 이제 그만 마음을 정리하시고 항복하시는 것이 어떻소? 죄없는 생령들이 불쌍하지도 않소? 내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 성을 칠 수도 있으나 유황숙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받들어 차마 그렇게는 하지 않겠소. 잘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시오.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

그러고는 힁허케 말머리를 돌려 면죽성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악―!”

마초가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유장은 한 모금의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혼절이었다. 좌우의 막료들이 급히 그를 업어다 자리에 뉘었다.
밤이 되어서야 유장은 깨어났다. 그는 겨우 일어나 모든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오랫동안 망설였던 마음 속의 뜻을 막료들에게 밝혔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밝지 못해 생겨난 일이오. 하지만 이제 와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성문을 열고 항복해 죄없는 생령들의 목숨이나 구할까 하오.”

숙연했다. 울음을 터뜨리는 자도 있었고, 탄식을 내뱉는 자도 있었다. 그 때 한 사람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 안에는 아직도 3만 군사가 있고, 식량과 마초는 일 년을 족히 버틸 수 있습니다. 항복할 까닭이 없습니다.”

익주 태수 동화였다. 한중의 장로에게 구원을 청하자고 제안했던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유장의 항복 결심을 굳히는 결정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장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동화를 내려다보며 처연하게 말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파촉을 다스린 지 어언 20년이 넘었소. 하지만 그 동안 백성들에게 이렇다 할 은덕 한 번 베풀지 못하였소. 게다가 지금은 유비와의 3년간에 걸친 싸움 때문에 백성들의 피와 살이 들판을 덮고 있으니, 이 모두가 나의 부덕한 소치이외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일뿐이오. 그대들은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시오.”

유장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듣고 있던 막료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제는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밤은 깊어갔다.


공명의 선택 (262)…제22장 서천에 뜨는 해 (14)


‘마지막 순서만 남았다.’

공명은 불을 밝힌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항복 권고 사절단을 보내야 하지 않겠소?

마초가 돌아온 직후 유비는 이렇게 물었다. 사실은 명령이나 다름없는 물음이었다.

―적임자를 생각 중입니다.

쉬운 듯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유비의 덕스러움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 점령군이었다. 거만하기가 쉽다. 그렇다고 온유하다고만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얕보일 수가 있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협상 과정에서 가해지는 위협도 생각해두어야 한다. 비굴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명단의 이름을 훑어내려가던 공명의 눈길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간옹(簡雍)―. 자는 헌화(憲和)이고, 유비와 같은 탁군 태생이다. 젊었을 때부터 유비와 교류하며 뜻을 같이했다.

특별한 재능은 지니고 있지 않다. 말재간도 뛰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면 좋아한다. 초대면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유비는 자주 그를 사자로 기용했다. 그가 나서면 결과는 언제나 좋았다.

서천으로 들어와 부성에 머물 때도 그러했다. 1백여 일을 그 곳에 머물며 잔치를 벌이는 동안 유비는 자주 간옹을 형주 측의 대표로 내세웠고, 유장 역시 내내 간옹만 찾았다고 했다.

행동거지는 단정치가 못한 편이었다. 오만하고 남에게 구애됨이 없는 성품이었다. 유비 앞에서도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 등 단정·위엄스런 기풍은 전혀 엿볼 수가 없었다. 공명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방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의견을 내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공명 자신도 그가 무례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간옹이라면 능히 이번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공명이 그의 이름에 밑줄을 그었을 때, 멀리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간옹은 유비의 수석사절 자격으로 성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수레를 타고 유장의 관소로 향하는데 구경꾼 중에서 누군가가 칼을 빼어들며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뜻을 얻었다고 감히 우리 촉중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냐?”

간옹이 놀라 내려다보니 광한 면죽현 사람인 진복(秦宓)이었다. 부성에서 사귄 사람으로 그와는 뜻이 잘 맞았다. 학식이 깊고 재능이 뛰어났다. 유장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말단 관리로 부릴 뿐이었다. 반유장파의 한 사람이었다. 칼을 빼어들긴 하였으나 눈은 웃고 있었다.

간옹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해 얼른 수레에서 뛰어내려 진복의 손을 잡았다.

“현형(賢兄)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서천에 새로운 해가 뜨려 하고 있음이오. 부디 잘 다스려주기 바라오.”

“현형도 많이 도와주기 바라오.”

진복의 안내로 간옹은 유장의 관소에 도착했다. 유장은 간옹을 보자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이었다. 간옹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편안하게 유장을 대했다.

“명공께서는 아직도 제 노래를 듣고 싶으십니까?”

부성에 머물 때 유장은 유달리 간옹의 노래를 좋아했다. 간옹은 일부러 그 때 일을 거론한 것이었다.

“좋지요. 오늘 밤에 한 번 들어봅시다.”

“오늘 밤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하루라도 빨리…….”

그러나 유장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들은 곧 인수 절차를 논의했다. 유장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막료들에 대한 처우였다. 간옹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점이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유황숙께서도 익주의 인재들을 원하고 계십니다.”

“고맙소.”

유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간옹은 못 본 척 유장에게 권했다.

“이제 그만 유황숙을 보러 가시지요. 성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출발합시다.”

유장은 익주목의 인수와 모든 문서를 가지고 수레에 올랐다. 특별히 그 옆에 간옹을 태웠다. 아무리 항복한 군주이지만 대단한 파격이었다.

이윽고 유장의 수레가 유비의 진채 앞에 멈추어섰다. 진문이 열리면서 유비가 나타났다. 좌우로 공명과 법정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장비와 조운, 황충, 위연, 마초 등이 시립해 섰다.

유장은 수레에서 내려 유비 앞으로 걸어갔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유장이 유황숙께 익주를 바칩니다.”

유비는 그런 유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오. 우리 함께 익주와 형주를 잘 다스려봅시다.”

서천의 해가 머리 위에서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건안 19년(214년) 5월의 일이었다.

이 때 공명의 나이 34세, 유비는 54세였다.






<공명의 선택> 23장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지고
<공명의 선택> 21장 아아, 봉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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