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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20 20:01:52, Hit : 2696, Vote : 234
 <공명의 선택> 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공명의 선택 (230)…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1)
유비와 방통이 이끄는 서정군의 행진은 순조로웠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자귀, 건평을 지나 백제성에 이르렀을 때 유비는 익주의 유장에게로 답례 사절을 보냈다.

―말씀에 따라 장로를 치러 익주로 들어갑니다. 유장에 대한 예의였으나, 사실은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장의 수하들을 겨냥한 행동이기도 했다. 황권, 왕루, 이회(李恢) 등이 끝까지 유비의 서촉행을 반대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통이 건의했다. 유비도 수긍했다. 다시 사절을 보냈다.

―연도(沿道)가 불안합니다. 회담을 하고 싶습니다.

유장은 창업자라기보다는 계승자였다. 계승자는 힘보다는 덕을 더 갖추어야 했다. 그런데 유장에게는 그 덕이 없었다. 민심의 이반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유언이 지니고 있던 힘도 상당 부분 상실되었다.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파촉의 호족들에게로 분산된 것이다. 유장은 그 힘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러나 호족들의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서로간의 견제가 팽팽했다.

―너희들이 그렇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유장은 이렇게 생각하고 호족들을 견제할 힘을 외부에서 찾기로 했다. 조조에게 힘을 빌리자는 장송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고심 끝에 내린 나름대로의 결단이었다. 장송은 돌아와 조조 대신 유비를 동반자로 천거했다. 유비는 한왕조의 종실이었다. 인의와 덕망을 천하에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파촉을 빼앗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유장으로서는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개혁을 이루리라!

유비 군이 들어오는 대로 호족들의 세력부터 제거해나가리라 결심을 굳혔다.

―유비의 영입을 반대하는 자가 곧 그 대상자들이다.

두 번에 걸친 유비의 사절은 호족들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었다.

“지금 유황숙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서천을 구하러 오시는 중이다. 연도의 주군(州郡)들은 유황숙의 군대를 환영하여 물자와 곡식을 제공하라. 나는 친히 부성( 城)까지 나가 영접하리라.”

이러한 유장의 영이 떨어졌다. 곧 기치창검을 세우고 유비를 맞이하러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막료들에 대한 시험이었다. 황권이 첫번째로 걸려든 대상자였다. 그는 유장의 앞을 가로막고 외쳤다.

“주공께서 친히 마중을 나가시면 반드시 유비에게 화를 당할 것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전에도 장송의 북행을 반대한 바 있는 황권이었다. 그는 벽에 부딪쳐 자신의 머리를 깨면서까지 유장의 부성행을 만류했다. 유장은 그런 황권을 내직에서 내쫓아 광한현(廣漢縣)의 현령에 임명했다. 이번에는 이회가 나섰다. 이회는 건령군(建寧郡) 유원(兪元) 태생으로 독우(督郵) 벼슬을 하고 있었다. 건령에 기반을 잡고 있는 전형적인 지방 호족이었다.

“황권의 말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사지(死地)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현덕은 나의 일가 형님이시다. 어찌 나를 해할 수가 있겠는가?”

유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회를 파직시켰다.

이회에 이어 또 한 사람이 유장의 시험에 걸려들었다. 종사관 왕루였다. 그는 말로 해서는 유장이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묶어 성문 위에 매달린 후 유장에게 글을 보냈다.

주공께서는 이번에 부성에 가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장송의 목을 베고 유비와 단교하여 주공의 기업을 탄탄히 하십시오.

그러나 유장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 글을 찢어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왕루는 탄식했다.

“어허, 다 틀렸구나!”

한마디 부르짖은 후 손에 들고 있던 칼로 동아줄을 끊어버렸다. 왕루의 몸은 허공에서 떨어져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머리가 깨져 즉사했다. 장송은 이러한 소란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반대는 뜻밖으로 거셌으나, 유장의 마음은 이미 굳어 있었다. 이로써 일차 고비는 넘겼다. 그는 곧 편지를 써서 극비리에 유비를 수행하고 있는 법정에게로 보냈다.

유장은 마음을 놓고 있소이다. 부성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유장을 도모하시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좋은 기회요.

부현―. 성도에서 360리 정도 떨어진 작은 고을이다. 성 옆으로 부강이 흐르고 있었다. 유비가 먼저 부현에 당도했다. 부성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부강 상류에 진을 쳤다. 유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법정은 방통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내부는 모두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유장은 방심하고 있습니다. 군대를 동원해 단번에 해치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곳에서 유장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힘 안 들이고 익주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유비에 의해 무산되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곤란하오.”

평생 대의와 명분에 맞지 않는 일은 결코 해본 적이 없는 유비였다.

―그것은 조조 식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취하는 것이 조조였다. 하지만 유비 식은 달랐다.

―스스로 바칠 때까지 기다리자.

서주 때도 그러했고, 형주 때도 그러했다. 아니, 스스로 바치는 것조차 거절했던 유비였다. 그것이 유비가 말하는 인의요, 덕이었다.

“순리란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이오.”

유비의 이러한 말에 방통과 법정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유장은 결코 익주를 스스로 바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망설이다가는 다른 사람만 좋게 할 뿐입니다.”

두 사람은 쥐어짜듯 말했다.

“스스로 바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니오? 익주를 포기하는 수밖에.”

유비 역시 익주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익주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 유비였다. 그래서 이 곳까지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그의 입에서는 포기라는 말이 나왔다. 법정은 몰랐으나 방통은 유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바치도록 상황을 만드는 것이 그대들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쉬운 방법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강요하고 있는 유비였다. 그렇지 않고는 익주를 취한 후에 이 곳 백성들을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땅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원하고 있었다. 방통과 법정은 유비 앞을 물러나왔다.

“어렵군요.”

법정이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공의 방식이오. 어려운 일이지요. 웬만한 기다림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말이오.”

이렇게 말하는 방통의 입에서도, 그러나, 역시 긴 한숨이 흘렀다.

공명의 선택 (231)…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2)
“진정한 영웅이다!”

유장은 감격하고 있었다. 유비와는 두 번 회담을 가졌다. 한 번은 자신의 영내에서였고, 또 한 번은 유비의 진영에서였다. 두 번 모두 유비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전혀 날카로움이라든가 매서움은 엿볼 수가 없었다. 온유하고 편안했다.

―그러면서도 몸을 굽히지 않으면 안 되는 위엄을 풍겨내는 인물.

그는 여전히 유비를 경계하라는 수하들의 진언에 웃음을 띠며 유비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소. 오히려 어질고 의로운 분이라는 느낌이었소. 황권과 왕루 등이 이러한 영웅의 어진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시기와 의심을 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장송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평생 후회하며 지낼 뻔했소이다.”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성도에 있는 장송에게 황금 5백 냥을 상으로 내렸다. 이후 유장의 유비에 대한 환대는 더욱 극진했다. 연일 유비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되었다. 부성 안에 마련된 연회장에서 유비는 유장을 진서장군(鎭西將軍) 겸 익주목으로 추대했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유장은 유비에게 대사마·사예교위의 칭호를 내렸다. 영수 회담의 관례이기도 했지만, 서로간의 직위를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외교상으로는 유장이 유비보다 높은 서열에 올라 있는 형식을 취했다. 유장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일 유비를 불러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다. 그렇게 석 달 가량이 흘러갔다. 이쯤 되면 유장의 막료들도 더 이상 유비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제는 한중을 평정해야 하겠습니다.”

유비가 먼저 서천에 들어온 목적을 되새겼다.

“그렇군요. 부디 장로를 쳐서 북쪽을 편안케 해주십시오.”

유장은 자신이 이끌고 왔던 군사의 일부를 떼어 유비에게 넘겨주었다. 토벌에 필요한 모든 물자와 양곡도 원하는 대로 제공하였다. 며칠 후, 유비는 군마를 정돈하여 부성을 출발해 가맹관으로 떠나갔다. 건안 17년(212년) 봄의 일이었다. 이 때 유비의 나이 52세, 공명은 32세, 방통은 34세였다.

‘사원(士元=방통의 자)과 효직(孝直=법정의 자)이 속깨나 태웠겠군.’

공명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유비는 정기적으로 사자를 보내 서촉에서의 일을 공명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공명은 항상 그보다 먼저 유비의 서정군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황풍이 지휘하는 그물망 같은 운조 조직을 통해서였다.

―부성에서 연일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았을 때 공명은 대뜸 유비의 마음을 짐작했다.

‘유장이 스스로 바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로군.’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유장이 익주를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형주성을 차지하기까지 내내 곁에서 유비를 지켜본 공명이었다. 그는 유비의 사람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그 마음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결코 명분이 생길 때까지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었다. 부성에서 머무는 석 달 동안 방통과 법정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유비 몰래 유장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공 또한 방사원과 법효직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을 테지.’

유비가 노리는 바는 대성공이라고 봐야 했다. 유장은 이제 조금도 유비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유장 측의 실수뿐이다.

‘유장이 아니더라도 그 측근에 의한 실수―.’

유비는 그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공명의 예측은 정확했다.

―주공께서는 가맹관에 들어섰지만 전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장로 토벌을 위해 서촉으로 들어간 유비였다. 그런데 군사 훈련은커녕 민심 수습에만 전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공다우신 처신이군.”

공명은 빙긋 웃었다. 가맹관 가까이 백수관(白水關)이라는 곳이 있었다. 백수관을 지키는 수비장수는 고패(高沛)와 양회(楊懷)였다. 그들은 장로를 토벌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유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수상쩍다.

―군량만 축내고 있다.

이러한 보고는 성도의 유장에게도 전해졌다. 반유비파의 여론이 거세졌다. 유장도 유비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비는 전혀 장로를 공격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방사원도 주공의 마음을 짐작하였으리라.’

군사를 돌려 성도성을 칠 명분과 때만 기다리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조에 대한 움직임도 황풍과 그 수하들에 의해 수시로 공명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32)…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3)
―황제께서 조조에게 찬배불명(贊拜不名), 입조불추(入朝不趨), 검리상전(劍履上殿)의 특전을 내렸다 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보통 천자는 신하를 대할 때 그 신하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천자의 권위이다. 그런데 작위가 높거나 공이 많은 신하를 대할 때는 공경하는 의미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나 벼슬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찬배불명이다. 이제 헌제는 조조를 부를 때 ‘맹덕(孟德)’ 혹은 ‘승상’이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신하는 천자 앞에서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추(趨=종종걸음)이다. 모든 신하는 조정에 들어서게 되면 종종걸음을 해야 한다. 예부터 전해오는 관례이다. 그런데 이 특전을 받으면 종종걸음을 치지 않아도 되었다. 조조는 이제 궁 안에서도 느긋하게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신하가 천자에게 지켜야 할 예는 또 있다. 전각에 오를 때는 신발을 벗고 칼을 풀어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검리상전의 특전을 얻으면 신발을 신은 채로 칼을 차고 천자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건국공신인 소하(蕭何)에게 내렸던 특전들이다. 이만저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니다. 이 무렵의 조조의 위세와 권력은 가히 이와 같았다. 그는 이제 마음대로 천자 곁에 서서 만조백관들을 호령하게 되었다. 헌제는 더욱 더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조조라면 능히 그러한 특전을 받아들일 인물이리라.”

조조의 안하무인에 대한 공명의 비꼼이었다.

‘어쩌면 조조는 찬탈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릉성에 앉아 공명은 막연히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조조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장사 벼슬을 하고 있는 동소(董昭)가 그 선봉에 섰다.

―조 승상을 위공(魏公)으로 승진시키고 구석(九錫)을 내려 한실에 기여한 공훈을 표창해야 합니다.

구석은 또 무엇이던가. 이 역시 천자가 공덕이 큰 제후나 신하들에게 내리는 특전이다. 그 첫째가 수레와 말이다. 행차할 때는 언제나 두 대의 수레가 동시에 움직인다. 큰 수레와 작은 수레다. 큰 수레에는 제후를 태우고 작은 수레에는 무장을 한 병사들을 태운다. 요즘으로 치면 호위 전차(戰車)인 셈이다. 그 수레를 끄는 말들도 평범하지가 않다. 검은 소 두 필과 누런 말 여덟 필이어야 한다. 천자의 행차와 비슷한 격식이다.

둘째는 의복이다. 곤룡포에 면류관을 쓴다. 신도 붉은색이다. 왕의 예복이다.

셋째는 악현(樂縣)이다.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音曲)을 듣고 가무(歌舞)를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일무(佾舞)라고도 한다. 물론 황제나 왕 앞에서와 같은 격식이다. 천자 앞에서는 팔일무(八佾舞)를 추고, 왕 앞에서는 육일무(六佾舞)를 춘다.

넷째는 집이다.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에 모두 붉은색을 칠하도록 한다. 주호(朱戶)이다. 일반 신하들의 집에서는 붉은색을 금한다.

다섯째는 납폐(納陛)이다. 검리상전과 유사한 것으로 궁중에서 신발을 신고 전상(殿上)에 오르내릴 수 있게 하는 특전이다.

여섯째는 호분(虎賁)이다. 군대의 명칭으로 늘 곁을 따라다니며 호위한다. 3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째는 부월(斧鉞)이다. 왕의 의장 행사에 쓰이는 도끼이다.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특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덟째는 궁시(弓矢)이다. 붉은 활 한 벌과 붉은 화살 백 개, 그리고 검은 활 열 벌과 화살 3천 개다. 언제든지 역적을 칠 수 있는 권한을 나타낸다.

아홉째는 거창규찬(圭瓚)이다. 거창은 제사 때 쓰이는 검은 수수로 빚은 술이다. 규찬은 옥으로 만든 제기(祭器)이다. 둘 다 종묘 제례 때 사용한다.

한결같이 천자와 맞먹는 격식으로 여간 큰 공을 세우지 않는 한 감히 생각해볼 수 없는 특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소 등에 의해 이러한 여론이 조성되자 조조는 흐뭇했다. 모르는 척 일이 추진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뜻밖의 인물이 그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순욱이었다.

―안 됩니다. 승상께서는 한평생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어 무너져가는 한실을 붙들었습니다.

마땅히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켜 늘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구석 같은 특전으로 위세를 뽐내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순욱이 조조를 도운 것은 한왕실의 부흥을 위해서였다. 결코 조조 개인을 위해 재주와 지략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조가 구석 등을 탐내며 엉뚱한 욕심을 보이자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그런가? 그대의 말을 따르리라.

조조는 순순히 순욱의 말을 받아들였다. 헌제 앞으로 나가 위공 승진과 구석 받는 일을 사양했다. 모두들 조조의 아량과 대범함에 탄복했다. 그러나 공명만은 고개를 내저었다.

“순욱은 반드시 조조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이다.”

공명의 예측대로였다. 조조는 이후로 순욱을 몹시 못마땅히 여기며 냉랭하게 대했다. 조조는 집요한 사람이었다. 한 번 밉보이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그 해 10월, 조조는 제2차 동오 정벌에 나섰다. 40만 대군을 몰고 유수구(濡須口)로 내려갔다. 장강 동편이었다. 이 때 순욱도 조조의 명에 따라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조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수춘(壽春)을 지날 무렵, 병을 핑계로 그 곳에 남았다. 아니나다를까. 조조는 수춘성을 떠나면서 순욱에게 물건 하나를 보냈다.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씀을 듣고 승상께서 잡수시라고 보냈습니다.”

심부름꾼의 말이었다. 순욱은 보자기를 풀었다. 음식을 담는 합(盒)이었다. 합 위에는 조조의 친필 편지가 놓여 있었다. 승상 조조가 그대를 위해 보내노라.

공명의 선택 (233)…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4)
순욱은 합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릇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순욱은 누구보다도 조조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이것은……?’

죽으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욱은 조조의 차가운 눈길을 보는 듯했다. 씁쓸히 웃었다. 미련은 없었다.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그 동안 틈나는 대로 적어온 비망록(備忘錄)을 모두 꺼내어 불에 태웠다. 앞으로의 천하 경영에 대한 비책을 적은 글들이었다. 불꽃이 일었다. 천하가 타고 있음이었다. 그 불꽃을 바라보며 순욱은 술잔에 독약을 풀었다. 순욱은 그렇게 죽어갔다. 나이 오십이었다.

“아깝구나!”

공명은 탄식했다. 또 한 사람의 기재가 사라져갔다. 순욱의 죽음에 대한 추모라기보다는 주인을 잘못 선택한 그의 안목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곧 이어 유수구 전투에 대한 결과가 날아들었다.

―조조 군의 대승. 손권 측의 도독 공손양(公孫陽)을 사로잡고 귀환.

두 달 간의 전투였다. 조조는 바람처럼 내려갔다가 바람처럼 올라왔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건안 18년(213년)이었다. 그 해 조조는 결국 위공(魏公)에 올랐다. 나라를 갖게 된 것이다. 국호는 위(魏)나라였다. 사직과 종묘도 세웠다. 구석도 받았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었다. 그의 딸들은 모두 헌제에게 시집을 갔다. 둘째딸은 황후에 올랐다. 조조 나이 59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겠지요?”

공명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강릉성이었다. 앞에 관우가 앉아 있었다. 그에 대한 공명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관우는 방금 형주의 제일 도시인 양양성을 점령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조조가 임명한 양양 태수 악진은 번성으로 쫓겨나고 유비가 임명한 양양 태수 관우가 명실공히 그 주인이 된 것이다. 조조의 관심이 동오 정벌에 쏠려 있는 틈을 이용한 성과였다.

“당연합니다. 저는 조조를 잘 알고 있지요.”

관우 또한 마음 속으로 공명에 대해 승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양성 함락에 대한 기쁨보다는 향후 정세에 대해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3차, 4차 동오 정벌이 예상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오의 손권이 우리 측에 구원을 요청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묵살하실 건가요?”

관우가 물었다.

“묵살한다면 동맹군이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대답하는 공명의 눈동자는, 그러나, 유난히 반짝거렸다. 무엇인가를 또 궁리하고 있다는 징표였다. 관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구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지 않습니까?”

“형주의 군사로는 힘들지요. 하지만 서촉의 군사가 있질 않습니까?”

“익주를 포기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동오에서 지원 요청이 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요. 적어도 겉으로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지금 주공께서는 가맹관에 머물고 계십니다만, 사실은 이제나 저제나 군대를 돌릴 때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럴 만한 명분이 없습니다. 이럴 때 동오에서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그것처럼 더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관우는 비로소 공명이 말하려는 바를 깨달았다.

“동오를 구원하러 가는 척하면서 익주를 공략한다,는 전략이시로군요.”

“하하하, 바로 보셨습니다. 방사원이 그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를 봉추라고 부를 까닭이 없겠지요. 물론 그에 따른 또 하나의 명분은 거기에서 만들 것입니다만, 이미 분위기는 충분히 익었다고 봅니다.”

이 같은 공명의 분석과 예측에 관우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군사께서는 진정 신인(神人)이십니다.”

“미염공께서도 그런 말을 할 줄 아십니까? 하하하…….”

공명의 웃음소리는 전에 없이 맑았다. 유비의 서정군이 가맹관에 머문 지 2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법정은 극도로 초조했다. 한

중의 장로를 치든, 익주의 유장을 공략하든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언제까지 허송세월만 보낼 것인가.’

그런데도 유비는 여전히 군사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맹 근처의 고을들을 순시하며 민심 추스리기에만 전념했다. 방통도 그러한 유비를 재촉하지 않았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릉의 공명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조조가 제3차 동오 정벌에 나섰습니다. 동오는 우리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 말뿐이었다. 구원군을 파병할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 말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은 유비와 방통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섬광이 일었다.

‘때는 왔다!’

이런 눈빛이었다. 유비가 먼저 고개를 들어 방통을 쳐다보았다.

“방 군사의 생각은 어떠시오?”

방통의 들창코가 오래간만에 벌름거렸다. 긴장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방통은 짧고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회군하시지요.”

두 사람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그게 좋겠지요?”

유비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재삼 확인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유장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당연하신 말씀.”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있었다. 법정만이 의혹과 불안의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후에는……?”

“세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유장의 반응을 보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러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방통이었다.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완료해놓고 있었다. 방통이 생각해놓은 세 가지 방책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상책―정병을 뽑아 밤낮으로 달려 성도성을 급습하는 것이었다. 이 계책은 가장 빠르기는 하나 유장이 유비를 철석같이 믿고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비밀이 새어나간다거나 각 고을에 경계령을 내린다면 오히려 유비 군이 고립무원에 빠질 것이었다. 더욱이 가맹관과 이웃인 백수관에는 고패와 양회가 감시역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진작부터 유비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따돌리기란 유장의 명령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책―형주로 돌아가는 척하면서 먼저 고패와 양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을 방심케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런 후에 부성까지 나가 그 곳에 근거지를 두고 성도를 공략하는 전략이었다. 시일은 다소 걸리겠지만, 무난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유장의 반응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책―일단 파촉에서 완전 철군하여 백제성에 주둔한다. 그 곳에서 형주군과 합류한 다음 다시 성도를 향해 진격하는 계책이었다. 백제는 형주와 익주의 경계 지역에 있는 성이다. 안전하기는 했지만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유장이 유비를 의심하는 마음이 짙을 경우에는 이 계책을 쓸 수밖에 없다

공명의 선택 (234)…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5)

방통으로부터 세 가지 계책을 설명 들은 유비는 곧 성도의 유장에게로 편지를 썼다.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강남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손권은 우리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손권과 나는 혼인으로 맺은 관계입니다. 도와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강하고 우리는 약합니다. 유익주께서 정병 4만 명과 병량 10만 석을 빌려주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정병 4만에 병량 10만 석이면 만만치 않은 군세였다. 그 군세라면 한중의 장로를 쳐도 충분할 전력이었다. 그것을 유비는 유장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성도성은 발칵 뒤집혔다. 장로를 토벌한다고 들어와서는 일 년이 넘도록 버티고 앉은 채 양곡만 축내고 있던 유비였다. 가뜩이나 의심과 반발의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는 때에 자신들과는 전연 상관없는 싸움에 이런 군세를 요구하고 있으니 격동될 만도 하였다.

“당장 유비를 형주로 돌려보내십시오. 그에게 군사와 군량을 빌려주는 것은 섶에 불을 지르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비가 이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은 집 안에 호랑이를 기르고 있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 동안 유비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막료들이 앞을 다투어 진언했다. 유장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유비의 힘을 빌려 북방을 편안케 하고 그 여세를 몰아 호족들의 힘을 누르려 했던 유장이었다. 그런데 유비의 태도를 보니 이미 그것은 물 건너간 계획인 듯했다.

‘실망이다!’

그러나 유비는 적극적으로 한중 토벌에 임하지 않았을 뿐 뚜렷이 문책할 만한 사항이 없었다. 막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군사를 돌이켜 성도를 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랜 갈등 끝에 유장은 마침내 결심했다.

―군사 4천 명과 군량 1만 석을 지원하겠습니다.

유비는 이번 작전의 완벽한 비밀 유지를 위해 성도성의 내응자인 장송에게도 비밀로 붙였다. 유비가 형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장송은 당연히 크게 놀랐다.

‘이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유비를 파촉의 새 주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급히 가맹관의 유비에게로 편지를 썼다.

일전에 제가 드린 진언은 조금도 헛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황숙께서는 어찌하여 성도를 취하지 않고 형주로 돌아가시려고 하십니까. 이 장송은 유황숙의 회군 소식에 낙심천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대로 군사를 움직이십시오.

장송이 편지를 다 썼을 때였다.

“아우는 그 동안 별일 없었는가?”

형 장숙(張肅)이 들어왔다. 장숙은 광한 태수를 지내고 있었다. 반유비파의 한 사람이었다. 이번 유비 문제로 급히 성도에 왔다가 동생인 장송의 집을 방문한 것이었다. 장송은 급했다. 편지를 숨길 틈이 없었다. 급히 소매 속에다 쑤셔넣었다.

“형님께서 웬일이십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색이 변했다. 장숙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어디 아픈가?”

“예, 몸이 조금 불편합니다.”

술상이 나왔다. 장송은 장숙을 대접하기 위해 술잔을 권했다. 그 때 그의 소매 속에서 접힌 종잇조각이 떨어져내렸다. 유비에게로 보내는 편지였다. 그러나 장송도 알지 못했고, 장숙도 무심히 넘어갔다. 밤이 깊어 장숙은 일어났다. 장숙의 시종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편지를 주워들었다. 장숙의 것인 줄 알았다.다음 날 아침, 시종은 장숙에게 그 편지를 바쳤다. 의아하게 여기며 편지를 펼쳐본 장숙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반역이 아닌가.

“내 아우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장숙은 그 화가 자신의 가족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염려했다. 즉각 유장에게로 달려갔다. 유장의 놀라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장송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믿었던 유비가 아니던가. 성도성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비상령이 떨어졌다.

“장송을 잡아다 목을 베라!”

“빨리 백수관을 지키고 있는 고패와 양회에게 유비를 토벌하라 전하라!”

“각 고을의 수령들은 군사를 증원하여 관문을 굳게 지키고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지 못하게끔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성 안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지고 있을 때 한 필의 유성마가 나는 듯이 성도성을 빠져나갔다. 장송과 뜻을 같이하던 심복 부하였다.

공명의 선택 (235)…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6)
  

―군사 4천에 군량 1만 석을 지원하겠습니다.

성도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전달받은 유비는 유장의 마음을 읽었다. 방통을 돌아보며 외치듯 말했다.

“중책이오!”

유장은 유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책의 핵심은 백수관을 지키고 있는 고패와 양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속이느냐였다.

유비와 방통이 계책을 의논하는데 급보가 날아들었다.

―장송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상황은 일각을 다투게 되었다.

“백수관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방통이 급하게 물었다.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파발이 성도성을 떠났을 것입니다.”

유비와 방통은 서둘렀다. 그들은 곧 전군에 명령을 내리고 백수관을 향해 진군했다. 황충을 선봉으로 한 경기병을 먼저 앞세웠다. 가는 동안 방통은 유비의 귀에다 대고 고패와 양회를 제거할 계책을 알려주었다.

백수관 앞에 당도한 유비는 곧 사자를 보냈다.

“우리는 동오의 원군 요청을 받고 형주로 돌아가는 길이오. 작별 인사를 드리려 하오. 두 장군께서는 우리 군중으로 와주시기 바라오.”

고패와 양회는 아직 성도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는 익주를 도와주러 온 용병의 총사령관이다. 그 동안 의심스러운 점이 없진 않았지만, 작별 인사를 한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군사 2백 명에게 술과 고기를 들려 유비 진영으로 향했다.

유비 막사 앞에 이르러 그들은 자진하여 허리의 칼을 풀으려 했다. 그것이 상대 진영의 영수에 대한 예의요 관례였다. 그 때 황충이 나타나서 말했다.

“동맹군끼리 그런 격식을 차릴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장군들은 관문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질 않소이까? 함부로 칼을 풀어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같은 대우에 고패와 양회는 한결 마음을 놓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유비가 방통과 함께 앉아 있다가 공손히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관을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소?”

“유황숙께서 먼 길을 돌아가신다기에 보잘것없으나마 술과 고기를 마련해 배웅하러 왔습니다.”

고패는 말을 마치고 큰 잔에 술을 따라 유비에게 올렸다.

“고맙소이다. 장군들도 드시지요.”

두 사람이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 유비가 다시 말했다. 은밀한 어조였다.

“내 잠시 두 장군께 긴밀히 의논할 일이 있소이다. 수행원들을 물려주시기 바라오.”

고패와 양회는 유비의 청에 따라 호위 무사들을 막사 밖으로 내보냈다.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막 잔을 들려고 하는데 유비가 별안간 큰 소리로 외쳤다.

“뭣들 하느냐? 이 두 도적놈을 잡아라!”

유비의 호령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막사 뒤에 숨어 있던 관평과 유봉이 칼을 들고 뛰어나왔다. 고패와 양회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는 사이, 관평과 유봉은 날랜 몸놀림으로 두 장수의 칼을 빼앗고 동아줄로 몸을 묶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양회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유익주와 유황숙 사이를 이간질하였느냐?”

이번에는 방통이 나서서 꾸짖듯 말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서천을 위해 먼 길을 와 한중을 토벌하려는데, 너희들은 오히려 유익주에게 우리가 성도를 칠 것이라고 이간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단 말이냐. 뿐만 아니라 너희들은 우리 주공을 해칠 마음을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찌 여기까지 칼을 차고 들어왔단 말인가?”

“그것은 황충 장군께서……?”

“시끄럽다. 여봐라, 당장 저 자들의 목을 베어라!”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방통의 계책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방통의 눈짓에 유비 측의 무장 군사들은 두 사람을 밖으로 끌고 나가 목을 베었다.

그 사이, 밖에 있던 황충은 2백 명의 촉 병사들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러고는 곧바로 백수관으로 쳐들어가 단숨에 그 곳을 점령하였다.

공명의 선택 (236)…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7)
  

유비와 방통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문제는 부성이었다. 부성은 요충지이다. 반드시 그 곳을 손에 넣어 근거지로 삼아야 했다. 그래야 이번 작전이 완전히 성공하는 것이다. 백수관에서 부성까지는 백 리가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들은 신속히 움직였다. 성도를 떠난 파발마가 부성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그 곳에 도착해야 했다. 백수관을 지키는 수비병들을 앞세웠다. 부성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와서 방통은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부성 성문 앞으로 나가 문을 열라고 하여라.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무거운 상을 내리겠다.”

백수관의 병사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았다. 한결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들은 곧 부성 성문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우리들은 백수관을 지키는 고 장군과 양 장군의 부하들이다.”

성문 위에서 수문장이 머리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백수관의 군사들이었다.

성도를 떠난 파발마는 아직 부성에 도착하지 않았다. 유비 군의 동태를 알 리 없었다. 더욱이 백수관 수비대의 가족은 모두 부성에 살고 있었다. 모반이나 배신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성 옆의 좌우 골짜기에서 유비의 군사들이 새카맣게 몰려나와 성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창졸간의 일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부성 안의 군사들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항복했다.

급보를 알리는 성도의 유성마가 부성에 당도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는 멋모르고 성문을 두드렸다가 위연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이로써 유비는 군사 하나 잃지 않고 백수관과 부성을 점령하였다. 서촉 정벌의 시작이었다.

그 날 밤, 유비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럴 만도 했다. 서천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험한 관문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과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형주를 떠난 이후 2년 가까이 기다려왔던 일이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장에서였다. 법정을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 자리는 없었을 것이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법정의 공을 치하했다.

방통은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황충과 위연 등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마시긴 하였으나 별로 유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군사께서는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충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근심이라기보다는…… 오늘의 이 계책은 그다지 밝은 방법이 아니었소.”

방통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사께서 계획해낸 책략이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역시 도의에는 어긋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책이십니까?”

“부끄러움이겠지요.”

그 때 유비가 방통 곁으로 다가와 술잔을 건네며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군사의 노고가 컸소. 참으로 유쾌한 밤이외다. 아마도 오늘은 나의 일생 중 가장 즐거운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유비는 이미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방통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날 방통은 유난히 감상적이었다. 자신이 낸 야비한 계책에 상당히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퉁명한 어조로 유비를 나무랐다.

“남의 나라를 빼앗고 즐거워하는 것은 인자(仁者)의 군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의 계책은 정도(正道)가 아니었습니다. 편법을 성공시키고 나서 즐거워하는 자는 군자라 할 수 없습니다.”

유비는 취중에도 그 말이 자신을 비꼬고 있는 말임을 알았다. 별안간 들고 있던 술잔을 팽개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무슨 소리를 하는가? 내가 알기로 옛날 주무왕(周武王)도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쳐부순 후 음악을 지어 그 공을 기렸다고 하였다. 네 말대로라면 무왕도 인자의 군대가 아니질 않은가?”

“오늘의 일과 주무왕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끄럽다. 그물로 잡든 화살로 잡든 새만 잡으면 그만이지, 그 방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알겠는가, 이 멍텅구리 선비야! 그런 말을 하려거든 내 눈앞에서 썩 꺼져라.”

아무리 취중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심한 폭언이었다. 연회장은 삽시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들 유비와 방통의 눈치만 살폈다. 자신 때문에 흥겨운 분위기가 깨진 것을 알았음인가, 아니면 취한 사람과 입씨름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인가. 혹은 유비에 대한 실망 때문인가. 방통은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나가버렸다. 유비도 시종들에게 부축되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유비는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어쩐지 기분이 몹시 좋질 않았다. 시종을 불러 물었다.

“어젯밤에는 내가 술에 많이 취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가?”

시종은 망설이다가 방통과의 일을 사실대로 얘기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난 유비는 크게 후회했다.

“그의 말이 백 번 옳은데, 내가 이 무슨 추태를 부렸단 말인가.”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정청으로 나가 방통을 불러 정중하게 사죄했다.

“어제는 내가 너무 술에 취해 있었소. 듣자 하니 내가 군사께 심한 말을 한 모양인데, 부디 마음에 접어두지 말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오.”

“주공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저 역시 주공께 실수를 하였습니다. 오히려 주공께서 저를 용서해주셔야 합니다.”

방통이 웃으며 말했다. 비로소 유비는 마음이 놓이는 듯 얼굴에 웃음을 띠며 방통의 넓은 마음을 칭찬했다.

“과연 군사께서는 대인(大人)이십니다.”


공명의 선택 (237)…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8)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나.”

부성 함락 소식에 유장은 분노하는 마음보다는 탄식과 절망에 사로잡혔다.

어릴 적부터 강함을 강요받으며 자라온 유장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강함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인과 덕이야말로 강함을 누를 수 있는 최대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고수했다.

그러나 익주목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현실은 그의 그러한 생각을 나약함으로 전락시켰다. 허도의 조조가, 한중의 장로가, 그리고 마침내는 형주의 유비마저 현실의 냉엄함을 깨우쳐준 것이다.

어제의 동맹군인 유비가 하룻밤 사이에 적군으로 돌변하여 성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눈앞의 일이었다.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복이냐, 항전이냐!

성도의 막료들은 한결같이 항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참모 정탁(鄭度)은 극단적인 전략을 내놓았다.

“성을 높이 쌓고 들판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워버리십시오. 그러면 유비는 백 일이 안 돼 스스로 퇴각할 것입니다.”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책략이었다. 파서(巴西)와 재동(梓潼)의 백성들을 모조리 부수 서쪽으로 이주시킨다. 그러고는 각 고을의 식량과 들판의 곡식들을 일제히 불태워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유비가 싸움을 청해도 응하지 않고 높은 성벽에 의지해 지키기만 한다. 이렇게 되면 유비는 식량난에 허덕일 것이요, 1백 일이 못 되어 형주로 철군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 때 공격하면 유비를 사로잡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옥토를 폐허화시킴으로써 유비를 무력화한다―무서운 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유비의 다음 목표는 낙성(  城)이었다. 낙성은 성도성을 치기 위해 반드시 선점해두어야 하는 요충지였다. 방통·법정 등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는 중에 성도의 첩자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정탁이란 사람이 견벽청야의 계책을 올렸다고 합니다.”

순간, 유비의 얼굴빛이 변했다.

이제 막 부성에 근거지를 마련했을 뿐이었다. 군량과 마초(馬草)가 충분할 리 없었다. 가지고 있는 군량으로는 두 달도 채 버틸 수가 없다. 들녘에 널린 곡식에 의존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들녘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면 유비 군으로서는 여간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서천을 떠도는 외로운 혼백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유비가 낙심하여 탄식했다. 그러자 법정이 나서서 말했다.

“저는 유장의 사람됨을 잘 압니다. 그는 결코 그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오.”

“효직은 어찌 그 점을 장담하시오?”

“유장은 결코 모진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싸움을 벌일 사람이 아닙니다. 제 말이 맞을 터이니 두고 보십시오.”

법정의 예견대로였다. 유장은 정탁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적을 맞아 백성을 안전하게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았지만, 백성들을 움직여 적을 깨뜨린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소.

유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도의에 어긋난 계책을 냈다 하여 정탁을 파면시켜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유비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 얼굴빛을 찾았다.

“이제야 내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구나.”

성도성 안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유비 진영으로 날아들었다. 죽은 장송의 심복 부하들이 도처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유장이 장임(張任), 냉포(冷苞), 유괴(劉潰), 등현(鄧賢) 등 네 장수를 낙성으로 급파했습니다.

―유괴와 장임은 낙성 안에 남아 성을 지키고, 냉포와 등현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성 밖 60리 떨어진 곳으로 나와 진채를 내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방통이 능력을 발휘할 때였다. 그는 이제까지 본격적인 싸움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첫 전투 지휘인 것이다. 그는 은연중 공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첫 싸움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다. 그는 일단 장수들의 공명심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누가 앞장서서 첫 공을 세워보겠소? 냉포와 등현의 진채를 빼앗을 장수는 나와보시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장수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제가 단숨에 저들의 진채를 뿌리뽑겠습니다.”

황충이었다. 나이 예순이 넘은 노장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근력이라든가 병기 다루는 솜씨는 여느 장수 못지않았다.

방통이 허락하려는데 또 한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쳐댔다.

“황 장군께서는 연로하신 터에 어떻게 힘든 싸움을 감당하려 하십니까?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냉포와 등현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위연이었다. 유표 시절에는 황충의 막하에 있었다. 자기 딴에는 황충을 위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황충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내가 이미 자원했는데 자네가 어찌 나서는가? 감히 내 공을 빼앗아보겠다는 것인가?”

“이번 싸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혹시라도 실수가 있어 주공의 큰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달리 나쁜 뜻은 없습니다.”

말은 공손했으나 황충의 나이 많음을 얕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나다를까. 황충은 버럭 화를 내었다.

“너는 내가 늙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무예를 겨루어보자. 너쯤은 서너 합 만에 제압해버릴 수 있다.”

위연을 쏘아보는 눈길이 당장에라도 한판 벌일 태세였다. 위연 역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비록 옛 상관이었지만 두 눈을 부라리고 황충에게 맞섰다.

당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비가 놀라서 두 사람을 말렸다.

“아니 되오. 내가 군사를 이끌고 서천을 취하려 함은 오로지 두 장군을 믿고서였소. 그런데 적과 싸우기도 전에 우리끼리 다툼을 벌인다면 그야말로 나의 큰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오. 제발 두 장군은 다투지 말고 양보하시오.”

방통이 노리고 있던 바였다. 그는 두 사람의 출전 의욕이 한껏 고조되었음을 확인하고는 만류하듯 말했다.

“두 분 장군께서는 서로 다투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냉포와 등현은 따로이 진채를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두 분께서 각기 한 영채씩 맡아 공격하면 되질 않겠습니까? 먼저 적의 진채를 빼앗는 분께 으뜸 공을 드리겠습니다.”

황충과 위연은 방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 각기 군사를 이끌고 냉포와 등현의 진채를 향해 떠났다.

“저들이 도중에 다투지나 않을까 염려되오.”

유비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방통이 들창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옳게 보셨습니다. 저들 중 한 사람은 반드시 공을 다투느라 곤욕을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심려 마십시오. 주공께서 중군을 거느리고 몰래 뒤따르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으실 것입니다.”

공명의 선택 (238)…제20장 파촉으로 가는 길 (9)
  

위연은 유달리 경쟁심이 강한 장수였다. 늘 스스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관우나 장비, 조운만 아끼는 유비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이번이 그 좋은 기회다.’

어떻게 해서든 등현의 진채를 먼저 공략해 으뜸 공을 세워야 했다. 사람을 보내 황충 군의 움직임을 살펴오게 했다.

“내일 새벽 오경 무렵에 출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경에 출발한다.”

이 같은 위연의 명령에 군사들은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사경이라면 새벽 2시경이다. 군사들은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부성을 출발했다. 말방울을 떼고 재갈을 물려 소리 없이 어둠을 뚫고 나갔다.

행군 도중 위연은 문득 딴 마음이 일었다.

‘공을 세우려면 확실히 세우는 것이 좋다. 이참에 아예 냉포의 진채까지 들이쳐야겠다.’

그는 곧 군사들을 돌려 왼편 산길을 취해나갔다. 미명의 어둠 저편으로 불빛이 보였다. 냉포의 진채가 분명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병장기 등을 점검하라.”

밤새 행군해온 군사들이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지쳤다. 휴식이라는 말에 위연의 군사들은 좋아라 하고 말에서 내려 길섶 여기저기에 흩어져 누웠다. 위연 자신도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해 나뭇등걸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실수였다. 무엇보다도 냉포의 진채와 너무 가까웠다. 냉포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유비 군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척후병 하나가 길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위연의 군사들을 발견하였다. 냉포는 기회를 놓칠세라 곧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진채를 나와 위연의 군사들을 덮쳤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위연은 난데없는 함성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적군이 눈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튀듯 일어나 말 위에 올라탔다. 싸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위연의 군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창칼을 휘두를 힘조차 없었다. 게다가 예상치도 않은 기습까지 당하였다. 적군이 백만 대군처럼 여겨졌다. 조수물 밀리듯 쏟아져나오는 냉포의 군사들을 막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냉포를 맞아 싸우던 위연은 등뒤로 자기 편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급하고 불안했다. 그는 이미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다!’

그는 일단 후퇴하기로 마음먹고 말머리를 돌려 숲 속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막 숲 속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갑자기 앞에서 한떼의 군마가 새카맣게 쏟아져나왔다. 싸움이 일어난 줄 알고 달려온 등현의 군사들이었다.

“이놈, 위연아! 항복하려느냐, 칼을 받으려느냐?”

어느 틈에 촉장 등현이 두 눈을 부라리며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위연은 급했다. 채찍을 들어 말 궁둥이를 때렸다. 너무나 세게 때렸는가. 말이 놀랐다. 앞발을 높이 쳐들며 울부짖었다. 그 바람에 위연은 말에서 떨어졌다. 서너 바퀴 땅바닥을 굴렀다. 위연이 겨우 몸을 일으켜 땅에 섰다.

그러나 등현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위연이 말에서 떨어질 때부터 장창을 꼬나쥐고 위연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막 땅에서 일어난 위연의 가슴 한복판을 겨냥하고 힘껏 창끝을 내리꽂았다.

위연은 공포에 질려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죽는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아니, 그보다 간발이 더 빨랐다. 홀연 시윗소리가 나더니 백우전(白羽箭) 하나가 날아와 등현의 등판을 꿰뚫었다.

“아악―!”

등현은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위연으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직도 놀라움이 가라앉지 않은 눈길로 화살이 날아온 쪽을 보았다.

한 장수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신장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호령하고 있었다.

“이놈들, 노장 황충이 여기 있다!”

싸움의 승패는 끝나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변수가 많이 작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 싸움이 그러했다. 황충의 출현 하나가 싸움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말에서 떨어진 등현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던 냉포는 황충의 기세등등한 공격에 기겁을 했다.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천 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천군만마를 본 것 같았다. 지옥 속으로 떨어진 듯 아수라장을 이루며 서로 엎어지고 자빠지고 짓밟았다.

“진채로 퇴각하라!”

냉포는 악을 쓰듯 군사들을 몰아 자신의 진채를 향해 달렸다. 진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문 안에 꽂혀 있어야 할 촉군의 기치 대신 낯선 깃발들이 수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과 놀라움에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홀연히 진채의 문이 열리며 한 장수가 나타났다. 황금 갑주에 비단 홍포를 입고 있었다. 귀가 유난히 컸다. 팔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유비였다.

“이놈, 냉포야! 내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어서 항복하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고 있느냐?”

유비의 꾸짖는 소리에 냉포는 혼비백산했다. 황급히 말에 채찍을 가해 산 속으로 난 조그만 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등뒤로 유비의 웃음소리가 길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1장 아아, 봉추여
<공명의 선택> 19장 장송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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