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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20 19:59:01, Hit : 2801, Vote : 228
 <공명의 선택> 19장 장송의 선택
공명의 선택 (221)…제19장 장송의 선택 (1)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갔다.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여행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장송은 우울했다. 좀처럼 조조의 가늘게 뜬 거만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소문과 너무 다르다!’

사람들은 조조를 천하 제일의 영웅이라 부르고 있었다. 장송이 유장에게 조조를 거론한 것도 세상 사람들의 조조에 대한 칭송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고 나니 장송으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차라리 이대로가 더 낫다.’

본시 장송이 업으로 간 것은 무능하고 유약한 유장 대신 조조에게 서천을 맡기려 함이었다. 배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게 서천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조조에게 맡기면 서천은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유비는 어떠한 사람일까?’

자연스럽게 장송의 관심은 유비에게로 쏠렸다.

―힘은 조조, 덕은 유비!

이런 말이 공공연히 오갔다. 법정은 조조보다는 유비 쪽으로 쏠려 있는 눈치였다. 장송은 유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이제 소문을 믿지 않기로 했다. 조조에게 너무나 심하게 당한 탓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한수를 건너 양양성을 지났다. 이제부터는 유비의 영토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비는 다리를 뻗고 누울 땅 한 조각 없던 떠돌이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어엿한 형주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더니…….”

꼭 유비를 두고 중얼거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일조차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가.

‘유비마저 조조와 같은 부류 사람이라면 이 서천지도를 찢어버리리라!’

세상사의 모든 일을 포기하고 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결심을 하는 장송이었다.

“어디까지 왔다던가?”

“이제 장판을 지나는 중이라 합니다.”

“어차피 강릉을 지나야 하겠군.”

“이릉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잘 지켜보도록!”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습니다.”

황풍이 방을 나갔다. 공명은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방통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황풍의 존재는 타인에 대해 서 절대 비밀이었다. 심지어는 유비조차 황풍이 공명의 가복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통에게만큼은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융중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분신이군.”

방통이 콧구멍을 쑤시며 중얼거렸다. 탄복의 눈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흰 돌, 검은 돌이 반쯤 채워져 있다. 국면은 흰 돌의 우세였다. 검은 돌을 쥔 방통은, 그러나 바둑판 위의 국면에는 그다지 관심을 쏟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그런 탓인지 방통과의 바둑은 늘 느슨했다.

“분신이라기보다는 조력자이겠지.”

공명은 담담하게 웃었다. 방통이 그런 공명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많이 변했군.”

공명은 방통의 말뜻을 눈치챘다.

“세상은 변하게 마련 아닌가?”

“융중 시절의 촌뜨기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어.”

방통이 둘 차례였으나, 그는 좀처럼 착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手)를 고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서 두게.”

“진 바둑인걸.”

맥이 빠졌다. 공명은 탓하는 눈길로 방통을 건너다보았다.

“자네도 이제는 좀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둑 말인가?”

“아니. 남을 조롱하는 말투 말일세.”

“공연히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지 말게. 나는 지금 자네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네.”

“나는 우리 얘기를 하고 싶네.”

“서천에 대한 얘기겠지.”

“장송이 이리로 온다고 보는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들었네. 빈손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겠지.”

급기야 방통은 바둑판을 옆으로 밀쳐놓았다.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겠는가?”

공명 역시 바둑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손 안의 바둑돌을 내려놓으며 계속 물었다. 방통의 짝눈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를 시험하는 건가?”

“내 생각과 맞춰보려는 것뿐일세.”

“음흉한 것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후후, 음흉이 아니라 신중일세.”

공명은 방통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긴장하지 않아서 좋았다. 서서와는 늘 진지했었다.

“서촉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군.”

공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비를 극진히 접대하는 정성만 보여도 충분할 걸세. 어차피 마음이 급한 것은 그 쪽일

테니까 말일세.”

“흐음…….”

“조자룡이나 관운장 정도의 장수로부터 영접받으면 더욱 감격할 테지.”

“봉추 선생다운 말이네.”

그 때 황용이 손수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공명과 방통은 오랜만에 술잔을 나누었다.

공명의 선택 (222)…제19장 장송의 선택 (2)
강릉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장송은 저 멀리로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갑옷과 투구를 쓰긴 했지만 중무장은 아니었다. 경기병(輕騎兵)이었다. 일원대장이 날렵하게 달려와 장송의 수레 앞에 멈춰섰다.

“오시는 분은 혹시 장 별가(張別駕)가 아니십니까?”

장송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내가 장송이란 사람이오만, 장군은 누구시오?”

그러자 일원대장은 얼른 말 위에서 내려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저는 조운이라는 사람입니다. 선생께서 이 곳을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상산 땅의 조자룡?”

그의 이름은 멀리 서촉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선생처럼 높으신 분이 못난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니 평생의 영광입니다. 저는 우리 주공의 명을 받들어 선생의 내왕하시는 수고로움을 위로해드리러 왔습니다. 바쁘시지 않다면 저희 객관으로 드시어 쉬었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송으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영접이었다. 며칠을 기다려서야 조조를 만나볼 수 있었던 업성에서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감격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유현덕은 선비를 대접할 줄 안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구나.’

장송은 조운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사실은 제가 유황숙을 찾아뵈러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조운은 장송의 수레를 호위하며 강릉성 안으로 들어갔다. 객관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객관 주변으로 군사 1백여 명이 길게 나열하여 북을 치며 장송 일행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송은 어리둥절했다. 그 때였다. 한 장수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

붉은 대춧빛 얼굴에 긴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장수였다. 백마 전투에서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원소의 상장 안량의 목을 벤 천하 제일의 용맹. 게다가 화용도에서 옛 은의를 잊지 못하고 조조를 놓아준 천하 제일의 의기―그의 명성은 어느덧 만천하에 널리 떨쳐져 있었다. 장송은 첫눈에 그가 관우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과 흥분에 어찌 행동해야 좋을지 몰랐다. 황망히 수레에서 내리는데 관우가 가까이 다가와 앞에 섰다.

“형님의 명을 받들어 멀리 오시는 장 별가를 위하여 문앞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편안히 쉬시도록 하십시오.”

“소생,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장송은 관우와 조운의 안내를 받아 객관 안으로 들어갔다. 객관은 이미 장송을 위해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았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오자 방 안에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모든 것이 업성에서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관우와 조운이 한껏 몸을 낮추고 장송에게 공손히 술잔을 올렸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이었다.

‘수하 장수들의 사람됨이 이러하니 유황숙의 인품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구나.’

꿈 같은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조운의 호위를 받아 객관을 나선 장송은 본래의 뜻대로 유비를 만나보기 위해 공안으로 향했다. 물결 높은 장강을 건너 공안 포구에 당도한 그의 일행이 공안성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한떼의 인마가 앞에서 달려왔다. 앞장선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장송은 또 한 차례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커다란 귀에 양 손을 무릎까지 길게 늘어뜨린 그 사람은 분명 유비였다.

‘이럴 수가…….’

유비가 직접 마중을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며칠간의 기다림 끝에 겨우 만나볼 수 있었던 조조와는 하늘과 땅 차이 같은 정중함이요, 겸손함이었다. 장송은 황급히 수레에서 내렸다. 그 때는 이미 유비도 말에서 내려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선생의 높으신 이름을 우레처럼 들어왔으나, 높은 산이 첩첩이 가로막혀 있어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이제 선생을 만나뵙게 되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을 한껏 낮추는 겸손의 말이었는데도 장송은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을 들은 것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절로 우러름과 사모하는 마음이 솟구쳐올랐다.

“보잘것없는 저를 이처럼 환대하시니 저야말로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유비만이 아니었다. 그 좌우로 유달리 키가 큰 선비와 키가 작은 선비가 빙그레 웃으며 장송을 환영하고 있었다. 유비가 친히 그들을 장송에게 소개했다.

“여기 계신 분은 저의 군사이신 제갈공명이십니다.”

“아―!”

장송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조조의 대군에 맞서 단 한 번의 적벽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그의 지모와 계책은 이미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윤건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를 입었다. 신선의 풍모가 다분히 엿보였다. 얼굴에서는 환한 빛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장송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쪽 분은 역시 저의 군사이신 방통 선생입니다.”

“방통 선생이라면 봉추…….”

장송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 제일의 기재라고 불리는 공명과 방통을 한자리에서 동시에 만나보게 되다니. 감격과 외경과 기쁨에 장송은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서로간에 예가 끝났다. 장송은 유비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공안성으로 들어갔다.

공명의 선택 (223)…제19장 장송의 선택 (3)

성내에 이르러서도 장송에 대한 유비의 정중함과 공손함은 한결같았다. 장송을 당상 위로 불러앉히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좌우로 공명과 방통이 앉았다. 술잔을 교환하며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당연히 나와야 할 서천에 관한 얘기가 유비의 입에서도, 공명·방통의 입에서도 전연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장송이었다. 공식 외교사절단은 아니었다. 일종의 밀사였다. 더욱이 주공인 유장의 뜻과 달리 서천 땅을 내주려는 엄청난 계획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있는 장송이었다. 섣불리 자신의 뜻을 밝힐 수가 없었다. 가장 좋은 것은 유비 측에서 먼저 서천에 대한 뜻을 밝혀주는 것이다.

‘나를 환대하는 것도 서천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장송의 짐작은 빗나갔다. 아무도 서천에 관해서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조바심이 이는 것은 오히려 장송 쪽이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명을 향해 은근히 뜻을 비췄다.

“유황숙께서는 지금 형주를 다스리고 계신데, 형주에 예속된 고을은 몇 개나 됩니까?”

공명은 술잔을 들다 말고 장송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얼마나 기다리던 말이던가. 그는 내심 긴장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한숨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주공께서 형주를 다스리고 계시기는 합니다만, 사실은 동오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늘 땅을 돌려달라는 재촉이 대단합니다. 다행히 우리 주공께서 동오의 사위가 되시기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동오는 여섯 군에 여든한 고을을 차지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넉넉하건만, 그래도 만족할 줄 모른단 말씀이오?”

장송의 반문에 이번에는 방통이 대답했다.

“우리 주공께서는 한왕조의 종실이건만 한 조각의 땅도 차지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반면에 한왕조를 배신한 역적들은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때 묵묵히 앉아 있던 유비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두 분께서는 더 이상 아무 말씀 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슨 덕이 있다고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겠소이까? 나는 이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만큼 근심도 많은 것이 세상 이치 아니오?”

천하에 대한 포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말투였다. 그 말에 열을 낸 것은 오히려 장송이었다.

“유황숙께서는 겸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명공께서는 한왕조의 어른이시요, 어질고 의롭다는 명성이 사해(四海)에 떨쳐 있습니다. 고을을 차지하여 기반을 넓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 어지러운 천하를 다스리고 천자의 자리에 앉으셔도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소리였으나 유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두 손을 모아 겸양해할 뿐이었다.

“공의 말씀은 너무 과분합니다. 내가 어찌 그런 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장송은 감격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유비는 이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24)…제19장 장송의 선택 (4)
연회는 사흘 연속 베풀어졌다. 여전히 서천에 관한 얘기는 일체 거론되지 않았다. 장송은 극도로 초조해졌다. 장송이 공안을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그는 몰래 객관을 나서 공명의 집으로 갔다. 느닷없는 장송의 방문에 공명은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별가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웬일이십니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후원의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밀담이었다. 밀담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장송은 처음부터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그런 그의 숨결은 뜨거웠다.

“저는 유황숙을 모시고 싶습니다.”

이 말뜻을 어찌 공명이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공명은 여전히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좋은 일이지요. 언제든지 건너오시면 환영하겠습니다.”

툭 튀어나온 장송의 이마가 좌우로 흔들렸다.

“제가 이리로 오는 게 아니라 유황숙께서 서천으로 오시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곳 형주는 북으로는 조조와 맞닿아 있고, 동으로는 손권이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습니다. 결코 오래 머물 땅은 아니지요.”

“옳게 보셨습니다.”

“반면에 서천은 지형이 험해 지키기 좋은 곳입니다. 안으로는 기름진 들이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고 백성들의 살림도 넉넉합니다.”

“저도 파촉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살기 좋은 곳이더군요.”

공명은 서서히 끈을 늦추고 있었다.

“만일 유황숙께서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파촉으로 들어오신다면 가히 패업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실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유황숙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더욱이 익주목 유장은 같은 한실의 종친입니다. 촉 땅에 은덕을 베푼 것도 여간 아닐 텐데, 공연히 그 곳을 어지럽히는 게 아닐까요?”

“유장은 어리석고 나약합니다. 강하고 덕이 있는 주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배신입니까?”

“배신이 아닙니다. 파촉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일이지요.”

“서촉 사람들은 외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유장도 외지인입니다.”

“선생의 뜻은?”

공명의 물음에 장송은 소매 속에서 서천지도를 꺼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지도입니까?”

“서천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파촉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선생께서는 유황숙과 유표의 일을 알고 계십니까?”

유비가 형주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내 사양했던 일을 말함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서천 사람들은 유황숙을 원하고 있습니다.”

장송의 숨결은 아까보다 한결 뜨거워져 있었다.

“유황숙께서 끝내 이 지도를 받지 않으시면?”

“세상 일에는 모두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대업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서천을 위해서도, 유황숙을 위해서도 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유황숙을 설득하는 것은 바로 공명 선생의 일입니다. 만일 이번에 서천을 차지하지 않아 그 땅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면 그 때는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형주 때와는 다릅니다.”

장송이 한창 열을 올려 얘기하는 모든 것은 바로 공명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대의와 명분―장송은 그것을 공명에게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는 유황숙을 잘 압니다. 그분은 결코 군사를 일으켜 서촉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공명은 은연중 방법을 타진하고 있었다. 장송이 어찌 그것을 모를 리 있겠는가. 그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점이라면 안심하십시오. 저희들도 전쟁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촉은 지금 한중의 장로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조만간 유장은 유황숙께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유황숙께서는 그 청에 의해 파촉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안에서 법정이라는 벗과 제가 호응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이제 밀담을 끝낼 때가 되었다. 공명은 말없이 서천지도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청산(靑山)은 늙지 않고, 녹수(綠水)는 쉬임없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유황숙께서는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공명과 장송은 두 손을 잡았다. 서로의 손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장송은 넉 달 만에 성도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으나 장송의 눈에는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그의 마음은 이미 유장에게서 떠나 있었다.

‘이 곳의 주인은 이제 유비다!’

성 안으로 들어선 그는 유장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법정의 집을 찾아갔다. 법정은 장송을 보자 반가움을 표시하기에 앞서 결과가 궁금했다.

“어찌되었는가?”

“전혀 아닐세.”

“누가?”

“조조 말일세.”

“유현덕은 만나보았는가?”

“자네 안목은 정확했네. 생각보다 훨씬 큰 인물이더군. 나는 유황숙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네.”

장송은 그간의 일을 자세히 들려주고 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자네 역할이 크네.”

그 때였다. 방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거칠게 방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나는 너희들의 뜻을 알고 있다. 네놈들은 우리 익주를 남에게 갖다 바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냐?”

장송과 법정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사람은 맹달(孟達)이라는 사람이었다. 순간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맹달은 법정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서촉으로 건너왔다. 자를 자경(子慶)이라 했다. 서로 속마음을 나누는 사이였다. 아니나다를까. 위협적인 호령소리와는 달리 맹달의 눈과 입가에는 웃음빛이 가득 차 있었다. 장송이 웃으면서 맹달에게 말했다.

“눈치 하나는 빠르구먼. 그렇다면 누구에게 넘겨주려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겠군.”

“유현덕 외에 이 땅을 바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내 말이 틀렸는가?”

“하하하, 바로 맞추었네. 과연 자경이로세.”

의기가 통한 세 사람은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곧 다음 의논으로 넘어갔다. 법정이 장송에게 물었다.

“자네는 내일 유장을 만나 보고해야 할 텐데, 어찌할 작정인가?”

“나는 자네 두 사람을 형주로 보낼 사신으로 천거하겠네. 자네들은 형주로 가 유황숙과 함께 이 곳으로 들어오게. 그렇게만 되면 일은 한결 수월해질 것일세.”

“좋군.”

법정과 맹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송의 뜻에 동조했다.

공명의 선택 (225)…제19장 장송의 선택 (5)
“사절단이 성도를 출발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보고가 공안으로 날아들었다. 황풍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정탐꾼들이 서촉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만큼 유비 진영은 유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장 별가가 잘 해내었군.”

“유장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난세일세. 모든 사람이 강할 수는 없겠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라는 말인가?”

“치세에 어울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일세.”

사절단의 대표는 법정과 맹달이라고 했다. 두 사람 모두 반유장파였으나, 정작 유장 자신은 그 점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절단의 파견을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 황권(黃權)과 왕루(王累)의 반대가 거셌다는 보고가 있었다.

―유비는 너그러운 듯하면서도 강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의 수하들은 한결같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뿐입니다. 지모가 있기로는 제갈량과 방통이요, 용맹스런 장수로는 관우·장비·조운·황충·위연 등이 날개처럼 벌려 서 있습니다. 그런 유비를 촉으로 불러들여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아랫사람으로 부리려 하신다면 그가 몸을 굽히지 않을 것이요, 빈객으로 대접한다면 한 나라에 두 주인이 있는 셈입니다. 유비가 서촉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주공께서는 누란의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황권은 유비의 파촉행을 ‘누란(累卵)의 위기’라고 표현했다. 계란을 쌓아둔 것 같은 위태로움이라는 뜻이다.

“절묘한 표현이군.”

방통의 들창코가 또 벌름거렸다. 황권은 중파(中巴) 땅 태생으로 자를 공형(公衡)이라고 했다. 사려가 깊고 충직스러웠다.

“장송이 꽤나 놀랐겠군.”

공명은 빙긋 웃었다. 이미 법정과 맹달의 파견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여유를 부릴 수가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두 손에 땀을 쥘 만큼 가슴을 조였을 것이 분명했다. 황권의 반대에 유장은 마음이 흔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황권을 향해 물었다고 했다.

―조조나 장로가 쳐들어오면 그 때는 어찌하는가?

―변경을 막고 서촉으로 이어지는 잔도를 모두 끊어버리면 적병이 쉽게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울러 성마다 도랑을 깊게 파고 성벽을 높게 하면 적병은 절로 물러갈 것입니다. 험한 땅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자는 계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유장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유장은 버럭 화를 내며 황권을 꾸짖었다.

―적이 우리 경계 안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눈썹에 불이 붙은 것만큼이나 다급한 일이다. 어찌 그것을 계책이라고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종사관 왕루가 다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장로가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은 옴 같은 하찮은 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비가 파촉으로 들어오는 것은 심장이 썩는 큰 병과 다름없습니다. 유비를 불러들이신다면 서촉은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유장과 서촉을 위한 말이었으나 끝내 그들의 말은 무시되었다.

“하늘이 돕고 있음일세.”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순서로군.”

공명과 방통의 감상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쉰 것만은 똑같았다.

“문제는…….”

공명이 고개를 외로 틀었다.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의 습관이다.

“주공을 염려하는 게로군.”

방통은 공명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의 인의는 세상 사람이 다 알 정도로 높았다. 죽은 유표와의 은의를 지키기 위해 손 안에 들어온 양양성을 내친 유비였다. 그런 그가 익주로 들어가 유장의 자리를 빼앗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유비는 파촉으로 들어가는 일 자체를 거절할지도 몰랐다.

―비밀로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설득할 것인가.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촉을 손에 넣긴 넣어야 했다. 유비도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차마 종친의 땅을 어찌 빼앗는단 말이오? 누가 이러한 유비를 설득할 것인가.

“혹시…….”

방통의 짝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말해보게.”

공명이 기대의 눈길을 던졌다.

“주공께서는 이미 마음이 서 계신 것이 아닐까?”

“자네 말뜻은?”

“주공 스스로 먼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들이 청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뜻인가?”

“그렇지.”

지난 번 장송을 대하던 유비의 태도는 정말 훌륭했다. 공명이나 방통은 유비에게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조운과 관우만을 보내어 장송을 맞아들인 것이다. 유비는 이러한 그들의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기가 막힐 정도로 호흡을 맞추었다. 공명과 방통이 원하고 있는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주공의 능청스러움에 놀아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듣고 보니 그렇군.”

“서촉행은 주공께서 더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일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공연한 고민을 한 것이 아닌가?”

공명과 방통은 갑자기 유쾌해졌다. 서로 눈을 마주 보고 한참을 웃어댔다. 그것을 확인하는 일은 방통이 맡기로 했다.

공명의 선택 (226)…제19장 장송의 선택 (6)
법정과 맹달은 단순한 사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하나는, 한령 태수 장로의 침공을 막아내고 나아가 한중 땅을 토벌할 목적으로 유비의 군대를 촉 땅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유비의 군대를 용병(傭兵)으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익주목 유장도 허락한 일이었다. 공식 임무인 셈이다. 그러나 그 임무말고도 은밀한 또 다른 사명감이 법정의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기회를 보아 유장을 들이친다! 이것은 유장 측에서 보면 모반이요, 음모였다. 유장 측근들도 이러한 음모를 눈치챘음인가, 아니면 단순한 우려에서였음인가. 유비 군의 영입에 대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다행히도 유장은 측근들의 반대를 무시했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을 것이겠지만, 어찌되었건 법정과 맹달로서는 공식 사절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도 최소한의 성의는 표해야겠지. 유장은 군사 4천 명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연합군의 형식을 취하자는 뜻이리라. 한중 토벌에 필요한 모든 물자는 일체 유장 측에서 제공하겠다는 조건도 붙였다. 법정과 맹달은 마지막 관문인 황구협을 지났다. 파구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형주로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법정이 제안했다. 맹달은 파구에 남아 4천 군사와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그 무렵, 유비는 공안과 강릉을 오가며 형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법정이 당도했을 때는 유비는 강릉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이렇게 뵙게 되니 평생의 광영입니다.”

이미 세밀한 사항은 장송이 처리하고 난 뒤였다. 양측 모두 결론을 내놓고 있었다. 어려운 회담은 아니었다. 오히려 형식적인 회담에 가까웠다. 유장이 유비에게로 보내는 편지가 먼저 전달되었다. 내용 역시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 장로란 자가 저희 북편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군사를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촉은 매우 불안합니다. 종실의 정의를 생각하시어 유황숙께서 군대를 일으켜 장로를 소탕해주시면 이보다 더한 감격이 없겠습니다.

유비는 유장의 편지를 읽고 나서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끄러미 법정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법정은 내심 불안을 느꼈다. 유장의 편지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면 내용이었다. 그런데 유비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표정이 아닌가.

‘우리만 공연히 애태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법정이 의심하고 있는데 유비가 별안간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공의 조부께서도 자가 현덕(玄德)이었다지요?”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밀담이어야 할 자리에서 느닷없이 할아버지 자를 거론한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법정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데 유비가 또 물었다.

“청렴한 절개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역시 법정의 조부 법진(法眞)에 관한 이야기였다. 법정은 장송과 더불어 파촉 제일의 기재라는 칭송을 듣는 인물이었다. 유비의 두 번째 물음에 그는 비로소 그 말뜻을 깨달았다.

‘아―!’

유비는 이미 법정의 할아버지인 법진에 대해서까지 소상히 조사해두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자와 업적까지 알 정도라면 법정 자신에 대해서는 이미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음에 틀림없다.

―새삼스레 유장의 편지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유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태산이다!’

법정은 갑자기 자신이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짓눌리는 듯 숨이 막혀왔다.

‘이분이야말로 내 주인이다!’

단 두어 마디의 대화뿐이었다. 그런데도 법정은 감격하고 있었다. 유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품이었다. 법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하듯 말했다.

“촉 중에 있는 작은 벼슬아치를 이처럼 과분하게 대접하시니 감격할 뿐입니다. 말은 백락(伯樂=전국시대 사람으로 말을 특히 잘 다루었다.)을 만나야 소리쳐 울고,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야 죽기까지 일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주공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허허허, 이제 겨우 엉덩이 하나 붙일 땅 조각을 얻은 몸이올시다. 효직의 말씀은 내게 너무 과분하오. 참, 장 별가는 안녕하시오?”

유비의 화술은 교묘했다. 법정의 조부 얘기를 하는가 싶더니 법정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였다. 그뿐만 아니다. 어느 틈에 서촉 얘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법정이 몸달아하고 있는 화제가 아니던가.

“익주는 하늘이 내리신 좋은 땅입니다. 제가 그 땅을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법정은 유비에게 주공이라는 호칭을 썼다. 바치겠다는 표현도 서슴없이 나왔다. 이제는 회담이 아니었다. 군신간의 담소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유비는 빙그레 미소 지음으로써 법정의 말을 수용했다. 그러나 유비는 결코 직선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유장은 나와 같은 한왕조의 종실이오. 차마 도모할 수가 없소이다.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토끼도 먼저 쫓는 사람이 잡게 마련입니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나의 두 군사께서 어찌 생각할지……?”

유비는 별안간 공명과 방통을 끌어들였다.

공명의 선택 (227)…제19장 장송의 선택 (7)
“우리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두 분 선생께서 주공을 만나보셔야겠습니다.”

공명과 방통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어이가 없는 웃음이었다. 법정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이제 자네가 나설 차례네.”

공명이 방통에게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방통의 들창코가 벌렁거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쉬운 편일세. 유표 때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속이 다 타버릴 지경이네.”

“아무튼 그 기다림과 인내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네.”

“어서 다녀오게.”

공명의 채근에 방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통이 유비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유비는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심하고 있는 기색이 완연했다. 정말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일까. 방통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효직과의 얘기는 잘 되었습니까?”

“아, 봉추 선생. 그렇지 않아도 만나보고 싶었소.”

“아직도 망설이고 계시는 건지요?”

“선생의 의향은 어떠시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누구요?”

“일을 결단할 때 빨리 정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쩐지 자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생 조조와 나는 대립 관계에 있었소. 조조가 급하게 서두르면 나는 유유하게 행동했고, 조조가 사납게 행동하면 나는 더욱 부드럽게 처신해왔소. 조조가 속이는 행동을 할 때는 나는 정직한 태세를 취했고, 조조가 의심하면 나는 신의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했소.”

방통은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말은 유비의 진심이리라. 그러나 방통은 알고 있었다. 그 진심 뒤에 또 하나의 거대한 진심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유비는 지금 그 진심을 타인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방통은 과감하게 유비의 마음을 파헤쳐나갔다. 그것이 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난세에는 강한 것이 필요합니다. 역(逆)을 순(順)으로 만들 줄도 아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입니다. 이번 일은 신의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다행히 장송과 법정이 내응이 되려 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주신 복올습니다. 일이 성공한 뒤에 덕으로써 서촉을 다스리면 그것이 곧 순(順)이 아니겠습니까?”

짧았으나 강한 어조였다. 과연 유비의 얼굴에 변화가 왔다.

“알겠습니다. 선생께서 그토록 간절히 말씀하시니, 내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갈 군사와 효직을 불러주시오.”

“잘 생각하시었습니다.”

임무를 완수했다,라고 방통은 생각했다. 그런데 유비의 방을 나오면서 방통의 머릿속으로 언뜻 한 생각이 스쳐갔다.

‘어쩌면 주공은 나를 위해 이런 연극을 한 것이 아닐까?’

서촉 정벌의 성공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공을 이룬 사람은 누구일까. 유비? 공명? 법정? 모두 아니다. 유비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설득한 방통의 공이 아니겠는가.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유비의 서촉 정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할 것이다.

서촉 평정은 모두 방통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공명의 태도도 수상쩍었다. 유독 서촉에 관한 일은 모두 방통에게 미루었다. 이렇게 생각되자 방통의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세차게 솟구쳐올랐다.

유비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

―한중 토벌군. 명분은 이러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말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서촉 토벌군. 절대 비밀이 되어야 할 사안이 공공연한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나 유비도, 공명도, 방통도 그 점에 대해선 굳이 말리려 들지 않았다.

총사령관은 유비 자신이 맡았다. 친정(親征)이었다. 유비를 보좌하고 실질적으로 군사를 지휘할 참모장격인 군사(軍師) 선정에는 많은 논란과 고심이 뒤따랐다.

―방사원이 아니고는 이 일을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공명이 가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공명과 방통은 서로 양보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숙의 끝에 방통을 지명했다.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형주를 지킬 사람이 필요하오.”

일찍이 손권은 유비에게 파촉을 함께 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그 때 유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유비가 파촉 정벌을 나간다면 손권은 크게 화를 낼 것임에 분명했다. 어쩌면 군사 행동을 감행할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 방비책을 강구해놓아야 했다.

―공명은 형주를 지키시오. 형주는 유비의 터전이나 다름없었다. 겨우 마련한 기반이었다. 서촉 때문에 그 기반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지금의 형주를 이룩한 주역은 누가 뭐래도 공명이었다. 이룩한 자가 지킨다. 유비의 논리였다.

반면에 서촉 정벌의 계획은 방통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각자의 일을 끝까지 책임지도록 합시다. 이로써 두 사람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역시 방통에게 공을 넘겨주려

는 유비와 공명의 배려가 많이 작용하였다.

유비의 염려대로 형주를 지키는 문제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공명도, 방통도 그 점에는 공감했다. 공명에게 장수 지명권이 주어졌다.

“관운장께서는 형주성에 머물면서 양양성을 도모하십시오.”

관우가 기쁜 마음으로 형주성을 향해 떠나갔다. 공명은 계속해서 형주 방어선을 구축해나갔다.

“장익덕은 호남 사군을 순시하며 동오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펴주십시오.”

장비도 군사를 데리고 강릉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조자룡 장군은 강릉성에 주둔하면서 공안 일대를 지키시오.”

유비 진영의 핵심 장수들은 모두 공명의 관할하에 형주에 남아 있게 된 셈이었다. 방통은 나머지 장수들로 서정군(西征軍)을 짤 수밖에 없었다. 노장 황충을 전군(前軍) 대장으로 지명하여 앞장서도록 했다. 후군 대장에는 위연을 삼았다. 그리고 유비는 중군 대장이 되어 유봉·관평을 거느리게 했다. 방통 자신은 중군에 머물면서 3군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서정군의 총병력은 5만. 이윽고 유비가 이끄는 서정군은 강릉을 떠났다. 길은 법정이 안내했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를 택했다. 파구에서 맹달의 4천 군사와 합류했다.

“유익주께서 저로 하여금 주공을 맞이하라 하셨습니다.”

맹달도 유비에게 주공이라는 표현을 썼다. 유비는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의 가늘게 뜬 시선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명의 선택 (228)…제19장 장송의 선택 (8)
유비의 서정군이 파촉을 향해 출발하고 나서 강릉성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소동의 원인은 유비의 서정에 따른 동오 진영의 반응으로 인한 것이었다.

“유비는 음흉한 자이다. 우리가 치러 가자고 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손권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었다.

“서천은 먼 곳입니다. 유비는 좀처럼 쉽게 형주로 돌아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형주의 뒤를 친다면 한 번 공격에 형주땅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몽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직위가 올라가려면 공을 세워야 할 것이고, 공을 세우려면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는 동오 진영 내에서도 유난히 싸움을 즐기는 장수였다. 손권은 여몽의 진언에 귀가 솔깃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는데 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손권이 물었다.

“우리 군사가 움직이면 조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정(南征)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허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뿐이오?”

“또 있습니다. 유비가 서정군을 발진시켰다고는 하지만 그 주력부대는 고스란히 형주에 남아 있습니다. 공명, 관우, 장비, 조운 등 일급장수들은 서천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동쪽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손권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제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장소였다.

“무엇이오?”

“손부인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손부인이라면 유비의 부인을 말함이었다. 손권의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불러들여서?”

손권의 눈길이 장소에게 고정되었다.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우리 동오에서 기르는 겁니다.”

손권은 장소의 말을 알아들었다. 유비는 오랫동안 형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손부인이 동오로 돌아와 머무는 것은 별반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그 손부인이 동오로 건너올 때 유비의 아들 아두를 데리고 온다면 동오 진영으로서는 기막힌 인질 하나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일 그 아두와 형주를 교환하면 금상첨화이겠지.”

손권의 찌푸려졌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손부인의 귀환 작전―좀더 엄밀히 말하면 아두의 유괴 작전은 신속하고 은밀한 움직임 속에

개시되었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주선(周善)이라는 사람이었다. 주선은 손권의 식객이었다. 어려서부터 담이 커서 두려움을 몰랐다. 담장을 넘고 벽을 뚫는 데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남의 집을 숨어드는 데 달인이었다. 손권의 명을 받은 주선은 그 날로 군사 5백을 거느리고 강릉성을 향해 떠났다. 모두들 장사치로 변장했다. 배도 전선(戰船)이 아닌 상선(商船)을 이용했다. 주선은 형주 영토에 이르자 강릉이 바라보이는 장강 갈대숲에 배를 숨겨두고 혼자서 강릉성 안으로 들어갔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주선이 손부인의 거처로 잠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동에서 온 사람이오. 손부인을 만나뵈었으면 합니다.”

문을 지키는 시녀 역시 손부인이 시집올 때 데리고 온 강동 사람이었다. 주선의 속삭임에 문지기 시녀는 그를 곧 손부인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대는……?”

어릴 적부터 한집안에서 자란 사이였다. 손부인은 이내 주선을 알아보았다. 반가움과 놀라움에 소리치려는 데 주선이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해보였다. 사내들 틈에 끼여 자란 손부인이었다. 주선의 은밀한 행동이 뜻하는 바를 어찌 모르겠는가.

“무슨 일이오?”

“주공의 밀명입니다.”

두 사람 모두 낮게 속삭였다.

―동오로 돌아오라! 손권의 친필 밀지였다.

“전쟁이오?”

손부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서렸다.

“아닙니다. 다만, 아두를…….”

아침저녁을 장담할 수 없는 천하 형세였다. 자신의 결혼 생활이 언제까지 평탄하게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아두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그 어린 것을…….”

“강동과 형주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주선의 그 말에서 손부인은 손권의 강한 의지를 읽었다. 자신이 반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내가 강동으로 가려면 제갈 군사의 허락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점이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미 강변 갈대숲에 배를 숨겨놓았습니다. 한나절이면 강동 경계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탈출이오?”

“그렇습니다.”

“알겠소. 곧 준비하리다.”

손부인의 행동이 갑자기 신속해졌다.

공명의 선택 (229)…제19장 장송의 선택 (9)
“아두 도련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공명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미축과 마주 앉아 서촉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손건이 뛰어들어왔다. 아두는 유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올해 나이 다섯 살. 별로 영특한 면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래의 후계자이다. 작은 주인인 것이다. 공명은 놀랐다. 단순한 실종이라면 손건이 사색이 되어 뛰어다닐 리 없었다. 웬만한 일에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손건이 아니던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전율이 전신을 스쳐갔다.

“주모(主母=손부인을 가리킴)께서는?”

짚이는 바가 있었음인가. 공명의 입에서는 가장 먼저 손부인의 행방을 묻는 말부터 나왔다.

“내실은 텅 비었소이다. 시녀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내 불찰이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고 있지 못했소.”

공명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빨리 군사를 보내 추격을…….”

“조자룡 장군은 어디에 계시오?”

“순찰을 나갔는지 아침부터 보이질 않습니다.”

“낭패로군. 우리라도 서둘러 손부인의 뒤를 쫓읍시다. 공안으로 사람을 보내 장익덕에게도 기별을 해주시오.”

공명은 전에 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조운은 강릉성 주변을 순찰하고 돌아오는 중에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으로부터 손부인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혼자이셨더냐?”

“아닙니다. 수레 다섯 대에 시녀들이 모두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신다고 하며 나갔느냐?”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주공도 함께 계시었더냐?”

“예, 작은 주공께서도 수레에 타고 계셨습니다.”

조운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추격하라!”

나중 일은 어찌되었건 그는 일단 손부인의 뒤를 쫓기로 결심했다. 말머리를 돌려 곧장 수레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0리쯤 달렸을까. 조운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갈대숲 주변으로 빈 수레 다섯 대가 널려 있는 것이었다. 손부인도, 시녀들도 어디에고 보이지 않았다. 배를 탄 것이 분명했다.

“강변을 따라 달려라!”

배와 말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조운은 바람처럼 질주했다. 뒤따르는 군사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달렸을까. 저 멀리로 동정호가 보였고, 그 못 미처에 10여 척의 배가 돛을 펼치고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동오의 상선이었다.

“저 배다!”

조운은 더욱 말에 박차를 가했다. 배 안에 탄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추격했다. 과연 상선의 갑판 위에는 눈에 익은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멈추어라!”

조운은 크게 소리쳤다. 예상치 못한 조운의 출현에 배 안에 있던 손부인은 깜짝 놀랐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얼른 아두를 안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선이 창을 짚고 뱃머리에 서서 강변의 조운을 향해 외쳤다.

“너는 누구기에 감히 주모의 배를 막느냐?”

이미 갑판에는 장사치로 변장한 동오의 군사들이 병장기를 꺼내들고 나열해 있었다. 조운은 그 상선이 손부인을 태운 동오의 배임을 확인하자 곧바로 말에서 뛰어내려 강변에 묶여 있는 고기잡이배에 올라탔다. 곧장 노를 저어 쏜살같이 손부인의 배를 뒤쫓았다. 이것

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주선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활을 쏘아라!”

화살이 조운의 배를 향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조운이 어떤 사람인가. 아두를 품에 안고 장판벌을 종횡무진 누빈 장수가 아니던가. 그는 청홍검(靑紅劍)을 빼어들고 날아드는 화살을 모조리 강물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 사이 조운이 탄 배는 손부인의 배와 두 간 남짓 좁혀졌다. 동오의 군사들이 당황하여 창으로 찔러댔다. 청홍검이 또다시 번뜩였다. 창이 잘려나가고 그 앞으로 공간이 생겼다. 조운은 몸을 비호처럼 날려 손부인의 배로 뛰어올랐다. 동오 군사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선실 문이 열리며 한 부인이 나타났다. 손부인이었다. 품에는 여전히 아두를 안고 있었다.

“장군은 어찌 이리도 무례하오?”

만만치 않은 호통이었다. 그러나 조운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주모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기에 군사께 알리지도 않으셨습니까?”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시다기에 군사께는 알릴 겨를 없이 떠나왔소.”

“그렇다면 아두 아기씨는 왜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아두는 내 아들이오.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는 게 무엇이 이상한 일이란 말이오?”

계모이든 생모이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더욱이 충효를 강조하는 유교 사회였다. 손부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운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아두 아기씨는 제가 일찍이 장판벌에서 백만 대군 사이를 헤치고 구해낸 분입니다. 주모께 아기씨를 맡길 수 없습니다.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그대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움직이는 장수에 불과하오. 어찌 감히 주인의 집안일까지 간여를 하려는 것이오?”

손부인의 말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조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제가 어찌 주공의 집안일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부인께서는 자유롭게 행동하십시오. 다만 작은 주공만은 데리고 가지 못합니다.”

“무례하구나! 모반할 뜻을 품고 있는 게 아니냐!”

손부인의 목소리가 뱃전을 쨍쨍 울렸다.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만일 부인께서 작은 주인을 내주지 않는다면 이 조자룡은 만 번 죽어도 부인을 그대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손부인은 아두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얼른 뒤에 있던 시녀들에게 아두를 넘겨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림자 하나가 번쩍 하는가 싶더니 아두는 어느 틈에 조운의 품으로 옮겨져 있었다. 조운은 얼른 뱃머리에 섰다. 타고 왔던 고기잡이배를 찾았으나 어느 새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동안에도 배는 계속 항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강의 푸른 물결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뛰어내릴 수도, 그대로 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부인이 별안간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돛을 있는 대로 다 올리고 강동으로 향해라!”

바람은 세고 물살은 빨랐다. 10여 척의 배는 계속해서 빠르게 미끄러져 나갔다. 조운은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늘이 주공을 버리려 하고 있음인가!’

그 때였다. 앞쪽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20여 척의 배가 길게 늘어서서 손부인의 배를 가로막았다.

“아!”

그 배에 꽂혀 있는 깃발을 보는 순간, 조운은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형주 군을 상징하는 문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맨 앞에 있던 배의 갑판 위로 일원대장이 나타나더니 큰 소리로 외쳐댔다.

“아주머니께서는 조카를 두고 가십시오!”

장비였다. 그는 공안에 머물면서 호남 사군을 순시하려던 참에 공명이 보낸 사자로부터 손부인의 일을 들었다. 뱃길로는 늦었다고 판단하고 육로로 육구(陸口)까지 달려와 그 곳에서 선단을 이끌고 손부인의 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비는 손부인의 배로 가까이 다가와 날렵하게 배로 뛰어올랐다. 그가 장비인 줄을 알지 못하는 주선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장비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칼을 뽑아 휘둘렀다. 흰 무지개가 허공에 그려졌다. 동시에 주선의 목이 손부인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그것을 본 손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장비는 아두가 조운의 품에 안겨 있음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만 가도록 합시다.”

“그럼 부인께서는 잘 가시오.”

조운과 장비는 여전히 사색이 되어 있는 손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형주의 배로 건너갔다. 두 장수가 아두를 보살피며 강릉성으로 향하는데 그제야 상류 쪽에서 공명이 수십 척의 배를 이끌고 왔다. 그는 조운과 장비로부터 그간의 일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자룡과 익덕은 주인을 구해낸 나라의 보배이십니다. 이 공을 어찌 말로 치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강릉에 도착할 때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연방 두 사람을 칭찬했다. 그로서는 유비에게 출사한 이래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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