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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13 21:55:03, Hit : 3496, Vote : 268
 <공명의 선택> 18장 서쪽을 바라보며
공명의 선택 (211)…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1)
공명은 뒤뜰에 박힌 듯 서 있었다. 밤이었다. 하늘에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그 중 동쪽 별 하나가 유난히 빛났다. 갑자기 그 별이 불붙은 듯 타오르더니 긴 꼬리를 남기며 떨어져 내렸다.

“아―!”

공명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때 그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늘 밤고양이같이 움직이는 사내―황풍이었다.

“주랑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는가?”

공명의 목소리는 낮았고 담담했다.

“파구를 지나는 도중에…… 영구는 시상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황풍은 계속해서 보고했으나 공명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숙적이라면 숙적이었다. 강동 제일의 기재라 불릴 만큼 주유의 능력과 활동은 눈부셨다. 공명으로서는 처음 만난 경쟁자였다. 적벽에서는 온갖 지략을 짜내 그와 상대했었다. 그가 서천 정벌을 선언하고 나섰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었다.

파촉―. 천하 대업을 이루려는 공명의 야망에 반드시 필요한 영토였다. 북방을 점하고 있는 조조와 강동 땅에 탄탄한 기반을 내린 손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땅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런데 주유가 먼저 서천 정벌을 외치고 나선 것이다.

―선수(先手)를 빼앗겼다.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막아야 했다. 주유의 서천 정벌을 저지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격동지계였다.

―멋지게 성공했다. 그런데도 공명의 마음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둡고 무거웠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책감은 아니었다. 일찍이 유비에게도 장담했듯이 주유의 파촉 정벌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냥 놔두어도 주유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주유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반 이상은 진심이었다.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주유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공명의 아픔이라면 아픔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개운치가 못했다.

“주랑은 후임으로 자경 선생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황풍은 사라져갔다.

공명은 여전히 뒤뜰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석상 같았다. 황풍의 마지막 말이 그의 귓전에 맴돌았다. 주유가 임종 직전 노숙을 추천했다는 것은 공명으로서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적벽대전 전까지만 해도 주유와 노숙은 반조조파라는 면에서 같은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그 후 유비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두 사람 사이는 눈에 띄게 벌어졌다. 유비를 대하는 시각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이번 파촉 정벌만 해도 그랬다. 노숙은 가장 격렬하게 파촉 정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조조를 눈앞에 두고 다른 곳에 힘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 노숙을 원정군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주유는 죽음 직전 노숙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한 것이다.

―어째서? 어쩌면 주유는 자신만이 파촉 정벌을 이룩하고 단독으로 조조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일 자신이 죽고 없으면 노숙의 말대로 파촉 정벌은 커녕 조조의 침공조차 막아내지 못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숙의 친유비 정책만이 향후 동오를 보존할 수 있다고 최종 판단을 내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동오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공명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12)…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2)
“동오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주유의 죽음을 놓고 얘기를 하던 유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명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우리가 서촉을 바라볼 때가 왔습니다.”

공명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아, 서촉―!”

여유가 생겨서임인가. 요즘 들어 유비는 꽤 능청스러워졌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묻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보다도 서촉행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 유비였다. 당연히 그의 입에서 먼저 파촉행이 거론되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끝내 공명이 먼저 거론할 때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요.”

이번에는 공명이 슬쩍 늦추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유비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오?”

이럴 때 보면 유비는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속마음을 너무 금방 드러낸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리셨습니다.”

공명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쪽에서도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저 쪽에서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 쪽이라니요?”

“익주 말입니다.”

“익주?”

“서천은 천부의 땅입니다. 옥토이기도 하지만, 요새이기도 합니다. 안에서 내응이 없으면 손무자가 살아온다 하더라도 정벌할 수가 없습니다.”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구려. 안에서 내응이라니요? 대관절 누가 내응을 한다는 말씀이오?”

“그야 당연히 유장과 그 부하들이지요.”

“그들이 어째서 우리에게 내응한단 말이오?”

“우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유장은 나약하고 어리석습니다. 실정(失政)이지요. 익주 사람들은 지금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어렴풋이나마 공명의 말을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모반이오?”

“모반이라기보다는…… 영접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영접이라…… 좋은 말이오. 그런데 군사께서는 저들이 누구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요?”

“아마도 저들은 조조를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만…….”

“조조?”

유비의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까지는 섣불리 서천 정벌의 뜻을 내비추지 말아야 합니다.”

공명은 익주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해놓고 있었다. 유언에 이어 익주목이 된 유장은 아버지만큼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심을 잃고 있는 것이다. 조조가 서량·한중 땅을 노리고 주력부대를 서북쪽으로 옮기면서부터는 전쟁의 불안까지 안고 있었다.

“서촉은 오랫동안 평화의 땅이었지요.”

유비가 중얼거렸다.

“저들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막아줄 강력하면서도 덕이 있는 통치자를 고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익주 사람들뿐이겠소?”

“그렇습니다. 평화는 천하 만민의 뜻입니다.”

공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제 한마음이나 다름없었다. 형주에서의 후퇴, 장판파 싸움, 적벽대전 등을 겪으면서 그들은 상대의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서로간에 깊은 이해를 쌓게 되었다. 공명은 유비를 알았고, 유비는 공명을 알게 되었다. 공명이 유비를 선택한 것도, 유비가 공명을 선택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에 대한 확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명은 다시 화제를 주유의 죽음 쪽으로 돌렸다.

“조문 사절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소. 누가 적당하겠소?”

유비도 눈앞의 일로 관심을 돌렸다. 서촉 정벌은 나중의 일이다. 공명은 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라고 믿을 만큼 유비의 공명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제가 다녀왔으면 싶습니다.”

공명은 자원했다. 동맹국의 도독에 대한 조문이었다. 격이 낮아서도, 또 지나치게 높아서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공명이라면 적당했다. 그러나 유비는 선뜻 내키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군사께서 가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저들이 군사를 해치지나 않을까 두렵소.”

공명은 유비의 마음을 짐작했다. 감격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빙긋 웃으며 유비를 안심시켰다.

“주랑이 살아 있을 때도 저는 두려워하지 않고 동오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주유가 죽었는 데 두려워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공명은 곧 시상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공명의 선택 (213)…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3)
……그대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요, 그대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었거늘. 슬프구나, 이제 다시는 그대를 볼 수 없으니 하늘도 야속하도다. 내 마음 찢어지는 듯 아파 이제 한 잔 술을 부어올리니 영혼이라도 부디 내 정성 받아주오. 내 엎드려 슬피 우노니, 그대 살았을 적 씩씩한 모습과 빼어난 기상을 어찌 잊으리요. 그대 비록 서른여섯에 생을 마쳤으나 그 이름은 백세에 드리우리라. 그대의 죽음을 슬퍼하는 정 간절하니 창자가 천갈래 만갈래 얽힌 듯하고 간장이 슬픔으로 쪼개지는 듯하는구려. 오오, 슬프다, 공근이여. 이제 삶과 죽음으로 영영 나뉘는구려. 나는 이 하늘 아래서 그대 같은 벗을 두 번 다시 얻지 못하고, 다시는 나를 알아주는 이 만나지 못하리라. 아아, 영혼이 있거든 내 잔을 받아주오.

주유의 영전 앞에 선 공명은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그의 조사(弔辭)는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 애달팠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도 이보다 더 슬퍼할 것인가. 동오의 장수들조차 공명의 애곡(哀哭)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조문을 마치고 공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상 부둣가로 나왔을 때였다. 누군가가 공명의 어깨를 치며 준엄한 어조로 꾸짖는 것이었다.

“그대는 주랑을 격동지계로 죽여놓고 이제는 조상(弔喪)까지 왔는가. 대담하구나, 공명이여!”

공명은 기겁을 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

순간, 공명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대나무로 얽은 관을 쓰고 낡은 도포를 입은, 짝눈에 들창코의 사내―그랬다. 나타난 사람은 방통이었다. 공명의 예측은 맞았다. 그는 주유의 장례식에 반드시 방통이 나타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뭘 그리 놀라는가? 죄를 짓긴 지은 모양이구먼. 하, 하, 하.”

방통은 하늘을 쳐다보며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이 사람, 사원. 대관절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나야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돌아다니는 방랑객 아닌가.”

방통을 다시 만난 공명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손을 잡아끌고 배에 올랐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는가?”

“서촉의 하늘은 참으로 높더군.”

방통의 선문답 같은 대답에 공명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자네 결심을 한 게로군.”

“공명이 그토록 바라는 일인데, 내 어찌 감히 그 뜻을 거역하겠는가?”

“하하하. 잘 생각했네. 유황숙의 그릇이라면 자네의 평생 공부가 헛되지 않을 것일세.”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자네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음일세.”

방통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공명은 이내 그가 염려하는 바를 알았다. 공명은 뛰어난 재능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막료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견제를 받아왔다. 특히 관우와 장비의 반발이 심했다. 화용도 사건으로 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제 방통이 출사한다면 그런 일이 또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내부의 견제를 물리치기란 여간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지금까지 쌓아온 유비의 기반마저 무너뜨릴 수도 있다. 방통은 이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유비 진영 내에서의 입지를 미리 보장받고 싶어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 점은 공명도 염려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공명은 이미 그 해결 방법을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방통을 바라보았다.

“유황숙께서는 요즘 매우 능청스러워지셨네.”

“무슨 뜻인가?”

“연극을 즐기신다는 뜻일세.”

그러고는 방통의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를 한참 속삭였다. 어둡던 방통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지며 들창코가 벌름거렸다.

“좋군. 과연 공명의 지모이네.”

일단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작별하기로 했다.

공명의 선택 (215)…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5)
유비는 천천히 입을 열어 방통의 직책을 내려주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형주 땅이 많이 안정되어 마땅한 자리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동남쪽으로 수백 리 가면 뇌양현이라는 고을이 하나 있는데, 그 곳 현령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우선 그 자리를 맡길 터이니 한 번 가보십시오. 뒷날 자리가 비면 선생을 불러 무겁게 쓰겠습니다.”

방통의 눈에 놀라는 기색이 스쳐갔다. 어이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감탄의 눈빛이었다. 그런 방통을 향해 유비가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정도면 되겠소? 그 웃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날로 방통은 뇌양현으로 부임해갔다. 그러나 무슨 속셈인지 방통은 고을을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셔댔다. 백성들의 송사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일체 거들떠보지 않았다. 원망하는 소리가 성 안에 가득했다. 그 소문이 공안에까지 들려왔다.

“방통이 전혀 일을 하지 않아 뇌양현이 몹시 어지럽다고 합니다.”

그 보고에 유비는 크게 노했다.

“그 더벅머리 선비놈이 나의 법도를 어지럽히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는 곧 관우와 장비를 불러 엄하게 명했다.

“너희들은 형주 각 고을을 순시하되 공평하지 못하거나 법을 어기는 현령이 있으면 엄하게 문책하라.”

관우와 장비도 방통의 오만무례한 행동에 대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잘 되었다 싶어 각 고을을 순시하는 척하며 뇌양현으로 들어갔다. 고을 백성들과 관리들이 모두 나와 맞이 하는데 오직 현령인 방통만 보이지 않았다. 장비의 눈꼬리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현령은 어디 있는가?”

관리 하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현령께서는 어젯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깨 관사에 누워 계십니다.”

관우와 장비는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곧 관소로 들어가 정청에 앉아 현령을 불러오게 했다. 한참 후에 방통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관을 삐딱하게 쓰고 옷차림도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아직 취한 기운이 온몸에 역력했다. 관우가 두 눈을 부라리며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우리 형님께서 너를 사람답게 보아 백성을 다스리도록 했거늘, 너는 어찌하여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느냐?”

그러자 방통이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장군께서는 나에게 정사를 다스리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요?”

이번에는 장비가 호령했다.

“너는 이 곳에 부임한 지 백 일이 넘었다. 그런데 매일같이 술만 마시고 송사 하나 처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고을을 팽개친 게 아니고 무엇이더냐?”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장군께서는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이까짓 백 리 고을의 작은 송사를 처리하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두 장군께서는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내가 모든 걸 처결하겠소이다.”

방통은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고을의 관리들을 불렀다.

“그 동안 밀린 문서들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고는 곧장 송사를 처리하는데,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시비 곡직을 가리는 솜씨 또한 청산에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명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송사를 낸 백성들도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방통의 판결에 전혀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관우와 장비는 넋을 빼앗긴 채 방통의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을 본 지 반나절이 채 안 되어 백여 일이나 밀려 있던 일이 모두 처결되었다. 이윽고 방통이 손바닥을 털며 관우와 장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소이다. 이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외다. 조조나 손권 보기를 손톱 밑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나이거늘, 하물며 이까짓 작은 고을의 일에 매일 머리를 쓸 까닭이 어디 있겠소이까? 하, 하, 하!”

관우와 장비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자신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믿지 못할 방통의 능력이었다. 그들은 비로소 방통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아랫자리로 내려가 잘못을 빌었다.

“선생의 크신 재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저희들이 그만 실수를 하였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형님께 말씀드려 선생을 천거해 올리겠습니다.”

“장군들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제야 방통도 겸양해하며 관우와 장비를 높은 자리로 모셨다. 공안으로 돌아온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찾아가 뇌양현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방통의 재주를 칭찬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유비는 비로소 공명과 방통이 목적하는 바를 완전히 깨달았다. 이제 또 하나의 연극이 막을 내릴 차례가 되었다. 그것은 역시 유비의 몫이었다.

“너희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대현(大賢) 한 분을 잃어버릴 뻔했구나!”

이렇게 칭찬하고 곧 두 사람에게 다시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지금 다시 뇌양현으로 내려가 방통 선생을 모셔오너라!”

공명의 선택 (216)…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6)
유비가 방통에게 내린 직위는 공명과 같은 군사중랑장. 서서나 공명 때와 같이 역시 파격적인 등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비의 막료들 사이에 아무런 소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존 세력의 영수라 할 수 있는 관우와 장비가 천거하다시피 영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공명의 계책이 잘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공명과 방통은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마음이 잘 통했고, 서로간에 뜻이 맞았다. 방통이 두 살 연상이다. 방통이 들어오면서 공명의 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공명은 여전히 임증에 머물렀다. 무릉·계양·장사·영릉 등 4군의 행정을 쇄신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방통은 공안에 집무실을 마련하고 유비를 보좌했다.

―형주 땅을 탈환하자. 유비의 참모가 된 방통의 첫 사업이었다. 그는 관우·장비·황충·위연 등을 앞세워 야금야금 형주 땅을 수복하여갔다. 그랬다. 그것은 야금야금이었다. 방통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조조 군과의 전선(戰線)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싸움이랄 것도 없는 소규모 전투였다. 그런데도 반 년쯤 지났을 때는 당양과 형주성이 유비의 땅이 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양양성뿐이었다. 이제 형주의 9할은 유비의 영토가 되었다.

천하 정세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적벽대전 패배 이후 조조는 업 땅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의기가 소침했으나 이내 특유의

호방함을 발휘했다.

―조조는 건재하다! 그는 업 땅에 거대한 동작대(銅雀臺)를 짓고 잔치를 벌임으로써 자신의 위세가 전혀 위축되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떨쳐보였다. 반면, 손권은 말릉에 석두성(石頭城)을 쌓고 이름을 건업(建業)이라 개칭했다. 실질적인 동오의 수도였다. 손권이 건업을 수도로 삼은 것은 역시 조조의 남침을 경계하기 위한 조치였다. 먼저 변화를 일으킨 것은 조조였다. 그 계기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한중 땅을 지배하고 있는 소군벌 장로가 조조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한 것이다. 한중은 서량(西凉)과 파촉 사이에 있는 산악지대였다. 섬서성·감숙성 정남쪽 지역이다. 한중의 지배자 장로는 사교 성격이 짙은 오두미도교(五斗米道敎)의 교주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장릉(張陵), 아버지 장형(張衡)에 이어 삼대째 내려오는 오두미도교는 민중신앙으로서 그 지역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인접 지역인 익주의 유장을 수시로 괴롭혔다. 그 장로가 딴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한중왕(漢中王)에 오르리라. 그 첫번째 조치로 매년 허도에 바치던 조공을 거부했다. 조조로서는 여간 가소롭지 않았다.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 쌀 도적놈이 감히……! 허도에서는 장로를 미적(米賊=쌀도둑)이라 낮추어 부르고 있었다. 다만 상대하기 귀찮아서 한령 태수(漢寧太守) 겸 진남중랑장(鎭南中郞將)의 직함을 내려 달래고 있었을 뿐이었다. 건안 16년(211년) 3월, 마침내 조조는 사예교위 종요(鍾繇)에게 장로 토벌의 명을 내렸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지 2년이 조금 지난 때의 일이었다. 조조의 이 출병은 유비 진영의 막료들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임증에 머물러 있던 공명은 즉각 공안으로 올라올 정도로 조조의 서북행에 관심을 쏟았다.

“긴장하고 있군.”

방통이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진지할 때의 특징이다. 역시 두 눈은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서촉이 달려 있는 문제 아닌가?”

“역시 자네도 그렇게 보고 있었구먼.”

조조의 세력이 미치는 곳은 장안까지뿐이다. 조조가 한중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섬서성과 감숙성으로 뻗어 있는 길을 통과해야 했다. 양주 땅이다. 문제는 그 곳을 지배하고 있는 소군벌들의 반응이었다.

“이제까지 관중(關中)의 장수들은 중도를 취해도 무방했지만, 지금은 뜻을 명확히 할 수밖에 없겠지.”

공명이 중얼거렸다.

공명의 선택 (217)…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7)
한중 이북, 즉 양주 일대를 관중이라 한다. 동쪽의 함곡관(函谷關), 서쪽의 산관(散關), 남쪽의 무관(武關), 북쪽의 소관(蕭關)―이렇게 4개의 관문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중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았다. 크게는 마초와 한수(韓遂), 작게는 후선(侯選), 정은(程銀), 이감(李堪), 장횡(張橫), 양흥(梁興), 성의(成宜), 마완(馬玩), 양추(楊秋) 등이 연합하여 각기 제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들을 그 지역 사람들은 ‘관중십장(關中十將)’이라고 불렀다. 그 중 마초와 한수가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명은 이번 조조의 서북 출정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었다.

“장로 토벌이 목표가 아니라 관중십장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함이 분명하네.”

“공감하네. 만일 정말로 장로를 토벌할 생각이었다면 종요 정도의 사람에게 명을 내리지는 않았을 테지.”

방통도 공명의 시각에 동조했다.

―길을 빌려주면 그들은 조조의 편이다. 그러나 길을 내주지 않으면 조조의 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조는 마초를 비롯한 관중십장이 적이냐, 아니냐부터 알아보고 싶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는 일 아닐까. 마초는 조조와는 원수지간 아닌가.”

방통의 분석이었다. 마초의 아버지 마등(馬騰)은 조조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마등뿐 아니라 그 자식들까지 모두 조조의 손에 의해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마초와 그의 사촌동생 마대(馬岱)뿐이었다. 당연히 마초는 조조의 명을 받은 종요의 장로 토벌행을 가로막을 것이었다.

“빌미를 만들자는 의도겠지.”

공명이 덧붙였다. 방통의 예견도, 공명의 짐작도 모두 맞아떨어졌다. 종요는 장안성에서 나오자마자 마초와 한수의 공격을 받았다. 마초는 뛰어난 맹장이었다. 한왕조 초기의 명장 한신(韓信)에 버금가는 장수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였다. 그런 마초를 종요가 당해낼 리 없었다. 장안성까지 빼앗기고 종요는 허도로 쫓겨갔다. 조조는 이제 마초와 한수를 비롯한 관중십장의 마음을 분명히 알았다.

―장로는 나중이다. 먼저 관중을 토벌하리라! 조조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 선봉장에는 안서장군(安西將軍) 조인을 임명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군하라! 적을 만나도 싸우지 마라. 이상한 명령이었다. 조조 자신도 느릿느릿 행군했다.

“일거에 섬멸하려는 속셈이군.”

공명은 조조의 의도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관중십장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란 말이지?”

“그렇다네. 마초, 한수, 양추 등 하나하나 토벌하려면 적어도 2, 3년쯤 걸리겠지. 그러나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항해온다면 힘은 들지 몰라도 단 한 번 싸움으로 박살낼 수 있겠지.”

“생각보다 무서운 자이군, 조조는.”

“관중십장 중 똑똑한 자가 있다면 제각기 방어태세를 갖추겠지만 그런 안목을 가진 자가 있을는지…….”

기대라기보다는 우려였다. 그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힘을 합하면 조조를 물리칠 수 있다. 마초가 선동하고 한수가 동조했다. 나머지 여덟 장수들은 망설이다가 차례로 마초의 진영으

로 몰려들었다.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관중십장들이 하나하나 합류할 때마다 조조의 입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황풍의 보고였다. 공명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멍청이 같은 자들이로군!”

“오히려 잘 된 일 아닐까?”

방통의 코가 다시 -벌름거렸다.

“서촉 일 말인가?”

공명도 방통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유장의 성품으로 본다면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일 것이 분명하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르네.”

“그도 그렇군.”

공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이목은 실상 조조에게가 아니라 서촉의 내부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공명은 아직 방 한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황풍을 돌아보았다. 황풍은 공명의 뜻을 이내 알아챘다.

“서촉에 다녀올까요?”

“외부로 나가는 사신(使臣)을 잘 살펴야 할 것일세.”

“명심하겠습니다.”

황풍은 다시 사라졌다.

서북방의 일은 계속해서 공안에 머물러 있는 공명과 방통에게 보고되었다.

“관중 연합군과 조조 간에 일전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조조의 대승이랍니다. 관중십장 중 성의와 이감은 목이 잘려 죽었고, 양추는 안정(安定) 땅으로 달아났다가 끝내는 항복하여 조조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초는?”

“마초는 양주 서쪽의 사막 너머로 달아나 오랑캐에게 의탁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관중십장은 한 싸움에서 조조 군에게 대패해 섬멸당하고 만 것이다. 이로써 조조는 서북쪽의 땅마저 평정했다. 이제 불똥은 한중의 장로, 아니 익주의 유장에게로 튈 판이었다. 공명과 방통이 손꼽아 기다리던 일이기도 했다. 한령 태수 장로는 조조의 한중 토벌 소식을 듣고도 마음을 푹 놓고 있었다. 중원과 한중을 가로막고 있는 마초의 호랑이 같은 용맹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초를 비롯한 관중십장이 조조와의 한 번 싸움에서 여지없이 격파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장로는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부하를 불러놓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서량의 범 같은 장수 마초가 조조에게 크게 패했다고 한다. 이제 조조는 반드시 우리 한중땅을 노릴 터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모두들 겁을 집어먹고 있는 중에 모사 염포(閻圃)만이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로는 그를 보고 기대하는 말투로 물었다.

“그대에게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조조가 비록 마초를 깨고 관중을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주공께서는 그다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곳 한중은 10만이 넘는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데다가 재물이 많고 곡식이 풍부합니다. 또한 사방의 지세가 험해 치기는 어려워도 지키기는 매우 쉽습니다. 아마도 조조는 쉽사리 이 곳을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업으로 돌아갔다가 후일을 기약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주공께서는 익주를 도모하십시오. 익주의 유장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약하고 우유부단합니다. 민심 또한 크게 잃고 있으니 이 기회에 파촉을 공격하여 손에 넣은 뒤 한중왕에 오르면 가히 조조의 대군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든지 정세를 올바르게 분석하고 앞날을 계획하는 재사는 있는 모양이었다. 한중에서는 염포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장로는 염포의 말을 듣자 눈앞이 훤히 트이는 듯했다.

“그렇군. 파촉 땅만 손에 넣으면 가히 한 나라를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유장은 내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원수가 아닌가. 내 이 기회에 마땅히 서천으로 진출해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곧 아우 장위(張衛)와 함께 서천을 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조조의 향후 움직임에 대한 염포의 예견은 정확했다. 내처 한중까지 밀고 내려올 것 같은 기세이던 조조가 군사들만 관중에 배치하고 자신은 업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해 12월의

일이었다.

공명의 선택 (218)…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8)
일찍이 익주목 유장은 장로를 토벌하려다가 그 어머니를 죽인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유장과 장로는 원수지간으로 지냈다. 유장은 늘 장로의 침범을 경계했다. 많은 정탐꾼을 한중 땅에 심어놓고 그 곳의 움직임을 살피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장로가 서천을 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곧장 익주의 유장에게도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유언만큼 심지가 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을 싫어했다. 조조가 관중을 평정했다는 소식에도 몸을 떨었지만, 장로가 서천 정벌군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보고에는 그야말로 사색이 다 되었다. 심복 부하들을 불러 연일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유장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우유부단함의 전형이었다.

유장의 부하 중에 장송(張松)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별가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으로 치면 보좌관 역이다. 재주가 톡톡 튀는 인재였다. 하지만 생김새가 괴이쩍게 생겼다. 얼굴은 깎아낸 듯 비딱했고, 이마는 튀어나왔고, 머리 끝은 이상하게 뾰족했다. 이것뿐이라면 어찌 괴이쩍다고 할 것인가. 들창코에다 일그러지기까 지 했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잇몸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한마디로 추남(醜男) 중의 추남이 었다. 게다가 키까지 작아 5척이니 광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외모였다. 그런데도 별가의 직책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여간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님에 틀림없다. 장송은 서촉 태생의 토박이였다. 누구보다도 서촉의 번영과 안정을 원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나약한 유장을 몹시 못마땅히 여기고 있었다.

―익주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한 인물이다. 친구인 법정(法正)에게 늘 이렇게 투덜대었다.

―조조처럼 강하지도, 유비처럼 덕이 깊지도 않다. 법정도 장송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불만파 지식인들이었다.

―차라리 조조나 유비가 이 곳을 통치하면……? 그들의 대화는 점점 대담해져갔다.

―말이 나온 김에 아예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 어떨까? 못생겼지만 눈빛만은 맑고 투명한 장송이었다. 법정은 그 눈빛에서 촉 땅을 아끼는 장송의 진심을 읽었다. 법정은 촉 땅 태생이 아니었다. 부풍군(扶風郡) 미현(嵋縣) 사람이다. 현재의 섬서성이니, 관중 사람이라고 해야 했다. 자를 효직(孝直)이라 했다. 재능은 뛰어났으나 사람됨이 편협하고 품행이 바르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 심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장송과는 절친하게 지냈다. 천재들의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인가, 아니면 현실에 쉽게 순응하지 못하는 열등감의 공통점 때문인가.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좋은 일이지.

―먼저 조조부터 알아보는 것이 낫겠지?

―돌아오는 길에 유황숙에게도 들러보게.

―손권은?

―주랑이 살아 있다면 모를까…… 지키기에 급급할 걸세.

이런 대화가 있은 다음 날, 익주 별가 장송은 회의 석상에서 유장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장로가 우리 서천을 범하려 하고 있다지만, 주공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썩지 않은 이 세 치 혀로써 장로로 하여금 감히 우리 서천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장송의 이 같은 말에 유장은 기대하는 눈길로 물었다.

“별가는 어떤 계책으로 나의 근심을 풀어주려는가?”

“조조는 동북 평정에 이어 이번에 서북의 관중까지 소탕한 천하 제일의 강자입니다. 장로가 우리 서천을 넘보고 있는 것은 조조가 업 땅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 예물을 갖추어주시면 제가 업 땅으로 가서 친히 조조를 찾아뵙고 한중의 장로를 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조조가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장로가 어느 겨를에 우리 서천을 엿볼 수 있겠습니까?”

장송의 말을 듣는 순간 유장은 무릎을 쳤다.

“좋은 계책이오. 조조가 한중을 쳐주기만 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소?”

며칠 후, 장송은 수레에 예물을 잔뜩 싣고 업을 향해 떠났다. 그의 품속에는 서천의 지세와 성곽과 인구 수까지 자세히 기록된 지리도본(地理圖本)이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법정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심해서 다녀오게. 조조의 사람됨을 잘 살펴야 하네.”

“염려 말게나. 자네나 입조심하고 있게.”

법정의 배웅을 받으며 성도성을 나서는 장송의 뒤를 그림자 하나가 몰래 뒤따르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19)…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9)
업성에 당도한 장송은, 그러나, 좀처럼 조조를 만나볼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서북의 관중 땅마저 평정한 조조는 천하를 다 손에 넣은 듯한 거만함에 싸여 있었다. 마음이 우쭐하고 방자한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제 나를 상대할 자가 누구냐?

이런 조조에게 서천에서 왔다는 사자(使者)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예물만 바치고 가면 될 것을 굳이 나를 보려는 까닭이 무엇이냐?

승상부로 통문을 내었지만 장송은 이런 대답만 들었다. 장송은 스스로 천재라고 자부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예물을 바치러 온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서천의 앞날과 관계되는 중대한 사명을 띤 사자였다. 더욱이 그의 품속에는 서천지도가 숨겨져 있다. 그 지도를 내놓느냐, 아니 내놓느냐에 따라서 천하 판도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그는 조조를 배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조를 시험하러 왔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조조를 만나보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조조는…… 아니다.’

그는 실망하기에 앞서 오기가 생겨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보고야 말리라!’

승상부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쓸 정도로까지 장송의 고집도 어지간했다. 닷새 만에야 겨우 승상부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 그나마 면담시간은 일각도 주어지지 않았다. 풍채가 보잘것없고 생김새도 괴이한 장송을 보는 순간, 조조의 얼굴에 멸시하는 기색이 완연히 떠올랐다.

“그대가 서천에서 왔다는 장송인가?”

낮고 묵직한 음성이었다. 관록이라기보다는 교만한 어조였다.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장송은 자신의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익주에서는 어찌하여 자주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는가?”

“길이 멀고 험한데다가 사방이 어지러워 조공을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장송은 천하 정세를 논하려는 의도에서 일부러 사방이 어지럽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말이 오히려 조조의 화를 돋우었다.

“내가 중원을 평정하여 천하가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는데, 사방이 어지럽다고 하니 너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험악한 어조였다. 그러나 이미 조조에 대한 마음을 정한 장송이었다. 조금도 놀라지 않고 뒤틀린 말투로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세상 보는 눈이 너무 어둡습니다. 지금 남쪽에는 손권이 건재하고, 북쪽에는 장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유비가 탄탄히 기반을 잡아가고 있는데 태평성대라는 말을 하시니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대담한 반격이었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과연 조조의 반응은 격동적이었다.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조조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노기어린 눈길로 장송의 기형적인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껄껄 웃었다.

“서촉에도 사람이 꽤나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러고는 옷자락을 떨치고 일어나 후당으로 들어가버렸다. 장송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버티듯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좌우 사람들이 그런 장송을 타박했다.

“당신은 사신의 몸으로 어찌 그리 예의도 모르시오. 다행히 승상께서 멀리 온 당신의 낯을 보아 죄를 묻지 않으신 것이니 어서 돌아가시오. 공연히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화만 당할 것이외다.”

배알이 틀린 장송은 그들에게도 한마디 쏘아붙였다.

“우리 서천에서는 아첨으로 윗사람을 모시지 않소.”

그 때였다.

“그렇다면 우리 중원에는 아첨꾼만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찌르듯 반박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가늘었다. 눈빛이 유난히 맑았다. 장송은 첫눈에 그가 출중한 재사임을 알아보았다.

“그대는 누구시오?”

장송은 호기심을 느끼고 물었다.

“나는 양수(楊修)라는 사람이오.”

자는 덕조(德祖), 이각·곽사의 난리 때 많은 공을 세운 태위 양표(楊彪)의 아들이었다. 학식이 높고 말솜씨가 뛰어났다. 식견 또한 남다른 데가 많아 중원의 재사라 불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자존심이 여간 높지 않았다.

공명의 선택 (220)…제18장 서쪽을 바라보며 (10)
장송과 양수―. 한 사람은 서천의 천재요, 또 한 사람은 중원이 자랑하는 천재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알아보았다. 장송이 먼저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공의 존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양수 역시 천하의 모든 선비를 얕보고 있던 차에 장송을 대해보니 말 속에 풍자가 가득했다. 가히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를 데리고 서원(書院)으로 들어갔다.

“서촉 길이 멀고 험하다는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양수가 먼저 말문을 꺼냈다. 예의를 갖춘 말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장송의 재주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주공의 명을 받은 몸입니다. 뜨거운 불 속이라 한들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장송의 적절한 응대였다. 양수는 속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것이 기뻤다.

“촉은 어떠한 땅입니까?”

“촉은 중원의 서편에 있는 곳으로 익주라고도 합니다. 길은 금강(錦江)에 가로막혀 험하고, 땅은 검각(劍閣) 연봉(連峰)에 둘러싸여 웅장합니다.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는 천 리에 이어져 있고, 시정과 여염은 즐비하게 맞닿아 있지요. 밭은 기름지고 논은 푸르러 홍수와 가뭄의 근심이 없고, 나라는 넉넉하고 백성들은 풍요로워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합니다. 하늘 아래 촉만큼 살기 좋은 고장은 없을 것입니다.”

“촉이 배출한 인물에는 어떠한 사람이 있습니까?”

“문장으로는 사마상여(司馬相如)요, 장수로는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있습니다. 의원으로는 중경(仲景)이 있고, 점술가로는 군평(君平)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빼어난 사람이 수없이 많으니 어찌 촉의 인물을 모두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서촉에는 공 같은 인재가 몇이나 됩니까?”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은 수레로 날라야 할 만큼 많습니다.”

“공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습니까?”

“분에 넘치게도 별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온데 공은 조정에서 무슨 직함을 맡고 있습니까?”

이번에는 장송이 물었다.

“승상부의 장고 주부(掌庫主簿)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양수의 솔직한 대답에 장송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공은 여러 대 동안 높은 벼슬을 해온 명문의 후예입니다. 또한 공의 재주가 예사롭지 않은데 천자를 보좌하지 않고 어찌 구차하게 승상부의 이름없는 벼슬아치가 되셨습니까?”

문득 양수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스쳐갔다.

“아직 승상께 가르침을 받을 점이 많아 이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궁색한 변명이었으나 장송은 이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하하하, 내가 알기로 조 승상은 글이 짧아 도학에 밝지 못하고, 그렇다고 병법에도 뛰어나지 않아 손오(孫吳)의 오묘한 이치조차 터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천하의 재사이신 공을 가르쳐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공께서는 아첨이 너무 심하십니다.”

고의로 양수를 자극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공이 조 승상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공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양수는 장송의 말에 휘말려드는 줄도 모르고 서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장송에게 내보였다. 장송이 받아보니 『맹덕신서(孟德新書)』라는 병법책이었다. 장송은 그 책을 펼쳐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살폈다. 모두 13편으로 되어 있었다. 군사를 부리는 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윽고 책을 덮은 장송이 양수를 향해 물었다.

“이 책을 내게 보인 까닭이 무엇이오?”

양수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 책은 조 승상께서 옛일과 현대의 일을 두루 살피시어 저술한 병법책입니다. 『손자병법』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습니까? 공은 조 승상이 글이 짧고 병법에 어둡다고 하였으나,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조 승상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양수의 말에 장송은 별안간 고개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 책은 우리 서촉에서는 삼척동자도 다들 외우고 있는 터인데, 조 승상이 새로이 저술했다니요? 이 책의 내용은 전국시대의 이름없는 선비가 지은 병법서와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지은 것처럼 『맹덕신서』라는 제목을 붙이니,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양수는 장송의 장난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이 책은 분명히 조 승상께서 지으신 책이오. 아직 세상에 발표하지 않은 책인데, 서촉의 어린아이들이 외우고 있다니 말도 되지 않소이다.”

“공께서 정히 내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내가 한 번 외어보겠습니다.”

장송은 말을 마치자마자 『맹덕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한 자도 틀리는 곳이 없었다. 양수는 깜짝 놀랐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청난 기억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공은 과연 천하의 기재입니다. 한 번 보고 이렇듯 물 흐르듯 외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양수는 장송을 잠시 그 곳에 앉혀두고 조조를 찾아갔다. 그를 다시 조조에게 면대시키려는 생각에서였다.

“장송은 기재입니다. 잘 달래어 중히 쓰십시오.”

그러고는 서원에서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조조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양수에게 말했다.

“좋다. 내일 다시 만나보리라.”

다음 날이었다. 양수는 장송을 데리고 군사를 사열하고 있는 조조에게로 나갔다. 조조는 사열을 마치고 나서 자랑스러운 듯이 장송을 향해 물었다.

“그대는 서천에서도 이러한 영웅의 기상을 본 적이 있는가?”

장송을 기죽이려는 마음에서 던진 물음이었지만, 그것은 장송을 잘 알지 못한 조조의 실수였다. 장송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서촉에서는 이렇듯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과 덕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릴 뿐입니다.”

순간 조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눈동자에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스쳐갔다. 양수가 눈치를 채고 장송을 말리려 들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냐? 당장 저놈을 내치도록 하라!”

결국 장송은 조조와의 두 번째 면담에서도 냉대를 받고 쫓겨났다. 업성을 나왔다. 장송은 참담하면서도 허탈했다.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 본시 서천지도를 조조에게 넘겨주려 했는데, 조조가 이처럼 사람을 함부로 대할 줄 누가 알았으랴. 내가 서촉을 떠나올 때 주공에게 큰소리를 쳤는데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그냥 돌아간다면 서천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효직(孝直=법정의 자)의 말대로 유현덕을 만나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겠다.’

그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형주를 향하고 있었다. 유비를 만나보고 오라는 법정의 부탁이 마치 예언처럼 생각되었다.





원검일생록-3 [17]
<공명의 선택> 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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