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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13 21:47:27, Hit : 3681, Vote : 308
 <공명의 선택> 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공명의 선택 (201)…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1)
공안(公安)―. 유비가 유강구에 머물면서 새로이 지어붙인 땅이름이었다. 두루 평안하게 다스리겠다는 유비의 의지이기도 했다. 유비는 장수의 소질보다는 확실히 정치·행정가의 능력이 더 뛰어났다. 공안을 다스린 지 한 달이 채 안 돼 그 곳 인심은 완전히 유비에게로 쏠렸다. 그뿐만 아니라 강 건너 강릉에서는 물론 멀리 양양이나 여강(廬江)에서도 유비에게 의탁하기 위해 많은 백성과 선비들이 공안으로 찾아들었다. 그 중 특히 여강의 호족인 뇌서(雷緖)의 투항은 유비의 명성과 덕망이 강동 일대까지 미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일이었다. 유표의 아들 유기를 형주목으로 추대한 공명의 대의명분 정책이 맞아떨어진 순간이기도 했다. 뇌서가 거느리고 온 군사 수만도 3만 명이 넘었다. 내부가 탄탄하게 다져짐에 따라 공명은 이제 그 세를 넓힐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호남 사군(湖南四郡). 공명이 노리는 곳이었다.

“계양(桂陽), 무릉(武陵), 영릉(零陵), 장사(長沙) 등 4개 군을 ‘호남 사군’이라 합니다. 땅이 비옥하고 넓은 것이 그 특징이지요. 이 곳에서 나오는 곡식과 물자를 비축하여 쌓는다면 앞날을 세우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공명의 계획에 유비는 크게 기뻐했다.

“호남 사군 중 어느 곳을 먼저 취하는 것이 좋겠소?”

“상수(湘水) 서쪽의 영릉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 곳부터 차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다음 상수 동쪽에 있는 계양과 장사를 취하고, 마지막으로 무릉을 취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습니다.”

“군사께서 직접 원정을 나갈 작정이시오?”

무슨 생각에서인지 유비가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려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군사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 곳 호남은 예전부터 민란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가능한 한 사람들이 상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공명은 유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묻지 않아도 유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인(仁)과 덕(德)을 아시는 분!’

전쟁의 목적은 승리에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하지 않고도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공명이 유비에게 감복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릴 적에 경험한 조조의 서주 대학살이 뇌리를 스쳐갔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지요. 일개 무명의 군사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군사께서는 이 점을 잊지 마시고 부디 아름다운 승리를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유비는 ‘아름다운 승리’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었다.

“주공의 귀한 말씀 가슴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출전을 앞둔 장수에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군주가 있을까. 공명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첫 원정이었다. 선봉장에는 장비를 임명했다. 후군은 조운에게 맡겼으며, 중군은 공명 자신이 거느리기로 했다. 총 군사는 1만 5천 명.

“미염공께서는 공안에 남아 주공을 지켜드리시오.”

군령장 사건 이후 공명과 관우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공명은 관우의 점잖은 인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당대 제일의 장수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관우는 가슴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공명 역시 그 수염의 아름다움을 몹시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관우에게 ‘미염공(美髥公)’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이 별칭을 받고 관우는 어린애처럼 좋아하였다.

“이 곳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디 개선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관우의 배웅을 받으며 공명은 공안을 떠나 영릉으로 향했다. 영릉은 공안에서 정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을이었다. 그 무렵 영릉 태수는 유도(劉度)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공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에 아들 유현(劉賢)과 상장 형도영(邢道榮)에게 군사 1만 명을 내주어 유비 군을 막게 했다. 양 측 군대는 성 밖 50리쯤 되는 곳에서 마주쳤다. 형도영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나가 외쳤다.

“반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그 때 유비 군의 진문이 열리며 누런 기를 꽂은 사륜거(四輪車) 하나가 미끄러지듯 굴러나왔다. 수레 위에 젊은 선비 하나가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윤건(綸巾)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를 입고, 손에는 백우선(白羽扇)을 쥔 모습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자태였다. 형도영이 놀란 눈으로 수레 위의 선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낭랑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남양 땅의 제갈공명이다. 내가 이렇게 온 것은 너희들에게 유황숙의 큰 덕을 입히려 함이니, 당장 말에서 내려 항복하여라.”

공명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형도영은 도끼를 높이 쳐들고 다짜고짜 공명을 향해 덤벼들었다. 공명은 재빨리 수레를 돌려 진문 안으로 달아났다. 형도영도 놓칠세라 진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때 진문이 닫히며 진세가 변하였다. 형도영은 주춤했으나 공명의 군사들이 별로 많지 않음을 보고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과연 공명의 군사들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공명의 뒤를 따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명의 선택 (202)…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2)
형도영은 누런 기가 꽂힌 수레를 바라보고 급히 뒤쫓았다. 산모퉁이를 지날 때 홀연히 사륜거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한 장수가 뛰쳐나왔다. 호랑이 수염에 고리눈을 부릅뜬 그 장수의 손에는 긴 사모(蛇矛)가 들려 있었다.

“이놈, 연인 장비가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도영은 장비의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솜씨를 겨루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 도끼를 휘두르며 장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는 장비의 적수가 못 되었다. 서너 합을 부딪치다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겨우 장비를 떼놓고 숨을 돌리려는데, 앞길에서 또 한 장수가 튀어나오며 형도영을 꾸짖었다.

“이놈, 너는 상산 땅의 조자룡을 알아보겠느냐?”

이미 장비에게 혼쭐이 난 형도영이었다. 상산 조자룡이란 말을 듣자 기운이 빠졌다. 달아날 마음도 잃었다. 말에서 내려 항복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운은 그런 형도영을 묶어 공명에게로 끌고 갔다. 공명이 밧줄에 묶인 형도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반쯤은 죽을 각오를 한 형도영은 공명의 물음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저의 항복은 진심입니다. 군사께서는 믿어주십시오.”

“무엇으로 너의 항복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게 하겠느냐?”

형도영은 재빨리 생각을 굴린 후 대답했다.

“유현을 잡아 바치겠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유현을 잡겠다는 것이냐?”

“군사께서 저를 놓아주신다면 저는 일단 진채로 돌아가 유현을 속여 마음을 놓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밤 군사께서 야습을 하십시오. 그 때 제가 안에서 호응하면 쉽게 유현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현만 사로잡는다면 그 아비 유도는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

형도영의 말에 공명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곁에 있던 장비와 조운이 고개를 저으며 믿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공명은 못 본 체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형 장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무기를 내어드려라.”

죽는 줄만 알았던 형도영은 공명이 쉽게 자신의 말에 빠져들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급히 말을 달려 유현이 머물고 있는 진채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공명이란 자도 별것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풋내기 서생에 불과합디다.”

형도영은 그간의 일을 유현에게 낱낱이 보고하며 이렇게 공명을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좋겠소?”

유현이 물었다. 형도영은 약은 체 꾀를 내었다.

“장계취계(將計就計)입니다. 저 쪽의 계책을 우리가 거꾸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오늘 밤 공명이 야습해오면 진문 밖에 매복해 있다가 공명을 사로잡아버립시다.”

유현이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그는 곧 군사를 움직여 진문 밖에 매복시키고 진 안에는 허장성세로 빈 깃발만 가득 세워두었다. 그 날 밤 이경 무렵, 과연 한 떼의 군마가 유현의 진채를 습격해왔다. 유현과 형도영은 공명이 자기들의 계교에 말려든 것으로 알고 일시에 달려나가 진채에 불을 지르고 있는 유비 군을 덮쳤다.

“퇴각하라!”

누군가가 소리치자 유비 군은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에 바빴다. 유현과 형도영은 신바람이 나서 그 뒤를 쫓으며 공명을 찾았다. 10여 리를 쫓았으나 끝내 공명을 잡지 못했다. 유비 군이 버리고 간 병장기만을 수습하여 자기 진채로 돌아온 유현과 형도영은 깜짝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진문 앞에 한 장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은 어디를 갔다가 지금 돌아오느냐?”

형도영이 일렁이는 횃불 사이로 바라보니 바로 장비였다. 기겁을 한 형도영은 얼른 유현에게 말했다.

“진채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공명의 진채를 들이치는 것이 낫겠소.”

유현과 형도영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5리도 채 못 가서 그들은 또 한 장수와 마주쳤다.

“간사한 형도영은 어서 목을 바쳐라!”

어둠 속에서 한줄기 칼빛이 그어졌다. 형도영은 그 장수가 조운인 줄도 모르고 목을 잃고 그대로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유현은 형도영이 죽는 것을 보자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급히 말을 몰아 길 닿는 대로 달렸다. 하지만 그 역시 그리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다. 어디서 나타났는가. 장비가 그의 뒤를 쫓더니 긴 팔을 뻗어 덥석 유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유현은 찍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그

대로 장비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밧줄에 묶인 유현이 공명 앞으로 끌려나갔다. 그런데 공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수 유현의 결박을 풀어주고 위로의 술까지 따라주었다. 유현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서 성으로 돌아가 그대 아버지에게 항복하라 권하시오. 유황숙을 섬기면 복이 있을 것이로되, 거역하면 멸망만이 있을 뿐이오.”

유현은 그 길로 영릉으로 돌아갔다. 영릉 태수 유도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항복을 나타내는 흰 기를 성벽 위에 내걸었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유도가 태수의 인수를 들고 나와 공명을 맞이했다. 공명은 그런 유도에게 도로 인수를 내밀며 말했다.

“계속 영릉을 맡아 다스리십시오.”

영릉 태수 유도가 공명에게 항복하고, 공명은 유도에게 태수의 인수를 다시 내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호남 일대의 인심은 온통 유비에게로 쏠렸다. 영릉 이외의 계양, 장사, 무릉은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일종의 순방과도 같았다. 공명이 영릉을 떠나 계양으로 향하자 계양 태수 조범(趙範)은 영접하듯이 군 경계로 나와 공명을 맞이했다. 이런 식으로 장사와 무릉마저 평정한 공명은 불과 두 달 만에 호남 사군을 모두 평정하고 공안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유비는 곡식과 물자가 풍부해졌다. 그 동안 강릉성의 주유는 장강 이북에 펼쳐놓은 조조 군의 강력한 방어망에 가로막혀 한 치도 북상하지 못하고 그 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모든 것이 공명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공명의 선택 (203)…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3)
유비 진영에 조직 개편이 있었다. 유비는 좌장군, 유기는 형주목―. 변함이 없다. 그 아래로 양양 태수에 관우, 의도(宜都) 태수에 장비, 계양 태수에 조운이 각각 임명되었다. 미축은 좌장군 종사중랑에 올랐다. 요즘의 비서실장이다. 6개월 전에 비하면 대대적인 승진이었다. 공명만은 여전히 군사중랑장의 직위를 유지했다. 모두 2천 석의 녹봉이었다. 유비와 유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서열을 굳이 따져보자면 관우가 제1이요, 공명이 가장 낮은 지위였다. 그러나 그가 유비에게 출사한 지 이제 일 년이 조금 넘었고, 또 그의 나이가 29세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파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관우와 장비의 관직이었다. 그들이 태수 직함을 받은 양양과 의도는 유비의 관할이 아닌 조조의 땅이었다. 더욱이 양양에는 조조가 임명한 악진이 버티고 있다. 부임하려야 부임할 수가 없다. 언뜻 보면 명예직이랄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었다.

“형주가 우리 땅임을 확인시켜두려는 것뿐입니다.”

다분히 주유를 의식한 공명의 인사정책이었다.

―장차 그 땅을 점령하시오. 라는 뜻도 숨겨져 있었으나,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위와 임무는 별개였다. 조조는 허도에 머물러 있고, 강동의 손권은 장강을 따라 구축된 3천여 리의 전선(戰線)에 군사를 배치해놓는 바람에 전혀 형주 남부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유비 진영으로서는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실이 무엇인가. 국방과 경제였다. 국방은 명목상의 양양 태수 관우와 의도 태수 장비에게 맡기면 충분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무장인 것이다. 문제는 경제력이었다.

“임증(臨蒸)으로 거처를 옮길까 합니다.”

공명은 공안을 떠날 것을 자청했다. 임증은 호남 사군의 한복판에 위치한 작은 땅이었다. 4개 군이 거의 같은 거리에 있다. 상수(湘水)의 지류가 흐르는 곳이다. 임증에서 상강 본류까지는 50리 거리였다. 언제든지 배를 타고 호남 사군을 돌아볼 수 있었다. 현재의 호남성 형양시(衡陽市) 근교이다. 호남 사군이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민란에 시달리는 것은 경영의 부재 때문이라고 공명은 보고 있었다.

가렴주구―. 탐관오리―. 백성들에게서 거두어간 세금은 몽땅 토호나 하급 관료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군(郡)의 재정은 언제나 바닥이었다.

“군의 행정을 쇄신해야 합니다.”

스스로 재정 담당관의 임무를 떠맡은 공명이 임증으로 떠나가면서 한 말이었다. 공명은 영릉, 계양, 장사, 무릉 등 4개 군을 직접 돌아다니며 과감하게 감세 정책을 폈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만 제거해도 군의 재정은 금방 넉넉해질 것이었다.

―동오 군의 태사자가 합비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황풍의 정보 수집 능력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호남 일대가 안정되면서 공명은 운조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그로 인해 동정호 일대는 운송업이 크게 성행하였다. 자연히 황풍의 입지도 높아졌다. 그것은 곧 그가 수집하는 정보의 양이 그만큼 많고 정확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공명은 임증에 앉아서도 북방·강동의 일까지 소상히 전해 듣고 있었다.

―태사자는 죽기 전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대장부가 난세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삼척검(三尺劍)을 허리에 차고 세상에 길이 남을 공을 세워야 하거늘, 이제 나는 큰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태사자만의 절규뿐이겠는가.

―손권은 결국 합비를 포기하고 오군으로 돌아갔습니다.

공명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황풍은 이미 소리 없이 사라져간 뒤였다.

‘병력을 집중시켜야 했을 것을…….’

그랬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오히려 손권에게 자만심을 안겨주었다. 예부터 강동 땅은 인구가 현저하게 부족했다.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인구가 부족하니 군사 수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적벽의 승리를 과신하고 강릉에서부터 오군에 걸친 3천여 리의 장강 연안에 군사를 분산, 배치했다. 더욱이 주유 같은 지략가를 멀리 강릉에 박아놓은 것은 공명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합비성 공략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조조 군과 동오 군의 장기적인 소모전은 유비 측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길어야 2년. 그 사이에 적어도 손권과는 맞먹을 수 있는 양곡과 물자와 군사력을 길러놓아야 했다.

―그 다음에 파촉이다.

‘천하삼분의 계’ 중 마지막 순서이다. 그 때까지만……. 공명은 조조와 손권의 소모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빌었다. 한 가지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 인재 등용이었다.

‘서원직이 아깝다.’

형주 남부를 완전히 평정하고 난 후 공명은 더욱 서서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서서가 어째서 그토록 자신의 출사를 위해 노력했는지 공명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하나의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방통. 적벽대전 당시 조조 진영을 찾아가 은근히 연환계를 흘린 방통이 또다시 사라져버렸다. 황풍에게 특별히 부탁했으나 아직 그의 종적을 알아내지 못했다.

‘찾으리라!’

임증에 마련한 거처에서 공명은 이렇게 장시간 사색에 잠길 때가 많았다.

공명의 선택 (204)…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4)
그 해 여름, 공명은 다소 우울했다. 두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부보가 잇달아 임증으로 날아든 것이다.

―감부인 죽음. 유비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미부인과 감부인이 그들이었다. 그 중 미부인이 지난 해 조조 군에게 쫓기어 남하하던 중 장판벌에서 스스로 우물 속에 빠져 죽었다. 유비의 외아들 아두(阿斗)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 년이 채 안 되어 감부인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생만 실컷 하다가…….”

목이 메어 울먹이는 유비의 말처럼 온갖 고초를 겪다가 이제 형편이 펴질 만하게 되자 약속이나 한 듯 세상을 떠났다. 감부인은 아두의 생모이기도 했다. 패현의 가난한 집안 태생이다. 유비가 도겸의 배려로 소패에 거주할 때 그의 첩이 되었다. 유비가 싸움에 패할 때마다 그 가솔들은 적장의 포로가 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형주로 들어와 뒤늦게 아두를 낳았다. 그 아두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처복이 없는가……?

눈이 붉게 충혈된 유비의 중얼거림에 공명은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나이 48, 9세에 두 차례나 아내를 잃은 유비의 심정을 29세의 공명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위로의 말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지도 몰랐다.

“어진 부인이셨는데…….”

임증에 돌아와서도 공명의 아내 황용은 여전히 눈물을 찍었다. 장판파 들판에서 함께 고생했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난세에 태어난 여인들의 슬픈 운명을 서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못 되어 형주목 유기가 병사(病死)했다는 부음을 들었다.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예전부터 병약하기는 했다. 양양 시절 계모 채씨에게서 시달리던 그는 아마도 강하 태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공명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던 유기의 겁에 질린 얼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비의 슬픔은 공명과는 또 달랐다.

“내 지하에서 유경승의 얼굴을 어찌 대할 것인가?”

유기는 유표의 장남이었다. 적벽대전 후까지도 유비는 유표와의 의리를 잊지 못하고 그 핏줄로 하여금 형주목에 오르게 했다. 공명이 유기의 형주목 옹립을 정치적인 면에서 추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유비는 슬프디슬프게 유기의 관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감부인의 죽음은 유비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였으나, 유기의 죽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상한 소문이 호남 일대에 퍼져나갔다.

―독살이다. 주유 진영에서 퍼뜨린 소문일 것이다. 유기는 분명 형주목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유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유기를 형주의 통치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유비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인물. 강동의 손권마저도 형주 일을 의논할 때는 유비를 찾았다. 유비도 그 점만은 부정하지 못했

다. 형주의 국방이나 경제에 관한 일을 언제 한 번 유기와 의논한 적이 있었던가.

―조만간 교체될 것이다. 근거가 없는 소문을 유언(流言)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이러한 소문을 유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있을 수 있는 일, 신빙성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때에 유기가 죽었다. 이 좋은 소재를 주유가 놓칠 리 없었다. 유비의 가장 큰 무기는 덕망이었다. 덕망을 무너뜨리려는 방법으로 유언비어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이다.

‘곤란하군.’

유기의 후임으로 누가 형주목에 오를 것인가. 당연히 유비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공명의 고민이었다. 그렇게 되면 독살설은 더욱 신빙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행한 점은 그 전부터 유기가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었다. 이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일면으로는 젊은 유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비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냉엄한 현실적 안목에 공명은 잠시나마 비애와 회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명의 선택 (205)…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5)
공명의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형주목 유비. 유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유비는 스스로 형주목에 올랐다. 아무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형주목의 인수를 챙겨넣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기의 죽음을 전후로 그토록 극성을 부리던 유언비어가 막상 유비가 형주목에 오르면서부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오.”

유비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가 임증으로 돌아온 공명은 아내 황용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실된 마음의 힘이 아닐는지요.”

황용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공명은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몰랐다. 진정한 덕은 모든 위험을 스스로 넘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공명은 유기의 관을 붙잡고 통곡하던 유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것이 유황숙의 진실된 모습이다.’

자신의 마음이 떳떳하고 자신의 행동이 결백하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꺼릴 것인가. 그 정도가 되면 유언비어 따위는 봄날 내리는 눈송이처럼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실! 공명은 마음 속에서 하나의 큰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이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또 한 번 유비라는 사람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유비의 덕스러움은 유언비어를 물리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의지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일반 농민도 있었고, 병사를 자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모가 뛰어난 선비도 있었다. 그 중에 공명의 눈길을 끈 사람이 있었다. 마량(馬良)과 마속(馬謖) 형제, 요립(寥立)이 바로 그들이었다. 마량과 마속을 천거한 사람은 유표 시절부터 형주의 막관으로 있던 이적(伊籍)이었다. 이적은 조조가 형주를 침공했을 때 유비를 따라 하구로 내려온 이래 계속 유비의 일을 돕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마씨 성을 가진 다섯 형제가 있습니다. 그 중 마량과 마속이 어질고 뛰어나니 초빙하여 앞날을 꾀해보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마량은 자가 계상(季常)이고 양양군 의성현 태생이었다. 눈썹 가운데 흰 털이 있어 그 곳 사람들은 마량을 일컬어 ‘백미(白眉)’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마량의 재능을 놓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어불렀다.

―마씨의 오상(五常=다섯 형제 모두 자에 상(常)자가 들어갔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중에 백미가 가장 뛰어나다네!

‘백미’라는 말이 생겨난 유래였다.

마량의 동생 마속은 자가 유상(幼常)이다.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걸출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군사 전략에 관한 논의를 좋아했다. 이적으로부터 두 형제에 관한 얘기를 들은 유비는 그 날로 사람을 보내 그들을 초빙하여 종사로 삼았다. 마량과 마속은 요립을 천거했다. 요립은 무릉군 임원현 사람으로 자를 공연(公淵)이라 했다. 역시 마량·마속 형제 못지않은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요립은 또 무장 황충(黃忠)과 위연(魏延)을 천거했다. 황충의 자는 한승(漢升)으로 남양 사람이었다. 유표의 막하에서는 중랑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조가 형주를 함락하자 비장군(裨將軍)에 올랐다가 장사 태수 한현(韓玄)의 밑에 머물렀다. 공명이 호남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장사를 침공했을 때 한현과 뜻이 맞지 않아 관직을 내놓고 물러났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다. 위연의 자는 문장(文長)이고 의양군 사람이었다. 무용(武勇)이 뛰어나고 전략에 밝았다. 황충과 함께 장사에 머물다가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었다.

“자리가 모자랄 판이군.”

유비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다. 형주목에 오른 이후 유비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고생은 끝났다,라는 확신이 들었음에 틀림없었다.

“인재가 몰려드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공명은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마량과 마속 형제를 아꼈다. 마량과는 의형제를 맺었다. 이쯤 되면 손권도 유비의 형주목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명의 선택 (206)…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6)
또 하나의 경사가 있었다. 감부인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손권 측에서 유비에게 청혼을 해온 것이다.

“손권의 누이라고?”

처음에 유비는 펄쩍 뛰었다. 그럴 만도 했다. 유비의 나이 49세. 반면 손권의 누이는 20세였다.

“보기 드문 여걸이라고 합니다.”

공명은 은근히 그 혼담을 권했다. 따로 가형 제갈근의 편지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동오 진영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손권의 누이는 여자답지 않게 체격이 크고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상당한 미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억세고 거칠기가 야생마 같았다. 손권은 그 누이동생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더 골치가 아픈 것은 그녀의 높은 콧대였다.

―나는 천하의 영웅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습니다. 요조숙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강동의 청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손권이 놀리듯 그런 누이동생에게 말했다.

―천하의 영웅은 조조, 유비, 손권 이렇게 셋밖에 없는데, 네가 어찌 그들에게 시집을 갈 수가 있겠느냐. 평생 처녀로 늙어 죽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데 누이동생의 입에서 경천동지할 말이 튀어나왔다.

―듣자 하니 유황숙께서 상처(喪妻)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진정 영웅이라면 저는 그에게로 시집가겠습니다.

―나이가…….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손권은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농담이 진담으로 변해버릴 때의 기막힘이요, 놀라움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오의 참모들이 구수회의를 열었다. 노숙도, 주유도, 장소도, 제갈근도 참석했다. 서너 시간의 의논 끝에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혼담을 성사시키자. 각자의 생각은 달랐다. 노숙은 유비와의 우호를 강조했다. 주유는 유비를 굴복시키기 위한 기회로 생각했다. 조조와의 화친론을 주장했던 장소와 제갈근은 적벽대전 이후 노숙과 같은 노선을 걷고 있었다. 손권의 가정사가 한순간 동오의 정책이 되어버렸다. 이쯤 되면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동오의 내부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있던 공명이었다.

‘저들이 그렇다면 우리도…….’

공명과 노숙은 천하 정세를 판단하고 그 미래를 그리는 구상이 비슷했다. 노숙의 입지를 높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노숙을 잘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동오와는 친목을 유지해야 합니다.”

공명은 유비에게 이번 혼사가 정략적임을 암시해주었다. 유비는 더욱 불안한 눈길로 공명을 바라보았다.

“잘못하다간 동오에 구속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주공께서 동오로 장가드는 것이 아니고, 동오의 신부가 이 곳으로 시집오는 것입니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인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주군의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닌가. 유비는 곰곰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젊은 신부라 쑥스럽군.”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해 겨울, 손권의 누이동생은 유비에게로 시집을 왔다. 공안 포구로 마중 나간 유비 진영은 깜짝 놀랐다. 배에서 내리는 손부인(孫夫人)은 물론 그 시녀들까지 한결같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부인이 여걸이라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공명은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싸움을 하러 온 것이로군.”

마량에게 중얼거렸다. 손부인의 그러한 행동은 신혼생활 중에도 변함이 없었다. 신방(新房) 주변으로 언제나 1백여명의 무장 시녀들을 배치해놓았다. 유비 외에는 다른 사람의 출입을 일절 금지시켰다.

“밤이 두렵소.”

창칼이 번뜩이는 감시 속에서 신혼의 밤을 보내야 하는 유비로서는 여간 고통이 아니었으리라. 이 말을 전해 들은 공명은 유비의 겁에 질린 표정을 상상하며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공명의 선택 (207)…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7)
정략결혼이라면 서로에게 이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유비 측도 손권 측도 모두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영토의 경계가 불확실한 시절이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땅일 수밖에 없었다. 손권은 유비가 호남 사군을 평정함으로써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이 불안했다. 그 동안 자신은 장강 연안에 긴 전선(戰線)만 벌여놓았을 뿐,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역시 남쪽을 든든히 하지 않고서는 군세를 기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장사를 비롯한 호남 사군의 땅을 회수하시오. 그는 노숙을 불러 밀명을 내렸다. 아무리 노숙이 친유비파라고는 하지만 유비 측에게 멀쩡한 땅을 그냥 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노숙은 고민 끝에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내고 공안으로 내려갔다.

“호남 사군은 동오 땅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예상했던 대로 유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임증에서 달려온 공명은 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장사 일대는 오정후(烏程侯) 시절부터 동오의 땅이었습니다.”

오정후라면 손견을 말함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영토를 달리하는 이 난세에 30년 가까이 지난 시절의 얘기를 내세운다는 것은 억지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유비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노숙의 말을 받았다.

“장사 일대가 동오의 땅이라면 강릉 이북의 모든 지역은 당연히 형주목인 나의 땅이 되어야 할 것이오.”

노숙의 논리를 깨자고 한 말이었으나 사실 그 말은 노숙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자경의 말뜻은……?”

노숙의 선선한 대답에 오히려 유비가 놀라 물었다.

“강릉 이북의 땅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유황숙께서도 호남 사군의 땅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노숙의 뜻은 분명히 드러났다. 장강을 경계로 형주 북부와 형주 남부의 땅을 맞바꾸자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공평한 조건 같았지만 사실은 억지나 다름없었다. 형주 북부는 강릉성만 온전히 동오의 소유였을 뿐 그 나머지 땅은 아직까지 조조 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노숙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남부와 북부의 땅을 교환하자는 것이다. 옆에서 유비와 노숙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공명은 이제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자경 선생의 말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우선 일차적으로 일부의 땅만을 교환하기로 합시다.”

“일부의 땅이라면?”

“장사군 중 상수 동쪽의 땅을 동오에게 내드리겠습니다. 대신 동오에서는 강릉성을 우리에게 빌려주십시오. 자경 선생도 아시다시피 강릉 이북은 아직 조조 군이 주둔하고 있질 않습니까. 우리가 형주·양양성을 온전히 탈환하게 되면 그 때 가서 형주 남부의 사군을 모두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숙이 생각해보니 전혀 손해될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강릉에서 철군을 하고 유비로 하여금 강릉 이북의 조조 군과 싸우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손권이 바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좋습니다.”

공명과 노숙은 합의문에 서명했다.

―한창군(漢昌郡). 손권의 영토에 새로운 군(郡)이 생겨났다. 예장군 서쪽에서부터 상수 동쪽까지가 그 경계였다. 예전에는 장사군에 속해 있던 땅이었다. 초대 태수로는 노숙이 부임했다. 관소는 육구(陸口). 이것으로 일단은 유비의 남쪽 영토 확장을 견제할 수 있었다.

“수고했소.”

손권은 노숙의 외교 성과에 대단히 흡족해했다. 그러나 주유는 손권의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표했다. 강릉을 임차해주고 한창군을 얻은 것이 못마땅한 게 아니라, 유비에게 북쪽과 서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준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차라리 통합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는 유비를, 아니 공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동오의 큰 우환거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공명만 생각하면 주유는 초조했다.

‘더 늦기 전에…….’

마침 경구(京口)에서 손권과 유비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특별한 사안은 없었다. 처남과 매부 간의 상견례 겸 양쪽 진영의 우호를 다지기 위한 친선회담이었다. 경구는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眞江市) 근교이다. 말릉보다도 더 동쪽의 장강 연안이었다. 강릉에서 철수한 주유는 이 소식을 하구에서 들었다. 그는 유비를 무력화시킬 한 계책을 떠올리고 즉시 붓을 들어 손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유비는 용맹하며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는 효웅입니다. 더욱이 그는 곰과 호랑이나 다름없는 관우, 장비 같은 장수를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남의 밑에서 몸을 굽히며 지배를 받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유비가 경구에 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화려한 궁전을 지어주고 미녀와 오락을 갖추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

을 것입니다. 아울러 관우와 장비를 동오의 소속으로 배치하여 저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면 천하의 대업을 쉽게 이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이들 세 사람에게 강릉을 내주어 조조와 맞서 싸우게 한다면 이들은 반드시 교룡(蛟龍)이 비와 구름을 얻은 것처럼 크게 비약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들은 이미 연못 속의 붕어가 아닙니다.

공명의 선택 (208)…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8)
유비를 강동에 머물게 하여 뼈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부하 맹장들과는 격리시키자는, 이른바 미인계(美人計)와 이간책(離間策)이었다. 과연 주유다운 분석이요, 그 대응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비 진영에서 보면 등골이 오싹한 계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노숙과 장소가 반대했다. 그들은 친유비파였다. 유비를 보호하자는 의도라기보다는 유비를 이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조조는 강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북방군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유비의 힘을 깎아서는 동오조차 보존하기 힘듭니다.”

“그렇습니다. 유비를 내세워 조조와 맞서 싸우게 해야 합니다. 유비는 효웅이라 설사 이 곳에 잡아둔다 해도 끝까지 제압하기는 힘들 것으로 봅니다.”

손권 진영의 이상한 움직임을 유비도 눈치챘다. 그는 이 곳으로 오기 전 공명의 귀띔을 떠올렸다.

―늦어지면 관운장과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 때는 웃음으로 흘려 넘겼는데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유비는 손권과의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어느 새 날짜가 이렇게 지나갔구려. 관운장이 나를 찾아나섰을지도 모르겠군.”

찾아나선다는 의미를 어찌 손권이 모르겠는가. 확실치도 않은 계책으로 동맹 진영 간의 군사상 충돌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권과 유비의 불화는 곧 조조의 남침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조조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손권으로서는 가장 최악의 경우이다.

“그렇군요. 공안에서 걱정이 크겠습니다.”

오히려 손권이 유비의 귀환을 재촉했다.

―조조의 군대가 서북으로 향했다.

이런 소식이 공안의 유비 진영으로 날아들었다. 확실히 그 무렵의 정세는 유비 진영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비 측의 전략이 뛰어나거나 힘이 강대해져서만은 아니었다. 조조와 손권의 심리적인 요인이 이상하게 유비의 입지를 넓혀주고 있는 것이다.

손권의 조조에 대한 공포 심리―. 반면에 조조는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유비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손권이 장사의 일부를 차지하는 대신 유비가 강릉 땅을 임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허도의 조조는 어찌나 놀랐는지 밥을 먹다가 수저를 떨어뜨렸다고 했다.

―손권이 어쩌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고! 옆에 있던 참모들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

―승상께서는 주유가 강릉을 차지했을 때는 가소로운 듯 비웃더니, 유비가 차지했다는 소식에는 어찌 그토록 놀라시는 겁니까?

조조가 대답했다.

―땅이란 주인에 따라 그 효험 가치가 달라진다. 주유가 강릉에 있을 때는 손권의 전력이 그만큼 분산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유비가 강릉에 머물게 되면 반대로 우리는 두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유비는 호랑이 같은 존재다. 거기에 강릉까지 얻었으니 날개를 달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는 강남 대신 서북 땅을 노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허도의 주력부대가 형주를 떠나 한중(漢中)·서량(西凉)으로 향하게 된 것은 조조의 이러한 유비 공포증이 불러일으킨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급보가 공안에 전해졌다.

―주유가 파촉 정벌을 꾀하고 있답니다. 유비 진영은 갑자기 바빠졌다. 공명과 마량 등이 모두 공안으로 모여들었다. 연일 정세 분석

에 여념이 없었다. 조조의 서북행은 유비 측에게 유리한 동향으로 판단되었다. 문제는 주유의 서정(西征)이었다.

“주유에게 파촉을 평정할 능력이 있겠소?”

유비가 핵심을 물었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공명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유가 초조해하고 있다고 보시오?”

“주공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공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주유의 서정 결심은 유비 공포증 때문이다.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공명 공포증. 손권이 조조를 두려워하고, 조조가 유비를 의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의식하고 있다는 말뜻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유비는 입을 다물었다. 주유가 의도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공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공명의 선택 (209)…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9)
유비의 무사 귀환 소식을 들은 주유는 땅을 치며 통탄했다.

―아깝구나.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손권의 조조 공포증도 문제가 있었지만 주유의 공명 공포증도 가히 병적이었다. 주유는 도저히 이대로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유비의 군세 확장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파촉 정벌이었다. 즉시 경구의 사령부로 찾아가 손권에게 진언했다.

“조조가 한중 땅과 서량을 취하면 우리는 그만큼 더 외로운 형세가 됩니다. 조조의 힘이 서북으로 쏠려 있을 때 파촉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익주를 얻고 한중의 장로를 병합한 후 마초(馬超)와 동맹을 맺으면 일단 서쪽과 남쪽은 안정됩니다. 그 후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병력이 부족하지 않겠소?”

“유비 군이 있질 않습니까?”

“유비?”

“유비 군을 선봉으로 내세우는 겁니다. 그들이 길을 닦으면 그 뒤를 우리 동오 군이 진격합니다.”

손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유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좋은 생각이오. 하지만…… 유비가 서정을 거절하면?”

“그 때는…….”

주유는 목소리를 낮췄다. 손권도 안색을 굳히고 상체를 내밀었다.

“파촉으로 들어가는 척하다가 공안부터 먼저 취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으음……!”

손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맹 관계가 깨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던 듯 주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주공께서는 모르시는 일입니다. 모든 것은 이 주유가 책임지겠습니다.”

주유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손권은 마음이 흔들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손권의 입이 열렸다.

“지금 그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소.”

“하오면?”

“서정군을 편성하시오.”

예상했던 대로 유비 진영에서는 서정 연합 출병을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간단했다.

―익주의 유장은 우리 주공과 같은 한왕조의 종실입니다. 만일 우리 주공이 군사를 일으켜 골육의 영토를 빼앗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유황숙을 비웃으며 침을 뱉을 것입니다. 이 점 양해하시고 동오 군 단독으로 출병하십시오. 부족하나마 양곡과 군마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주유가 원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그는 즉시 서정군을 편성하고 경구를 떠났다. 선봉에는 감녕을 임명했고, 주유 자신은 서성·정봉과 함께 중군이 되었다. 후군은 능통과 여몽에게 맡겼다. 총병력 5만이었다. 이윽고 저 멀리로 강릉성이 보였다. 약속대로라면 유비는 그 곳에서 양곡과 군마를 건네줄 것이다. 주유는 장강 연안에 배들을 정박시킨 후 물자를 받는 척하면서 강릉성을 들이칠 계획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공명이 내 계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주유는 뱃전에 서서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비와 공명을 사로잡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강릉 포구 가까이에 이르도록 아무도 맞으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드넓은 장강에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았다. 정탐선 한 척이 먼저 포구로 들어가 강릉성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강릉성 위에는 누런 기 두 개만 펄럭일 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습니다.”

그제야 주유는 의심이 일었다. 그는 전함들의 닻을 강심에 내리게 한 후 자신은 작은 배로 옮겨타고 친히 뭍에 올랐다. 만일에 대비하여 서성·정봉·감녕 등 심복 장수들에게 3천 군마를 내주어 뒤따르게 했다. 강릉성 바로 밑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안에서는 역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성문도 굳게 닫힌 채였다.

“성문을 열어라!”

여러 차례 고함을 지르자 비로소 성 위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주 도독께서 친히 이 곳에 오시었다. 어서 성문을 열라!”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성 안에서 딱딱이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동시에 성벽 위로 군사들이 창칼을 세우고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전투를 벌일 태세였다. 그 앞에 선 대장은 조운이었다. 조운은 주유를 굽어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독은 무슨 일로 이 곳으로 오셨소?”

주유는 일이 잘못되어간다 싶었으나 이제 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태연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우리 주공의 명을 받들어 서천을 취하러 가는 길이오. 양곡과 군마가 모자라 걱정하던 참에 다행히 유황숙께서 군량과 말을 빌려주시겠다고 약속했소이다. 이제 그 군량미와 군마를 얻으러 왔으니, 장군은 성문을 열고 나를 공명에게 안내해주시오.”

그러자 조운이 별안간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도독은 지금 서천을 치러 가는 척하면서 우리 주공을 멸하려 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 제갈 군사께서는 이미 그러한 가도멸괵(길을 빌리는 척하며 괵나라를 치다.)의 계책을 알고 이 조운을 여기에 있게 하셨소이다. 이 화살이 그대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기 전에 어서 돌아가시오.”

조운의 조롱어린 말을 들은 주유는 비로소 자신의 계책이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공명의 계책에 빠졌음을 알았다. 정신이 아뜩하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올랐다.

“진정하십시오. 저들에게 화를 당하기 전에 배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심상치 않은 주유의 표정을 보고 감녕이 재촉했다. 주유는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 때였다. 한 군사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지금 네 갈래 길에서 군마가 이리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동편에서는 관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곳으로 향하고 있고, 서쪽 이릉 방면에서는 장비가 쳐들어오고 있으며, 북쪽에서는 황충이, 남쪽에서는 위연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주유는 두려움보다는 노기부터 솟구쳤다.

“공명은? 공명은 어디 있느냐?”

험악한 표정을 짓는 중에 한 군사가 강릉성 서쪽편 산 위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저기를 보십시오. 유황숙과 공명이 저기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주유가 그 쪽을 바라보니 과연 유비와 공명이 누런 일산 아래 한가로이 앉아 주거니받거니 술잔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주유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행동이었다. 주유는 머릿속으로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날아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혔다. 눈앞

이 캄캄해지는 듯하더니 갈비뼈 아래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일었다.

“아악―!”

급기야 주유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겨우 아물어가던 금창이 다시 터진 것이었다. 좌우에 있던 장수들이 놀라 급히 주유를 떠메고 포구로 내려가 배로 옮겼다. 두어 시간 만에 주유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터진 상처가 쑤시듯 아팠으나,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공명의 생간을 씹어먹지 않으면 성을 갈리라!”

이를 갈며 강릉성 칠 일을 의논하려는데 감녕이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공명이 사람을 보내 도독께 글을 바쳐왔습니다.”

주유는 빼앗듯 공명의 편지를 받아 뜯어보았다.

공명의 선택 (210)…제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10)
동오 대도독 공근(公瑾)은 보시오. 적벽의 큰 싸움 이후 늘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제갈량은 공근이 서천을 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소. 하지만 이 양(亮)이 생각하기에는 그대는 서천(西川)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익주는 백성이 강성하고 땅이 험합니다. 비록 유장이 어리석고 약하다 해도 스스로 자기 영토를 지키기에는 넉넉한 인물입니다. 손무자(孫武子)나 오기(吳起) 같은 병법의 귀재라 하더라도 서천을 취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대가 어찌 만 리 길을 원정하여 그 끝을 볼 수 있겠소. 그 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군사들은 지치고 그대는 병들어 목숨이 다할 것이 틀림없소.

더욱이 지금 조조는 적벽에서의 패배를 잊지 못하고 원수를 갚으려 그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대가 군사를 일으켜 만 리 길을 원정하신다면 조조는 동오의 허한 틈을 타서 다시 강남으로 내려와 가루가 되도록 짓부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양은 차마 그러한 광경을 앉아서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리하여 몇 자 적어 일러주는 바이니, 공근은 생각을 돌리시어 강동으로 회군하십시오.

한마디로 주유 당신은 서천을 취할 능력이 없으니 동오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필시 주유의 노기를 끌어올리려는 공명의 격동지계(激動之計)일 것이겠으나, 주유는 이미 그러한 것을 판단할 능력을 상실한 뒤였다.

“공명, 이놈이……!”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공명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광기에 가까웠다.

“네놈은 내가 서천을 뺏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어디 두고 보아라. 내 맹세코 서천을 손에 넣어보이리라!”

이렇게 맹수처럼 울부짖고 있는데, 마침 손유(孫瑜)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그 곳에 당도했다.

“나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도독을 도우러 왔소이다. 도독께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군사를 나아가게 하십시오.”

손유는 손권의 사촌동생이다. 동오에서의 지위는 분위장군으로 단양 태수를 겸하고 있었다. 장수의 능력보다는 행정관의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영지 주민들을 잘 다스릴 줄 알았다.

손권이 손유를 뒤늦게 파견한 것은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우선 이번 원정은 만 리 길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지친 군사들의 마음을 달래줄 뛰어난 행정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번째로 손권은 주유의 서천 정벌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의 영토를 점령하면 용맹스런 장수의 역할보다는 그 곳 주민들의 마음을 다스릴 행정관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그 적임자로 손유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손권은 한 가지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총사령관인 주유의 건강이었다. 강릉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주유는 그 상처가 완전히 낫질 않았다. 그런데다가 형주 땅 탈환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쉴 틈 없이 조조 군과 전투를 벌였다. 별 성과 없는 소모전에서 주유의 건강은 극심하게 악화되어갔다. 당연히 주유는 그것을 숨겼다. 그런 상태에서 만 리 길이 넘는 대장정을 감행한 것이다.

손유의 합세는 공명에 대한 주유의 오기에 더욱 불을 질렀다.

“서천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대로 공명을 박살내리라!”

그러나 공명의 격동지계에 휘말린 주유는 이미 건강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간에 쌓인 피로에 금창이 재발하면서 그의 몸은 극도로 나빠졌다.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회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감녕을 비롯한 서성·정봉 등의 장수들 입에서 회군론이 대두되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되오!”

주유는 쥐어짜듯 외치며 계속 진군을 감행했다. 그랬다. 그것은 발악이었다. 주유는 기름이 다한 등불이 마지막 불꽃을 피우기 위해 심지를 태우듯 자신의 남은 힘을 모조리 짜냈다.

그러나 서천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겨우 파촉의 입구라 할 수 있는 파구(巴丘)에 이르렀을 때 그는 또 한 번 혼절했다.

“배를 멈추어라!”

부도독 손유도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주유는 하루 만에 깨어났다. 눈동자가 이미 빛을 잃고 있었다. 겨우 장수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주유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사자의 절규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구려.”

“도독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힘을 내십시오.”

장수들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러나 주유는 이미 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지필묵을 가져다 주시오. 마지막으로 주공에게 내 뜻을 전해야겠소.”
마지막 편지라면 유서가 아닌가. 주유는 이제 알았다. 자신이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군사 하나가 붓과 종이를 가져오자 주유는 일어나 앉았다.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다. 친히 붓을 잡았다.

삼가 주유가 주공께 올립니다.

이 유는 범상한 재주밖에 없었건만 특별한 대우를 받아 언제나 가까이서 병마를 거느리는 일을 맡아왔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이 몸이 죽는 것은 애석할 것 없지만 작은 뜻 하나 펼치지도 못하고 이대로 마쳐야 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아직 조조는 북쪽에서 우리 땅을 노리고 있고, 유비는 우리에게 의지해 있다고는 하나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장차 천하의 일이 어찌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조정 신하들은 먹지 않고 일을 해야 할 때요, 주공께서는 늘 근심하실 때입니다.

노숙은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입니다. 일을 맡으면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오니 가히 이 주유를 대신하여 큰일을 맡길 만한 인물입니다.
길이 살피시어 통촉하시면 주유는 죽어도 썩지 않겠습니다.

쓰기를 마치자 이번에는 모든 장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서쪽 땅과 북쪽 땅을 얻어 주공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천명(天命)이 다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대들은 부디 오후(吳侯)를 잘 섬기어 대업을 이루어주기 바라오.”

주유는 말을 마치자 정신을 잃었다. 장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흘렸다.

한 시각쯤 지나서 주유는 다시 깨어났다. 눈에서 뜨거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수들이 반색을 하는데, 주유의 입에서 별안간 한 외침소리가 터져나왔다.

“하늘이 주유를 낳아놓고, 어찌하여 또 제갈량을 낳으셨단 말인가!”

그러고는 곧 숨을 거두니, 이 때 주유의 나이 36세였다.






<공명의 선택> 18장 서쪽을 바라보며
<공명의 선택> 16장 병주고 약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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