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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13 21:43:25, Hit : 3159, Vote : 318
 <공명의 선택> 16장 병주고 약주고
공명의 선택 (192)…제16장 병주고 약주고 (1)
―이겼다. 하구의 유비 진영은 승전의 기쁨에 들떠 있었다. 조운, 장비, 유봉, 미축, 미방 등 조조의 뒤를 쫓은 장수들이 속속 수많은 전리품을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갈 곳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유비였다. 그런 그가 천하 제일의 실력자 조조의 80만 대군을 보기 좋게 격퇴시키고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제갈 군사의 덕분이오.”

유비는 여러 차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공명 역시 웃으며 축배의 잔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생각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일찍이 그는 유비에게 말했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그랬다. 공명에게 있어 적벽대전의 승리는 하나의 작은 출발에 불과할 뿐이었다. 앞으로 수많은 난관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크게는 조조·손권 등에서부터 작게는 내부의 일까지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무수히 도사리고 있다.

공명은 지금 가장 작은 일부터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관우―. 어찌 생각하면 치졸한 일이요, 하찮은 문제일 수도 있었으나 공명으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후세에 아름다운 일을 남겨주기 위해서. 관우를 화용가도로 보내면서 유비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공명의 속뜻은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관우를 길들이기 위해서. 라고 해야 옳았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 때였다.

“관운장께서 돌아오십니다.”

진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명은 과장이다 싶을 정도로 부리나케 일어나 당하로 내려가 관우를 정중히 맞아들였다.

“수고가 많았습니다. 조조의 목은 어디 있습니까?”

공명의 물음에 관우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군사께서는 이 관우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조조가 화용도로 오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군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조는 화용도로 왔습니다만……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순간, 공명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

“장군의 무용(武勇)으로 본다면 궁색한 조조와 싸워 패할 리가 없소. 이는 분명히 장군이 조조의 옛 은혜를 잊지 못하고 일부러 놓아준 것이 틀림없소. 더욱이 장군은 군령장을 써놓고 갔소이다. 이것이 어린애 장난이 아닐진대, 수중에 들어온 조조를 어찌 그냥 살려보낼 수가 있단 말이오? 군법대로 시행함이 마땅하오!”

그러고는 엄한 눈길로 뜰 아래 벌여 서 있는 군사들을 돌아다보며 호령했다.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당장 관우를 끌어내 목을 베도록 하라!”

공명의 싸늘하면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늘을 끊었다. 놀란 것은 유비였다. 이미 공명에게서 관우에 대한 의도를 들은 바 있었다.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풀이 죽어 들어오는 관우와 기세등등하게 호령하는 공명의 연극 한 마당을 구경하고 있었다. 관우가 궁지에 몰릴수록 그는 재미나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연극치고는 공명의 태도가 너무 살벌했던 것이다.

‘정말로 목을 벨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공명의 선택 (193)…제16장 병주고 약주고 (2)
유비는 관우와 공명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관우는 이미 목숨을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드높은 그의 자존심은 공명 앞에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공명 역시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유비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역시 유비의 관록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이내 공명이 자기까지도 연극 마당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막을 올린 것은 이 제갈량이었으되, 내리는 것은 주공께서 맡아 해주십시오.

두 사람의 호흡 맞춤은 이미 삼고초려에서 여실히 증명되지 않았던가. 유비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연극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공명의 호령소리에 눌린 군사들이 관우를 끌어내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아, 관우가 죽는구나. 승전의 축제 분위기는 삽시간에 사라지고 모든 장졸들은 사색이 된 채 가슴을 조였다. 그 때였다.

“군사는 잠시 멈추시오!”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유비는 이제 연극을 즐기는 관객이 아니었다. 이 자리를 마감해야 할 주연배우였다.

“주공께서는 무슨 분부를 내리려 하십니까?”

공명이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유비는 대답 대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당하로 내려왔다. 공명 앞에 섰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유비에게로 집중되었다. 별안간 유비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유비는 간곡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관운장은 나와 함께 의를 맺어 생사를 함께하고자 맹세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운장이 군법을 어겼으나, 나 또한 지난날의 맹세를 어길 수가 없습니다. 만일 군사께서 운장의 목을 베신다면 이 몸도 함께 죽어야 합니다. 바라건대 운장의 죄를 뒷날로 미루시어, 공을 세워 그 잘못을 씻을 수 있도록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쿵,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만큼 유비의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주공인 유비가 부하인 공명에게 무릎을 꿇고 관우의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아!” 하는 감탄과 함께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공명에게로 쏠렸다.

―공명의 패배다. 모든 사람들은 유비가 관우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여겼다. 주공의 권위로 관우를 죽이려 하는 공명의 기세를 꺾은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공명의 해석은 정반대였다.

―보아라, 그대의 자존심 때문에 주공이 이렇듯 내게 무릎을 꿇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진정 주공을 위하고 천하를 위한다면 허섭스레기 같은 자존심 따위는 가차없이 버려라. 유비는 공명이 원하는 바대로 그 역할을 너무나 훌륭히 해주었다. 공명은 감격했고, 또 감탄했다.

“주공께서는 이 무슨 해괴한 행동이십니까?”

공명은 황망히 유비를 잡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마지막 대사를 잊지 않았다. 관우를 돌아보며 매섭게 꾸짖었다.

“운장은 들으시오. 오늘은 주공의 간곡한 분부를 받들어 특별히 용서하거니와, 이후로는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장수는 상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아시겠습니까?”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비로소 관우도 깊이 허리를 숙이며 공명에게 사죄하는 말을 했다. 천하를 향한 또 하나의 작은 출발이기도 했다. 공명은 다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군세를 기를 안정된 땅이 필요했다.

“조조가 비록 허도로 쫓겨가기는 했지만 형주를 내준 것은 아닙니다.”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다. 관우도, 장비도, 조운도, 유기도 앉아 있었다. 적벽의 싸움에서는 승리했지만, 유비가 얻은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강릉에는 여전히 조인이 주둔하고 있었고, 이릉성에는 조홍(曹洪)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곳을 중심으로 형주의 남북 모두가 조조의 관할이었다.

“먼저 이 땅을 탈환해야 합니다.”

언제 형주가 유비 땅이었던가. 그런데도 공명은 탈환이라고 했다. 공자 유기도 앉아 있는 자리였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으나 묻지는 않았다.

“어디부터 손을 쓰는 것이 좋겠소?”

모두들 궁금하게 여기는 점을 유비가 물었다.

“강릉·이릉을 비롯한 남군 일대는 형주의 노른자라 할 수 있습니다.”

“동오 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조운이 물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유비 군과 손권 군은 동맹 관계였지만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조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벽대전까지만 동맹 조약을 맺었을 뿐,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협정도 맺지 않았던 것이다. 동맹군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는 이상한 관계였다.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주유는 이미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릉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했다.

―먼저 차지하는 자가 주인이다.

군사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주유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유비에게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공명은 오히려 더 그 점을 바라고 있었다. 차라리 그것이 뒤탈이 없는 것이다.

“나는 동오 군의 그 점을 이용할까 합니다. 일단은 하구를 떠나 유강구(油江口)로 들어갑시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공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곳 하구는 어찌합니까?”

장비가 물었다.

“공자 유기께서 강하와 하구·번구를 잘 지켜주실 겁니다. 동오 군이 드러내놓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니 강북의 조조 군만 잘 막아내면 될 겁니다.”

공명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공명의 선택 (194)…제16장 병주고 약주고 (3)
주유는 조인이 수비하고 있는 강릉성을 공격하기 위해 동쪽 50리 밖에 진채를 내렸다. 노숙, 감녕, 여몽 등과 함께 성을 공략할 의논을 하는데, 능통이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유비 군이 지금 막 유강구에 당도하여 진을 치고 있습니다.”

순간, 주유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완연히 떠올랐다.

“공명도 와 있소?”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그렇습니다. 유황숙과 더불어 강변을 돌아보는 중이랍니다.”

유강구는 장강 남쪽 강릉 대안(對岸)에 있는 작은 포구였다. 강을 건너면 곧바로 강릉성이었다. 그런 곳에 유비와 공명이 직접 와 사령부를 차렸다면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이는 강릉성을 차지하려는 수작이다.”

이미 여러 차례 공명의 능력을 확인한 바 있는 주유였다. 조조 군의 수채를 공격하기 직전에는 공명을 죽이려고 장수까지 보냈었다. 이제 그는 공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주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여몽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도독께서는 무엇을 그리 놀라십니까? 공명이 군사를 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공격하여 강릉성을 빼앗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격하면 강릉성을 함락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감녕 역시 주유가 너무 공명을 의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가 않소. 공명이란 자는 음흉한 자요. 적벽대전에서도 보지 않았소? 유비 군은 군사 한 명 다치지 않고 많은 노획물을 차지했단 말이오. 이번에도 마찬가지 속셈일 것이오. 유강구에 사령부를 차렸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소.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을 나누어 가지려는 수작이 분명하오.”

“그렇다고 조인을 눈앞에 두고 유비 군을 공격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내가 유강구를 다녀와야겠소. 강릉성 전투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분명히 일러두면 제아무리 공명이라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오.”

이 때 노숙이 고개를 들어 주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르오. 조조가 비록 적벽에서 패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육상군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소. 여전히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소. 그러나 우리 동오 군은 군사가 그리 많지 않소.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조조 군을 내몰고 형주를 평정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보다는 차라리 공명에게 강릉성을 양보해주는 척하여 조조 군과 싸우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소. 공명이 조조 군과 싸우는 사이, 우리는 형주의 다른 지역을 공략하면 한결 쉽게 형주를 취할 수가 있을 거란 말이오.”

유비와 조조가 다투며 힘을 소진하는 동안 손권은 강동과 형주 일대를 안정시킨다―이른바 노숙이 꿈꾸는 ‘삼자구도론’이었다. 공명이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말이었으나, 주유의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공명에게 강릉을 내주다니?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요. 이 주유가 살아 있는 한 공명에게는 결코 한 치의 땅도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오.”

이를 갈 듯 이렇게 말하고 주유는 몸을 일으켰다.

배 한 척이 빠르게 장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유강구로 향하는 주유의 배였다. 노숙도 함께 탔다. 주유의 과격한 성품을 염려한 그는 자청하여 그 배에 올라탄 것이다. 과연 공명을 대하는 주유의 태도는 상당히 적의에 불타 있었다. 적벽대전 직후 조조 군이 남기고 간 수많은 군수 물자를 모조리 유비 군에게 빼앗긴 것이 몹시 분했던 모양이었다. 첫마디부터가 위협적이고 직선적이었다.

“그대가 군사를 이 곳으로 옮긴 것은 강릉을 취하려는 뜻에서가 아니오?”

그러나 공명은 느긋하고 태평스러운 표정이었다. 웃고 있었다.

“취하려 한다기보다도…… 도독께서 강릉을 치려 하신다는 말을 듣고 도우러 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동맹군이 아닙니까?”

“도움은 필요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조인을 몰아내겠소.”

“동오 군만으로는 병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조인 역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지 않소.”

“이릉에도 조조 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릉에는 유장의 군사들이 일부 있을 뿐이오. 그나마 파촉(巴蜀)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소. 우리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강릉과 이릉을 함락시킬 수가 있소이다.”

주유는 공명이 끼여들 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도독께서 그렇게 자신하고 있으니 우리는 군사를 내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공명은 양보했다.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소.”

일어서는 주유를 향해 공명이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도독께서 강릉을 빼앗지 못하신다면 그 때는 우리가 군사를 내어 강릉성을 취하겠소.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주유는 멈칫했으나 잠깐뿐이었다.

“좋소이다. 내가 만일 강릉을 취하지 못하면 그 때는 그대에게 공격권을 넘겨주겠소.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외다.”

“과연 주랑다운 호기이십니다. 여기 계신 자경 선생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터이니 나중에 딴 소리는 없기로 합시다.”

“장부일언 중천금이오. 어찌 딴 소리가 있을 리 있겠소. 그대나 속임수를 쓰지 마시오.”

“그럼 잘 싸워보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공명은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공명의 선택 (195)…제16장 병주고 약주고 (4)
주유가 강릉과 이릉성에 집착하는 것은 딱히 유비에게 땅을 내주지 않으려는 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성 모두 장강에 접해 있는 만큼 물길을 따라 파촉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릉에서 1백여 리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황우협(黃牛峽)이 나온다. 무협(巫峽)·구당협(瞿塘峽)과 함께 ‘삼협(三峽)’이라 불리는 이 곳은 바로 파촉으로 통하는 첫 관문이다.

―형주 다음에는 익주. 그랬다. 주유는 이 두 지역을 평정함으로써 북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조조와 맞서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남과 북―‘이자구도론(二者構圖論)’이었다. 노숙처럼 아무 힘도 없는 유비를 키워 조조와 맞서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아예 유비를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강릉과 이릉은 주유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유강구로 건너가 공명과 담판을 짓고 돌아온 주유는 곧 강릉성을 총공격하기 시작했다. 선봉에 장흠을 세우고 서성과 정봉을 부장으로 삼아 돕게 했다. 주유는 친히 중군이 되어 뒤를 받쳤다. 하지만 조인이 이끄는 북방군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확실히 육상전에 강했다. 적벽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예기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우금이 나와 장흠과 맞섰다. 우금이 우세함을 보이기 시작하자 성 안에 있던 조인이 전 병력을 이끌고 나와 우금과 더불어 장흠을 들이쳤다. 서성과 정봉이 분전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장흠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흠이 첫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주유는 분함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돌진하려는데 감녕이 나서서 만류했다.

“도독께서는 너무 조급히 굴지 마십시오. 지금 조인은 이릉과 쇠뿔같이 의지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게 3천 군사만 내주십시오. 단숨에 이릉성을 점령해보이겠습니다. 그런 후 강릉을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별동대(別動隊)를 보내 서쪽의 구원군을 미리 차단하자는 전략이었다.

“좋은 계책이오.”

주유는 즉시 감녕에게 3천 군사를 내주어 이릉성으로 향하게 했다. 감녕의 이 작전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그 때 이릉성은 조홍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설마 동오 군이 강릉성을 놔두고 이릉부터 쳐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를 찔린 조홍은 감녕의 공격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홍이 쫓겨오자 조인은 몹시 당황했다. 곧 수하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강릉과 이릉은 이와 입술과 같은 관계요. 그런데 이제 뜻하지 않게 이릉성을 잃어버렸으니 강릉마저 위태롭게 되었소. 싸우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양양으로 후퇴하는 것이 낫겠소?”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는 중에 모사 진교(陳矯)가 일어나 말했다.

“제게 주유를 깨칠 계책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극비를 요하는 일입니다. 잠시 귀를 빌려주십시오.”

진교가 조인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몇 마디 속삭이자, 조인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기막힌 계책이오. 이번에야말로 주유를 죽일 수가 있겠구려.”

다음 날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이릉성을 점령하여 기분이 한껏 고조된 주유는 아침 일찍부터 전군에 명령을 내려 강릉성을 향하여 쳐들어갔다. 조인도 성문을 열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주유 군에 맞섰다. 정면으로 맞붙자는 태도였다. 마땅히 성 안에서 굳게 지킬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싸울 기세를 보이자 주유는 주춤했다.

“저들의 동태가 수상쩍습니다.”

여몽이 성 위를 가리켜보였다. 그 곳에는 전날보다 훨씬 많은 깃발과 창검이 꽂혀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군사들의 허리춤에 한결같이 작은 봇짐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공명의 선택 (196)…제16장 병주고 약주고 (5)
망루 위로 올라가 잠시 적진을 살피던 주유는 외치듯 여몽에게 말했다.

“조인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려 하고 있구나. 성벽 위의 기치창검은 허장성세일 뿐이다.”

그 때 적장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와 싸움을 돋우었다. 이릉성을 지키다 감녕에게 패해 쫓겨온 조홍이었다. 주유는 좌우를 둘러보며 외쳤다.

“누가 나가서 조홍과 싸우겠느냐?”

“제가 조홍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한당이었다. 두 장수는 곧 한데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 합이 채 넘기도 전에 팽팽하던 싸움은 균형이 깨졌다. 조홍이 한당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오 군 진영에서 함성소리가 터져나오자 이번에는 조인이 직접 말을 달려 앞으로 나왔다. 주유 편에서는 주태가 달려나갔다. 그러나 조인 역시 주태를 당해내지 못하고 이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조 군은 조인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약속이라도 한 듯 창칼을 거꾸로 쥐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유는 이미 그들이 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당과 주태로 하여금 좌군을 지휘하게 하여 달아나는 조인의 뒤를 쫓게 하고, 자신은 친히 우군을 거느리고 활짝 열려 있는 강릉성의 문을 향해 치달았다. 강릉성 안은 과연 텅 비어 있었다. 성벽 위의 깃발과 창검은 역시 허장성세였다. 주유는 신바람이 났다. 수십 기만을 거느린 채 앞장서서 내성(內城)으로 뛰어들었다. 그 때였다. 내성의 양쪽 문루에서 크게 징소리가 울리더니 별안간 화살과 쇠뇌가 소나기처럼 주유와 그 군사들을 향해 쏟아져내렸다.

“속았구나!”

이렇게 외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뒤따르던 군사들은 거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주유 역시 왼편 갈빗대에 화살 한 대를 맞았다.

“악!”

주유가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성벽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우금이 재빨리 뛰어내려와 주유를 잡으려 할 때, 마침 서성과 정봉이 달려와 주유를 보호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겨우 주유를 구출해 진채로 돌아갔다. 주유의 중상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쫓기던 조홍과 조인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사기가 떨어진 동오 군을 마구 짓밟았다. 우도독 정보가 군사를 수습하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 날의 싸움은 동오 군의 대패로 끝이 났다. 주유는 다행히 목숨을 구했으나 상처가 매우 깊었다. 행군의자(行軍醫者=군의관)가 화살촉을 빼고 금창(金瘡) 약을 발라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아픔이 너무 심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할 지경이었다.

“살촉 끝에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약으로 독기를 눌러놓기는 했으나, 성을 내거나 몸이 피곤하면 금창이 다시 터질 것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주유 대신 지휘봉을 잡은 우도독 정보는 애초 강릉성 공략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장수였다. 그는 전략상 시상 동북쪽의 합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무렵 손권은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군사가 부족하여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쉽게 합비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정보는 전력(戰力)의 분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군대를 그 쪽으로 이동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주유가 워낙 강릉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철수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진채를 지키기만 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주유의 상처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주유는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자 정보를 불러 물었다.

“우도독께서는 어찌하여 군사를 내어 강릉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오? 자칫하면 공명이 먼저 강릉성을 취할 것입니다.”

“듣자 하니 주공께서 합비에서 고전을 하고 계시다 하오. 강릉보다는 차라리 그 쪽으로 군사를 이동시키는 게 낫지 않겠소? 마침 도독께서도 부상을 당하셨으니, 일단 시상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정보의 말을 들은 주유는 안색이 돌변했다.

“강릉은 형주의 서쪽 관문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를 안정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형주를 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반드시 강릉을 취하고야 말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갑옷과 투구를 붙이고 말 위에 올라탔다.

“내 친히 조조 군의 동태를 살펴보리라!”

장수들이 놀라서 말렸으나 주유는 수백 기를 거느리고 진문 밖으로 나갔다. 마침 저 쪽에서 조인이 싸움을 돋우기 위해 동오 군 진채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조인은 주유를 보자 그가 부상 중인 것을 알고 군사들을 시켜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가소롭구나, 주랑아. 갈비뼈에 화살을 맞은 기분이 어떠냐?”

“이번에는 창에 사타구니를 찔리고 싶어서 나왔느냐? 이리로 오너라. 내가 찔러주마.”

조조 군의 심한 욕설에 주유는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곁에 있는 반장을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당장 나가서 조인을 죽여버려라!”

그러나 반장이 채 말을 달려나가기도 전이었다.

“아악―!”

주유는 길게 비명을 지르면서 입으로 피를 토하고 말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인은 이 때다 싶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조 군이 밀려들어오자 동오 군 장수들은 위급함을 느끼고 모두 몰려나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유를 겨우 떠메고 돌아와 진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미처 진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주유의 군사들은 모두 조인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었다.

공명의 선택 (197)…제16장 병주고 약주고 (6)
“오늘도 동오 군이 패했답니다.”

유비 군의 염탐꾼들은 바빴다. 조인과 주유의 싸움은 그 즉시 유강구에 머물고 있는 공명에게 보고되었다. 공명은 일각일각 날아드는 강 건너편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진한 점이 있으면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그 날도 그랬다.

“어떻게 해서 동오 군이 패했느냐?”

“조조 군의 욕설에 화를 참지 못한 주유가 공격 명령을 내리다가 별안간 피를 토하고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습니다.”

“주유 군의 피해는?”

“미처 진문 안으로 달아나지 못한 30여 명의 군사들이 포로가 되거나 죽었습니다.”

“거느리고 나간 군사는 얼마나 되었는가?”

“2백여 기였습니다.”

별안간 공명의 두 눈이 별같이 빛났다.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옆에 앉아 있던 유비를 향해 빙긋 웃었다.

“주공께서는 오늘 밤 안으로 강릉성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겠습니다.”

유비는 공명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유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강릉성을 함락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연전연패하는 것으로 보아 조인의 군세는 여간 강한 게 아닌 것이 분명하오. 그런데 우리가 어찌 하룻밤 사이에 강릉성을 취할 수가 있단 말이오?”

“오늘 밤 조인은 반드시 패합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은 주유입니다. 군사께서는 동오 군이 패할 거라는 말을 잘못 얘기한 것 아닌지요?”

유비의 반문에 공명은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주유가 피를 토하고 말에서 떨어진 것은 그의 계략입니다. 조인과 대치 중인데도 2백 기만을 거느리고 나갔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밤 주유는 자신이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릴 것입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강 건너 염탐을 나갔던 다른 군사 하나가 급하게 뛰어들어오며 외치듯 보고했다.

“주도독이 방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동오 군은 지금 철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깜짝 놀라 공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앉아서도 주유의 행동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짐작하고 있는 공명의 헤아림이 너무나 신기해서였다. 그러나 공명은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조금 전의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삼경이 넘어서 조인은 반드시 전 병력을 동원하여 동오 군의 진채를 급습할 것입니다. 이제 주공께서는 비밀리에 조자룡에게 영을 내리시어 조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거든 지체 없이 강릉성을 취하게 하십시오.”

그제야 유비는 오늘 밤 안으로 강릉성으로 들어갈 거라는 공명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아직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우리가 강릉을 취한다 해도 주유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 때는 어찌하면 좋겠소?”

“그 점은 제가 다 생각해놓은 바 있으니, 주공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강릉으로 들어갈 준비나 하십시오.”

공명의 말에 유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군사만 믿겠습니다.”

공명의 짐작은 정확했다. 조인과 대치하던 중 욕설을 듣고 피를 토한 주유는, 그러나, 자신의 막사로 실려 들어오자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우도독 정보를 향해 말했다.

“방금 전 내가 피를 토한 것은 조인을 속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지금 곧 내가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시상으로 돌아갈 것처럼 꾸미십시오. 그러면 조인은 틀림없이 이긴 기세를 타고 오늘 밤 야습을 해올 것입니다. 이제 강릉성을 취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정보는 주유의 말을 듣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신묘한 계책이오. 공명이라도 이 계교에는 속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 동오 군의 진채에서 별안간 통곡소리가 터져나왔다. 정보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갑옷 대신 상복을 입었다. 군사들은 창칼 대신 시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공명의 선택 (198)…제16장 병주고 약주고 (7)
강릉성을 놓고 벌이는 공명, 주유, 조인 등 세 사람의 머리 싸움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시각, 강릉성 안의 조인은 부하 장수들을 불러놓고 그 날 낮의 승전에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오늘 주유가 부아를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금창이 터졌으니, 이제 그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소.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동오 군을 섬멸시켜야 할 것이오.”

조인이 얼굴 가득히 기쁜 기색을 드리우며 말하고 있는데, 문득 군사 하나가 들어와 보고했다.

“동오 군 진채에서 통곡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조인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졌음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주유가 죽었음이 분명하다. 이제야 적벽에서 진 빚을 갚아줄 때가 왔구나.”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음입니다. 오늘 밤 동오 군의 진채를 급습하면 크게 성공할 것입니다. 주유의 시체를 빼앗아 그 목을 베어 허도로 보내면 승상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모사 진교가 재빨리 조인의 말을 도왔다.

“그거 좋은 생각이외다.”

다른 장수들도 주유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지라 아무 의심하지 않고 찬성했다. 그 날 밤이었다. 조인은 우금을 선봉으로 삼고 자기는 중군이 되어 전 병력을 거느리고 강릉성을 나섰다. 성을 지킬 사람으로는 모사 진교만을 남겨놓았다. 군사들에게는 일체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말에게도 재갈을 물려 일체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조인의 군사들이 동오 군 진채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삼경 가까이 되었다. 과연 진채 안에서는 요란한 통곡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조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나서 영을 내렸다.

“총공격하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조조 군은 곧 산을 울릴 듯한 함성을 질러대며 동오 군의 진채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그들이 막 진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별안간 진채 안에서 불길이 솟더니 그것을 신호로 주변 사방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동오 군이 물밀듯 쏟아져나왔다.

“속았다! 퇴각하라!”

그제야 적의 계교에 떨어진 걸 깨달은 조인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동편에서는 동오 군 장수 한당과 장흠이 앞장서 시살해 들어왔고, 서편에서는 주태, 반장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남쪽과 북쪽에서도 서성과 정봉, 진무와 여몽이 창을 휘두르며 치고 나왔다. 그것은 이미 싸움이 아니었다. 조인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에 바빴다. 조인은 겨우 수십 기만을 이끌고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한참을 정신없이 도망치는 중에 조홍을 만났다. 더 이상 싸울 마음을 잃은 조인과 조홍은 연이어 도망쳐오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강릉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길목마다 동오 군이 숨어 기다리고 있다가 조인을 급습하였다. 결국 조인과 조홍은 강릉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방향을 바꿔 양양으로 쫓겨 달아났다.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단 하룻밤 싸움에 조조 군을 전멸시킨 주유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군사를 거두어 승전고를 울리며 강릉성을 향해 진군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텅 비어 있어야 할 강릉성 위에 기치창검이 가득히 꽂혀 있는 게 아닌가. 주유는 혹시나 자기 편 장수가 그 사이 강릉성을 점령한 게 아닌가 하여 성문 앞에 이르러 크게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그러자 문득 성벽 위에서 한 장수가 나타나 우렁차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도독께서는 어찌하여 강동으로 돌아가시다가 다시 오셨습니까? 우리는 제갈 군사의 명을 받들어 이미 강릉성을 취한 지 오래요. 나는 상산 땅의 조자룡이외다.”

주유는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또 공명의 수작에 놀아난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괴롭게 싸운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분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으으으…….”

주유의 턱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우도독 정보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깨닫고 막 진정시키려 하는데 별안간 주유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뿜어나왔다.

“으아악―!”

긴 비명소리와 함께 주유는 말에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금창이 터진 것이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서너 시각이 지나서였다. 정보, 노숙 등이 별의별 말을 동원하여 위로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주유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내가 살아서 제갈량 그 촌부를 죽이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나는 그 자의 간을 씹어먹고야 말겠다!”

눈에서 퍼런 불이 쏟아져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숙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유의 마음을 달랬다.

“우리가 비록 적벽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조조에게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네. 더욱이 주공께서는 합비를 공격한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계시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유황숙과 서로 싸우게 되면 어찌되겠는가. 만일 그 틈을 타 조조가 다시 내려오면 그 때는 두 집안 모두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하고 말 것이네. 자중하게나.”

“하지만 공명이란 자가 너무 괘씸하지 않은가. 자네도 보았듯이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하면서까지 싸웠는데도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네. 그런데 공명은 어떠한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덥석 강릉성을 차지했으니 어찌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죽어도 이대로는 그냥 물러서지 않겠네.”

“그렇다면 이러는 것이 어떤가? 내가 유황숙을 찾아보고 좋은 말로 달래보겠네. 어차피 공명이 서약한 것도 있고 하니 무작정 우기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만약 성을 내주지 않겠다면 그 때는 자네 뜻대로 하게.”

주유도 노숙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음인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은 자네 말에 따라보겠네. 하지만 저들이 어떠한 이유를 내세우든 강릉성을 내놓지 않으면 나는 동맹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 병력을 동원하여 강릉성을 들이치겠네.”

주유의 동의를 받은 노숙은 그 길로 진채를 나와 강릉성으로 들어갔다.

공명의 선택 (199)…제16장 병주고 약주고 (8)
공명은 노숙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적벽대전 이후 이 날이 있기를 기다려온 공명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노숙이 찾아오도록 상황을 만들어갔다. 한진에서 하구로 가는 도중 이루어진 공명과 노숙의 첫 회담에서는 동맹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거론되지 않았었다.

―조조에 맞서 싸운다. 대원칙만 합의했었다. 승리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공명도, 노숙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서로의 이득과 장래가 관계되는 예민한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부분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형주. 양측이 노리는 바가 같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동맹을 깨고 싸움을 벌이든지, 아니면 새로이 세부적인 사항을 약속해야 했다.

제1차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여건은 유비 측에게 불리했다. 여전히 힘도 땅도 없었다. 유비는 어떻게 해서든 군세를 기를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다. 싸워서 얻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손권과는 다시 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유비 군의 전력으로는 조조와 손권을 모두 적으로 해서는 견딜 능력이 없다.

―동오 군과의 불가침 조약. 유비 측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공명은 이것을 얻어내기 위하여 발빠르게 유강구로 이동한 후 주유가 힘을 빼는 사이 강릉성을 점령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강릉성은 노숙과의 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유황숙을 뵙고 싶습니다.”

노숙은 성 안으로 들어와 유비를 찾았으나 공명은 고개를 저었다.

“유황숙께서는 손 장군과 얘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군 대 신하의 회담은 격에 맞지 않는다,라는 공명의 일침이었다. 노숙은 즉각 공명의 뜻을 알아채고 얼굴을 붉히며 사죄했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즉각 회담에 들어갔다. 노숙이 먼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조조가 80만 대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내려온 본래 목적은 유황숙을 쳐 없애려 함이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주공께서 유황숙을 도와 조조의 대군을 물리쳐주셨으니, 형주 아홉 고을은 당연히 동오의 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황숙께서는 속임수를 써서 강릉성을 취하셨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께서는 마땅히 강릉을 우리에게 내주셔야 할 것입니다.”

“자경 선생의 말씀이 옳긴 합니다만, 한 가지 잊은 사실이 있는 듯합니다.”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잊다니요?”

“자경 선생께 묻겠습니다. 형주는 누구의 땅이었습니까?”

“그야 유경승의 땅이었지요.”

“바로 보셨습니다. 유황숙께서 조조의 침공을 받아 하구로 내려오신 것은 유경승의 아들인 유기 공자를 도와 형주를 다시 찾으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다만 힘이 없어 한탄하던 중, 다행히 동오와 동맹을 맺고 조조를 무찔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형주는 누구의 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야…….”

노숙은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판이 아닌가. 노숙이 주춤하는 사이, 공명이 그 마음을 짐작하고 재빨리 말을 받았다.

“옳게 보셨습니다. 형주는 당연히 본래의 주인인 유경승의 아들에게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노숙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허둥댔다.

“그렇다면 유황숙께서는 형주를 온전히 유기 공자에게 넘겨주실 작정이란 말씀이오?”

“그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 유황숙께서는 결코 종친의 땅을 빼앗을 분이 아닙니다. 그 점은 자경 선생께서도 여러 차례 보아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유황숙께서는 조만간 유기 공자를 형주목으로 임명해달라는 표문을 황제 폐하께 올릴 예정이십니다. 물론 동오의 손 장군께서 동의를 하신다면 말입니다.”

공명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노숙은 깜짝깜짝 놀랐다. 한결같이 예상 밖의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숙이 당황하여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공명의 입에서 이 회담의 본론이랄 수 있는 말이 터져나왔다.

“물론 유황숙께서는 동오의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신 것이 이 강릉성입니다.”

“강릉성이라니요?”

노숙은 이미 공명의 말에 자신이 끌려들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귀가 번쩍 뜨여 물었다.

“자경 선생께서는 유기 공자가 형주목에 오를 수 있도록 손 장군과 주랑에게 잘 말씀드려주시오. 그러면 유황숙께서는 유기 공자와 협의하여 강릉을 포함한 그 이북 땅을 모두 동오에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선생께서는 이 양(亮)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렇게 되면 유황숙께서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노숙의 의심어린 눈빛에 공명이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유황숙께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다만, 유기 공자를 도와 형주를 편안히 다스리기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도 어디 머물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명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야 당연하지요. 유황숙께서는 유강구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손 장군이 양해만 해주신다면 유강구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노숙은 공명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랐다.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요, 손권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명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가 이렇게 나오는 데는 뭔가 나름대로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공명의 선택 (200)…제16장 병주고 약주고 (9)
‘그것이 무엇일까?’

여러 각도로 생각해볼 수가 있었다. 강릉과 유강구를 제외하곤 형주는 아직 조조 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비 군으로서는 형주에서 조조 군을 몰아낼 힘이 부족할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북쪽을 동오 군에게 내주고 남쪽만을 수복하여 다스리겠다는 속셈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것은 손권에게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어차피 동오 군도 단시일 내에 형주 전체를 수복할 능력은 없다. 그럴 바에는 남쪽을 내주는 것이 유리할지도 몰랐다.

―형주 북쪽은 손권, 형주 남쪽은 유비.

노숙도 이와 비슷한 구상을 한 적이 있었다. 주유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공명도 같은 구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 정도 조건이면 수락해도 무방할 듯 싶었다. 무엇보다도 노숙의 마음을 끈 것은 강릉을 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가 이 곳으로 들어온 목적은 강릉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었던가. 일단 임무는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곰곰이 따져보던 노숙이 이윽고 공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공명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유황숙과 유기 공자께서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형주의 남쪽 지역은 유기 공자가 다스리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상호간 군사 행동을 일으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는 동맹군이 아닙니까? 서로 힘을 합해 조조의 힘을 죽여놓아야 합니다.”

“오늘 안으로 강릉성을 비워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주랑의 병이 빨리 완쾌될 게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저도 돌아가는 대로 주공께 말씀드려 공자 유기를 형주목으로 제수해 달라고 천자께 표문을 올리겠습니다.”

공명과 노숙은 손을 잡았다. 두 사람 모두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 출발이 형주 분할이었다.

―형주목 유기.

―강릉 태수 주유.

공명과 노숙 사이에 맺어진 밀약은 얼마 후 이런 형태로 나타났다. 유비는 여전히 형주의 객장 신분이었다. 손권은 실리를 취했고, 유비는 공자 유기에게 형주목이라는 지위를 되찾아주었다는 덕망을 얻었다. 그 이외에 눈에 드러나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소득이라면 손권의 인정하에 유강구라는 땅에 머물게 된 것뿐이라고나 할까. 이 결과를 놓고 양쪽 진영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특히 유비 진영에서는 노골적으로 공명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았다. 공명이 하는 일에 웬만해서는 관여를 하지 않는 유비도 이 때만큼은 불만의 뜻을 비췄다.

“기껏 차지한 강릉성을 주유에게 내준 까닭을 알 수 없구려.”

공명이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강릉성을 얻기란 강가의 돌멩이 하나 주워드는 것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것이 필요없기에 주유에게 내준 것뿐입니다. 주공께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민심을 잘 추스리십시오. 이 곳 유강구 주변에는 비옥한 땅이 많습니다.”

죽을 위험까지 넘겨가면서 강릉성을 차지한 주유의 판단은 언뜻 보기에 옳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자충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공명은 보고 있었다.

“자기 함정을 자기가 판 것이지요.”

공명은 유비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강릉 이북의 땅은 아직도 고스란히 조조의 영역이었다. 주유는 그 땅을 빼앗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이요, 조조는 그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급 장수들을 전진 배치시켜놓았다. 양양성에 악진(樂進)을 남겨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는 강남 땅에 틈이 생기기만 하면 언제든지 남하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놓고 있었다. 싸움은 장기화될 것이고, 승패는 좀처럼 가려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반면에 유비가 머물고 있는 유강구는 장강에 면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면서도 조조와는 직접적인 대결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강릉성의 주유가 완충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이지요.”

공명은 자신의 속을 이렇게 드러내보였다. 비로소 유비는 공명의 속셈을 언뜻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우리는 동정호 일대의 호남지방을 공략한다, 이 말씀이오?”

“바로 그것입니다. 강릉은 형주 남부를 평정한 후에라야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땅이지요. 지금은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형주 남부를 공략하면 주유가 우리의 뒤를 치지는 않겠소?”

“주유는 욕심이 많기는 하지만 현실을 정확히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강릉의 위험을 무릅쓰고 중원과는 거리가 먼 형주 남부 땅을 탐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명의 설명이 끝날 무렵쯤 해서는 유비의 입이 벙긋벙긋 벌어졌다.





<공명의 선택> 17장 날개를 펴는 유비
원검일생록-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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