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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12 19:00:14, Hit : 3363, Vote : 296
 <공명의 선택> 15장 적벽의 풍운
공명의 선택 (178)…제15장 적벽의 풍운 (1)
‘모든 준비는 끝났다!’

주유는 뱃머리에 서서 멀리 강 건너 숲 속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안개가 아슴아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불타는 적벽뿐이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입에서는 뜨거운 숨결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조조의 80만 대군이 강동을 향해 밀려온다는 소식에 접한 지 어느 새 한 달. 그 동안 주유는 까마득한 벼랑과 벼랑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계속 이어져왔다.

거대한 해일과의 싸움―.

눈앞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급해진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등골이 오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황개의 고육계와 사항계가 멋지게 적중했다. 조조는 이제 황개의 투항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연환계도 성공했다.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조조는 전함들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해놓았다고 한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명의 묘책에 조조가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 배에 불 지르는 일만 남았다. 그것은 황개가 잘 해낼 것이다. 승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유는 왠지 자꾸 불안했다. 벅차오르는 가슴 속 한구석에서 정체 모를 두려움이 고개를 치밀고 있었다.

‘공명 때문인가?’

빙긋 웃는 공명의 수려한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대하면 대할수록 크게 느껴지는 공명이었다. 주유의 헤아림으로는 도저히 그의 신기막측한 묘계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공명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공명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조조의 함대가 불타오르는 순간 공명의 목도 장강의 깊은 물 속으로 잠겨들 것이다.’

그를 제거할 방법은 이미 생각해두었다.

‘그렇다면 주랑아, 너는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가?’

발자국 소리가 갑판을 울리고 있었다. 노숙이었다.

“언제 감행할 것인가?”

주유 옆에 선 노숙의 얼굴은 무거웠다. 그럴 만도 했다. 황개의 투항 편지를 보낸 것이 벌써 열흘 전 아닌가. 더 늦어졌다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변할 것이다.

“글쎄…….”

과감하고 결단성 있는 주유였다. 늘 우유부단한 노숙을 타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 되었다. 노숙은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고, 주유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가는 장강의 황혼이었다. 강가에 정박한 크고 작은 배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강남의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다. 그래도 11월의 강바람은 차갑고 사나웠다. 주유는 문득 섬뜩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의 눈길은 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런가……?”

노숙이 심상치 않은 주유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유가 별안간 자신의 목을 움켜잡으며 시뻘건 피를 토해냈다.

“헉!”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주랑……!”

“아악―!”

순간, 주유는 긴 비명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노숙이 달려들어 주유를 부축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혼절한 뒤였다.

공명의 선택 (179)…제15장 적벽의 풍운 (2)
수채 한가운데 자리잡은 큰 배 위에 올라 수군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조조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제야말로 유현덕과 손중모가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구나.”

조조의 나이 54세. 난세를 만나 어지러운 풍운 사이를 뚫고 지내온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진류 땅의 한 새파란 청년 장수가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몸을 떠는 천하의 영웅이 되어 희끗희끗한 수염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장졸들이 대지에 피를 뿌리며 스러져갔는가. 그 자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왔다.

―힘든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결실이 지금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조조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연환계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처음 서서의 감시병에게서 방통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조조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때 모사 정욱이 낮게 속삭였다.

―방통은 봉추(鳳雛)입니다. 다만, 아직 머물 둥지를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조조가 서서의 막사를 찾았을 땐 봉추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수색 명령을 내렸다.

―잡혀서 머물 사람이라면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서서의 말에 조조는 방통을 포기했다. 그보다는 연환계의 효험이 더 궁금했다.

―배들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하라!

즉각 전군에 명령을 내리고 훈련에 들어갔다.

조조는 수군을 모두 다섯 전대(戰隊)로 나누었다. 중군(中軍)은 누런 기를 매달아 모개와 우금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고, 전군(前軍)은 붉은 깃발을 꽂아 장합에게 맡겼다. 후군(後軍)의 대장은 여건으로 검은 깃발을 쓰게 했으며, 좌군(左軍)은 푸른 기를 달아 문빙에게 이끌게 하였으며 흰 기를 매단 우군(右軍)은 여통에게 지휘를 맡겼다.

둥둥둥둥…….

단단한 쇠고리로 연결한 다섯 함대는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수채를 빠져나갔다. 바람이 심하게 불며 물결이 높았으나 배들은 전혀 요동이 없었다.

“우로!”

“좌로!”

뱃멀미에 시달리지 않게 된 군사들은 예전의 용맹을 되찾은 듯 평지나 다름없이 이리 뛰고 저리 내달으며 창칼을 휘둘렀다. 북방을 정벌한 군대답게 모든 것이 정연했다. 대만족이었다. 조조는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모든 것은 갖춰졌다. 남은 것은 황개의 투항뿐이다.”

황개가 강 건너 이 곳으로 오는 날, 조조는 전 함대를 출동시킬 작정이었다.

둥둥, 둥둥둥…….

다섯 전대가 질서 있게 뱃머리를 돌려 수채로 향하고 있었다. 조조는 장대(將臺) 위에서 내려오면서 좌우의 장수들에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대들도 보았는가, 저 험한 장강을 평지처럼 달리는 우리의 함대를!”

모두들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오직 정욱만이 한 가닥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배들을 얽어놓아 흔들림이 없는 것은 좋으나, 동오 군이 화공(火攻)을 쓴다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가 껄껄껄 웃어댔다.

“그대의 생각이 비록 주도면밀하오마는 아직 미치지 못한 데가 있는 듯하오.”

옆에 있던 순유가 의아한 눈길로 조조를 바라보았다.

“정중덕(仲德=정욱의 자)의 말씀이 옳은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웃으십니까?”

조조가 다시 한 번 웃으며 그 까닭을 설명했다.

“그대들의 눈에는 저 깃발이 보이지 않는가? 무릇 화공책을 쓰려면 바람의 힘을 빌려야 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은 바야흐로 한겨울이오. 서풍과 북풍은 불어도 동풍과 남풍은 불지 않소. 우리가 있는 곳은 강의 북편이요, 동오 군은 남쪽 언덕에 기대어 있소. 만일 저들이 불을 지른다 해도 불길은 모두 동오 군 쪽을 향해 덤벼들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내가 왜 화공을 두려워하겠소?”

정욱·순유를 비롯한 모든 장수들은 그 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희들은 도저히 승상의 안목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나를 위하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조조는 힘차게 펄럭이고 있는 깃발들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화답했다.

공명의 선택 (180)…제15장 적벽의 풍운 (3)
생각지도 않은 주유의 쓰러짐에 동오 군 진영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장수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한숨과 탄식을 터뜨렸다. 군사들에게는 비밀에 붙였으나 언제 알려질지 몰랐다.

“하필이면 이럴 때…….”

“만일 조조 군이 쳐들어오면 큰일 아닌가?”

그 중 가장 피가 마르는 사람은 노숙이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주유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그의 얼굴이 오히려 반쪽이 되었다. 애간장이 탄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어쩌면…….’

까맣게 타들어간 입술을 깨물던 노숙은 어느 순간 공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공명이 의술을 익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혹시나 그라면 화타(華陀) 같은 명의(名醫)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노숙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공명의 거처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명은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한가로이 책을 보며 앉아 있었다. 노숙이 소매를 잡다시피 바싹 다가앉아 주유의 병을 걱정하자 그제야 눈을 들어 노숙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공근의 병에 대해 자경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늘이 우리 강동을 버리고 조조를 도우려는 모양이오.”

“하늘이라…… 좋은 말씀이오.”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농담이라니요? 선생의 말씀대로 주공근의 병은 하늘이 내린 병입니다. 인력(人力)으로는 어쩔 수가 없지요.”

“좋은 방법이 없겠소?”

“하늘이 내린 병이니, 하늘만이 고칠 수가 있겠지요.”

계속 하늘 타령만 하고 있는 공명의 태도에 노숙은 은근히 화가 났다.

“이보시오, 공명 선생! 우리는 같은 배를 탄 동맹군이오. 이번 싸움에서 패하면 우리 주공뿐 아니라 유황숙도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명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내가 어찌 그 점을 잊을 리 있겠습니까? 물론 나는 주공근의 병을 치유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병이 치유되느냐 안 되느냐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공명의 그 말에 노숙은 금세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앉았다.

“병을 치유할 방법을 알고 계시다니요? 그게 사실이오?”

“이 양(亮)은 헛된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노숙은 공명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어떻게 하면 주랑의 병이 낫겠습니까?”

“일단 주공근을 만나보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주랑에게로 가십시다.”

노숙의 불 같은 성화에 공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유는 가슴이 뛰고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공명의 얼굴을 보자 안간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노숙이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그는 손을 내저었다. 주유 특유의 자존심과 오기가 발동한 것이리라. 공명은 그런 주유를 동정과 안타까움과 공감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번 싸움에 임하는 그의 각오와 집착이 어느 정도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공명이었다.

‘과연 주랑이로다!’

공명은 속으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주유의 두 눈은 뚫린 듯 퀭하니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마른 무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공명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며칠 만나뵙지 못하는 사이 이렇게 병환이 드신 줄은 몰랐습니다.”

공명의 위로에 주유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말을 받았다.

“사람의 화복은 아침 저녁 사이에 달려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라고 어찌 늘 건강할 수 있겠소?”

그러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다시 한마디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늘도 하늘에 이는 풍운을 헤아리지 못하는 때가 있거늘, 사람이 어찌 자신의 일을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심상히 흘리는 말 같았지만 묘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주유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공명을 바라보다가 괴로운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공명은 그러한 주유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도독께서는 가슴 속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약을 써서 가슴을 풀어야 하겠습니다.”

“수십 가지 약을 써보았습니다만 전혀 효험이 없으니 더욱 답답할 뿐이외다.”

“약도 약 나름이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무릇 병이란 마음 속에서부터 비롯되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기운이 고르지 않게 되고, 기운이 고르지 않으면 가슴이 막히게 됩니다. 그러니 도독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마치 주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주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선생의 말씀이 틀린 바는 아니지만, 도무지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공명이 그런 주유를 보고 다시 빙긋 웃었다.

“도독께서는 제 약을 한 번 써보시겠습니까?”

강동 제일의 기재라 불리는 주유였다. 그는 이내 공명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선생께서는 어떤 약을 쓰려 하시오?”

“먼저 진맥을 하여 병의 원인부터 잡아낸 후 거기에 맞는 약재를 써야 하겠지요.”

공명은 이렇게 말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였다. 노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붓을 내밀자 공명은 몇 자 적어 주유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도독께서 병이 나신 까닭입니다.”

주유는 얼른 그 종이를 받아 읽어보았다.


공명의 선택 (181)…제15장 적벽의 풍운 (4)
조조를 깨뜨리려면 마땅히 화공을 해야 하거늘, 모든 것은 갖추어졌으되 오직 동풍(東風)이 없구나.

그 글을 읽어본 주유는 깜짝 놀랐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진정 공명은 하늘이 내린 사람인가.’

그랬다. 주유는 밥짓는 연기가 모두 남쪽을 향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바람이 서북풍인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혼자 걱정하며 하늘만을 원망하다 보니 어느 새 가슴 속의 병이 깊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공명은 가만히 앉아서 이러한 주유의 가슴 속 병을 고스란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유는 공명의 놀라운 혜안에 새삼 탄복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매달리기로 마음먹었다.

“선생께서 이미 내 병을 정확히 짚으셨으니, 반드시 그 처방책도 알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부디 제게 좋은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하는 주유의 태도는 공손했고, 어조는 간곡하기 그지없었다. 공명도 정색을 하고 그에 답했다.

“이 양(亮)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융중 산 속에 살면서 기문둔갑(奇門遁甲)에 관한 천서(天書)를 익힌 적이 있기에 하늘님에 기도하는 법을 조금 압니다. 하지만 역시 동남풍이 불고 안 불고는 결국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도독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한 번 제단을 차려 기도를 드려보겠습니다.”

“지금은 한겨울인데 기도를 올린다고 서북풍이 동남풍으로 바뀌겠습니까?”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정성에 달린 것이 아닐까요? 지금 곧 남병산(南屛山)에 칠성단(七聖壇)을 만들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곳에 올라가 사흘 동안 동남풍을 몰아치게 하겠습니다. 도독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제껏 한 번도 허튼 소리를 한 적이 없는 공명이었다. 황당한 중에서도 주유는 어쩌면 공명은 바람을 부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흘 밤낮은 고사하고 하룻밤만 동남풍이 불어도 대사(大事)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오로지 공명 선생만 믿겠습니다.”

주유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하 장수를 불러 명했다.

“5백 날랜 군사를 뽑아 남병산에 제단을 쌓도록 하라. 또 따로이 120명의 군사를 뽑아 기를 들고 제단을 지키며 공명의 영을 받들도록 하라.”

명을 받은 장수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남병산으로 달려가 칠성단을 쌓기 시작했다.

자신의 배로 돌아온 공명은 은밀히 황풍을 불렀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네. 자네는 지금 곧 하구로 가 사흘 후에 조자룡을 남병산 아래 갈대숲으로 오라 하게. 많은 군사는 필요없네. 다만 빠른 배만 가지고 오면 될 것일세.”

“이 곳 어부들은 구름 색깔만 보고도 며칠 후의 날씨까지 알아맞힐 정도입니다. 사흘 안에 반드시 동남풍이 불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빌어야지.”

“그럼 저는 이만…….”

언제나 그렇듯 황풍은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공명은 목욕재계를 하고 도의(道衣)로 갈아입은 뒤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칠성단 앞에 이르렀다. 노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동남풍이 불겠습니까?”

그러나 공명은 대답 대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자경 선생께서는 진중으로 돌아가 주공근을 도우시오. 특히 황개 장군에게 실수가 있지 않도록 잘 살펴주시오.”

노숙은 아무 말 못 하고 그 곳을 떠나갔다. 공명은 다시 단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엄한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함부로 제 위치를 떠나서는 안 된다. 머리를 대고 속삭여서도 안 된다. 쓸데없이 묻거나 어지러운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요망스럽게 놀라거나 괴이한 짓을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영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리라!”

이윽고 공명은 단 위로 올라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공명의 선택 (182)…제15장 적벽의 풍운 (5)
황개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삼 일 안에 그 곳으로 건너갈 작정입니다.

도착 날짜를 알리는 편지는 이미 이틀 전에 조조 진영으로 보내두었다. 적함에 부딪치면 떨어지지 않도록 뱃머리에 빽빽이 큰 못을 박아놓았다. 배 안에는 마른 갈대와 싸리나무를 가득 실은 후 생선기름을 붓고 그 위에 다시 유황과 염초(焰硝) 등을 쌓아두었다. 불만 당기면 삽시간에 불덩어리로 변할 것이다. 그런 배들이 모두 30여 척이었다. 주유의 명이 떨어지기만 하면 그 배들은 일제히 조조 군의 수채를 향해 돌진할 것이다. 주유 역시 뱃전에 꽂아둔 깃발의 방향만 지켜보고 있었다. 공명이 칠성단에 오른 지 이틀째 였다. 바람은 여전히 서북풍이었다. 그 때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아뢰었다.

“주공께서 많은 전함을 친히 거느리고 85리 밖에 닻을 내렸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겠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주유는 더한층 긴장이 고조되었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떴다.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바람은 이제 불지 않았다. 주유는 입술이 탔다. 옆에 있던 노숙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만은 공명이 틀린 것 같네.”

“좀더 기다려보게나.”

누구보다도 공명의 능력을 믿고 있는 노숙은 좋은 말로 주유를 달랬다. 적벽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새벽―. 군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는 퍼뜩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노숙이 흥분한 모습으로 달려들어왔다.

“주랑, 이제 되었네!”

노숙은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

“되다니?”

주유는 언뜻 노숙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바람 말일세. 공명의 말대로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말이네!”

“그것이 사실인가?”

주유는 의심 반 기쁨 반이 섞인 눈길로 노숙을 쳐다보았다.

“저 밖의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동남풍이란 말일세. 나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면 알 게 아니겠…….”

노숙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주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과연 뱃머리에 꽂아두었던 대장기가 서북편을 향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동남풍이던가. 이 때문에 피까지 토하고 쓰러졌던 주유였다. 이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주유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 하는가? 빨리 황개 장군에게 명을 내리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출전 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노숙이 일깨우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었을지 몰랐다. 주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 그는 3만 동오 군을 호령하는 본래의 총지휘관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 전령을 보내 모든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주유는 장대(將臺) 위로 높이 올라가 위풍당당하게 출전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황개 장군은 조조의 함대에 불지를 화선(火船)을 한 번 더 살핀 후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강 건너 투항을 하시오!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장군은 제일 전공자가 될 것입니다.”

“곧 출발하도록 하겠소!”

영을 받은 황개는 비장한 각오을 보이며 그 곳을 떠났다. 주유의 영은 계속되었다.

“조조 군 수채에 불길이 솟으면 곧바로 돌격이오. 제1대는 한당이, 제2대는 주태가, 제3대는 장흠이, 제4대는 진무가 지휘할 것이며, 제5대는 내가 직접 이끌도록 하겠소.”

수전에 대한 배치가 끝나자 육상전에 대비한 영이 계속 이어졌다.

“태사자는 들으시오. 3천 군사를 거느리고 황주 경계로 달려가 합비(合肥)에서 오는 조조의 군사를 막으시오!”

“영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여몽 장군은 어디 계시오?”

“여기 대령했습니다.”

여몽이 장대 앞으로 나와 군례를 올렸다.

“장군은 3천 군사를 거느리고 강 남쪽을 우회하여 오림으로 들어가 조조 진채 뒤편에 불을 지르시오. 그렇게 되면 조조 군은 크게 혼란에 빠질 것이외다.”

“틀림없이 이행하겠습니다.”

“다음은 능통 장군!”

“예, 영을 내리십시오.”

“능 장군 역시 3천 군사를 거느리고 이릉(夷陵) 방면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오림에 불이 일거든 쫓아와 조조 군을 공격하시오!”

주유는 다시 동습을 불렀다.

“동습 장군은 군사 3천을 이끌고 한천(漢川)을 따라 올라가 조조의 후방 진채를 쳐부수시오! 흰 기를 앞세운 군사를 보면 도우러 온 우리 편 군사인 줄로 알고 협력하시오.”

또 반장(潘璋)을 불러 영을 내렸다.

“반 장군은 흰 기를 앞세우고 한천 뒤편에 숨어 있다가 동습 장군이 힘에 부치거든 달려가 돕도록 하시오.”

여간 치밀한 작전 명령이 아니었다. 영을 받은 모든 장수들이 각기 전선과 군마를 이끌고 떠나갔다. 이제 장대 앞에는 몇몇 장수들밖에 남지 않았다. 그 중 서성(徐盛)과 정봉(丁奉)은 용맹하기로 소문난 동오의 장수였다. 그들은 자신들만 영을 받지 못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도독께서는 어찌하여 우리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주유가 빙그레 웃으며 가까이 불러 말했다.

“내 어찌 두 장군을 잊을 리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는 따로이 중요한 임무를 맡아주셔야 하겠습니다.”

“무엇입니까?”

“공명은 지극히 위험한 자입니다. 장차 동오의 큰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나는 그 공명을 제거할까 하오. 두 분은 지금 곧 남병산으로 달려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공명을 끌어내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시오. 우리 강동의 장래가 달린 일이니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적벽의 대전에 임하는 주유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공명의 선택 (183)…제15장 적벽의 풍운 (6)
―공명을 죽여라! 주유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은 서성과 정봉은 각기 1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병산을 향해 달려갔다. 서성은 배를 타고 물결을 박차고 나갔으며, 정봉은 말을 타고 언덕길을 따라 내달렸다. 남병산에 먼저 이른 것은 기마군을 거느린 정봉이었다. 그는 재빨리 칠성단을 포위하고 그 위를 살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기를 잡은 군사들만 꼼짝하지 않은 채 바람을 맞고 서 있을 뿐, 공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봉은 말에서 뛰어내려 칠성단을 지키는 군사를 붙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공명은 어디 있느냐?”

“조금 전에 단에서 내려가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군사들이 본 대로 말해주었다. 정봉은 초조했다. 칠성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련한 임시 막사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공명의 그림자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 때 서성의 배가 그 곳에 당도했다. 두 사람은 서로 군사를 나누어 남병산 주변을 다시

한 번 수색했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 큰일나지 않았소?”

“무슨 면목으로 도독을 뵌단 말이오?”

이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물가를 지키고 있던 군사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방금 전 동쪽 아래 갈대숲에서 빠른 배 한 척이 나와 하구 방면으로 미끄러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성과 정봉은 귀가 번쩍 뜨였다. 부리나케 물가로 달려가 멀리 강을 바라보았다. 과연 아슴아슴 안개가 피어오르는 장강 한가운데에 작은 배 한 척이 빠르게 나가고 있었다.

“공명이 탄 배가 틀림없소.”

서성은 즉시 배에 올라탔고, 정봉은 말에 올라 공명의 배를 바라보며 강변을 따라 달렸다. 서성은 돛이란 돛을 모두 올려 최고 속도로 공명의 배를 뒤쫓아갔다. 어릴 적부터 장강의 바람과 물길에 익숙한 강동의 군사들이었다. 서성의 배는 살같이 달려 잠시 후 그 배와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따라잡았다. 그 배에 공명이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 서성은 뱃머리에 서서 큰 소리를 질렀다.

“선생께서는 가지 마시고 잠깐 멈추시오. 도독께서 청하십니다.”

그러자 배 뒤편에 앉아 있던 공명이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주랑에게 내 말이나 전하시오. 이 제갈량은 이제 할 일을 마치고 하구로 돌아가는 중이오. 주랑은 딴 생각 하지 말고 용병(用兵)을 잘해 조조의 대군이나 깨뜨리라고 하시오. 인연이 닿으면 뒷날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 말에 물러날 서성이 아니었다. 그는 목청을 높여 외쳤다.

“잠깐이면 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하하…… 나는 벌써 다 알고 있소. 주랑이 나를 시기하여 해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그래서 나는 미리 조자룡에게 배를 가지고 오라 한 것이니, 장군은 애써 나의 뒤를 쫓지 마시오.”

서성은 말로는 공명을 잡을 수가 없음을 알고 군사들에게 활을 쏠 것을 명했다. 그 때였다. 공명이 탄 배에서 한 장수가 일어나더니 활을 가득 당기며 서성을 꾸짖었다.

“나는 상산(常山) 조자룡이다. 내 특별히 명을 받들어 제갈 군사를 모시러 왔는데, 네 어찌 감히 뒤를 쫓는단 말이냐? 이 화살 한 대로 너를 쏘아 죽일 수도 있으나, 동맹군의 화평이 깨질까 염려하여 잠시 내 솜씨를 보이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조운은 말을 마치자마자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바람을 뚫고 날아갔다. 서성이 타고 있던 배의 돛줄 하나에 가서 정확히 맞았다. 돛줄이 끊어지자 배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이를 본 서성은 안색이 변하였다. 더 이상 쫓을 마음이 일지 않았다.

강 언덕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정봉이 서성에게 외쳤다.

“제갈량의 신기묘산은 귀신도 미치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자가 어찌 그를 잡을 수 있겠소? 더욱이 만 명의 군사가 몰려와도 꿈쩍하지 않을 조자룡이 저처럼 굳게 지키고 있으니 애당초 공명을 잡기는 그른 일이오. 그대로 돌아가 도독에게 사실대로 고하는 수밖에 없소.”

당양의 장판벌에서 조조의 대군 사이를 휘저으며 아두를 구해낸 조운의 전설 같은 용맹은 이미 강동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서성은 못 이기는 체 뱃머리를 돌렸다. 두 사람은 곧 어깨를 늘어뜨리고 주유에게로 돌아가 사실대로 고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공명을 죽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던 주유는 서성과 정봉의 보고에 화를 내기보다는 탄식이 먼저 앞섰다.

“공명의 지모가 이토록 깊고 넓으니 내가 낮이나 밤이나 편할 날이 없겠구나!”

그러고는 모든 것을 잊고 조조와의 결전에 전념했다.

공명의 선택 (184)…제15장 적벽의 풍운 (7)
강남이라고는 하지만 11월의 아침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조조는 옷깃을 여미고 갑옷과 투구를 몸에 붙였다.

“상쾌한 아침이군.”

막사 앞에 갖다 놓은 의자에 앉았다. 순유와 하후돈이 그 옆에 시립했다. 눈앞에 펼쳐진 수채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쇠고리로 연결한 다섯 함대가 정연하게 정박해 있었고, 그 사이를 정찰선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조조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해가 뜨기 전 20여 척의 배가 동오 군 수채를 떠났습니다.

그는 방금 전 이러한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황개의 배인가?

―청룡기를 매단 것으로 보아 그러한 듯싶습니다.

정찰선의 보고는 세밀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조조는 직감했다. 서둘러 장수들을 배치한 후 자신은 순유와 하후돈만을 거느리고 수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막사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실눈을 뜨고 멀리 강 건너 동오 군의 진영을 살폈다. 거뭇한 진채(陣寨)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사람이라든가 배의 움직임은 식별할 수가 없었다.

“안개인가?”

조조가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물었다.

“장강은 안개가 많은 곳입니다.”

하후돈이 대답했다.

“좋은 고장이야. 모름지기 시인(詩人)이라면 이런 땅에서 살아야겠지.”

“황개의 항복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요?”

순유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눈빛이었다.

“싸움에서 의심은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지. 하지만 그대는 너무 지나치군.”

“대비책이라도…….”

“지금까지는 적어도…… 양항(佯降)은 아니네. 만일 황개가 투항 날짜를 정확히 적어보냈다면 의심해볼 만한 일이었겠지. 주유는 군사 일을 잘 아는 자일세. 마음먹은 날짜에 양곡을 빼돌릴 만큼 허술하게 관리할 리가 없지. 하지만 황개는 자신도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고 했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네.”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순유는 말꼬리를 흐렸다. 우금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동오 군의 진채를 나온 황개의 배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금이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조조가 빙그레 웃었다.

“주유의 눈을 속이려는 것일세. 황개도 제법이군.”

아니나다를까. 잠시 후 장합이 또 달려와 보고했다.

“동쪽으로 향하던 배들이 방향을 틀어 북쪽 강안을 따라 이리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계속 보고하도록!”

조조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안개가 걷히면서 장강의 동쪽 수평선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장강의 물결은 금방 금빛으로 물들었다.

“일출이군.”

조조는 격전을 눈앞에 둔 사람답지 않게 장강의 일출 광경에 눈을 빼앗기고 있었다. 순유도, 하후돈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출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은 황개의 선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물결에 비치는 햇빛의 찬란함 때문인가. 수채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황개의 선단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수상합니다.”

시린 눈을 돌리며 순유가 이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황개의 배는 수채 가까이 접근해온 뒤였다.

“무엇이 수상하다는 것인가?”

“배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배 안에 양곡이 실렸다면 그 무게 때문에 배의 속도가 저렇듯 빠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기 오는 황개의 배들은 가벼울 뿐만 아니라 너무 빠릅니다.”

“그야 바람 때문에…….”

여기까지 말하다가 조조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뱃머리에 꽂아놓은 깃발로 눈길을 돌렸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바람은 어느 틈에 서북쪽을 향하여 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바람이 거세어지면서 장강의 물결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조조는 그제야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나뒹굴었다. 하후돈을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저 배들이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하라!”

그러나 하후돈이 언덕 아래로 채 달려내려가기도 전에 황개가 이끄는 20여 척의 배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돌격하라!”

황개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마른 나뭇가지와 염초를 가득 실은 동오 군의 화선(火船)들은 이미 쇠고리로 엮어놓은 선박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수백, 수천 개의 대못을 박아놓았다. 충돌한 화선들은 모두 조조 군의 배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충돌하기 직전 화선에 타고 있던 군사들은 개구리처럼 장강의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쇠고리를 끊어라!”

“밧줄을 풀어라!”

조조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강한 동남풍에 조조의 대함대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길 사이로 조조는 보았다. 남쪽 강물을 새까맣게 뒤덮은 채 몰려오고 있는 동오 군의 전함들을. 동시에 오림 숲 속에서도 불길이 일었다. 그들은 어느 틈에 조조 군의 후방까지 끊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을까?’

잠깐 사이 조조의 뇌리 속으로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창을 비껴들고 말에 올라탔다. 고개를 돌려 멀리 장강의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꿈이 있었던 곳, 천하 패업의 야망이 서렸던 곳,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있었던 곳―그러나 이제 그 곳은 까마득히 먼 곳이 되어버렸다. 히히힝―. 말이 길게 울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조조는 말에 박차를 가하기 전, 불길에 휩싸

인 언덕 아래를 향해 외쳤다.

“퇴각하라!”

공명의 선택 (185)…제15장 적벽의 풍운 (8)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적벽을 뒤로하고 작은 배 한 척이 빠르게 장강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명과 조운이 탄 배였다. 두 사람은 배 뒤편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불타는 적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해내셨군요.”

조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공명의 지략에 대한 감탄과 외경심이 듬뿍 서린 어조였다. 유비의 방랑이 끝났음을 확인하는 감동의 분출이기도 했으리라.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공명의 가슴도 뿌듯했다. 지난 한 달여 동안의 강동 생활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발 한 번 잘못 내디디면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안과 밖―두 개의 적과 싸워야 했다. 노숙, 장소, 손권, 주유, 그리고 조조의 80만 대군. 그러나 역시 가장 힘든 싸움은 하늘과의 싸움이었다.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되, 사람은 하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알지 못하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러나 공명은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맡기겠다.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하늘과 싸우겠다는 결의요, 각오였다. 공명의 나이 28세. 더욱이 출사한 지 일 년이 채 안 되었다. 뜨거운 열정과 패기가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을 때였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니, 두려움을 모른다고 해야 할 나이였다.

―하늘과의 한판 승부. 그는 거기에 자신의 일생을 걸기로 했다. 이 싸움에서 지면 공명은 없다.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지니지 못한다. 운조의 일원인 황풍이 그 선봉역을 맡아주었다. 공명은 황풍을 통해 철저하게 하늘의 움직임을 읽으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읽어냈다. 지금 눈앞에 일고 있는 적벽의 불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겼다! 라는 희열과 감동이 공명의 전신에 넘쳐흘렀다.

‘앞으로는 사람과의 싸움뿐이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라고 조운에게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였다. 오만일까, 자신감일까.

배가 하구에 당도했다. 공명을 본 유비는 반가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수고하시었소.”

“주공의 복이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감격에 젖어 있을 만큼 공명의 마음은 한가롭지 않았다.

―수전은 손권 군. ―육상전은 유비 군.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묵시적으로 정한 양 군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공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주유는 수군을 발진시킴과 동시에 6로군의 육상군까지 출병시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형주를 온전히 동오 땅으로 하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자칫 잘못하면 유비는 도로 발붙일 곳 하나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주유라면 능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조조 군이 비록 패했다고는 하지만 그 진채가 3백 리에 걸쳐 있을 만큼 형세가 대단한데, 우리의 적은 군사로 이 넓은 형주를 모두 취할 수 있겠소?”

하구에 머물면서 유비는 이 점을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조의 수군이 패했다고는 하나 육상군이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력부대와의 싸움은 동오 군에게 맡기고, 우리는 조조의 뒤만 쫓는 겁니다. 그 뒤의 일 또한 제게 맡기십시오.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군사만 믿겠소.”

공명은 곧 장막으로 들어가 지도를 펼쳐놓고 장수 하나하나에게 군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조자룡은 3천 군마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 즉시 오림을 취하되, 작은 길 옆 수목에 매복해 있으시오. 조조는 반드시 그 길을 통해 달아날 것이오. 굳이 군사를 손상시켜가며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혼만 빼놓으시오.”

명을 받은 조운이 지도 한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림에서 나오는 길은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한쪽 길은 강릉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형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어느 길을 막아야 하겠습니까?”

“조조는 이미 이 곳에 마음을 잃었소. 틀림없이 형주로 가서 군사들을 수습할 마음을 먹고 있을 것이오.”

공명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러났다. 다음은 장비에게 명이 떨어졌다.

“장익덕은 군사 3천을 이끌고 강을 건너 이릉 뒷길을 끊고 호로곡(葫蘆谷)에 매복해 있으시오. 그 곳 역시 길이 두 갈래가 있는데, 조조는 감히 남이릉으로는 가지 못할 것입니다. 북이릉 방면에 숨어 있다가 조조 군을 보면 들이치시오. 그 곳에서 세우게 될 공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공명의 선택 (186)…제15장 적벽의 풍운 (9)
장비가 물러가자 공명은 다시 미축, 미방, 유봉을 불렀다.

“그대들은 각기 배를 타고 강변을 따라 돌면서 쫓기는 조조의 군사들을 사로잡고 병기 등 여러 가지 물자들을 취하도록 하시오.”

이번에는 공자 유기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강하는 매우 요긴한 곳입니다. 한편으로는 동오 군을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곳으로 쫓겨온 조조 군을 모두 사로잡으십시오. 결코 강하성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장수들이 영을 받고 나갔다. 이제 장막 안에는 유비와 공명, 그리고 관우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명은 관우를 본체만체 아무런 영을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관우가 누구이던가. 천하의 일류급 장수들조차 발가락의 때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있는 그였다. 기개와 충절 또한 이미 뭇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백마 전투에서는 원소가 그토록 아끼는 상장 안량을 단 한 번에 목 베는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유비의 진영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제2인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싸움을 눈앞에 두고 공명이 그에게만 아무런 역할도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공명이 아무리 유비의 총애를 받고 지모·지략이 뛰어난 기재라 해도 관우의 눈에는 이제 불과 28세의 새파란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관우의 자부심은 그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드높았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는 것이었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앞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관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급기야 봉의 눈을 부릅뜨고 공명을 향해 큰 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이 관우는 우리 형님을 따라 무수히 전쟁터를 치달렸지만, 아직 한 번도 남에게 뒤떨어진 적이 없소이다. 그런데 오늘 조조 같은 큰 적을 맞아 싸우는데 군사는 어찌하여 나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는 것이오? 나는 그 까닭을 알아야겠소.”

유비조차 관우가 그토록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내심 불안한 눈길로 공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공명은 관우의 성난 표정을 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빙긋 웃기까지 했다.

“관운장께서는 너무 괴이쩍어하지 마십시오. 내 본시 장군의 위풍과 용맹함을 높이 사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 하였으나, 생각해보니 미덥지 못한 데가 있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어조는 공손했으나 역시 관우의 자긍심을 긁는 말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관우는 다시 눈에 힘을 주며 따지듯 캐물었다.

“미덥지 못한 데라니요? 도대체 나의 어디가 미덥지 못하다는 말이오?”

공명은 여전히 빙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지난날 조조는 관운장을 매우 두텁게 대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장군께서는 인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점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좀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보시오.”

“조조는 이리저리 쫓기다가 반드시 화용가도(華容街道)를 취해 달아날 것인데, 만일 장군을 그리로 보내면 장군은 옛 은덕을 생각하여 틀림없이 조조를 그냥 놓아보내 주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도 어찌 관운장을 화용도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공명의 말을 듣자 관우가 별안간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군사가 걱정하는 것이 그것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군사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였소. 조조가 나를 두터이 대해준 것은 사실이나, 나는 이미 그의 은공을 갚았소이다. 백마성 전투에서 안량을 죽여 포위를 풀어준 것만으로도 보답은 충분하외다. 그러기에 내가 홀가분히 조조를 떠나 형님을 찾아나선 것이 아니겠소. 이제 내가 조조를 다시 만나게 된들 어찌 그 때 일로 그를 놓아줄 수가 있겠소?”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소.”

“만일 놓아보내 주었을 때는 어찌하겠습니까?”

“당연히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겠지요. 내 목을 베도 좋습니다.”


공명의 선택 (187)…제15장 적벽의 풍운 (10)
관우의 흔쾌한 대답에 공명은 얼굴빛을 엄숙하게 바꿨다.

“목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정히 못 믿으시겠다면 군령장을 써 드리겠소이다.”

관우는 스스로 군령장을 쓰고 수결(手決)한 후 공명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관우의 상한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았다.

“나도 군사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아야겠소.”

“무엇이오?”

“만일 조조가 화용도로 오지 않을 때는 어찌하겠소?”

공명은 관우의 마음을 알았다. 빙긋 웃으며 역시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나도 장군에게 군령장을 써 드리겠습니다. 조조가 화용가도로 오지 않을 때에는

내 목을 내놓겠습니다.”

공명의 군령장을 받고서야 관우는 상한 마음이 풀린 듯 얼굴에서 노기가 풀어졌다. 그런 관

우를 향해 공명이 한마디 덧붙였다.

“관운장께서 화용도로 가시거든 반드시 산 높은 곳에다 나뭇가지를 쌓아두었다가 적당한

때에 불을 피우도록 하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쓴 군령장은 무효로 하겠습니

다.”

관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불을 피우라는 이유가 궁금했다.

“조조가 연기나는 것을 보면 매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오히려 다른 길을 취할 텐데, 그리

해도 괜찮겠소?”

“장군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이란 말도 듣지 못했습니까? 조조는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연

기를 보면 오히려 그것이 허장성세인 줄 알고 반드시 연기가 나는 쪽으로 갈 것입니다. 장

군이나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지 마시오. 목이 달려 있는 일입니다.”

“군사께서 어련하시겠소?”

관우는 이렇게 비꼬는 말을 남긴 채 관평과 주창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유비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두 사람의 자존심 다툼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라 그

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당장에 그들이 써놓은 군령장이 걱정이었다. 둘 중 하나

는 목이 달아나야 할 판이었다. 특히 그는 관우가 걱정이 되었다. 근심스런 눈길로 공명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 아우는 본시 의기를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오. 만일 정말로 조조가 화용가도를 지난다

면 열에 아홉은 그대로 놓아줄 것이 분명하오. 군사는 진정 내 아우의 목을 벨 생각입니

까?”

그런 유비를 공명이 빙그레 웃으며 위로했다.

“저 역시 관운장의 의기를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조조를 놓아줄 것입니다만,

제가 어찌 감히 관운장의 목을 베겠습니까? 다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 짐짓 장난을 해본 것

뿐입니다. 주공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전히 유비의 얼굴은 어두웠다.

“군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 아우의 일은 이제 안심이나, 조조가 살아돌아가는 것이

또한 걱정입니다.”

유비의 마음을 짐작한 공명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제가 관운장을 보내어 일부러 조조를 살려보내는 까닭을 아십니까?”

“나는 모르겠소.”

“아직은 조조를 죽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조조를 죽일 때가 아니라는 것이오?”

“그것은 아직 주공께서 마음놓고 다리를 뻗을 땅 하나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조조가 죽으면 천하는 또다시 어지러움에 빠질 것이고, 수많은 군웅이 할거할 것이 틀

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공은 더욱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럴 바에는 조조를 살

려두어 북방에 세력을 펼치게 하여 손권을 비롯한 뭇 군웅들을 견제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

다. 조조는 이번 싸움을 계기로 손권을 원수처럼 여길 것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유비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손권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하여 유비는 형주의 일부 땅을 차지하고 파촉으로 진출할 힘을 쌓

는다. 파촉만 손에 넣으면 천하는 균형을 이루며 삼분(三分)된다. 조조는 그 다음에 상대해

도 늦지 않다. 이것이 바로 공명이 획책하고 있는 ‘천하삼분의 계’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적으로써 또 다른 적을 경계하게 한다, 이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조조를 죽인다 한들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오히려 득을

보는 것은 손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관운장을 화용가도로 보내어 후세에 아름다운 일

이나 남겨주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유비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군사의 헤아림은 실로 따를 자가 없겠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공명의 양 볼은 수줍은 소녀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공명의 선택 (188)…제15장 적벽의 풍운 (11)
주유가 이끄는 동오 군은 수전에서뿐 아니라 육상전에서도 큰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태사자, 능통 등을 비롯한 강동의 장수들은 조조의 수채에 불길이 치솟자마자 장강을 건너 오림의 진채를 급습했다. 숫자 싸움이라면 불리할 것이 없는 조조 군이었으나, 그들은 넋을 반쯤 빼앗긴 상태였다. 오로지 불길 속을 뚫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사냥을 즐깁시다. 조조가 손권에게 보냈던 항복 권유 편지의 문구였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다. 그랬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사냥이었다.조조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이 되어 이리저리 오림 숲을 헤매다가 겨우 그 곳을 벗어났다. 처량하다거나 비참하다는 생각조차 들 틈이 없을 정도로 다급한 도주였다. 뒤따르는 장수와 군사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했다.

“여기가 어디냐?”

조조가 물었다.

“오림에서 보면 형주로 올라가는 북서쪽 길입니다.”

조조는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산과 내가 험하고 가파른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군사를 숨겨두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별안간 조조는 고개를 젖히고 껄껄껄 웃어댔다. 싸움에 져 정신없이 도망쳐온 사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장수들이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그같이 웃으십니까?”

조조가 앙연히 대답했다.

“비록 주유가 꾀가 많고 제갈량이 지혜가 많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젖비린내나는 어린애에 불과하다. 만일 내가 용병을 했더라면 반드시 이 곳에다 군사를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대들은 힘을 내라. 오늘 내가 황개의 사항계에 속아 쫓기고 있다마는 반드시 강동 땅을 취할 날이 있으리라. 하, 하, 하…….”

조조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별안간 길 양편에서 북소리가 나더니 하늘을 덮을 듯한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뒤이어 가파른 바위 뒤에서 한 장수가 한떼의 군마를 이끌고 달려나왔다. 마치 조조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한 때맞춤이었다.

“나는 상산 조자룡이다. 제갈공명의 명을 받들어 이 곳에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조조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눈앞이 아찔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황과 장합은 어디 있느냐? 빨리 나가서 조자룡을 막아다오!”

일찍이 당양의 장판벌에서 흰 칼빛에 싸인 채 무인지경 달리듯 질주하던 조운의 무용을 직접 눈으로 본 바 있는 조조였다. 그는 서황과 장합이 달려나가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났다. 다행히 조운은 더 이상 조조의 뒤를 쫓지 않았다. 연기와 불길을 헤치고 겨우 오림 숲을 빠져나왔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 가득 밀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졌다. 수초(水草)처럼 물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조조와 그 군사들의 모습은 더욱 비참하고 처량했다.

공명의 선택 (189)…제15장 적벽의 풍운 (12)
11월의 추운 겨울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흠뻑 맞았으니 어찌 몸이 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배도 고팠다. 그러나 조조는 일세의 영웅다운 면모를 유지했다.

“형주성까지만 가면 따뜻한 밥과 잠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힘을 내어 행군하라!”

이렇게 독려해가며 형주를 향해 가던 중 두 개의 갈림길 앞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게 되는가?”

길을 잘 아는 군사를 불러 물었다.

“한쪽은 남이릉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오고, 다른 쪽 길은 북이릉으로 가는 산길이 나옵니다.”

“어느 쪽이 형주와 가까운 길인가?”

“북이릉을 지나 호로곡을 통과하면 가장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북이릉 길로 가자.”

그들이 호로곡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람들도 말들도 배가 고파 더 이상 행군할 수가 없었다. 어떤 군사는 그대로 길바닥에 자빠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조조는 휴식 명령을 내렸다. 일부 군사들이 마을로 내려가 곡식을 거두어왔다. 곧 불이 지펴지고 말을 죽여 고기를 구웠다. 고생 끝에 먹는 음식은 꿀맛 같았다. 군사들이 휴식하며 주린 배를 채우는 동안, 조조 역시 커다란 나무 밑에서 밥과 고기를 먹었다. 배가 든든해지자 방금 전의 처량함은 눈처럼 사라지고 다시 조조 특유의 호방함이 되살아났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또 껄껄껄 웃어제꼈다. 옆에 앉아 있던 장수들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얼마 전에도 승상께서 주유와 제갈량을 비웃으시다가 조자룡이 나타나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까닭으로 웃으시는 겁니까?”

“하, 하, 하.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주유와 제갈량은 병법을 모르는 자들이다. 자, 보아라. 이렇게 마음 편히 쉬고 있는 우리 군사들의 모습을. 만일 내가 주유나 제갈량이었다면 이 곳에 한 떼의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한창 쉬는 중에 급습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주랑아, 공명아! 가서 젖을 더 먹고 오너라!”

그 때였다. 저편 계곡에서 쉬고 있던 군사들이 이상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적병이다!”

조조는 기겁을 하였다. 갑옷을 걸칠 새도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어느 새 산과 골짜기는 연기와 불길로 가득 찼다. 조조는 닥치는 대로 달렸다. 군사들의 태반은 무기도 들지 못하고 불길을 피해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아군의 말발굽에 채어 마구 쓰러졌다. 나타난 장수는 장비였다. 장팔사모를 비껴들고 벼락 같은 호통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놈, 조조야! 어디로 달아나느냐!”

모든 장졸들은 이 같은 장비의 호령소리에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조조는 뭐라 영을 내리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허저와 장료, 서황이 함께 달려가 장비를 협공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기려고 덤벼든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을 조조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장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말을 치달아 호로곡을 빠져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입술이 타고 코에서는 단내가 풍겼다. 한참을 달린 끝에 뒤따르는 장졸을 살펴보니 머리가 깨진 놈, 코가 뭉그러진 놈, 팔이 떨어진 놈, 다리가 부러진 놈 등등 온전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한 몸으로 조조를 뒤따라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암담한 중에서도 다행인 것은 장비 역시 조조의 뒤를 악착같이 쫓아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조조는 다시 인마를 수습하여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두 차례에 걸쳐 공명과의 지략 싸움에서 졌다는 것이 조조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공명의 선택 (190)…제15장 적벽의 풍운 (13)
―하늘이 우리를 저버렸다!

불타는 적벽의 광경을 내려다보며 조조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주유나 공명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림 숲 속에서 껄껄껄 웃어댄 것이나 호로곡에서 주유와 공명의 어리석음을 비웃은 것 역시 그러한 자신의 자긍심을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두 번 모두 공명에게 보기 좋게 당했다.

‘그 자가 감히…….’

자기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는 분하고 약이 올라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는 중에 다시 두 갈래 길을 만났다. 길을 이끌던 장수가 달려와 물었다.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어느 쪽이 가까운가?”

“윗길은 넓고 평탄하기는 합니다만 50여 리를 돌게 되고, 아랫길은 화용도(華容道)를 지나게 되는데 50여 리가 가깝습니다. 다만, 화용도는 산길이라 길이 험하고 좁아 행군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두 번이나 낭패를 본 뒤라 조조는 신중했다. 한 군사에게 명하였다.

“산에 올라가 두 갈래 길을 각기 살피고 오너라.”

영을 받은 군사가 잠시 뒤에 돌아와 보고했다.

“큰 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만, 작은 길에는 두어 군데 연기가 일고 있습니다.”

그 같은 말에 조조는 지체 없이 영을 내렸다.

“작은 길로 간다!”

여러 장수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연기가 나는 길에는 반드시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오히려

그 쪽 길을 택하시는 겁니까?”

“그대들은 병서도 읽지 않았는가. ‘있는 듯하며 없고, 없는 듯하며 있다.’ 이것이 바로 허허실실이 아니냐. 지금까지 보아온즉, 주유는 이 곳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제갈량은 계속 우리의 행군 방향을 예측하고 있다. 그는 주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모가 뛰어난 자임에 틀림없다. 그 자는 일부러 좁은 길에 연기를 피워 복병을 숨겨둔 것처럼 해놓고 우리를 큰 길로 유인하여 기습하려는 것이다. 큰 길로 가면 우리는 반드시 잡히고 말 것이다.”

조조의 말을 들은 장수들은 한결같이 탄복을 금치 못했다.

“승상의 헤아림은 실로 신인(神人)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조와 그 군사들은 곧 화용도를 향해 행군했다. 과연 화용도의 산길은 험하고 거칠었다. 군데군데 길이 끊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지치고 굶주린 패잔병이었으나 북방의 정예군답게 불평 한마디하지 않고 구덩이를 메우고 길을 닦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갔다. 화용도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주위의 험한 풍경을 둘러보던 조조가 또 별안간 요망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장졸들은 조조가 웃기만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함을 넘어서 아예 사색이 되었다.

“승상께서는 어찌 또 웃으십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갈량은 지모가 깊고 많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모두 헛말이다. 만일 그 자가 진정 재능이 뛰어난 자였다면 큰 길이 아닌 이 곳에다 5백의 군사를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는 공연히 작은 길에 연기를 피워 우리를 사로잡을 기회를 스스로 놓쳤구나. 핫, 핫, 핫.”

공명의 선택 (191)…제15장 적벽의 풍운 (14)
큰 싸움에서 이겼을 때도 웃음소리가 이보다 더 통쾌했을까. 조조가 손을 높이 들어 진군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별안간 일성포향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산골짜기 양 편에서 5백 군사가 일시에 쏟아져나왔다. 앞선 장수는 부릅뜬 봉의 눈에 잘 익은 대춧빛 얼굴, 그리고 가슴까지 늘어뜨린 검은 삼각수염―관우였다. 붉은 말 위에 늠름하게 앉아 청룡도를 비껴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도 그보다 더 위풍당당할까. 관우의 모습을 본 조조의 군사들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조조만이 영웅다운 기백을 잃지 않고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한판 싸워보는 수밖에 없도다. 모든 장수는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것이 어찌 그의 진심이겠는가. 아마도 상대가 다른 장수였다면 그는 실제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눈앞의 장수는 다름아닌 관우였다. 일찍이 조조 밑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었다.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관우는 비굴함을 무엇보다도 싫어하고 미워하는 반면 당당한 기백과 의기를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관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조조는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도 알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이것만이 조조가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럴 때 잘 해주어야 하는 것이 그 참모들이다. 조조의 말에 동조하여 진짜로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든다면 모든 것은 허사가 된다. 정욱은 이런 면에서 뛰어난 모사였다. 그는 재빨리 조조의 뜻을 알아챘다. 조조 앞으로 나가 관우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만류했다.

“장수들이 승상의 명을 따른다 해도 말들이 이미 힘이 다해 싸울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관운장에게 몸을 낮춰 달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내 어찌 관운장에게 몸을 낮춰 애걸할 수 있겠는가?”

조조 역시 정욱의 말뜻을 알아채고 여전히 기백 있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정욱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누구보다도 관운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관운장은 은혜와 원수를 갚는 데 분명하고, 무엇보다도 신의를 높이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힘센 자는 우습게 여기지만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도량을 베풀 줄 아는 장수입니다. 지난날 승상께서는 관운장에게 두터운 은혜를 베푼 적이 있습니다. 맞서 싸우기보다는 몸소 나서시어 은혜와 신의로써 설득한다면 관운장은 틀림없이 승상을 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욱의 외침소리를 듣고 과연 관우의 얼굴에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 이를 본 정욱이 눈짓하자 조조는 못 이기는 체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는 그 동안 별일 없으셨소?”

관우는 조조가 몸을 굽혀 예를 올리자 자기도 몸을 굽혀 답례를 하였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오늘 이 관우는 제갈 군사의 명을 받들어 승상을 이 곳에서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역시 목소리가 전처럼 자신감에 넘치지 못했다. 조조는 더욱 정중하고 간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조조는 싸움에 패하여 몹시 위태롭고 처량한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용케 예까지 왔는데, 그만 또 장군을 만나게 되었구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옛정을 생각하시어 나갈 길을 열어주시오.”

하지만 관우 역시 군령장을 써놓고 온 처지가 아닌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관우가 비록 승상께 후한 대접을 받기는 하였으나, 이미 안량의 목을 베어 백마성의 위태로움을 풀어드렸습니다. 더욱이 오늘은 군명(君命)을 받들고 나온 몸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공도(公道)를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내 곁을 떠나면서 나의 장수들을 죽인 일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래도 나는 장군의 뒤를 쫓지 않았습니다. 장군께서는 신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어찌 유공차(庾公差)가 탁유자(濯孺子)를 쫓던 일을 모르십니까?”

탁유자는 정(鄭)나라 사람으로 활을 잘 쏘았다. 어느 해, 임금의 명을 받고 위(衛)나라로 쳐들어갔는데, 싸움에 패해 위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병까지 얻어 활을 쏠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그는 탄식하며 시종에게 물었다.

―나를 뒤쫓는 위나라 장수는 누구냐? 시종이 대답했다.

―유공차라는 장수입니다. 그러자 탁유자가 안심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나는 살았다. 시종이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유공차는 위나라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명궁입니다. 그런데 대부(大夫)께서는 어찌하여 오히려 살게 되었다고 하십니까?

탁유자가 대답했다.

―유공차는 활 쏘는 법을 윤공지타(尹公之陀)에게 배웠다. 그런데 윤공지타는 또 나에게서 활쏘기를 배웠다. 윤공지타는 마음이 바른 사람이다. 그가 가르친 제자 또한 마음이 바른 사람임에 틀림없다. 어찌 병이 든 나를 향해 활을 쏠 것인가? 그 때 마침 유공차가 뒤쫓아와 수레 위에 앉아 있는 탁유자에게 물었다.

―대부께서는 어찌하여 활을 들어 맞서지 않으시오?

―내가 지금 중병을 얻어 활을 쏠 수가 없소.

탁유자의 대답에 유공차가 탄식하며 말했다.

―제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분은 윤공지타입니다. 그리고 윤공지타의 스승은 대부라고 들었습니다. 결국 제 활솜씨는 대부로부터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대부를 해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의 일은 군명(君命)을 받든 일이라 감히 어길 수도 없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고는 촉이 없는 화살을 몇 대 쏘고 위나라로 돌아갔다…….

조조의 말에 관우는 묵묵히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의기가 태산 같은 사람이었다. 탁유자와 유공차의 일화를 떠올리며 조조와 그 뒤에 서 있는 장졸들을 내려다보았다. 한결같이 지치고 초라한 모습들이었다. 어떤 군사는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마침내 관우는 결심한 듯 말머리를 돌리며 군사들에게 명했다.

“돌아가자!”

“고맙소이다.”

조조는 감격하여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멀어져가는 관우를 향해 인사했다. 이렇게 하여 화용도를 빠져나온 조조는 무사히 형주성에 당도했다. 형주성에 들자마자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했다. 수하장수들이 영문을 알지 못해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승상께서는 세 차례 위험한 길을 지나오실 때에는 조금도 겁내고 두려워하시지 않더니, 이제 안전한 성 안에 도착하셨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슬피 우십니까?”

조조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나는 죽은 곽봉효(奉孝=곽가의 자)를 생각하고 통곡한 것이다. 만일 곽봉효만 살아 있었더라도 오늘 내가 이처럼 큰 패배는 당하지 않았으리라!”

말을 마치고 조조는 다시 방성통곡을 터뜨렸다.

“슬프구나, 봉효야! 아프구나, 봉효야! 아깝구나, 봉효야!”

이에 모든 장수와 모사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원검일생록-2 [5]
<공명의 선택> 14장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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