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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11 23:01:14, Hit : 3259, Vote : 245
 <공명의 선택> 11장 양양성의 눈물
공명의 선택 (141)…제11장 양양성의 눈물 (1)
신야성 안에 마련한 공명의 저택―.

저택이라고 했지만 아담했다. 별당도, 화초를 심어놓은 정원도 없다. 안채와 바깥채뿐이다. 이따금씩 산책을 즐기는 뒤뜰의 소나무 한 그루가 그 저택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소나무는 작았으나 푸르고 무성했다. 가을이었다. 햇빛이 밝고 따가웠다. 소나무 아래의 그늘은 짙었다. 그 그늘 속에 공명은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멀리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조용한 놀림이었다.

“잘 되어가고 있을까요?”

황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명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전쟁을 무척 싫어하였소.”

등을 돌린 채 공명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싫어한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였소.” “…….”

“죽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오. 어머니, 아버지, 현(玄) 숙부. 나는 많은 죽음을 보아왔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죽이는 일은 더 끔찍할 것이오.” “…….”

“지금 저기 박망파에서는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나는 전쟁이 싫소. 전쟁을 막아보고 싶었소. 싸움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었소. 이것이 나의 어릴 적 꿈이었소. 내가 융중을 나온 까닭을…… 부인은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모를 것이오, 지금 나의 기분을.” “…….”

“전쟁과 살육은 다르오. 나는 살육자가 되고 싶지 않소. 그것이 지금의 나의 꿈이오.”

“저기가 어딘가?”

“박망파라는 곳입니다. 그 뒤로 나구천(羅口川)이 흐릅니다.”

“진격하라.”

하후돈은 전쟁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패국 초현 사람이다. 열네 살 때 어떤 사람이 스승을 모독했다 하여 그를 살해했다. 사람들은 그를 호걸의 기개가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조조가 동탁을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처음 전쟁에 따라나섰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서주 대학살 직후 여포를 추격하던 중 눈에 화살을 맞았다. 화살을 뽑으니 눈알이 뽑혀 나왔다. 그 눈알을 그대로 씹어먹었다. 애꾸가 된 하후돈을 사람들은 ‘맹하후(盲夏侯)’라 불렀다. 하후돈은 그런 사람이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가. 난세였다. 하후돈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을 즐기고 있었다. 이전(李典), 우금(于禁) 등이 하후돈의 뒤를 따랐다.

“공명이란 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후돈은 상대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모르면 경계라도 해야 했다.

“이제 보니 서서라는 자도 허명뿐이었구나.”

그는 북벌에 참가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었다. 조운이 이끄는 2천 기마병을 보고 깔깔 웃어댔다. 박망파 깊숙이 추격해들어갔다.

“길이 좁고 수목은 빽빽합니다. 매복을 조심하십시오.”

이전과 우금이 일깨워줬을 때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모두 말머리를 돌려라. 앞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등뒤에서 함성이 일며 한줄기 불길이 숲에서 솟아올랐다. 길 옆은 갈대숲과 억새풀이었다. 삽시간에 사면 팔방이 불길 속에 잠겼다. 적병은 보이지 않았다. 아군끼리 넘어뜨리고 밟고 하였다. 겨우 불구덩이를 빠져나오자 한 떼의 군마가 길을 가로막았다. 봉의 눈에 가슴까지 늘어뜨린 삼각수. 관우였다. 싸울 마음이 일지 않았다. 관우 또한 쫓지 않았다. 이번엔 장비였다. 친척 동생인 하후란이 장비의 창에 찔려 죽었다.

“전원 퇴각하라!”

하후돈은 악을 썼다.

공명의 선택 (142)…제11장 양양성의 눈물 (2)
싸움은 오히려 유비 군이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추격하지 않았다. 그저 주인 잃은 말과 식량 실은 수레만을 탈취하거나 불태웠다.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관우는 청룡도에 피를 묻히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대승이었다. 2만이 채 못 되는 유비 군이 10만의 대군을 하룻밤 사이에 궤멸시켜 버린 것이었다. 20년 동안 전쟁터를 돌아다녔지만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다. 직접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얘기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했지?”

장수들이 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불을 질러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신기하군.”

장비가 중얼거렸다. 자존심이 강한 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우와 장비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신야성으로 향했다. 나구천을 건너자 미축과 손건이 군사를 이끌고 마중나오는 게 보였다. 그 사이로 작은 수레 하나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왔다. 수레 위에 윤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은 공명이 부채를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이 부셨다.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 관우와 장비는 공명을 보자 약속이나 한 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공명의 수레 앞으

로 나가 공손히 허리 숙여 절을 올렸다.

“수고하였소.”

공명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야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개선하는 유비 군을 맞이했다. 그들

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조조였다.

―조조 군은 강하다. 그리고 잔인하다.

서주 대학살 이후 이러한 소문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형주는 조조와 가장 근접해 있다. 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조조 군의 침공에 늘 가슴을 조였다. 그런 중에 하후돈의 10만 대군이 신야성을 노리고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조 군이 오면 죽는다.

모두들 공포에 떨었다. 미리 짐을 싸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유비 군이 조조 군을 막기 위해 출격했다. 방어선은 박망파. 공명이라는 젊은 선비가 총사령관이라고 했다. 방어군의 총병력은 2만. 아무도 유비 군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다.

―융중의 허풍쟁이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출격 삼 일 만에 유비 군은 멋지게 조조 군을 격퇴했다. 하후돈은 불에 탄 강아지처럼 머리를 싸매고 달아났다고 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신야성 백성들은 열광했다.

―유 사군이 우리를 살렸다.

―공명이 휘저은 부채질 한 번에 하후돈의 10만 대군이 가랑잎처럼 흩어졌다. 공명은 신인(神人)이다.

신야성 사람들은 유비와 공명의 신화를 만들어나갔다. 이것이 군중이었다. 유비는 그러한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멋진 화답이었다. 윤건에 학창의 차림의 공명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신비스럽게 보였다.

“사람들은 자네가 요술을 부린 줄 알고 있네.”

서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정말 곤란한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지.”

“그만큼 조조 군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증거일세.”

공명은 백성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환상에 빠질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비록 이번 싸움은 이겼다고 하나 조조의 힘을 꺾었다고 볼 수는 없네.”

“그러나 어쨌든 이긴 것은 이긴 것이네. 오늘 하루쯤은 기분을 풀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서서는 공명과 정반대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싸움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네.”

“조조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면,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

“형주를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가. 주공의 성품으로는 어쩔 수가 없네. 그것에 반해 자네나

나나 몸을 던진 것 아닌가.”

“형주는 현실이네.”

“정말 어쩔 수 없군, 자네란 사람은.”

공명과 서서는 유비를 찾아갔다. 유비는 두 사람을 위해 특별히 주안상을 마련했다. 어떤 면에서 유비는 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박망파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신묘한 전술이었소.”

그에게 내일의 걱정은 없는 것 같아보였다. 한 조직의 우두머리는 이러한 면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공명의 선택 (143)…제11장 양양성의 눈물 (3)
공명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애처럼 들떠 있는 유비를 바라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우두머리는 환상, 참모는 현실!

내일의 일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공명은 생각했다.

“주공, 하후돈이 패해 돌아갔으니 이번에는 조조의 친정군(親征軍)일 것입니다.”

조조라는 이름에 유비는 술이 깨는 표정이었다.

“조조? 언제쯤이겠소?”

전환이 빠른 것 또한 유비의 장점이었다.

“조만간입니다. 어쩌면 지금쯤 조조는 친히 원정군의 진영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명의 말에 유비는 불안한 눈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제게 조조 군을 깨뜨릴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공명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무엇이오?”

“단, 주공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해보시오.”

공명은 입술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신야는 작은 고을이라 오래 머물 곳이 못 됩니다. 요사이 듣자 하니, 유경승의 병이 깊어졌다고 합니다. 이미 모든 권한은 유종에게로 넘어간 모양입니다. 아니, 유종은 열네 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꼭두각시일 수밖에 없겠지요. 채모가 병권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조금도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형주를 얻기만 하면 몸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조와도 능히 맞서볼 만한 근거지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얘기요?”

유비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공명은 다시 밀어붙였다.

“천하의 안녕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지금 형주를 손에 넣어두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형주가 그렇게 중요하오?”

유비가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간발의 틈도 두지 않고 공명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형주만 손에 넣으면 10년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나는 자꾸 여포 생각이 나오. 나의 이득을 위해 의(義)를 저버리는 행동은 하고 싶지가 않소.”

“유경승의 형주를 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채모의 형주입니다.”

“그 일은 뒤에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하시지요.”

공명은 한숨을 길게 쉬며 물러났다.

그러나 북쪽의 바람은 유비가 그 일을 오래 접어둘 만큼 기다려주지 않았다. 공명은 유비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조만간.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 순간 허도의 조조는 남정(南征)의 뜻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르지 않겠습니까?”

순욱이 고개를 저었으나, 조조는 나름대로 형주의 정세를 파악하고 난 뒤였다.

“유표의 병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오. 자칫 잘못하여 유비가 형주를 넘겨받으면 그 땐 고기가 바다로 들어간 격이 될 것이오.”

“짚이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공명이란 자, 우리가 너무 가벼이 본 것 같소. 형주를 취하기 위해 몸이 달아 있다는 말을 들었소. 어쩌면 군사를 동원할지도 모르겠소.”

조조가 친정(親征)을 결심한 것은 하후돈의 패배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에 임함에 있어 조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보였다. 그는 순욱 등 참모진이 모르는 첩자를 비밀리에 관리하면서 각 고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전해 듣고 있었다. 신야성에도, 형주성에도 조조의 첩자들은 박혀 있었다.

―채모, 괴월, 한숭, 왕찬(王粲) 등 유종파 사람들은 승상께 적대감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서서와 공명이 요즘 들어 부쩍 이규(李珪), 이적(伊籍), 곽준(藿峻), 유옹(劉邕)과 같은 유기파 사람들과 접촉이 잦아졌습니다. 아무래도 모반을 사주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정보들이 날아들면서 조조는 부쩍 마음이 급해졌다. 유표가 죽으면 형주는 내분에 빠질 것이 뻔했다. 조조에게도 유리하겠지만, 유비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유표가 숨을 쉬고 있을 때―.’

유표가 살아 있는 동안 유비는 결코 형주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조조는 판단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순욱은 이러한 조조의 정보력과 정세 분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표가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조가 기다리던 보고였다. 즉시 남정군의 명단을 발표했다.

“제1대는 조홍과 조인이 맡는다. 제2대는 장료와 장합, 제3대는 하후돈과 하후연이 책임을 져라. 제4대는 이전과 우금, 나는 제5대를 거느리고 가겠다.”

그는 또 전군에 명을 내렸다.

“목표는 강동의 손권이다!”

장강에 이를 때까지의 걸림돌인 유비와 유표는 안중에도 없다는 호기에 찬 출병 명령이었다. 군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50만 대군이었다. 비어 있는 허도는 순욱에게 맡겼다. 북서쪽의 마등을 경계한 포진이었으나, 조조로서는 두뇌를 두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정군이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불상사가 일었다. 조조가 전 북해(北海) 태수 공융(孔融)을 죽인 것이었다. 공융은 예전부터 유비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조조가 쉽게 강동 땅을 취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다.

“유비와 유표는 모두 한왕조의 종친입니다. 대의명분이 없는 싸움은 천하의 신망을 잃습니다.”

조조의 출병을 반대했다. 공융의 말에 조조는 불같이 노했다.

“유비와 유표, 손권은 모두 천자의 명을 거스르는 역적들이다. 그런데 어찌 명분이 없다고 하는가?”

공융이 다시 말을 받았다.

“어질지 못한 자가 어진 이를 치러 나가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탈이 되었다. 조조는 분노를 못 참고 공융의 목을 베었다. 공융은 공자(孔子)의 20대 손으로 ‘건안칠자(建安七子)’라 불릴 만큼 당대 제1급의 문사(文士)였다.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공융의 죽음을 아쉬워하였고, 조조의 처사를 심하게 생각했다. 그런 여론 속에서 조조는 남정군을 출병시켰다.

공명의 선택 (144)…제11장 양양성의 눈물 (4)
―유표 위독.

―조조 군 침공.

두 개의 급박한 소식이 동시에 신야성으로 날아들었다. 유비와 서서와 공명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올 것이 왔습니다. 각오는 되어 있으시겠지요?”

서서가 유비를 보며 물었다.

“대책은…… 없소?”

유비는 공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저 유경승께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인사라도 올리는 것이 예가 아닐는지요?”

공명의 대답은 유비에게도, 서서에게도 뜻밖이었다.

“조조의 대군은?”

“다녀오신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형주성으로 향했다. 관우와 장비가 2천 군마로 호위했다.

“주공을 유표에게로 보낸 것은 무슨 뜻인가?”

그 날 저녁, 서서가 공명의 집을 찾아가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지.”

“형주 말인가?”

공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비는 그 날 밤 늦게 돌아왔다. 공명은 관우를 찾아갔다.

“유경승에게서 무슨 말이 없었습니까?”

“군사께서 예견하신 대로 유표는 형님에게 형주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요?”

공명의 눈에 기대감이 일었다. 그러나 관우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유비의 대답을 전했다.

“형님께서는 유표의 손을 붙잡고 나에겐 다른 뜻이 없다, 조카들을 도울 것이니 아무 걱정 말라고 말씀하시었소. 제가 다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그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우리 형님도 알 수 없는 사람이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공명은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주공이야말로 하늘이 낸 성인(聖人)이로다!”

말발굽 소리가 밤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강하 태수 유기는 3천 군마를 거느리고 양양성 밖에 이르렀다.

―유표 공 위독.

강하의 하구에 머물러 있던 유기에게 이러한 급보가 날아든 것은 이틀 전이었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막관(幕官) 이규에게서였다. 유기는 이규의 편지에서 채모 일당의 음모를 감지했다. 편지의 행간에는 속히 양양으로 달려와 채모 일당을 제거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즉시 3천 정예병을 거느리고 양양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는 이제 계모의 음모에 목숨을 걱정하는 힘없는 공자가 아니었다. 2만 군사를 거느린 명실상부한 강하 태수 유기였다. 양양성으로 들어간다 해도 유종 일파에게 쉽게 죽임을 당할 염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성문을 열어라!”

유종파의 우두머리인 채모는 경악했다. 아직 유표는 유명(遺命)을 내리지 않았다. 부인 채씨가 유종을 앞세우고, “형주를 맡기시지요.” 라고 재촉했지만, 유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유비가 다녀갔을 때에도 채모는 가슴을 조였었다.

―내 병이 이미 뼛속 깊이 스며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듯하오. 유공이 형주를 맡아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소?

유표의 간병인으로 심어놓은 여종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암담함을 느꼈다. 군사를 동원할까, 하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이 유비는 힘을 다해 조카들을 도울 뿐입니다. 어찌 딴 뜻이 있겠습니까?

다행히 유비는 이렇게 말하고 총총히 돌아갔다고 했다. 신변의 위험을 눈치채서였는지도 몰랐다. 겨우 한숨을 돌린 터에 이번에는 느닷없이 맏아들 유기가 성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유표가 유기를 보고, “형주를 부탁한다.” 라는 유명을 남기기라도 하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그럴 공산이 컸다. 채모는 급히 장수 장윤을 불러 명했다.

“군사를 이끌고 성문으로 가 굳게 지키도록 하시오. 유기를 결코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는 안 되오.”

장윤은 성루로 올라가 유기를 향해 소리쳤다.

“공자께서는 아버님의 명을 받아 강하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 책임이 막중한데, 어찌 그 곳을 비워두고 이 곳에 오셨습니까? 그 사이 동오(東吳)의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아버님의 병환은 아직 염려할 정도가 아닙니다. 속히 강하로 돌아가십시오.”

유기는 장윤에게 간청했다.

“아버님의 얼굴만이라도 한 번 보고 돌아가겠소. 제발 문을 열어주시오.”

“강하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아시면 아버님의 병환은 오히려 더 무거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유기는 그들이 쉽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성을 공격하리라!”

분노한 유기는 곧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공명이 이 소식을 접한 것은 잠자리에 들기 바로 직전이었다. 공명은 깜짝 놀랐다.

“자칫하다가는 발붙일 곳도 없어지겠구나.”

그는 곧 옷을 갈아입고 빠른 말을 타고 양양성 밖의 유기 진영으로 달려갔다. 유비도, 서서도 알지 못하는 잠행이었다.

“공명 선생!”

유기는 공명을 보자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공명은 한가로이 그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틈이 없었다.

“공자께서는 지금 바로 강하로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채모가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조조의 남정군이 이미 형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채모 따위의 음모는 이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형주를 공자에게 돌려드릴 터이니, 공자는 속히 돌아가 강하를 잘 지키고 계십시오. 조만간에 관우 장군이 그리로 갈 것이오. 그러면 관 장군과 함께 한진(漢津)으로 나오십시오.”

“아버님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유기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공자의 효성은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이 공명이 알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아버님을 위하신다면 지금 곧 강하로 돌아가십시오. 그것만이 형주를 보존하고, 아버님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설득하는 공명의 눈에도 촉촉한 물기가 서렸다.

“알겠습니다. 선생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한진입니다. 관 장군이 도착하는 대로 곧장 나오셔야 합니다.”

공명이 신야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공명의 선택 (145)…제11장 양양성의 눈물 (5)
다음 날 유표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도 그는 장남 유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유기는 오지 않았다. 후사(後嗣) 문제를 밝히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었다. 채씨 부인과 채모, 장윤 등은 형주의 새 주인으로 유종을 세우고 그 사실을 성 안에 공표했다. 대부분의 성 안 사람들은 장남 유기를 제쳐두고 어린 유종이 새 주인이 된 것을 괴이쩍게 여겼다. 하지만 그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할 틈이 없었다.

―전쟁이 터졌다.

유표의 죽음, 유종의 유업 계승 선포에 이어 조조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형주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 형주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조조 군의 움직임에 쏠렸다. 유종을 형주목으로 세운 주동자들은 곧장 조조 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 회의를 열었다.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주항론(主降論)과 주전론(主戰論)―.

부손(傅巽)·왕찬(王粲) 등 문사(文士)들은 주항론을 펼쳤다.

“거스름[逆]과 따름[順]에는 큰 줄기가 있는 법입니다. 조조는 천자를 모시고 있는 왕사군(王師軍=천자의 군대)입니다.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천자에게 대항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 형주의 군세는 조조 군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국입니다. 항복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유비와 유기는 형주의 우군(友軍)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합세하여 위, 아래서 동시에 공격해온다면 이 곳 양양성은 조조 군과 싸워보기도 전에 유비의 차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강릉·양양 아홉 고을을 조조에게 바치는 것이 형주 백성들을 위하고 천하를 위하는 일입니다.”

반면, 장윤 등의 장수들은 주전론을 내세웠다.

“유경승께서 돌아가신 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은 마당에 싸워보지도 않고 형주 아홉 고을을 고스란히 조조에게 내준다는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유비라는 방패막이가 있습니다. 그가 신야에서 조조에게 대항하는 동안 강동의 손권에게 원군을 청하면 능히 형주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전론이 우세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항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채모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때 괴월이 나서서 중재안을 내었다.

“제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유비 군의 동태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유비가 조조와 싸워 능히 신야성을 지켜내면 우리는 유비를 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 때는 우리 형주 군도 유비와 합세하여 조조의 대군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유비가 신야성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 곳 양양성을 비롯한 형주도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니, 그때 가서 조조에게 항복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말에 채모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외다. 유비 측에는 일체 비밀로 하고 당분간 신야성의 형세를 지켜보도록 합시다.”

“조조의 선봉이 박망파에 이르렀습니다.”

선봉장은 허저(許楮)라고 했다. 그 뒤로 조인과 조홍이 이끄는 제1대가 뒤따르고 있다는 보고였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유비는 막상 일이 닥치자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지난 세월의 일들이 한순간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승산은…… 없다!”

그 정도쯤은 유비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신세가 처량한 것이다.

―천하 제일의 실력자로 부상한 조조.

―강동에 탄탄한 기반을 세워놓은 손권.

반면에 유비 자신은 어떠한가.

‘또 쫓겨야 한다.’

20여 년의 세월이 조조와 유비를 그렇게 갈라놓았다.

‘어디로 달아날 것인가?’

유비는 말없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며 공명과 서서가 들어왔다.

“어떻게 하기로 하였소?”

“일단은 번성으로 철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양양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조 군의 남하를 저지하겠습니다.”

서서가 대답했다.

“싸워보지도 않고 신야를 조조에게 내주겠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신야는 작고 사방이 트여 있어 방어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적병의 예기를 꺾어놓을 대책을 마련해두었습니다.”

유비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공명은 평소의 조용함과 달리 호기롭게 대답했다.

“두 군사만 믿소.”

유비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공명과 서서는 바삐 움직였다.

“자네는 백성과 관리들을 데리고 번성으로 옮기는 일을 맡게나. 나는 군사들을 지휘하겠네.”

서서가 손건·미축과 함께 배를 거두어들이고 관원들의 가솔을 보호해 번성으로 옮겨가는 동안, 공명은 조홍·조인이 이끄는 조조 군의 제1대를 맞이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나가고 있었다. 먼저 관우를 불러 영을 내렸다.

“운장께서는 군사 1천을 이끌고 백하(白河) 상류로 가 물길을 막으시오.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하류에 군마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물길을 터뜨려 일시에 쏟아지게 하시오.”

관우가 나가자 장비를 불렀다.

“장익덕께서는 박릉(博陵) 나루터에 매복하시오. 조조 군사들이 그리로 쫓겨올 터인데, 그 때는 장군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공명은 계속해서 조운, 미방, 유봉을 차례로 불러 각기 할 일을 지시했다. 장수들은 자신의 역할이 전세에 어떤 도움을 줄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미 박망파 싸움에서 공명의 재주를 확인했기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따랐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공명은 유비를 찾아가 말했다.

“주공께서는 저와 함께 사방이 내려다뵈는 높은 산에 올라가 술을 한 잔 마시면 됩니다.”

공명의 선택 (146)…제11장 양양성의 눈물 (6)
박망파를 그대로 통과한 선봉장 허저가 작미파(鵲尾坡)에 이르렀을 때였다. 언덕 아래로 유비 군의 유봉과 미방이 푸른 기와 붉은 기를 나누어 들고 서로 자리를 바꾸며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허저는 제갈공명이라는 유비의 군사가 계략에 밝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던 터라 더럭 의심이 일었다.

“앞에 복병이 있는 게 틀림없다. 잠시 멈추어라.”

그러고는 군사 하나를 보내 그 사실을 조인에게 알렸다.

―그것은 거짓으로 우리를 혼란케 하려는 의병(疑兵)이다. 복병은 없으니 안심하고 앞으로 나가라.

이 같은 조인의 대답에 허저는 곧바로 작미파를 향해 돌진했다. 과연 복병은 없었다. 복병만 없는 게 아니라 유봉과 미방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허저가 그대로 언덕을 넘으려 하는 데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가까운 산꼭대기에 큰 깃발이 하나 꽂 혀 있고 그 아래로 일산(日傘)을 받은 두 사람이 앉아 한가로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좌편의 귀가 큰 자는 유비가 틀림없었으나, 오른편의 젊은 선비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유비 앞에 마주 앉은, 윤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있는 자가 바로 제갈공명입니다.”

누군가가 일러주는 말에 허저는 크게 성을 내었다.

“저 자가 나를 깔보아도 너무 깔보는구나.”

허저는 곧 3천 철갑군을 몰아 산 위로 쳐올라갔다. 중턱쯤 올라갔을 때, 별안간 산 위에서 통나무와 바위가 비 오듯 쏟아져내렸다.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허저는 도로 산을 내려왔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마침 조인의 군사가 그 곳에 당도했다. 조인은 허저를 보자 말했다.

“유비가 저렇듯 밖에 나와 있으니, 이 틈에 신야성을 공격하여 빼앗는 게 낫겠다.”

조인과 허저는 곧 군사를 몰아 신야성으로 향했다. 성 아래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성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 서서의 계략에 빠져 번성을 빼앗긴 바 있던 조인이었다. 그는 복병을 염려하여 정탐꾼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 성 안의 사정을 살펴오게 했다.

“백성들은커녕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정탐꾼이 돌아와 보고했다. 성 안은 정말로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안 유비가 백성들을 데리고 번성으로 달아난 것이 틀림없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 성을 둘러본 조인은 이렇게 단정했다. 뜻밖으로 손쉽게 신야성을 점령한 조인은 마음이 느긋했다. 이제 날이 밝는 대로 번성으로 달려가 유비만 사로잡으면 그는 제일의 전공(戰功)을 세우게 된다. 군사들을 민가에 나누어 쉬게 하였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초경이 지나면서부터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군사 하나가 급히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성 안에 불이 났습니다.”

군사들이 밥을 짓다가 불이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중에 잇달아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서문, 남문, 북문에서도 불길이 일고 있습니다.”

비로소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긴 조인은 재빨리 말에 올랐다. 그 때 이미 성 안에는 불길이 가득하여 하늘과 땅이 온통 시뻘겠다.

“적의 계략에 빠졌구나!”

적병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오로지 불길을 뚫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동문에는 불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황 중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인은 급히 동문을 향해 달렸다. 군사들이 그 뒤를 좇았다.

서로들 짓밟아 죽고 다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겨우 동문을 벗어난 조인이 한숨을 돌리려 하는데, 이것은 또 무슨 소린가. 뒤편에서 함성소리가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쳐들어왔다. 조운이 이끄는 유비 군이었다. 조인과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조운의 추격을 간신히 벗어났는가 싶자 이번에는 유봉의 군사가 쳐들어왔다. 또 한바탕 아비규환이 일었다. 삼경 무렵이 넘어서야 조인은 완전히 유봉에게서 벗어났다. 군사들은 반 넘어 꺾이어 있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불에 그을리고 화상을 입은 군사들이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지쳐 있었다. 백하가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강물은 깊지 않았고, 물결도 잔잔했다.

“이 강을 건너서 잠시 쉬도록 하자.”

조인과 그 군사들은 일시에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중간쯤 건넜을 때였다. 갑자기 상류에서 거센 물길이 쏟아져 내려왔다. 홍수가 난 듯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마음놓고 강을 건너던 조조 군은 또 한 차례 난데없는 물난리를 만나 빠져죽고 떠내려가는 자가 태반이 넘었다. 겨우 말머리를 돌려 목숨을 구한 조인과 나머지 군사들은 물 흐름이 느린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박릉 나루터까지 이르렀다. 배를 본 그들은 이제 살았다 싶어 앞을 다투어 나루터로 몰려갔다. 그 때 또다시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들아, 내게 목숨을 바쳐라!”

조조 군은 크게 놀랐다. 유비 군의 맹장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창을 곧추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조인은 또다시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 또 수천 명의 군사를 잃었다. 그러는 사이 날이 완전히 밝았다.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살피니 유비 군은 종적없이 사라지고, 지치고 굶주린 군사들만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쉬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저편에서 먼지가 일며 일지군마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제야말로 정말 죽었구나.’

모든 것을 단념한 채 눈을 감고 있는데, 아우 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유비 군은 이미 모두 번성으로 철수했습니다. 어서 신야성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조인은 어찌나 놀랐던지 신야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진을 친 채 조조가 당도 하기를 기다렸다. 성을 점령하였으니 승리이긴 승리였으나, 철저한 패배 끝에 얻은 이상한 승리였다.

공명의 선택 (147)…제11장 양양성의 눈물 (7)
번성은 신야성으로부터 남쪽으로 150리 정도 떨어진, 한수 강가에 자리잡은 상업도시였다. 그 아래로 양양성과 이웃해 있어 물자라든가 양곡이 풍부했다. 싸움에서는 이겼으나 신야성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유비 군은 공명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한수를 건너 번성으로 들어갔다. 강을 건너기 전, 공명은 한수 가에 있는 배들을 모두 불태웠다. 조조 군의 도하를 지연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번성에 도착하자마자 유비와 공명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유표가 세상을 떠났답니다.”

서서의 보고에 유비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공명은 잠시 침통한 표정으로 유비의 슬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후계자는 유종으로 정했답니다.”

서서는 계속해서 양양성 안의 일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조 군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양양의 군대는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유경승의 죽음 때문이 아니겠소?”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유비가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공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할 뜻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여기는가?”

공명의 말에 유비도 의아해했지만 서서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종을 형주목으로 세운 채모, 한숭 등은 모두가 형주 태생이네. 그들은 그 동안 군웅 유표를 섬긴 것이 아니라 형주목 유표를 섬긴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즉, 그들은 형주의 안전과 자신들의 땅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말일세. 주인은 누구라도 상관이 없네. 형주만 보존할 수 있다면 조조든 손권이든 누구든지 섬길 사람들이지.”

공명은 자신의 생각을 서서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닦아온 기업(基業)을 칼 한 번 휘둘러보지 않고 고스란히 조조에게 바친단 말인가? 그것은 유경승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네.”

“싸움은 벌써 했네.”

“언제? 누가?”

“우리가 벌써 싸우지 않았는가?”

“그것이 무슨 말이오?”

이번에는 유비가 끼여들며 물었다.

“유종 일파는 주공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주공께서 조조 군을 막지 못하고 신야성을 내주면 형주 군 역시 조조의 대군을 막을 힘이 없다,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싸우는 동안에도 군사를 내지 않고 싸움의 결과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신야성을 내주었으니, 유종 일파는 조조에게 항복할 것이 분명합니다.”

유비와 서서는 공명의 말뜻을 이해하긴 하였으나 미심쩍은 점이 많은지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 때였다. 조운이 형주의 막빈인 이적(伊籍)을 데리고 들어왔다.

“강변을 순찰하다 조각배를 타고 오는 이공을 발견하였기에 이리로 모셨습니다.”

이적은 유표의 가신이자 강하 태수 유기의 스승이었다. 자를 기백(機伯)이라 했으며, 산양 태생이었다. 양양성 안에 있어야 할 그가 번성에 나타나자 유비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백이 여기 웬일이시오?”

유비의 물음에 이적은 눈물부터 쏟았다.

“유표 공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일은 알고 있소.”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유종이 새로이 형주목에 올랐는데, 방금 전 조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항복 문서를 지닌 사자가 신야성에 당도하였을 것입니다.”

이적의 말에 유비와 서서는 비로소 공명의 예측이 옳았음을 알았다. 특히 유비는 몹시 허탈해하는 표정이었다. 형주는 유표가 반생에 걸쳐 이룩한 기업이었다. 그런 땅을 그 아들이 넘겨받자마자 조조에게 넘겨버렸으니 어찌 분하고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에서 다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유비를 보고 이적이 감동했음인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일이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유 사군께서 형주를 취하심이 어떠십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오?”

“이제 사군께서는 이미 조조 땅이 되어버린 형주에 대해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양양으로 문상을 하러 가는 척하면서 유종을 사로잡으면 형주는 자연 유 사군의 땅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백의 말이 옳습니다.”

서서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나 유비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표 공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내게 아들들을 부탁하였소. 유종도 유표 공의 아들이오. 그가 비록 형주를 조조에게 내주었다고는 하지만, 내 어찌 그를 핍박할 수 있겠소? 나중에 황천에 가서 내 무슨 낯으로 유표 공을 대한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유비의 그 같은 말에 서서와 공명은 탄식하였고, 이적은 더욱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

“형주가 이제 조조의 손에 들어갔으니, 주공께서는 하루도 이 곳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조조 군도 조조 군이거니와 양양의 군대가 언제 이 곳을 들이칠지 모릅니다.”

공명은 슬픔과 애석함에 빠져 있는 유비에게 현실의 당면 문제를 일깨워주었다.

“대군사의 말씀이 옳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남쪽으로 내려가시지요.”

공명이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남쪽? 남쪽 어디 말이오?”

공명의 선택 (148)…제11장 양양성의 눈물 (8)
“주공께서는 생각해두신 곳이 없습니까?”

공명이 유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유비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글쎄요, 남해의 창오(蒼梧) 태수 오거(吳巨)는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오. 그라면 나를 받아줄 듯싶소.”

창오는 오지(奧地)이다. 중국 대륙의 거의 서남단에 위치해 있다. 지금의 광서성(廣西省) 장족(壯族) 자치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 땅으로 피해 달아난다는 것은 곧 천하 대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창오를 생각하셨다니 참으로 뜻밖입니다.”

공명이 쓸쓸히 말했다.

“어찌하겠소? 이 넓은 천지에 이 한 몸 마음놓고 갈 곳이 없으니 말이오.”

“주공께서는 유기를 잊으셨습니까?”

공명이 일깨우듯 말했다. 그 말에 유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군. 강하 태수 유기가 있었군. 그에게로 가서 다시 군사를 정돈한 후 조조와 싸운다?

과연 대군사다운 생각이오.”

“주공께서 유기 공자에게 덕을 베푸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공명이 조용히 대답했다.

―강하.

이로써 목적지는 정해졌다. 유비 군은 곧 철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비 군이 번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번성의 고을 백성들이 짐을 싸들고 따라나서기를 원했던 것이다. 번성으로 피신해와 있던 신야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조 군이 쳐들어오면 개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다.

서주 대학살을 연상시키는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유비를 따라나서겠다는 백성들은 더욱 많아졌다.

“이래서는 마음놓고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공명이 난감해하며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 역시 이 뜻밖의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조만간에 조조는 유비를 사로잡기 위해 날랜 기마병을 추격대로 급파할 것이다. 기를 쓰고 달아나도 붙잡히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백성들까지 데리고 간다면 며칠 못 가서 조조의 추격대에 따라잡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소? 나를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을 버리는 것은 인의를 아는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니오.”

유비는 결국 백성들을 선택했다.

―원하는 사람들은 유 사군을 따르라.

곳곳에 방이 나붙었다. 백성들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는 업고 성문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고향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곡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성루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던 유비는 목을 놓아 통곡했다. 공명의 눈가에도 촉촉이 물기가 배었다. 서주 대학살을 전후하여 부모를 잃고 숙부 제갈현을 따라 고향 양도를 떠나던 그 날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서서 역시 입술을 깨물며 성문 앞에 모여 있는 백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공명이 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꼭 이렇게 해야 했는가?”

서서는 깜짝 놀랐다.

“알고 있었군. 조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네.”

“하긴 나도 무수히 고민했었네. 자네가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내가 했을지도 모르겠네.”

공명의 손이 서서의 손을 움켜잡고 있었다. 뜨거웠다.

공명의 선택 (149)…제11장 양양성의 눈물 (9)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조조의 추격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의 눈을 가릴 필요가 있었다. 조조는 병법에 밝은 사람이었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그를 따돌릴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백성들이었다. 남하하는 속도는 느리겠지만 행렬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그 행렬이 오히려 조조의 추격 속도를 늦추게 하지는 않을까. 유종이 항복한 마당에 조조는 형주 백성들의 인심을 얻으려 할 것이다.

―서주 침공 때처럼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는다.

공명은 이렇게 판단했다. 조조가 피난 행렬에 가로막혀 주춤거리는 사이, 유비 군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강하로 진군하면 멋진 철군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공명은 망설였다. 백성들을 이용한다는 것이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할 때 거리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조조 군이 쳐들어오면 개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다.

공명은 대뜸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원직이……?’

공명은 유비를 위하는 서서의 충정이 얼마나 강한지를 새삼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강하로 향해서는 의미가 없겠지.”

서서가 중얼거렸다.

“강릉은 형주의 양곡 창고나 다름없는 곳이네.”

“그렇군. 강릉이 좋겠군.”

“어머니를 잘 모시게. 거동이 불편하시지 않은가?”

공명이 염려했다.

서서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자네 안사람이나 잃어버리지 말게.”

그 날로 유비 군과 백성들은 번성을 떠났다. 양양성과 번성은 지척간이었다. 한 나절이 채 안 돼 유비는 양양성 앞을 지나게 되었다. 양양성을 보는 순간, 유비의 머릿속으로 지난 7년간의 형주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갈 곳 없는 초라한 몰골의 유비를 흔쾌히 받아들여 상빈(上賓)으로 대접한 유표의 인자함이 그리웠다. 유비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말을 멈추고 양양 성문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양양성도 마지막인가?”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공명이었다.

“주공.”

“다시 양양성을 볼 수 있을는지…….”

“마지막 기회입니다.”

공명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눈은 여전히 양양성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뜻이오?”

유비가 공명의 전과 다른 분위기를 눈치채고 물었다.

“이제는 유경승의 형주가 아닙니다. 조조의 형주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양양성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것은…….”

유비는 눈을 하늘로 쳐들었다. 공명의 눈길도 하늘을 향했다.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무심한 구름이었다.

“천하를 위하는 일입니다.”

“유표 공에게 면목없는 일이오.”

공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었다. 낙심해서도 탄복해서도 아니었다. 그 순간, 그는 한 인간을 이해하고 있었다. 말이나 생각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유비는 천하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를 잡지 못해 낙심하고 안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전쟁과 살육과 모략과 의심이 없는 세상.

그는 이런 세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적은 조조가 아니라 조조와 같은 사람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다.’

공명은 유비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다. 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유비의 몇 가지 행적들에 대한 궁금증이 실타래 풀리듯 명백하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유종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소.”

유비가 다시 중얼거렸다.

공명이 손건을 양양 성문 앞으로 보내 유비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성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유비는 눈물을 떨구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공명은 이제 분명히 알았다.

“그만 떠나시지요.”

“알겠소.”

“목적지는 강릉입니다.”

“강하가 아니오?”

“강릉에는 병기고와 군량 창고가 있습니다. 먼저 그 곳을 차지한 후 강하로 향해도 늦지 않습니다.”

“알겠소.”

떠나기 전, 공명은 관우를 비밀리에 불렀다.

“관공께서는 배를 타고 강하로 가십시오. 그러면 유기 공자가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관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릉이 아닙니까?”

그러나 공명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ㄱㄱㄱ (2001-11-25 11:51:45)
뭐야 . 왜 퍼오냐구!

<공명의 선택> 12장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죽림칠현과 유령(퍼온 글입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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