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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화원검(2001-01-06 14:35:28, Hit : 5172, Vote : 613
 http://deleted
 정사 조운열전
헥헥 가장논란이되는 조운열전입니다,,읽으시고 조운에대해 재평가하시는게..

《삼국지》권36 촉서 제6 관장마황조전 중에서 조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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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안에 연도와 같이 표기했는데, 그 연도에 일어난 일을 구분한 것임.
() 연도나 주석을 넣은 것.
①②③ 배송지의 주석.(모두 조운별전을 인용하고 있네요.)
->저의 짧은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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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雲(?-229)
->한 인물을 파악하는 데는 그 인물의 나이가 몇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데 조운은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매우 아쉽습니다.

  趙雲字子龍, (冀州)常山(郡)眞定(縣)人也. 本屬公孫瓚, 瓚遣先主爲田楷拒袁紹(189), 雲遂隨從, 爲先主主騎. ①[(208)及先主爲曹公所追於當陽長阪, 棄妻子南走, 雲身抱弱子, 卽後主也, 保護甘夫人, 卽後主母也, 皆得免難. 遷爲牙門將軍. ][(211)先主入蜀, 雲留荊州. ②]
조운은 자가 자룡이고, (기주) 상산군(한 고조가 만듬.) 진정(현)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에 속해 있었는데, 공손찬이 선주(유비)에게 전해를 도와 원소를 막도록 했을 때(189), 조운은 선주의 주기가 됐다.①[(208) 선주가 조공에게 당양의 장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을 때, 조운은 직접 어린 자식 즉 후주를 품에 안고 감부인 즉 후주의 모친을 보호하여 모두 난을 모면하도록 했다. 승진하여 아문장군이 되었다.] [(211) 선주가 촉으로 들어갔을 때, 조운은 형주에 남았다.]②

①雲別傳曰:雲身長八尺(192cm), 姿顔雄偉, 爲本郡所擧, 將義從吏兵詣公孫瓚. 時袁紹稱冀州牧, 瓚深憂州人之從紹也, 善雲來附, 嘲雲曰:「聞貴州人皆願袁氏, 君何獨 心, 迷而能反乎?」雲答曰:「天下仟央未知孰是, 民有倒縣之厄, 鄙州論議, 從仁政所在, 不爲忽袁公私明將軍(公孫瓚)也. 」遂與瓚征討. 時先主亦依託瓚, 每接納雲, 雲得深自結託. 雲以兄喪, 辭瓚暫歸, 先主知其不反, 捉手而別, 雲辭曰:「終不背德也. 」先主就袁紹, 雲見於 . 先主與雲同床眠臥, 密遣雲合募得數百人, 皆稱劉左將軍部曲, 紹不能知. 遂隨先主至荊州.
① 雲別傳曰: 조운은 신장이 8척(192cm)이며 자태나 안색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고향 군에서 추천되었고, 의를 따르는 아전(벼슬아치)과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으로 칭하고 있었는데, 공손찬은 주민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매우 걱정해서, 조운이 자신에게 온 것을 기뻐하면서도 조운을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듣건대 그대의 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를 따르기를 원한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그대만이 마음을 바꾸었는가?" 조운이 답하여 말했다. "천하는 어지러워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며 현에 재앙이 들이닥치면 백성들에게는 곧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고을에서는 어진 정치를 펴는 곳을 따르지, 원공을 경시하고 명장군을 섬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손찬과 함께 정벌을 했다. 이때 선주 역시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항상 조운을 평가하였고, 조운은 스스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조운은 형이 상을 당하자 공손찬을 떠나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므로 굳게 손을 잡으며 헤어지려 하자, 조운은 선주에게 말했다. "절대로 은덕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선주가 원소에게 의지하자, 조운은 업에서 선주를 만났다. 선주는 조운과 한 침상에 누워 잠을 잘 정도였다. 은밀히 조운을 파견해 병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모두 유좌장군(유비)의 부곡(사병을 지칭하는 말)이라 칭했다. 원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선주를 따라 형주로 갔다.

->조운의 배경에 대해서는 진수나 배송지 모두 기록하지 않했는데, 그의 가문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고(다른 전을 보면 현령이라도 기록한 것을 보아서), 爲本郡所擧, 將義從吏兵詣公孫瓚. 의 문장으로 보아 그 지방의 호족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되네요.

②雲別傳曰:初, 先主之敗, 有人言雲已北(曹操)去者, 先主以手戟 之曰:「子龍不棄我走也. 」頃之, 雲至. 從平江南, 以爲偏將軍, 領桂陽太守, 代趙範. 範寡嫂曰樊氏, 有國色, 範欲以配雲. 雲辭曰:「相與同姓, 卿兄猶我兄. 」固辭不許. 時有人勸雲納之, 雲曰:「範迫降耳, 心未可測;天下女不少. 」遂不取. 範果逃走, 雲無纖介. 先是, 與夏侯惇戰於博望, 生獲夏侯蘭. 蘭是雲鄕里人, 少小相知, 雲白先主活之, 薦蘭明於法律, 以爲軍正. 雲不用自近, 其愼慮類如此. 先主入益州, 雲領留營司馬. 此時先主孫夫人以權妹驕豪, 多將吳吏兵, 縱橫不法. 先主以雲嚴重, 必能整齊, 特任掌內事. 權聞備西征, 大遣舟船迎妹, 而夫人內欲將後主還吳, 雲與張飛勒兵截江, 乃得後主還.
② 雲別傳曰:처음에 선주가 패하자, 어떤 사람이 조운이 북(조조에게)으로 도망갈 것이라고 하자, 선주는 그에게 손에 있는 극을 들이대며 말했다. "자룡은 나를 버리고 갈 사람이 아니오." 잠시 후 조운은 돌아왔다.(유선을 구해서) 선주를 따라 강남을 평정했으며, 조범을 대신해 계양태수가 됐고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조범에게는 번씨라는 형수가 있었는데, 국색(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의 미인이었다. 조범이 형수를 취하라고 했는데, 조운이 말하기를 "경은 나와 같은 성씨이니 경의 형수는 곧 나의 형수와 같은 것이오."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조운에게 번씨를 받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운이 말하길 "조범이 어쩔 수 없이 항복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천하에 여자가 한둘이겠소." 라며 끝내 취하지 않았다. 조범은 달아났으나, 조운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이전에 박망에서 하후돈과 싸울 때 하후란을 생포하였는데, 하후란과 조운은 같은 고향 사람이었지만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운은 선주에게 간청하여 하후란을 살려주도록 했으며,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운은 스스로 곁에 두고 쓰지 않았다. 그의 삼가하고 살펴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선주가 익주로 들어갈 때, 조운을 남겨 사마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는 손권의 누이 손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오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린 채, 방자하여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 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어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212 先主自 萌還攻劉璋, ][214 召諸葛亮. 亮率雲與張飛等俱芟江西上, 平定郡縣. 至江州, 分遣雲從外水上江陽, 與亮會于成都. ]成都旣定, [219 以雲爲翊軍將軍. ①][建興元年(223), 爲中護軍·征南將軍, 封永昌亭侯, 遷鎭東將軍. ][五年(227), 隨諸葛亮駐漢中. ][明年(228), 亮出軍, 揚聲由斜谷道, 曹眞遣大衆當之. 亮令雲與鄧芝往拒, 而身攻祁山. 雲·芝兵弱敵彊, 失利於箕谷, 然斂衆固守, 不至大敗. 軍退, 貶爲鎭軍將軍. ②]
[212년 선주가 가맹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고,][214년 제갈양을 불렀다. 제갈양은 조운과 장비 등을 인솔하여 함께 장강을 역류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에 도착하자, 따로 조운에게 물을 지나 강양으로 올라와 성도에서 제갈양과 합치도록 했다.] 성도가 평정된 후, [219년 조운을 익군장군으로 임명했다.①] [건흥 원년(223)에 중호군·정남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영창정후에 봉해졌고, 승진하여 진동장군이 되었다.][5년(227년), 제갈양을 수행하여 한중에서 주둔했다.][다음해(228년), 제갈양이 군대를 출동시켜 사곡도를 지나며 승승장구하자, 조진은 대부대를 보내 이에 대적했다. 제갈양은 조운과 등지에게 가서 맞아 싸우도록 하고, 자신은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병력은 약하고 적군은 강했으므로 기곡에서는 패했지만, 군대를 모아 굳게 지켰으므로 참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대를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②]

->[219년 조운을 익군장군으로 임명했다.①] 조운을 익군장군으로 임명한 연도는 원래 몰랐었는데,《화양국지》를 보고서 알았습니다. 유비나 조조, 관우, 제갈양 등등의 인물은 삼국지의 다른 권이나 다른 사서(후한서, 세설신어, 어람, 통전 등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조운은 삼국지의 다른 권이나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없고, 삼국지 촉서의 다른 권이나 화양국지에 약간 있지만 거의 다 중복되는 내용이어서 정말 아쉽기 그지 없군요.
조운이 기곡에서 패한 것은 원래 제갈양이 여기에 중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동격서의 전략이었으므로 조운에게는 충분한 군사가 공급되지 않았다.

①雲別傳曰:益州旣定, 時議欲以成都中屋舍及城外園地桑田分賜諸將. 雲 之曰:「?去病以匈奴未滅, 無用家爲, 令國賊非但匈奴, 未可求安也. 須天下都定, 各反桑梓, 歸耕本土, 乃其宜耳. 益州人民, 初罹兵革, 田宅皆可歸還, 今安居復業, 然後可役調, 得其歡心. 」先主卽從之. 夏侯淵敗, 曹公爭漢中地, 運米北山下, 數千萬囊. 黃忠以爲可取, 雲兵隨忠取米. 忠過期不還, 雲將數十騎輕行出圍, 迎視忠等. 値曹公揚兵大出, 雲爲公前鋒所擊, 方戰, 其大衆至, 勢 , 遂前突其陳, 且 且 . 公軍敗, 已復合, 雲陷敵, 還趣圍. 將張著被創, 雲復馳馬還營迎著. 公軍追至圍, 此時沔陽長張翼在雲圍內, 翼欲閉門拒守, 而雲入營, 更大開門, 偃旗息鼓. 公軍疑雲有伏兵, 引去. 雲雷鼓震天, 惟以戎弩於後射公軍, 公軍驚駭, 自相蹂踐, 墮漢水中死者甚多. 先主明旦自來至雲營圍視昨戰處, 曰:「子龍一身都是膽也. 」作樂飮宴至暝, 軍中號雲爲虎威將軍. 孫權襲荊州, 先主大怒, 欲討權. 雲諫曰:「國賊是曹操, 非孫權也, 且先滅魏, 則吳自服. 操身雖斃, 子丕簒盜, 當因衆心, 早圖關中, 居河·渭上流以討凶逆, 關東義士必 糧策馬以迎王師. 不應置魏, 先與吳戰;兵勢一交, 不得卒解. 」先主不聽, 遂東(吳)征, 留雲督江州. 先主失利於 歸, 雲進兵至永安, 吳軍已退.
① 雲別傳曰:益州旣定, 時議欲以成都中屋舍及城外園地桑田分賜諸將.-> ???(해석이 안되네요.) "곽거병(BC140-117 전한 무제 시대의 장군. 위청BC?-106과 함께 흉노 공략에 가장 큰 활약을 한 장수.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는 장수들. 두 장군의 흉노 공략 활약상을 손에 땀을 쥐고 읽었던 기억이....)은 아직 흉노를 토벌하지 못했다 하여 황제가 내린 집까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라의 적은 비단 흉노만이 아닐진대 어찌 편안함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천하가 평정된 후라고 해도 뽕나무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익주의 백성들은 처음 병란을 겪어 어려움이 많았으니, 밭과 집을 돌려주고 영을 내려 편안히 거주하며 생업에 복귀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부역을 줄여준다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주는 그의 말을 따랐다. 여름에 하후연을 격파하고 조조와 한중을 놓고 대치했다. 수천만의 쌀이 북산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황충을 보내어 취하려 했는데 조운의 병사들도 황충을 따라갔다. 황충이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장군이 십여 기를 거느리고 나가 황충을 찾아 나섰다. 얼마 못 가 조공의 병사와 마주쳤는데 조공이 병사들을 출전시키자 조운은 그 앞의 한 곳을 날카롭게 공격하며 싸웠다. 대군이 점점 다가오자 형세는 위급해졌지만, 조운은 그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틈을 찾았다. 조공의 군사는 패했으나 다시 세를 모아 주위를 포위했다. 조운은 적진에 빠져 있었지만 곧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장수 장저가 부상을 입자 조운은 다시 말을 달려 장저를구하여 데리고 왔다. 이때 면양에는 장익이 있었는데, 조공의 군사가 추격하여 주위를 포위하자 장익은 문을 닫고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조운은 진영으로 들어오자 문을 다시 크게 열더니 기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조군은 조운의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퇴각했다. 이때 뇌성 같은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조공군의 뒤에서 쇠뇌의 사격이 가해졌다. 조공의 군사들은 놀라서 스스로 서로를 밟고 밟히며 한수에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다음날 아침 선주가 스스로 조운의 영채에 와서 전날의 전투 상황을 보고는 말했다. "자룡은 몸 전체가 담이구려" 전날의 전투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는데 밤새는 줄을 몰랐다. 군중에서는 조운을 호위장군이라고 불렸다. 손권이 형주를 침범하자 선주는 대노하여 정벌하려 했다. 조운이 간하여 말했다. "국적은 손권이 아니고 조조입니다. 먼저 위를 멸하고 오는 스스로 항복하게 해야 합니다. 조조가 죽었지만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했습니다.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을 도모하여 황하와 위수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의 뜻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나라와 싸우시면 아니되옵니다. 오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쪽(오)을 정벌하러 진격했는데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안에 이르렀지만 오의 군대는 이미 물러난 뒤였다.

-> 위에 조운이 유비의 오 정벌을 말린 것을 보면, 조운이 정치와 전략을 이해하는 장수였다는 유일한 기록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부같은 유비.

②雲別傳曰:亮曰:「街亭軍退, 兵將不復相錄, 箕谷軍退, 兵將初不相失, 何故?」芝答曰:「雲身自斷後, 軍資什物, 略無所棄, 兵將無緣相失. 」雲有軍資餘絹, 亮使分賜將士, 雲曰:「軍事無利, 何爲有賜?其物請悉入赤岸府庫, 須十月爲冬賜. 」亮大善之.
②雲別傳曰:제갈량이 말하기를, "가정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 장졸들은 돌아오지 못해 흩어져 버리고 말았는데, 기곡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는 능히 장병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된 연고인가?" 라고 묻자, 등지가 대답했다. "조운이 후방을 끊어 엄호한 뒤 군수물자를 소홀히 버리지 않았기에, 병사와 장수들도 서로 힘을 합해 나뉘어지지 않고 두루 따르게 된 것입니다." 조운의 군수물자에 명주가 많이 남아있자, 제갈량은 이를 장사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다. 이에 조운이 나서며 말했다. "군대의 일이란 이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나누어주려 하십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을 모두 적안부의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겨울이 오는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하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七年(229)卒, ][261 追諡順平侯. ]
[7년(229)에 조운은 세상을 떠났는데,][(261년 3월) 시호가 순평후로 추증되었다.]

四年(261)春三月, 追諡故將軍趙雲. 《三國志 蜀書-後主傳》
4년(261) 봄 3월에 이미 고인이 된 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다.




조운짱 (2001-02-11 21:13:38)
역쉬 조운은 멋쪄여
조자룡 (2001-03-04 23:06:44)
이게 정사인가여? 정사에서도 조운은 뛰어난 인물로 묘사 된것같군요...
常山趙雲 (2001-05-26 19:56:22)
조운........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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