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연 :: 동호회


정삼연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자유게시판
 치기 어린 시절에 남겨...
 sbs 야구병법
 EBS 세계견문록 삼국지...
  EBS 세계견문록 아틀...
 정원기 소장와 함께 떠...
공지사항
 중화TV 삼국지 덕후 콘...
 sbs 야구병법
 EBS 세계견문록 삼국지...
  EBS 세계견문록 아틀...
 정원기 소장과 함께 떠...


  천공하후패(2001-01-09 15:24:33, Hit : 5087, Vote : 580
 <공명의 선택> 5장 강동에 부는 바람
공명의 선택 (49)…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1)
제갈근과 제갈량이 아버지 제갈규의 죽음 소식을 들은 것은 조조 군이 서주에서 완전히 철병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비극적인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새어머니 정씨 부인의 친정 식구들도 모조 리 참살당했다는 것이었다. 단 한 명의 가족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서주 목 도겸만 믿고 팽성 안에 남아 있다가 그대로 몰살당한 것이다.

정씨 일가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재빨리 빠져나간 사람들을 제외하곤 남아 있던 팽성 안 백성들 모 두가 창칼에 찔려 죽거나 불에 타 죽었다.

이러한 참사는 열세 살 소년 제갈량에게 상당한 상처를 안겨주었다. 어지러운 천 하를 원망하기에 앞서 조조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어찌하여 그런 자를 천하의 영웅이라 부르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조조가 천 하를 평정한다 해도 나는 결코 조조에게 벼슬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갈량의 원망어린 독백에 형 제갈근은 묵묵히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았다. 사태 수습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계모 정씨 부인이었다.

"아버님의 시신부터 수습해와야 하지 않겠느냐?" 제갈근과 가복 장충이 나서서 제갈규의 시신을 찾아왔다. 여름철이었다. 시체는 거의 썩어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보겠다고 고집하는 제갈량을 제갈근은 겨우 말 렸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장례식을 치렀다. 그들은 제갈규의 시체를 땅에 묻으면서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조 군이 양도를 피해간 것이 천만다행이군."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제갈량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모두들 그런 제갈량 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자 제갈량은 이틀 밤을 꼬박 앓아누웠다.

슬픔과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의원은 진단하고 돌아갔다. 열이 워낙 높아 식구들은 모두 그가 죽는 줄 알았다. 계모 정씨가 이틀 밤낮을 제갈량 곁에서 지내며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숙부님께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생 제갈량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야 제갈근은 생각났다는 듯 계모 정씨와 의 논했다.

"이미 사람을 양양으로 보냈으니, 조만간에 당도하실 게다. 그보다도 팽성을 한 번 다녀오지 않겠느냐?" 제갈근은 새어머니 정씨의 뜻을 알아채고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오늘 당장 길을 떠나 뒷수습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갈현은 형주목 유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형주의 형세는 장사 태수 손견이 양양의 현산 골짜기에서 돌무더기에 깔려 죽은 이후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아들 손책이 형주 남부 지역을 포기하고 원술 의 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장사, 영릉, 계양 등의 형주 남쪽 지방 은 무주공산의 땅이 되었다. 이 점을 제갈현은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 원술은 손책을 시켜 강동 일대에 세력을 펴느라 장사, 영릉, 계양, 무릉 등 4개 군에 신경쓸 겨를이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그 땅을 손에 넣으십시오."

유표는 제갈현의 제안에 따라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동정호 일대로 내려보냈 다. 염려했던 원술은 제갈현의 예견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표는 일 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사방 3천 리가 넘는 형주 일대를 안 정시키기에 이르렀다.

북쪽으로는 조조, 원소, 여포, 공손찬 등이 제각기 세력을 확 장하고, 동쪽으로는 원술과 손책의 연합세력이 강동 일대를 석권하는 동안의 일이 었다. 이제 남은 것은 형주와 경계 지역인 양주(揚州)의 서쪽 지역을 확보하는 일뿐 이었다.

양주는 장안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조정의 힘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아직까지 뚜렷한 실력자가 등장하지 않은 미래의 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뭇 군 웅들이 그 땅을 노리고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양주 일대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제갈현의 계획이었다. 잠시 군사들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조조의 서주 대학살 사건 과 가형 제갈규의 죽음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다.

"결국 뜻을 펴보지 못하고 난세의 덧없는 희생자가 되었구나." 안타까움과 슬픔과 서러움이 겹쳐 제갈현은 삼일간을 통곡했다. 어머니 장씨가 죽은 후 삼 년이 채 안 돼 아버지마저 잃은 조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계모 정씨 가 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누가 그들을 보살필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제갈현은 울음을 그치고 유표를 찾아갔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가형이 조조 군의 만행에 희생되었습니다. 유족들의 뒤도 보살펴야 하고…… 잠 시 고향에 다녀왔으면 합니다."

형주 남부 지역도 평정되었겠다, 군사들도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당장 서둘 러야 할 일은 없으리라는 전망이 섰던 것이다.

공명의 선택 (50)…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2)
"양주의 일은 어떻게 할 작정이오?" 유표는 역시 공무를 염려했다.
"두세 달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때까지는 어차피 군사들도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고…… 조조·원소·원술 등도 양주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들의 동향도 파악할 겸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다녀오기 바라오. 아울러 그들의 동태도 상세히 파악해주기 바라 오." 유표가 말하는 ‘그들'이 조조·원소·원술을 가리키고 있음을 제갈현이 어찌 알지 못하랴.

양양을 떠나 양도로 가는 도중 팽성을 지나게 되었다. 새 형수 정씨를 맞이하기 위해 팽성을 들락거린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그 때 자신을 맞이해주던 정 학사의 자상한 웃음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런 정학사의 가족들도 몰살당했다 고 했다.

팽성 안으로 들어선 제갈현은 경악했다. 소문으로만 들어온 서주 대학살의 참상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고 처참했다. 사람으로서 이러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조조라는 자는 정말 알 수 없는 인물이로구나.' 난세라고는 하지만 민심을 얻지 않고서는 패업을 향해 달릴 수가 없다. 그러기에 모든 군웅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고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점이 도적의 무리와 다른 점이다. 그런데 조조는 보란 듯이 서주를 침공하여 대학살을 자행하고 바람처럼 사라져가버렸다.

‘어리석은 자인가, 범인(凡人)의 생각을 벗어난 자인가.' 팽성 정 학사의 집에서 제갈현은 뜻밖으로 장조카 제갈근을 만났다. "근이로구나." "숙부님!"

언제보아도 믿음직스럽고 근면한 제갈근이었다. 일 년 조금 넘게 못 본 사이 제갈 근은 더욱 성숙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정 학사와 그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후 양도로 돌아왔다.

제갈량은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험악한 세상에 대한 울 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일까. 그는 제갈현의 넓은 가슴에 안겨 두 시간 넘게 계속 눈물을 흘려댔다.

그런 제갈량의 행동을 숙부 제갈현도, 형 제갈근도, 새어머니 정 씨도 말리지 않았다. 언제까지 망자에 대한 추모와 슬픔에 젖어 있을 것인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살아 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곧 삶이 아니겠는가. 일시적인 귀향이었지만 제갈현이 돌아옴으로 해서 침울했던 집안은 다소 활력을 되찾았다. 그들은 앞날에 대한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술상이라도 봐올까요?" 계모 정씨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몸을 뺐다. "대책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냥 이 곳에서 이대로 지내면 되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향인 양도를 떠나 천하의 풍랑 속에 몸을 던지기를 바랐던 제갈근이었다. 덮쳐오는 파도와 싸우며 자신의 뜻을 펼칠 날을 기다리던 패기와 열 정이 눈에서 뜨겁게 뿜어져 나왔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그의 꿈을 꺾어놓은 것일까. 아니면 장남으 로서 가장의 책임감을 느낀 것일까. 그의 입에서는 ‘그냥 이대로……'라는 말이 튀 어나왔다.

"그냥 이대로……라? 농사를 지으면서 말이지?" 제갈현의 눈길이 제갈근의 얼굴에 가 멎었다. "예." "딸린 가족이 넷에 가복까지 합하면 모두 열 명이 넘는다. 그냥 이대로…… 자신 있느냐?" 제갈현은 화가 난 듯 제갈근을 쏘아보았다.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요." 한풀 꺾인 제갈근의 대답에 제갈현은 가슴이 저리듯 아파왔다. 낙양 유학 시절의 활화산 같던 제갈근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난세다. 언제 어디서 환란이 닥쳐올지 모른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서주라면 안심이다'라고 해서 많은 피난민이 서주로 몰려들었다. 그런 서주에 대환란이 밀어 닥친 것이다. 이 곳도 이제는 안심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네 말대로 ‘그냥 이대 로……' 지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니, 이제는 ‘그냥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되는 때가 되었다."

"숙부님의 말씀은…… 이 곳을 떠나자는 뜻입니까?" 전혀 예상 밖이라는 듯 제갈근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 여기서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예전의 서주요, 예전의 낭야가 아니다. 세상은 지금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냥 이대로……'의 시대는 끝났다. 나와 함 께 형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유표에게로 말입니까?" "유표가 아니라 형주라고 했다. 네가 유표를 선택하든, 원술을 선택하든 그것은 네 안목이요, 네 뜻이다. 다만, 내가 보기에 형주 땅은 당분간 무풍지대가 될 것이 다. 많은 안목 있는 선비들이 형주를 찾아 모여들고 있다. 너와 네 가족들이 몸을 보존하기에 형주만큼 합당한 곳이 없다. 그런 다음 세상을 향해 눈을 돌려라. 그러 는 것이 네 가족을 위하는 것이다. 네 나이 이제 스물이 아니냐? ‘그냥 이대로……' 는 너를 죽이고 네 가족을 죽이는 일이 될 뿐이다."

"숙부님께서 너무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나도 이제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내 일을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 해보겠습니다."

제갈현은 제갈근의 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생각이 깊은 것이 제갈근의 특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어떤 때는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을 때 도 있었다.

공명의 선택 (51)…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3)
제갈근의 염려대로 제갈현이 형님의 유족 다섯 명을 모두 책임진다는 것은 무리 였다. 그러기에는 형주에서 그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는 형주를 떠나 양도로 오 는 도중 이 문제를 놓고 내내 고심했다. 그리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 제갈근의 등용 이었다.
‘근을 유표 밑에서 일하게 하자.' 그렇게 되면 제갈근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요, 그는 직접 신경쓸 필요 없이 제갈근의 뒤만 돌보아주면 되는 것이다. 이미 아내 강씨와 는 떠나오기 전에 의논해두었다. 제갈근의 결심만 남은 것이다.

며칠 후, 제갈근은 마음을 정한 듯 제갈현에게 말했다. "숙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구나." "하지만 이 곳을 정리하려면 시일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 숙부님께 서 이 곳에 계실 수도 없고 하니, 먼저 양과 정과 균을 데리고 형주로 출발하십시 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이 곳 집과 땅을 정리한 후 뒤따라가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제갈현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형님, 빨리 뒤따라오셔야 합니다." 무슨 예감이라도 든 것일까. 제갈량은 집을 떠나기 전 몇 번이고 제갈근에게 이렇 게 말했다. "그래, 고생이 되더라도 참아야 한다. 숙부님 말씀 잘 듣고."

제갈근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눈시울까지 붉히며 제갈량의 등을 떠밀었다. 마치 영원히 헤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형제간의 이별 장면이었다. ‘성격은 남인 것처럼 다른데도, 우애는 꽤 깊은 형제들이로구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갈현은 한편으로는 흐뭇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미어지 는 듯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이 난세가 언제 끝나려나.' 하지만 이제 어지러움의 시작인 것을 제갈현은 잘 알고 있었다.

"양아, 그만 떠나도록 하자. 여기를 정리하는 대로 뒤따라온다고 하질 않느냐. 길 어야 두세 달이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제갈현과 제갈량은 말을 탔고, 정과 균은 유모와 함께 수레에 올랐다. 난생 처음으로 떠나보는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계시던 태산으로 가기 위해 양도현을 떠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렸을 적의 일이요, 온가족이 함께였다.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고향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제갈량은 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예전에는 참으로 좋은 곳이었는데……." 제갈현도 서글픈 감회에 젖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낭야의 경계를 벗어나 팽성 근처를 지나면서부터 제갈현 일행은 한가로운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게 되었다.

집과 땅을 잃은 백성들이 도적으로 변해 여행자를 상대 로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사람만 나타났다 하면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였다.

제갈현은 마침 형주로 가는 상인들을 만나 그들과 일행을 이루었다.

공명의 선택 (52)…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4)
"어째서 사람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나요?" 제갈량이 제갈현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이제 열네 살을 바라보는 제갈량은 숙성하여 성인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앳된 티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이란…… 이렇게 성장하는 것인가?' 제갈현은 제갈량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몰라서 묻는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싸움도 싸움 나름이겠지."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제갈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시공을 초월하고 있었다. 적어도 형주목 유표는 이러한 만행을 저 지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유약하다 싶을 정도로 싸움을 싫어했다. 손책이 포기하 고 간 장사, 영릉, 무릉, 계양 등의 땅에도 제갈현이 재촉하여 군사를 내보냈을 정 도였다. 싸움이라고는 했지만 사상자는 별로 없었다. 그것이 유표의 지시였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라는 말이, ―싸움도 싸움 나름이겠지. 라는 중얼거림으로 터져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싸울 수 있다는 뜻인가요?" 제갈량은 숙부의 머릿속 생각을 헤아리고 있기라도 한 듯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 제갈현의 반문섞인 대답에 제갈량은 입을 다물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싸울 수 있다. 가능할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싸움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제갈량은 속으로만 의문에 싸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 때 광야 저편에서 누런 먼지가 일면서 한떼의 인마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제갈량을 비롯한 여러 여행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흙먼지는 점점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적떼가 아닐까요?" 제갈량이 흙먼지 너머로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도적떼를 쫓는 군사들일 수도 있겠지." 제갈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기마병이 그들 앞에 멈춰섰다. 그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장교가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 사람들이오?" 상인들이 묻는 의도를 알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제갈현이 앞으로 나서며 대 답했다.

"우리는 형주까지 가는 사람들이오." 그러자 기마 장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알았소. 그렇다면 우리를 따라오시오. 저 곳 산 주변에는 도적떼가 많아 위험하 니 우리가 안전하게 인도해주겠소."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갈현이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어느 성 군사들이오?"

"우리는 소패에 주둔하고 있는 유현덕 공의 군사들이오. 우리 주공께서 이 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자주 도적들에게 피해를 당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특별히 우 리를 보낸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따라오는 게 좋을 것이오."

그들은 기마 장교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제갈현도 유비라는 장수가 도겸을 돕기 위해 서주로 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 다. 소문에 의하면, 도겸은 유비의 인덕에 감복하여 서주목 패인(牌印)을 그에게 넘 겨주려 했으나, 유비가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철회하고 대신 소패성 을 내주어 머물게 하였다고 했다.

―이런 난세에 그런 미덕은 있을 수 없다. 제갈현은 부풀려진 풍문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서주를 지나 형주 경계에 들어설 때까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여행자들 을 보호해주고 돌아간 기마 병사들을 직접 목격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조만간에 유비라는 사람이 부상할지도 모르겠다.'

유비에 대한 인상은 제갈현에게뿐만 아니라 소년 제갈량의 뇌리에도 또렷하게 박 혔다. ‘이 같은 사람이 천하를 잡으면 살기좋은 세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공명의 선택 (53)…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5)
한 달여의 여행 끝에 제갈현 일행은 무사히 양양성에 당도하였다. 형주목 유표는 제갈현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반색하였다.
"서주 지역을 지나오는 데 위험은 없었소?" "예, 다행히 소패성의 유현덕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내어 여행자들을 지켜주는 덕 분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유현덕이라면…… 황건의 난 때 많은 공을 세웠다던 유비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인과 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인 듯싶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효웅이 태어나고 있음인가?" "그렇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갈현은 유표의 도움을 받아 양양성 안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 단 그 곳에 제갈량과 정, 균을 거처하게 하고 아내 강씨로 하여금 수시로 돌보게 했다.

제갈근과 정씨 부인이 도착하는 대로 성 밖에 따로 집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곧 뒤따라오겠다던 제갈근이 서너 달이 지나 해가 바뀌도록 당도하질 않 았다.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제갈현은 걱정이 되어 사람을 보내 양도의 소식을 알 아오게 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제갈근이 보낸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돌아왔다.

…… 별탈 없이 도착하였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숙부님과 동생들이 떠나고 난 직후 이 곳 낭야 일대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어머님도 저도 모두 자 리에 쓰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습니다. 조만간 회복되는 대로 집안을 정리하여 양양으로 떠날 계획이니 너 무 심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세상이로구나.' 제갈근의 편지를 읽어본 제갈현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길게 탄식했다. 며칠 후 그는 유표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그 때 유표는 근거지를 형주성으로 옮겨 있었다. 제갈현은 말을 타고 형주성으로 달려갔다.

"양주 일대가 심상치 않을 것 같소. 우리도 어떻게 손을 써야 하지 않겠소? 아니 면 아예 손을 떼든지." 예상했던 대로 양주 문제였다. 그 일에 관해서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손을 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좀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아직은 개입할 만 한 구실이 없습니다. 세작들의 수를 지금보다 배로 늘리도록 하십시오. 그만큼 유리 할 겁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라고는 했지만, 그 무렵만큼 형세의 변화가 극심했던 적도 드물었다. 조조가 아버지 조숭의 복수에 눈이 멀어 서주 대학살을 자행하는 사이 여포가 연 주 일대를 장악했는가 싶더니, 다시 조조의 반격에 크게 패하여 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 것은 이미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인근 백 리 주변으로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을 만큼 폐허가 된 서주에도 변화가 일었다. 서주목 도겸이 죽고 그의 유명(遺命)에 따라 소패성에 머물러 있던 유비가 새로이 서주목이 된 것이다.

조조에게 패하여 갈 곳이 없던 여포가 풀이 죽 어 서주로 찾아든 것은 유비가 서주목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비는 모 든 군웅이 냉대하던 여포를 흔쾌히 받아들여 소패에 머물게 하는 대담한 면모를 보 여주었다.

헌제가 거주하는 서쪽의 장안에도 또 한 차례 풍운이 일었다.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이각과 곽사가 내분을 일으켜 둘 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헌제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천자가 사라졌다! 이런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헌제가 돌연 낙양 근처에 나타났다. 이각·곽사의 난 을 피해 장안을 탈출해온 것이다. 이 소식은 즉각 각 지방의 군웅들 귀에 전해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헌제를 맞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섬길 마음도, 섬 길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동 땅의 조조만은 달랐다. ‘아직은 천자가 필요하다!' 그는 재빨리 군대를 낙양으로 이동시켜 헌제를 맞이했다.

헌제는 그 공을 높이 사 조조에게 영사예교위 겸 녹상서사라는 관작을 내렸다. 이 때부터 조정의 실권은 모두 조조에게 돌아갔고, 헌제는 조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뒤늦게 사태의 흐름을 파악한 원소, 원술 등은 땅을 치고 후회 했으나 이미 배는 물 건너간 뒤였다. 그 해 조조는 도읍을 허창(許昌)으로 옮겨 원소와 동맹을 맺어 북쪽의 공손찬 세 력과 남쪽의 원술, 유표 등을 경계하였다.

그 무렵, 원술은 근거지를 남양에서 수춘(壽春)으로 옮겨 북으로는 원소·조조와 대치하는 동시에 동쪽과 남쪽 일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는 먼저 욕심 많고 배신 잘 하는 여포를 꾀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는 서주 목 유비를 치게 하였다. 이 계략은 성공하여 서주성은 여포의 손에 들어갔고, 유비 는 다시 소패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는 또 양주 지역을 지배하기 위한 첫 포석으로 손책을 시켜 여강(廬江)과 단양 (丹陽) 땅을 빼앗아 유훈(劉勳)과 오경(吳璟)을 각각 여강 태수와 단양 태수에 임명 하는 세를 과시했다.

아울러 양주목 진온(陳溫)을 공격하여 죽이고 자신의 심복인 진우(陳瑀)를 양주목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 때 원소 또한 땅이 넓고 비옥한 양주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 런 중에 원술이 양주목 진온을 죽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원술의 세력을 견제할 겸 양주를 지배하려는 욕심에 자신과 인척 간인 산양 태수 원유(袁遺)를 양 주목으로 승진시켜 내려가게 했다.

"그대라면…… 진우 정도는 처리할 수 있겠지요?" "아무 염려 마십시오. 진우를 몰아내고 양주를 차지하겠습니다." 그러나 원유는 산양을 떠나 양주로 부임하는 도중 원술의 매복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패(沛) 땅으로 달아났다가, 그 곳에서 부하 병사의 손에 살해당하는 불행한 종 말을 맞이했다. 이 때문에 원소와 원술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공명의 선택 (54)…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6)
조조는 조조대로 양주목 진온의 죽음을 놓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천자의 명을 직접 받드는 조정의 실세였다. 원술이 제멋대로 진온을 죽이고 진우를 양주목 에 임명하자 여간 괘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막 허창에 도읍을 정한 터였다. 군 사까지 동원할 여력은 없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키는 대신 시어사 유요(劉繇)를 양주목에 제수하여 현지로 부임 하게 했다. 유요는 태위 유총(劉寵)의 조카이자 전 연주 자사 유대(劉岱)의 동생이 었다. 하지만 유요는 망설였다.

"원소가 보낸 원유가 부임 도중 원술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내 어찌 그걸 모르겠소. 본래 양주의 관소는 수춘에 있었소만, 지금은 원술이 자 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곳으로 부임하기는 불가능하겠지요. 장강을 건너시오. 강 아 래쪽의 적당한 곳을 차지하여 관소를 차리면 그것이 곧 양주 관소가 아니겠소. 아 마도 곡아 정도면 일을 벌이기가 쉬울 것이오. 장수 번능(樊能)과 우미(于靡)를 붙 여주겠소."

유요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황제의 명을 내세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번능, 우미와 함께 5천 병력을 거느리고 장강 남쪽인 곡아를 향해 떠났다. 원소 쪽만 경계하느라 원술은 유요의 행적을 감지하지 못했다. 유요는 먼길을 돌 아 무사히 장강 건너 곡아에 당도하였다. 그 곳은 작은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유요 는 곧 곡아에 관소를 차리고 번능, 우미를 파견하여 단양 태수 오경과 단양 도위 손분을 역양(歷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유요는 자신감을 가졌다. 새로운 인물들이 속속 그의 밑으로 몰려들었다. 조조의 서주 대학살 당시 난을 피해 그 곳으로 이주해왔던 작융(炸融)과 장영(張英)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인물 비평가로 널리 알려진 허소가 그의 관소로 찾아든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유요는 허소의 방문을 무척 반겼다. 허소는 병법에도 어느 정도 조예를 지니고 있 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유요의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

유요는 허소의 말에 따라 군사를 징집하여 이제는 수만 명에 달하는 군세를 형성 하게 되었다. 그는 동쪽의 횡강진(橫江津)과 서쪽의 당리구(當利口)에 군사를 주둔 시키고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원술 군에 대비하는 치밀한 면도 보여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원술이 그런 유요를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진우로 하여금 유요를 치게 했지만, 유요의 철통 같은 수비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였다. 진우를 해임하고 새로이 혜구(惠衢)를 양주목에 임명하여 공격하도록 했으나 혜구 역시 유요를 깨뜨리지 못했다. 그만큼 유요의 모사라 할 수 있는 허소 와 수하 장수 작융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양주 일대가 심상치 않을 것 같소. 유표가 이렇게 말한 것은 조조가 후원하는 양주목 유요와 그 탈환을 노리는 원술 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유요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길을 걸을 야심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제갈현의 말에 유표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럴까?" "유요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곡아는 조조의 본거지인 허창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굳이 그의 지시를 받지 않더라도……."

"지금의 선전(善戰)은 조조의 후원을 받아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긴 합니다만, 불교 신도들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흐음, 유요가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그다지 신경쓸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원술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요."

"원술은 어리석은 자야." 유표는 원술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해 야심이 너무 큽니다."

제갈현이 염려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은 많다. 그런 사람은 무모한 일을 곧잘 저지른다. 원술 역시 언제 무슨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 예 측할 수가 없다. 제갈현이 원술의 향후 행보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손책입니다. 호랑이 새-끼라고 할 수 있지요. 언제까지 원술 밑에서 재주 만 넘고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유요의 일에 손책이 끼여들 거라고 보는 것인가?" "유요에게 쫓겨난 단양 태수 오경은 손책의 외숙이며, 단양 도위 손분은 사촌형입 니다. 좋은 핑곗거리가 되겠지요. 그가 원술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딴은 그렇군."

"이번에 떠나면 손책은 다시는 원술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봅니다. 문제는 원술이 그러한 손책의 마음을 읽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렸겠지요." "원술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군."

"주공께서 양주 지역에 손을 쓸 것인지 뗄 것인지는 그 때 가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군."

공명의 선택 (55)…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7)
원술과 손책의 관계에 대한 제갈현의 예측은 거의 정확했다. 원술은 품고 있는 야심에 비해 정세 판단에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었다. 사실 헌 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는 원술에게 가장 먼저 날아들 었다. 그 무렵 그는 남양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낙양과는 엎어지면 닿을 거리 였다. 수하의 총명한 모사들이 권했다.
―낙양으로 달려가 황제를 맞이하십시오. 주공의 뜻을 이루는 데 한결 득이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원술은 코웃음쳤다. ―그까짓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황제를 맞이하여 어디에 쓴단 말이냐! 차라리 내 가 직접 황제가 되는 것이 낫겠다.

이 때 처음으로 원술은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 뒤 조조가 헌제를 등에 업고 탄탄한 기반을 다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후회했으니, 그의 정세 판단 능력은 가히 이러했다.

게다가 소견이 좁고 옹졸했다. 용맹이 뛰어난 손책이 수없이 많은 전공을 세웠지 만, 그는 일체 손책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지 않았다. 고을 태수 자리 하나 내주지 않았다. 자신의 품을 떠날 것을 염려했서였다.

―다음에는 꼭……. 이라고 미루면서 손책을 수춘성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양주를 비 롯한 강동 일대를 수중에 넣었으면서도 조조, 원소, 유표 등이 넘보도록 안정시키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반면에 손책은 아버지 손견을 닮아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다. 이제 그의 나이 스물 두 살. 한창 피가 끓을 시기였다. 아버지가 유표와 싸우다 돌에 깔려 비명횡사한 지 어느덧 삼 년이 지났다.

‘원수를 갚기는커녕 변변한 고을 하나 얻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 인가.' 그 동안 그가 점령한 성만도 십여 개가 넘었다. 그 때마다 원술은 손책을 수춘성 으로 소환하고 다른 사람을 태수로 임명하여 내려보냈다. 그것은 그래도 참을 만했 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양양성을 치겠다며 군사를 요청하자 원술은 일언지 하에 거절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좀더 기다려라.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손책은 실망을 넘어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어쩌랴. 아직 독자적인 길을 걸을 만한 군세를 갖추지 못한 것을.

손책은 달빛 아래 뜰을 거닐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지하에 계신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그 탄식 소리를 군리(軍吏) 주치(朱治)가 들었다. 주치는 단양 태생으로 손견 때 부터 종사관으로 따라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는 손책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백부(伯符=손책의 자)는 어찌하여 역양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외숙 오경 과 종형 손분을 구하러 내려가지 않는 것이오?" 그 한마디에 손책은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 기회에 원술에게서 떠나자.' 다음 날 손책은 원술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불초한 자식이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해 늘 한스러운 중에, 듣자 하니 또 저희 외숙 오경이 역양에서 양주목 유요에게 여간 핍박을 받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외 숙에게 의지하고 있는 제 노모가 언제 해를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 서는 제게 군사를 빌려주시어 외숙을 곤경에서 헤어나게 하여주십시오."

원술은 아직 손책을 놓아보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강용함을 경계해서이기도 했지만, 북쪽의 조조나 원소와 언제 일전을 치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요 정도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조조나 원소와 맞서기 위해서는 손책 같은 장수가 필요했다. 더욱이 병사 수가 조 조나 원소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원술이었다. 공연히 보잘것없는 유요 때문에 군사 를 분산시킬 필요는 없다, 라는 것이 원술의 생각이었다.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의 병력은 조조나 원소에 비해 약하다. 굳이 그대가 내려가지 않아도 그대의 외숙 오경은 유요를 잘 처리할 것이다." 손책은 원술이 군사 내주는 것을 아까워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다른 꾀를 썼 다.

"제 생각에도 유요는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형주의 유표 입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유표 또한 양주를 노리고 군세를 키우고 있다 합니다." "유표가?"

과연 원술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양주 땅을 비롯한 강동 일대를 손에 넣기 위 해 형주의 남부 지역을 포기한 원술이었다. 양주가 안정되면 다음은 당연히 형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유표가 먼저 양주를 넘보고 있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견제 세력으로는 지금 정도가 적당하다. 더 이상 유표 의 힘을 키워주면 원술이 그만큼 고단해진다.

"만일 유요가 유표에게 붙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목에 칼끝을 들이댄 형국이 될 것입니다." 손책은 원술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원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됐다.' 손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욕심이 많은 자는 그 욕심이 약점인 것이다. 마침내 원술의 입이 열렸다. "좋다. 역양으로 내려가라. 단, 병사는 1천 명이다. 되었는가?"

손책은 기쁨에 앞서 겨우 1천 명의 군사를 내주는 원술의 옹졸함을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다음 날, 손책은 아버지 때부터의 부하인 정보, 황개, 한당, 주치 등과 함께 1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의 역양 땅을 향해 떠났다. 그간 손책이 쌓아놓은 명성 에 비하면 여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공명의 선택 (56)…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8)
손책이 역양 땅 초입에 이르렀을 때였다. 별안간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더니 바람 처럼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긴장하여 진(陣)을 벌이려 하는데 앞선 장수의 모습이 낯익었다. 용모가 수려하고 몸가짐이 단정했다. 말 위에 앉은 채로 자세히 보니 이 게 누구인가. 어릴 적의 친구 주유(周瑜)가 아닌가.
주유는 여강의 서현 태생으로 자를 공근(公瑾)이라 불렀다. 손견은 반동탁군의 일 원으로 낙양을 향해 진군할 때 가족들을 모두 서현으로 피신시켰는데, 이 때 손책 과 주유는 처음 만났다.

둘은 동갑내기였다. 첫눈에 의기가 통하면서 날이 갈수록 우정이 두터워졌다. 손책이 주유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주유는 손책을 언제나 형으로 불렀다. 두 사람 모두 무용(武勇)과 지략이 뛰어났는데, 특히 손책은 무용, 주유는 지략에서 상대를 능가했다.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기 위해 양양으로 향할 때 손책도 참전하였으므로 두 사람 은 헤어졌다. 그 뒤 손책이 원술에게 의지해 강동의 새-끼호랑이답게 용맹함을 떨치 는 사이, 주유는 숙부 주상(周尙) 밑에서 {손자병법}, {육도삼략} 등의 병서를 읽으 며 전략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원술은 손책을 내려보낸 후 오경 대신 새로 주 상을 단양 태수에 임명했는데, 주유는 그러한 숙부에게 축하인사차 들렀다가 손책 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역양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손책과 주유는 반가운 나머지 얼싸안은 채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자네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손책이 여전히 감격에 겨운 어조로 물었다. "형님께서 양주목 유요를 치기 위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이나마 힘을 보 태려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호기에 찬 주유의 대답에 손책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내 이제 공근을 얻었으니, 모든 일을 순조롭게 성취할 수 있겠구나." 손책은 곧 수춘성에서 데리고 온 장수들을 불러 주유를 소개했다. 서로간에 인사 가 끝나자 주유가 손책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요의 형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을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장씨(張氏)를 쓰셔야 합니다." "두 장씨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한 사람은 팽성 출신의 장소(張昭)요, 또 한 사람은 광릉 태생의 장굉(張紘)입니 다. 둘 모두 서주 대학살의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왔는데, 가히 하늘을 다스리고 땅 을 움직일 만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마침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숨어지 내고 있으니 청하여 형님 사람으로 끌어들이십시오."

장소는 자를 자포(子布)라 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좌씨춘추} 등 수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여 낭야 출신의 조욱(趙昱), 동해 출신의 왕랑(王朗) 등과 함께 ‘서주의 삼학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약관의 나이로 효렴에 천거되었지만, 세상이 어지러움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서주목 도겸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불러 쓰려 했지만 장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겸은 장소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 마침 광릉 태수로 부임한 조욱이 장소를 위해 구명 운동을 펼쳐 겨우 옥살이는 면했으나, 이 일로 인 해 장소는 도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 후 조조가 서주로 침공하여 대학살 을 자행할 때 그는 난리를 피해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자를 자강(子綱)이라고 한 장굉 역시 문리(文理)에 통하고 생각이 바른 영재였다.

그는 소년 시절에 태학에 입학하여 {역경}과 {서경}을 익혔고, 그 후 진류군 외황 (外黃) 땅에 사는 복양암(僕陽闇)이란 사람에게서 {시경}과 {예기}, {좌씨춘추} 등 을 배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관부의 초빙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 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서주 대학살 때 강동으로 피신한 사람이었다.

주유로부터 두 사람에 대한 신상을 상세히 들은 손책은 매우 기뻤다. 그는 그 길 로 말머리를 돌려 장소와 장굉이 숨어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친히 몸을 낮추고 예를 다하여 함께 일할 것을 청하자 그들도 감복하여 허리를 숙이고 손책을 도울 것을 맹세했다.

손책은 곧 장소를 장사(長史)로 삼고 장굉을 참모로 삼아 함께 유요를 칠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공명의 선택 (57)…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9)
양주 일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세작들에 의해 속속 유표에게로 전해졌다. "역시 원술은 손책을 품에서 내보냄으로써 어리석음을 드러냈구려." "양주 일대는 당분간 어지러움에 빠질 것 같습니다."
제갈현은 세작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분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원술의 품을 벗어나 역양으로 내려온 손책은 군사 수는 비록 적었지만 정보·황 개·한당 등 역전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데다가 새로이 주유·장소·장굉 등의 참모진들이 가세했다.

이에 비해 양주목 유요는 허소가 참모 역할을 수행할 뿐 이렇다 할 전략가를 거 느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수 역시 작융·번능·장영 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에게 는 수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있었다.

―전력은 반반이다. 제갈현은 이렇게 단정했다. "양주 외곽부터 서서히 손을 쓰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양주 외곽이라면……?"

좀처럼 모험을 하지 않는 유표도 점차 양주 땅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형주와의 접경 지역이라면 예장(豫章) 정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장은 파양호(播陽湖)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 고을이었다. 우연인가. 그 때 세작들 로부터 또 하나의 정보가 날아들었다.

……예장 태수 주술(周術)이 도적을 토벌하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에 허창 의 조조는 천자에게 상서하여 주호(周皓)라는 사람을 예장 태수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수춘성의 원술은 아직 예장군의 공백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유요 역시 손책의 침공에 대비하느라……

그 소식에 유표도, 제갈현도 놀랐다. 예장에서 일어난 일을 북쪽의 조조가 형주목 유표보다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진 것이다.

"조조는 참으로 무서운 자로구나." 예나 지금이나 정보는 곧 힘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다른 지역의 군웅보다 한 발 앞섰다고 보아야 옳았다. "하지만 아직 늦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갈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슨 뜻인가?"

"예장은 우리 형주와 가까운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허창에 있는 주호가 예장에 부임하려면 먼 길을 가야 합니다만, 우리는 뱃길로 가면 오래 걸려야 닷새 입니다. 주공께서 먼저 예장 태수를 임명하여 임지로 보내면 예장은 저절로 우리 형주 땅이 될 것입니다. 작은 싸움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대군을 파견하는 수고로 움은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주술의 죽음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건가?" 유표는 제갈현을 쳐다보며 눈을 끔벅였다.

"지금까지 세작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원술도, 유요도 예장 따위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조조가 파견한 주호인데, 그 정도라면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곳으로 부임하려 들까?" "제가 가겠습니다. 병사 2천 명만 딸려주십시오. 예장을 형주 땅으로 만들어놓고 오겠습니다."

"그대가 예장 태수로 부임한다? 자신 있는가?" "재주는 미치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예장을 다스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곧 떠날 채비를 갖추게."

헌제 즉위 이후 각 고을의 목(牧)이나 태수 임명은 황제의 손을 떠난 것이나 다 름없었다. 실력 있는 지방의 군벌들은 조정의 의사와 상관없이 스스로 목이나 태수 자리에 올랐고, 주변의 고을 수령 자리는 자신의 심복 부하들을 임명하여 내려보냈 다.

이도 저도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땅은 먼저 손 쓰는 자의 차지였다. 부임하는 사 람이 둘인 곳은 싸워서 이기는 자가 주인이었다.

―나도 이제는 태수를 임명할 만큼 기반을 잡았다. 유표가 제갈현을 예장 태수로 임명한 것은 그 자신 또한 천하 다툼에 적극적으로 끼여들겠다는 야심 섞인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북(北)은 조조와 원소, 남(南)은 유표와 원술! 이것은 곧 제갈현이 구상한 천하 다툼의 구도이기도 하였다.

공명의 선택 (58)…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10)
제갈현은 예장으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조조가 임명한 주호는 이미 허창을 출 발했을 것이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 가족들은 모두 양양에 남겨두기로 했다.
"자리가 잡히는 대로 데리러 오마." 조카 제갈량과 정, 균을 불러놓고 말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소 골머리를 앓 았다. "저도 예장으로 가겠습니다."

제갈량이 한사코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 제갈량은 고향 양도를 떠나 형주로 오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시체가 쌓여 썩는 지옥 같은 땅도 지나 왔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부호들의 삶도 보아왔다. 각기 느낌이 다른 넓은 강, 높 은 산을 대하면서 그는 점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상은 참으로 넓구나.' 옛 성현들의 학문과 경륜을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천문과 지리 등을 익 히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가능한 한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보리라, 결심했다.

"숙부님의 일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막무가내의 고집에 결국 제갈현이 졌다. "하긴 강남 땅을 두루 돌아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겠지. 네 형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겠다."

"형님께는 제가 벌써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양양으로 오지 말고 곧장 예장으로 오셔서 빨리 숙부님의 일을 도와드리라고 말입니다." 제갈현은 제갈량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이는 어렸 지만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귀인의 상이다.' 하지만 얼굴을 보기 위해 눈길을 제갈량에게 고정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놈이…… 내 마음을 읽고 있구나.'

제갈현은 지금 무엇보다도 제갈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작든 크든 한 고을 의 태수는 막중한 자리다. 봉록 2천 석이 아닌가. 그만큼 책임감이 뒤따랐으며, 할 일도 많았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현을 다스려야 했다.

그 고을이 풍요로우냐, 빈곤하느냐는 온전히 태수의 능력에 좌우되었다. 한 사람의 힘만으로 태수 직을 수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이 필요하다.' 제갈량은 그 적임자로 형인 제갈근을 천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백 면서생인 제갈근을 위해서라도 제갈현의 예장 태수 부임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숙부에게는 도울 사람을 제공하고, 형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한다. ‘이런 것을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겠지.' 제갈량이 굳이 자신을 따라 예장으로 가겠다고 고집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강남의 경관을 두루 구경하고…… 약은 놈이로군.' 그러나 어쨌든 좋은 일이었다. 제갈현은 어린 조카 제갈정과 균을 아내인 강씨에 게 부탁하고 양양을 떠나 예장으로 향했다.

공명의 선택 (59)…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11)
예장군의 군 소재지는 지금의 강서성 남창(南昌)이었다. 관영성(灌瓔城)이라고도 불렀다. 한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건국공신이 되었던 관영이 쌓은 성이기 때문이었 다.
성 서쪽 옆으로 감강(紺江)이 흐르고 있고, 그 강물은 파양호로 흘러들어간다. 파 양호는 동정호 절반 크기의 담수호로서, 당시에는 팽택(彭澤)이라고도 불렸다. 동정 호도, 파양호도 모두 장강을 본 줄기로 하고 있다.

제갈현은 양양을 흐르는 한수를 타고 강하까지 내려가 장강에 이른 뒤, 그 곳에서 다시 시상(柴桑)을 거쳐 파양호로 들어가는 뱃길을 취해 임지인 예장에 도착하였다. 멀리 서쪽으로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위엄있게 솟아 있다. 그 여산 너머가 형주 땅인 장사이다.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로군요." 예장 땅에 발을 내디딘 제갈량의 첫 소감이었다. 하지만 제갈현은 그 소감에 동조 하지 않았다. ‘조만간에 이 곳에도 피바람이 몰아칠지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조조가 임명한 또 한 명의 예장 태수가 조만간에 이 곳에 당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호가 순순히 물러가 준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 겠지만.

"자를 문명(文明)이라고 했던가?" 제갈현은 이미 주호에 대해 알아보았다. 무척이나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했다. 기 어코 성내로 들어와 관소를 차리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싸움인가요?"

제갈량이 물었다. "그렇게 되겠지." 제갈현은 서둘렀다. 그는 성내에 관소를 차리자마자 군사 모으는 일에 착수했다. 형주에서 2천 명의 병사를 데려오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명분 이 아니라 힘으로 성의 주인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호라는 사람의 병력부터 탐지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요?" 집을 떠나오면 성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갈현의 허둥대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그대로 투시된 때문인가. 제갈량은 자꾸 끼여들었다.

제갈현은 언짢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침착하자.' 후방에서 병참을 관리하는 일은 익숙했지만, 자신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사방으로 첩자들을 내보낸 지 얼마 안 있어 주호의 동태가 그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육로로 여강까지 와 이제 막 파양호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병력은?" "병력이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군 관리를 포함하여 도합 2백 명도 안 된다고 합니 다."

제갈현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조는 주호에게 병력을 딸려보내지 않았 던 것이다. ‘역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정치적 행동일 뿐이었던가?' 며칠 후, 주호가 파양호를 건너 예장성 밖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부임하 여 고을을 다스리고 있는 제갈현의 2천 병력 앞에 얼굴빛을 바꾸고 달아나다시피 허둥지둥 예장을 떠났다.

‘이로써 피바람은 면했다.' 제갈현은 본격적으로 예장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곡아를 둘러싼 장강의 동쪽 지역에서는 손책과 유요의 싸움이 한창이었 다. 조조로부터 양주목에 임명되어 곡아로 내려온 유요는 생각보다 쉽게 양주 일대를 손에 넣게 되자 은근히 딴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쯤 되면 나도 천하 패업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군웅의 한 사람으로 자리잡았다는 자부심이 가슴 가득히 일었다. 그러할 때 손책 이 장강을 건너 자신의 지역으로 침공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이 감히…….' 그는 이제 스무 살이 갓 넘은 손책을 깔보았다. 군사를 이끌고 우저영(牛渚營)으 로 들어가 진채를 세웠다. 부장 장영이 유요를 찾아가 말했다. "제가 먼저 나가 손책의 예기를 꺾어놓겠습니다."

유요가 승낙을 하고 군사를 내주려는데, 또 한 장수가 들어오며 외쳤다. "제가 장영 장군의 선봉이 되어 싸우겠습니다." 유요가 돌아보니 얼마 전에 새로이 막하로 들어온 태사자(太史慈)라는 아장이었 다.

공명의 선택 (60)…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12)
태사자는 유요와 같은 고향인 청주의 동래 태생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황건의 난 때였다. 당시 태사자는 청주목의 미움을 사 요동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북해 태수 공융이 그의 어머니를 잘 보살펴주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공융은 군사를 거느리고 도창(都昌)이라는 곳에 출동하였다가 도적 관해(管亥)에게 포위당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마침 태사자는 요동에서 돌아와 동해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태사자의 어머니가 태사자를 불러 말했다.

―너는 북해 태수를 뵌 적이 없겠지만, 그 분은 네가 없는 동안 나를 친어머니처 럼 보살펴주었다. 듣자 하니 지금 공 태수가 도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한다. 너 는 마땅히 달려가 그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 말에 태사자는 혼자 걸어서 도창까지 갔다. 어둠을 틈타 성 안으로 들어간 그 는 공융이 평원의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원했다.

―제가 가서 유현덕 공에게 구원병을 청하고 오겠습니다. ―도적들이 이중 삼중으로 에워싸고 있는데, 저들을 뚫고 평원까지 갈 수 있겠는 가? 그대의 뜻은 장하지만 공연히 아까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자 태사자가 다시 공융에게 말했다.

―과거에 태수께서는 제 노모를 잘 보살펴주셨습니다.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 다 하더라도 이제 그 은혜를 갚으려 하니, 태수께서는 그 일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리하여 태사자는 관해의 포위망을 뚫고 유비에게 달려가 구원을 청했고, 그 덕 분에 공융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태사자에 대한 소문은 유요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 는데, 얼마 전 수하 장수 작융이 태사자를 데리고 와 천거하였다. ―태사자의 용맹은 가히 하늘을 뚫을 만합니다. 대장군으로 임명하면 큰 일을 도 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융의 말에 따라 유요는 그를 대장군에 임명할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허소가 반 대 의사를 비쳤다. ―태사자는 결코 유양주(劉揚州=유요)를 오래도록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허소가 누구인가. 인물 비평의 대가가 아닌가. 유요는 작융보다는 허소의 말을 믿 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태사자에게 정찰 임무를 맡겼다.

그런 태사자가 자원하여 선봉에 서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용맹으로 본다면 충분히 선봉장에 임명할 만도 했으나, 자신을 오래 섬기지 않을 거라는 허소의 태사자에 대한 평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대는 적군을 정찰할 임무를 띠고 있지 않은가? 이번 싸움에서는 빠지게." 유요의 말에 태사자는 머쓱하여 뒤로 물러났다. 장영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저탄으로 나가 손책의 군사를 기다렸다. 손책 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그 곳에 당도했다. 병력은 고작해야 3천 명. 장영은 가소로웠 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장영은 군사 수만을 믿고 호기 있게 쳐들어갔다. 한참 혼전을 벌이는데 별안간 장 영의 후방이 어지러움에 빠졌다. 군량 창고에 불이 난 것이다.

장영은 놀라서 불난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이것이 군사들의 눈에는 도망가는 것 처럼 비쳤던 모양이다. 앞을 다투어 창칼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책의 군사들이 진격하니, 장영은 대패하여 산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첫 싸움에 패한 유요는 장영을 크게 꾸짖은 후 단양현 신정(神亭) 남쪽으로 군사 들을 물려 진을 쳤다. 원래 장영의 후방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사람은 수춘 태생의 장흠(蔣欽)과 하채 (下蔡) 출신의 주태(周泰)라는 장사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장강 일대를 무대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는 수적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큰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손책이 강동의 호걸들과 어진 선비들을 초빙하고 받아들인다는 소 문을 듣고 졸개 3백여 명을 이끌고 손책의 진영으로 향했다.

마침 손책과 장영이 혼전중이었다. 그들은 장영의 후방이 텅 빈 것을 보고 급습하 여 군량 창고에 불을 질러 장영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손책의 대승을 유도 한 것이었다. 손책은 장흠과 주태를 만나보고 크게 기뻐했다. 두 사람 모두 군전교 위로 삼아 그들의 공에 보답했다.

잠시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어느 날, 손책은 잠깐 조는 사이 광무제(光武帝)가 조칙을 내리는 꿈을 꾸었다. 깜 짝 놀라 깨어난 손책은 이상하게 여기고 그 곳 토박이 주민을 불러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광무제와 관계되는 유적이 있느냐?" "예, 유요 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고개 바로 남쪽에 광무제를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 다."

공명의 선택 (61)…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13)
손책은 주민에게 상을 주어 돌려보낸 후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었다. "주공은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새로이 장사에 임명된 장소가 물었다.
"낮에 잠깐 조는데, 광무제를 뵙는 꿈을 꾸었소이다. 이상하여 토민에게 물어보니 고개 남쪽에 광무제의 사당이 있다질 않소. 그래서 그 곳에 가 기도를 하려는 것이 오."

"안 됩니다. 그 곳은 유요 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입니다. 복병이라도 만나신다면 어쩔 작정이십니까?" 그러나 손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손에는 창을 들고 말에 올랐다.

"정보·한당·황개·장흠 등은 뒤를 따르라!" 모두 해서 13기(騎)뿐이었다. 고개를 올라 남쪽으로 얼마간 달리자 과연 광무제의 사당이 나타났다. 말에서 내려 분향하고 절한 후 기도하였다. 한편, 태사자는 자신을 써주지 않는 유요가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했 다. 공연히 유요의 진영에 몸을 맡긴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도 일었다. 그 때였다. 자신의 유일한 부하인 정찰병이 달려오며 외쳤다.

"신정 고개 위의 사당에서 손책이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호위 군사는 13기뿐입 니다." 그 말에 태사자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하늘이 내게 공을 세우게 하는구나."

갑옷과 투구를 걸친 채 나는 듯이 말 위에 올라탔다. 단숨에 고개 위를 올라 사당 으로 들어갔으나 손책은 이미 떠난 뒤였다. 아직 향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떠 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태사자는 다시 말머리를 돌려 손책의 진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과연 얼마 가 지 않아 열댓 명의 말 탄 무리가 보였다. 그는 힘껏 외쳤다. "손책은 달아나지 마라!"

난데없는 외침소리에 손책과 그 장수들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적장 하나가 창을 비껴들고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도 뒤따르는 군사는 없었다. 그제 야 마음을 놓은 손책 등은 창을 꼬나든 채 반월형으로 그 장수를 에워쌌다.

"누가 손책이냐?" 여러 장수들에게 에워쌓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사자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손책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내가 손책이다마는, 너는 누구냐?" "나는 동래 사람 태사자이다. 특별히 손책을 잡으러 달려왔다." 태사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창을 들어 곧장 손책을 향해 찔렀다. 손책도 그런 태사 자에 맞서 역시 창으로 응수했다.

두 사람은 곧 한데 어우러져 싸웠다. 누가 끼어들고 자시고 할 틈도 없는 접전이 었다. 창과 창이 맞부딪쳐 50여 합이 넘었으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곁에서 이를 보고 있던 정보·황개 등 손책의 부하 장수들은 마음 속으로 두 사람의 무예 솜씨에 은근히 감탄하였다.

한 순간, 태사자의 날카로운 창이 손책의 명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앗!" 손책의 부하 장수들 입에서 다급한 외침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보아도 창끝을 피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역시 손책의 무예 솜씨도 강동의 호랑이라고 일컬어질 만했다. 손책은 재 빨리 자신의 창을 버리고 맨손으로 태사자의 창자루를 움켜잡아 낚아챘다. 그 바람 에 몸의 균형을 잃은 태사자가 말 위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실력이었다 면 단신으로 손책을 잡겠다고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사자는 말에서 떨어지는 중에도 힘을 늦추지 않고 손책을 향해 덮쳐들었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동시에 말에서 떨어졌다. 이제는 창도 필요 없었다. 맨손으로 치고 막고 엉키고 뒹굴고 하였다. 갑옷이 뜯 겨나가고 투구끈이 끊어져나갔다. 손책이 땅에 깔린 태사자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수극(手戟)을 뺏어 찌르려는 찰나, 태사자 역시 손책의 머리에 씌어 있던 투구를 벗 겨 막아냈다.

그 때 저편 숲속에서 함성이 일었다. 태사자가 단신으로 손책을 잡으러 갔다는 보 고를 받고 유요가 뒤늦게 1천 여 군사를 보낸 것이었다. 다급한 것은 손책과 그의 부하 장수들이었다. 손책은 재빨리 태사자를 멀리 밀쳐버리고 정보가 붙잡고 있던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태사자라고 했던가? 다음에 다시 보자!" 이렇게 외치고는 13명의 부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람처럼 그 곳을 떠났다. 유요의 군사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지친 태사자만이 숨을 헐떡거리며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손책의 은빛 투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 었다.

다음 날이었다. 손책이 먼저 군사를 움직여 유요의 진 앞으로 나갔다. 유요도 군 사를 거느리고 그에 맞섰다. 양 편 군사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이 전날 빼 앗은 태사자의 수극을 긴 장대 끝에 매달고 나와 외쳤다.

"태사자는 어디 있느냐? 여기 네 수극이 있으니 가져 가거라." 이에 질세라 태사자도 손책의 투구를 들고 나와 큰 소리로 응수했다. "손책의 머리가 여기 있다. 머리를 두고 달아나는 놈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허소의 말만 듣고 태사자를 냉대했던 유요는 어제 비로소 그의 용맹함이 어느 정 도인 줄을 실감했다. 그가 곧 태사자에게 출전의 명을 내리려 할 때였다. 유성마 한 필이 나는 듯이 달려와 유요 앞에 이르렀다.

"손책의 부하 주유라는 자가 곡아를 급습하여 성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곡아는 양주목의 관소를 차려놓은 곳이었다. 유요의 근거지나 다름없었다. 유요가 손책과 싸우기 위해 그 곳을 나오면서 진무(陳武)에게 성을 맡겼는데, 그가 배신을 했다는 것이다.

공명의 선택 (62)…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14)
유요는 눈앞이 아뜩하여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일지 않았다. 군사를 물려 진문을 굳게 닫아건 채 곡아를 탈환할 궁리만 하였다. 손책은 손책대로 유요가 싸울 생각을 않자 군사를 시켜 몇 번 욕설을 퍼붓게 하 고는 심드렁하니 자신의 진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이었다. 모사 장소가 가만히 손책 에게 말했다.
"유요가 싸우지 않는 것은 곡아가 주유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지금 돌아가 곡아를 탈환할 궁리만 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밤 진채를 기습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손책은 장소의 말을 옳게 여기고 곧 군사를 다섯 길로 나누어 야습을 감행했다. 한밤중에 별안간 물밀듯 밀려드는 손책의 군사를 보자 유요의 군사들은 싸울 마 음을 잃고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유요는 이미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 을 알고 서둘러 단도성을 향해 달아났다.

태사자 역시 아무리 용맹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혼자 힘으로 그 많은 군사를 당 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간신히 수십 기만을 거느린 채 무호(蕪湖) 방면으로 달아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당연히 유요를 찾아 단도성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산 속에 머물면서 스스로 단양 태수라 칭하다가 손책에게 사로잡 혀 그의 사람이 되었으니, 인물 비평의 대가 허소의 말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어떤 지.

단 한 번의 야습으로 유요의 본진을 깬 손책 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손책은 곧 번능이 지키고 있는 말릉(抹陵)을 공격하여 일거에 함락시키고, 이어 작 융이 수비하고 있는 현성마저 격파함으로써 유요를 오갈데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

유요는 우울했다. 양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향해 이제 막 날갯짓하려는 참에 강동 의 풋내기 손책에게 어이없이 한 방 맞은 것이었다. ‘패배의 이유가 무엇일까?' 손책을 너무 깔본 것이 아닐까, 그런 반성이 일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강동에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손책과 맞서리라는 결의를 다진 것 은 현성을 수비하던 작융이 손책에 의해 단도성으로 쫓겨들어온 직후였다. 다행히 작융은 군사를 거의 잃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곡아에 입성한 손책은 장병들을 위로하는 한편, 여러 현에 포고령 을 내렸다고 했다. ―유요의 부하였던 자들이라도 항복하면 일체 예전의 죄를 묻지 않겠다. 종군을 원하는 자는 군대에 편입시킬 것이요, 원하지 않는 자는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 이런 포고령이 내린 지 보름이 채 안 돼 2만 명이 넘는 투항자가 생겨났다고 했 다.

"민심부터 추스리려는 수작이군." 그러나 작융의 군대만은 투항자가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 그가 거느린 군사들은 대부분 불교 신자들이었다. "결속력이 그만큼 강한 것이지요. 듣기로는 생사까지 초월할 정도라더군요." 유요의 막하에서 빈객의 예우를 받고 있던 허소의 평가였다.

"작융의 군사 1만 명에, 유정예(正禮=유요의 자)가 거느린 군사 3만 명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겝니다. 문제는 터전이겠지요." 허소의 말에 유요는 다시 힘이 솟는 듯했다.

"절강(浙江) 방면은 어떻겠소?" "절강이라면 엄백호(嚴白虎)가 다스리는 회계(會稽)·동야(東冶)를 말씀하시는 건 지요?"

절강 일대는 월(越)나라 때부터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군웅쟁패의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이었다. 그만큼 전쟁의 피해도 적었다. 그 곳으로 피신하여 터를 잡 고 힘을 기르자는 것이 유요가 그 동안 생각해낸 복안이었다. 허소는 인물 비평뿐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밝았다. 그런 그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소. 살기 좋은 땅이라고 들었습니다." 유요는 눈으로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허소는 잠시 고개를 외로 꼬며 생각에 잠겼다. "좋은 땅이지요.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이 유요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그런데요?" "회계는 바다와 면해 있습니다. 만일 손책이 회계까지 추격해온다면 더 이상 피신 할 곳이 없습니다."

결론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유요는 마음이 흔들렸다. 태사자가 무호에서 단양 태수로 자칭하다가 손책에게 투항한 이후 그는 허소의 말을 더욱 신뢰했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겠소?" "바다 쪽보다는 내륙이 좋겠습니다만……"

그 때 당직 장교가 들어와 바깥 일을 전했다. "주호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주호라면 문명(文明=주호의 자)이 아닌가? 허도에 있어야 할 그가 여기까지 웬 일인가?"

공명의 선택 (63)…제5장 강동에 부는 바람 (15)
유요는 그 때까지도 주호가 예장 태수로 임명되어 내려왔다가 제갈현에게 쫓겨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온 주호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유요에게 상세히 말한 후 덧붙였다.
"그냥 이대로 허창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게 군사 2천 명만 빌려주시면 제 갈현을 예장에서 내쫓아버리겠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유요 자신도 손책에게 패해 어디로 몸을 피할 것인가 고심하는 중 아닌가. 누구를 도와줄 마음이 생겨날 리 없었다. 유요가 난처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옆 에서 주호의 말을 듣고 있던 허소가 슬며시 귀뜸했다.

"예장이라면 깊은 강과 높은 산을 끼고 있는, 가히 요새라 할 만한 지역이지요. 군사를 보내 도와주심이……" 순간, 유요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이 기회에 예장으로 들어가 군세를 기를 근거 지로 삼으라는 허소의 암시를 어찌 유요가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제갈현이라고 했소?" "예." "어떤 인물이오?" 유요의 반응이 긍정적인 것을 보고 주호는 힘이 솟았다.

"낭야의 양도현 사람으로 그 형은 태산군 승을 지냈다고 합니다. 제갈풍의 후예로 한때는 명망이 높은 집안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그런 모양입니다. 형주목 유표의 심 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허소는 문득 서주를 떠나오기 전 한 주점에서 만났던 제갈 성을 지녔다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내도 태산군 승을 지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갈현이란 사람은 바로 그 사내의 동생이란 말인가?'

원한도, 은혜도 없는 사람들끼리 피를 보며 싸워야 하는 시대―이러한 시대를 난 세라고 하던가. 비정함도 아니다. 잔혹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살아야하겠다는 집념. 어느 누가 그것을 탓하랴. 그저 운명이랄 수밖에. ‘난세에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

그런 그의 얼굴 위로 전에없이 쓸쓸한 빛이 스쳐갔다.





<공명의 선택> 6장 예장별곡 [1]
<공명의 선택> 4장 전란에 휘말리다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sigi
연구소 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 무단수집 거부  |  고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