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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론2003-08-22 23:42:32
 낙양조자건


━───── 목차(目次) ─────────────────────────
  ① Ⅰ.들어가기에 앞서
  ② Ⅱ - Ⅰ.조조의 전반적 생애 1
  ③ Ⅱ - Ⅱ.조조의 중반적 생애 2
  ④ Ⅱ - Ⅲ.조조의 후반적 생애 3
  ⑤ Ⅲ - Ⅰ.제왕의 기지를 타고난 인물
  ⑥ Ⅲ - Ⅱ.유교(遺敎) 오상(五常)
      └→ 인(仁)/ 의(義)/ 예(禮)/ 지(智) · 신(信)/
  ⑦ Ⅳ - Ⅰ.승자 조조와, 패자 원소.
  ⑧ Ⅳ - Ⅱ.강인함도 매력이다
  ⑨ Ⅴ - Ⅰ.조조의 문학적 지약
  ⑩ Ⅴ - Ⅱ.조조의 아들
  ⑪ Ⅵ.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⑫ Ⅶ.맺으며
───────────────────────── 목차(目次) ─────━


Ⅰ.들어가기에 앞서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무엇인가 반드시 넘어가야 할 고비가 있고, 그에 대한 방치 자세가 있는 법이다. 더욱이, 난세를 극복하는 시대상에서는 확고한 후한말에 규칙들이 엄하게 감시될 것이며, 진행될 것이며, 이루어질 것이다. 인물론. 즉 인물을 논하는 본인으로써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인물을 품격을 점지어 보는 높이와 각도에 따라 평판이 천차만별 달라질 것이다.

한낱 장수에서 본 그를 제후로써, 군자로써의 면들로 보았을때 그의 평판은 천차만별 달라질 것이다. 더군다나 인물론의 별미, 능력치를 그의 입장에서 살려낸다면 정치면 정치, 병략이면 병략, 문학이면 문학. 대래 방면에서 두루두루 실력을 고루 갖춘 인물이 조조라는 것을 어림 짐작 할수 있다. 더욱이, 조조는 인물을 다루는 재주가 비범하지 않는가?

삼국지를 읽었거나, 혹은 읽고있는 사람들 중, ‘조조’ 의 인물격을 상세히 파악하지 못하였다면, 삼국지를 재해번 읽음으로써 그 인물의 성품과 역사적 열전을 독파하여 보는 시간을 마련해 보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흔히 조조를 말하자면,「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험담을 들먹이고 토론 사료로써 많이 쓰곤 한다. 그런데,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이 험담인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역시 보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위에의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은 점술가 관로가 조조의 관상을 평해 낸 것인데, 무엇의 사유로 인해「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이라 단절 판명 하였는지가 본인의 의구심을 고조 시킨다.

평소에 조조를 연구하신 분들이나, 의구점을 낳는 혹자분들. 삼국지 매니아라 칭컬시는 분들께서도 위와 같은 평을 내렸을지에 대해 의구점은 지니고 계셨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조조라는 인물을 논하면서, 여러가지의 타입으로 그를 평할 수 있겠지만, 본인은 특별히 조조의 능력에 점수를 높히 산다. 그러므로, 치중한 타입은 능력이다.

그는 군자의 제목이 충분히 있었고, 난세의 영웅이라 평가받을 수도 있다. 더욱이 능력을 위주로 상세히 논해 보겠다. 더욱이, 중요한 타입들 밖게의 세부략 적인 차원에서 전체적인 그를 흠모하며 평해보겠다.


Ⅱ - Ⅰ.조조의 전반적 생애를 알아보자 [1]

「-시기/조조의 태어남과 동시에, 하진의 직속부하일 때까지. 」

태조 무황제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자는 맹덕이다. 전한 때 상국을 지낸 조참의 후예로 환제 때 조등은 중상시와 대장추를 지냈으며, 나중에는 비정후에 봉해졌다. 훗날 후한 헌제를 폐위시킨뒤 국호를 위로 하여 황제를 찬탈한 문제 조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제하후조전을 보면, 조조의 성씨에 약간의 오류라 볼 수 있는 허구점이 있다. ‘조조는 하후씨 인가, 조씨인가?’ 하후돈과 하후연을 친족이라 보면서 조인과 조홍, 조휴를 친족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의문인 점이 있다. 더욱이, ≪정사≫「무제기」에서는 조조의 친족이 하후씨라는 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니, 혹자분들의 비난을 여러차례 받아왔다. 배송지의 주에서는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하후씨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배송지의 주에 기록에 의하면, 하후씨는 조조와 친족관계가 된다. 정사에서 이를 언급하지 못한 이유는, 진수의 오류가 있었다고 봐야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역사사실로 따져볼때 알수 없는 것이 있다. 조조와 조인과 조홍은 친척관계인가?아직도 알수없는 미스테리이다.

─ 조조의 능력 고찰

조조의 능력을 고찰하여 보았다. 옛 고사에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라는 말이 있다. 훗날 조조가 성인이 되었을때, 마음속 야심찬 포부심이 갑작스래 치솟은 것은 아닌지라, 그의 어렸을 적의 성품을 담은 자료를 발췌해 보았다.

〔 조조는 어려서부터 기지와 총명함과 권모술수가 있었으며, 의협심이 강하고 멋대로 놀기를 좋아해,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을 등한히 했다. ─ 정사 무제기 〕

위 자료의 ≪정사≫「무제기」와 같이, 조조는 남을 교묘히 속이는 잔꾀가 그 도를 지나칠 만큼이나 능하였고, 타인의 억울함은 사건에 묘미하게 얽매어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통 일반인이 그러듯 조조 역시, 분명 일생에 강압적으로 압박되어 눌려졌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포부를 키워 나갔을 수 있다고 가름해 볼 수 있다. 두마디로 쉽게 풀자면 ‘그는 분명 어렸을 적에도 야망이 있었고, 사내답게 포부가 기등하였다.’ 하지만,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을 등한히 했다.” 이 대목은 어렴풋 잡아 조조가 패거리의 시절을 보내며, 친구들과 오랫동안 지내며 알려진 성품이라 점 찍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으로는 ≪정사≫「무제기」에서 이렇게 저술하고 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직후, 기주자사 왕분, 남양 사람 허유, 패국 사람 주정등이 호걸들과 연합하여 영제를 폐위시키고 합비후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조조에게 알렸지만, 조조는 그런 제의를 거절하였다. ─ 정사 무제기 〕

그가 후한말 벼슬길에 나선 직후는 동한말 이며, 그때의 그는 효렴으로 승격 되었다. 쉽게 생각하기로는, 벼슬길 자체의 시점에서 자신의 능력 보다는 어떤이의 천거가 가까웠다고 생각 할수 있다. 그리고 하진의 소속 부하로써, 후한 영제를 보필하였다기 보다는, 대장군 하진의 휘하 장수로써 하진만을 보필하였다, 가 좀더 확고하며 옳은 판단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그렇지만, 본 뜻으로는 하진은 영제를 보필하는 신하이기 때문에 조조는 영제를 보필하다, 에 부합된다. 이로써 혹자분들의 의문을 낳았으면 한다) 혹자들은 조조라는 인물이 한 제후의 휘하 장수격으로써도 적합하다 생각하는가?사실상, 그가 하진을 보필하였을 당시에는 ‘인정을 받는 날보다는 박하게 무시당하는 날이 많았다.’ 이는, 그의 군욕 야심을 더욱더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Ⅱ - Ⅱ.조조의 중반적 생애를 알아보자 [2]

「-시기/하진의 직속부하일 때부터, 승상이라는 직책의 대우까지. 」

환관 십상시에 대장군 하진 암살사건. 정확한 사실을 ≪정사≫「무제기」에서 참조하면,

〔 대장군 하진은 원소와 환관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지만, 황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진은 곧 하동태수로 있던 동탁을 불러들여 태후에게 협박하려 했는데, 동탁이 낙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환고나들에게 살해되었다. ─ 정사 무제기 〕

하진이 십상시의 일원에게 살해된 이래에, 조조는 ‘시대’에 적응을 못하였다. 그러다 자신의 진로를 갈망 하다, 다시로 하여금 초야에 묻히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그의 인생관을 점쳐 볼 때 야심찬 그의 행각에서 포기의 절정이었을까?그게 아니라면, 아직도 혈성왕기한 사내로써 야심찬 야망이 남아 있었을까?주관적인 대화에서 본인은, ‘아직 야심을 잃지 않았다.’ 고 단절 가장 지어 보고싶다. 아직 그에게는 삶에 쓰디 쓴 실패라는 것이 없었고, 그 당시(하진이 암살된 당시)나이도 30대 중반기였다. 때문에 더욱이 군욕 야망의 기운이 내심 가슴속에서 들끓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조의 입장에서는 외롭지 않게, 말동무가 다수 있지 않았던가?후에, 조조 외 17명의 제후가 연합하여, 동탁의 세력을 토막내려한 사건 역시, 그에겐 친족과 벗이 있었기에 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분명 의지할 사람이 두루 여럿이 있었다. 어찌보면, 조조는 강인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냉철한 눈빛. 어쩌고 보면 카리스마(Charisma)를 갖춘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카리스마의 정의는 무엇인가?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을 말하지 않는가. 정의에 합당하여 위로 보면 공자의 자질은 물론이고, 아래로 보면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조조는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능력과 노력에 빚어져 그의 아우와 사촌, 조카등(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조휴 등)과 함께 세력을 키워나갔다. 후에 제후라는 직책에 당당히 입권되고, 후에 헌제를 이각과 곽사에게로 부터 구해낸 그는 승상 이라는 황실의 어른에 속하는 직책에 책봉 되었다. 이것은 조조로는 적당한 헌제의 대우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Ⅱ - Ⅲ.조조의 후반적 생애를 알아보자 [ 3 ]

「-시기/승상이라는 직책의 대우부터, 그의 임종까지. 」

당시의 군웅할거의 영웅이라 자칭하며, 속사의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원소, 원술, 여포, 유표등을 평정함은 대단한 진과라 볼 수 있다. 그는 사람을 다루는 말재주도 능숙한 대다가, 명석한 두뇌로써 냉철히 병력을 다룬다. 하지만, 조조에게도 일생의 고비가 있었다. 당시 원소와 원술과 여포를 정벌한 직후, 조조는 손권이 손견 손책을 이어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었던 강남에 눈독을 들였다. 전략상으로 보아 강남을 얻는다면, 쉽게 형주를 얻을 수 있으며, 형주를 얻으면 익주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후한의 민심 안정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조는 위군이 전쟁에 휘말리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의 책략을 생각하였다. 오군 손권에게 신하가 될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더욱이, 오군 내부에서는 분쟁이 일어났다. 이를 ≪정사≫「오주전」에서 진수는 이렇게 저술하고 있다.

〔 (중략)이때 조조는 방금 유표의 병력을 얻었으므로 형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손권의 많은 모사들은 모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 하였으며, 대부분 손권에게 조조를 맞아들여 항복하도록 권유했다. 오직 주유와 노숙만이 조조에게 저항할 것을 주장하여 손권과 뜻을 같이 했다.(중략)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에서 맞부딪쳐 조조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후략) ─ 정사 오주전 〕

위에 자료는 오군의 모사와 무사가 대립하는 과정도 짧막히 보여준다. 그러나 논지는 왜 주유와 노숙만이 조조에게 저항할 것을 주장하였을까?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모사와 전술가측에 포함되는 것으로써, 파가 각각 있지 않는가?주유와 노숙은 필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조는 계속하여 승승장구 하던 차에, 강남까지 그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손씨가 대업을 다시 도모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북방민족은 수전에 약하지 않는가. 강남은 수전에 유리한 지역이다.’ 이 생각들은 본인의 생각일지 몰라도, 후에 그들의 업적과 일치한다. 결국 조조는 이 책략에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조는 강남을 평정하기 위해 친히 대병을 이끌고, 배를 수리하는 작업 따위를 하였다. 하지만 수전에서 연환계에 걸린 조조는 화책응(火策應)으로 인해 유비·손권 연합에 깨져 버렸다.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그의 실패 요작은 무엇일까?첫째, 북방 민족의 위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했다. 위군은 산악 지형에서 바다와 같은 큰 물줄기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지형적인 요건으로 조조는 아직, 그러하다 라는 수전에서의 어책을 몰랐고, 확실히 오군은 위군 보다는 수전에 강하였다. 손쉽게 방통의 연환계에 넘어간 이유도 그러하다 볼 수 있겠다.(조조가 우둔한 것이 아니라, 대처할수 있는 수전 지식이 부족했다.)

위군이 적벽에서 오군에게 대패한 직후, 조조의 세력은 잠잠하였다, 후에 조조는 북방의 어지러움을 안정시키는데 후한 헌제에게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영웅도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전쟁의 참혹함과 자신이 이로운 살인을 하였다는 이유로나마, 꿈속에서까지 병마로 지내다 끝내 220년이 되던 이래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렇다. 영웅도 사람인 것이다. 당시 영웅 조조. 아니, 영원한 패자 조조가 시대에 이렇게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흔적도 없이·····. 어쩌고 보면, 삶의 종점이 이르렀을때 그 일생을 돌이켜 본다면 부질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조를 보았을때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기억이 남을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놓아줄수 있지 않을까?


Ⅲ - Ⅰ.제왕의 기지를 타고난 인물

간략히 제왕의 조건이라 함에 본인의 생각을 문장으로 적어보겠다. 더하여, 조조가 부합되는 여건까지···. “ 제왕이라 한다면 필부의 행각처럼 예절을 알아야 하며, 신하의 행실을 옳고 가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 정치를 도모할 수 있다. 딱 잘라서, 간단히 *황제라 하여 제왕이라 칭할수는 없을 것이다.(*군자/영웅) 왜냐, 포악하기 포악하다면 포군으로 이를 것이거니와, 결과가 뻔한 전쟁에 출전하여 자국의 병사와 군량만을 축낸다면, 그 또한 제왕이라 칭송 할수 없다. 더군다나 제왕은 잠시 머무는것이 아니다. 비롯이 제왕은 어렸을적에도 비범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로 위에의 사항을 조합되는 인물이 본인으로 생각된다. ” 그럼, ≪정사≫ 무제기에서 발췌한 말귀를 보자.

〔 (조조가 말하기를)“나는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반란군을 정벌하였고 지금 19년이 지났는데,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어찌 나 개인의 공로이겠는가?이는 곧 현명한 사대부들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아직 완전하게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현명한 사대부들과 함께 그들을 평정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공로의 대가를 한 사람이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시급히 공로를 결정하여 봉작을 행하라.” ─ 정사 무제기 〕

이는 건안 12년(207) 조조가 원씨를 정벌하고 순우에서 업성으로 도착하였을 당시 조조가 전하였던 말이다. 사소히 조조의 말귀를 들추기는 이유는, 이 말귀가 조조가 능력을 노골히 과시하는듯 하여도 얼듯,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을 다스리는 말재주 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신하들로 하여금 관직에 연연하지 못하게 하는 속뜻도 있으나 자신을 도와 정벌의 뜻을 담겠자는 큰 뜻이 있다. 아무리 필부라 할 지라도 조조의 이와 같은 말을 들었을 경우에 그 충의심을 상승될 것이다. 군대의 사기(士氣) 또한 마찬가지 이다. 본인의 짧은 생각으로, 치세의 능신이라 불리는 조조가 군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꾸며낸 말귀 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조조의 행각에 흡족한다. 왜냐?진정 그는 치세의 능신이였기 때문이다.


Ⅲ - Ⅱ.유교(遺敎) 오상(五常) ─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유교의 오상은 일반인에게도 적용되는 방침이나, 제왕의 기지로 살펴보았다.

/ ㉠ 제왕의 조건, 인(仁)

제왕의 첫번째 조건, 인(仁)은 남을 덕으로써 사랑하는 것을 말할수 있다. 대다수, 조조가 제왕의 기지에 큰 조건에 포합되어 있는 인(仁)이 부족하다고 보는 혹자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한 인물에 대하여 가려져 있는 그의 은실함이다. 흔히 유비가 인자로움을 두각해 내면 독자들은 유비를, 마음이 너그롭다 한다. 하지만 본인은 생각한다. 유비는 아리송송한 인(仁)으로 하여금 여러 인재를 속여왔더라고, 그도 분명 제왕의 기지를 타고난 점이 없지는 않다. 어찌 보면 유비는 인(仁)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조조와는 다른면의 소유자인 것이다. 유비가 사람을 끌여들이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조조는 강인한 카리스마(Charisma)로운 인덕을 가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찮게도 유비와 조조를 비교해 보았으나, 이는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시킨 경우이니 오해는 말라. 여튼, 조조는 강인한 면모의 인(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 ㉡ 제왕의 조건, 의(義)

제왕의 두번째 조건, 의(義)는 자기 스스로 지켜야할 도리를 뜻한다. 옛말에 이러한 말이 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답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
위의 옛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인간으로써의 도리를 지켜야 즉, 인간이라는 사상.(유교(遺敎)의 오상(五常)과 일치한다.) 조조는 늘상 스스로 이를 염두해 놓았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하였던가?하지만, 그의 행색을 보면 그의 마음을 쉽게 엿볼수 있다.

〔 “나는 폭력과 혼란을 제거하려고 천하를 위하여 정의의 군사를 일으켰다. 옛 땅(고향 초현)의 백성들은 대부분 사망했고, 나라 안에서 온종일 걸어다녀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통하고 상심해 있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병의 경우 죽어 후사가 없으면 친척을 찾아내어 뒤를 잇게하고 땅을 나누어 주고 관가로부터 농사짓는 소를 지급받으며, 교사를 두어 그 자식에게 교육시켜 주도록 하라. 뒤를 이을 사람이 있는 자에게는 종묘를 세워 그 선인들을 제사지낼 수 있게 해주라. 만일 죽은 자의 영혼이 있다면 우리가 사후에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 이어서 조조는 준의현으로 가서 수양거(운하 이름)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희생을 받들어 교현에게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나아가서 관도에 진을 쳤다. ─ 정사 무제기 〕

위에 ≪정사≫「무제기」와 같이 선인들의 제사를 짓게하는 유교의 범위에서 합당하며 사상의 정당한 말을 하였고, 이를 실천하였다. 과연 이 역시 신하의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 조조가 간략한 속임수 이나마 이용한 것일까?아니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선(善)하게 잉태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배경과 대인관계에서 틀어질 수 있는게 바로 사람의 됨됨이다. 위에 ≪정사≫ 무제기에서는 조조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고, 병자와 병사들과 함께 하는 어진 군자였다. 여기서 의(義)에 기본 자세만을 갖추었다면 그 사람은 제왕의 조건 의(義)에 합당하는 사람이다. 고로, 위의 주장과 일치함에 의해 조조는 의(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 ㉢ 제왕의 조건, 예(禮)

제왕의 세번째 조건, 예(禮)는 사람이 지켜야할 규범을 뜻한다.
「 ¶ 규범;사물의 본보기. 모범. 규모. 전경(典經). ─ 다음(Daum) 국어사전 」

혹자분들은 간혹 생각하기를, ‘조조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협을 괴롭혔으니 그는 예(禮)에 어긋나는 인사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기지에는 덜 떨어짐이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라. 당연, 본인은 이 주장과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자 생각해 보자. 동탁이 변을 퇴하고 협을 황제로 강제즉위 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초반에 그도 황제의 자리를 넘볼만큼의 소유자는 아니였다. 단지, 무능한 유변이 하진의 누이 하태후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유협을 제친것에 대한 반상 이였다. 물론 하늘같이 만백성의 칭송을 떠받고 있는 아버지(황제)를 폐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유변은 무능한 것이지 악(惡)의 폭정을 선택하지 않았다. 동탁의 시각으로 볼때는 그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것이다. 그러나, 왜 후에 황제 자리를 넘보게 되었는가?당시 동탁의 나이 60대 후반. 늙은 원로들이 조정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 나이 즈음 되었다면 원로중의 원로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욕(慾)이 절정에 수치에 넘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직이 높을 수록 신하는 충성하기 마련이지만, 정상의 자리에서 직책이 올라간다면, 누구나 쉽게 악한 마음을 먹기 마련이다.” 동탁은 승상이면서 상부(황제의 아버지)라는 후한(後漢)의 최고라 할만한 권력(정권, 병권)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본심이다. 이제 조조를 보자. 조조가 황실의 원로 동승을 암살하고, 헌제(유협)의 황후 동태후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이것이 조조가 황제 에게 품고 비수를 건넨 것인가?역시 타당치 못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까닭으로써는 동승 암살 실패작이 있다. 동승은 어떻게 어떠한 사유로써 조조를 암살하려 하였을까?조조가 패권을 가지고 황제에게 무력을 행사해서?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써 잘못이란 말인가. 조조는 결코 황제의 자리를 넘보이는 자세를 노골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역시 황제를 암살하려 도모하지도 않았다. 아직까지는, 단지 조정의 맏이 이며 황실을 보존케 하는데 발생된 고조된 갈등이라고 본다. 조조가 황실을 모욕하였다 할 지라도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을 살려둔다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한 법. 시대에 조조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조조와 그들의 갈등이다.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튼, 황실에 들어오면서 부터, 임종할 때까지, 후한에 충심을 다 받쳤다. 이로써, 조조는 예(禮)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 ㉣ 제왕의 조건, 지(智)와 신(信)

제왕의 네번째 조건, 지(智)는 사람이 본되 지니고 있는 지혜와 슬기이며, 제왕의 다섯번째 조건, 신(信)은 사람이 본되 가지고 있는 진심을 말한다. ‘Ⅱ - Ⅰ. ’ 장에 언급해 왔듯이, 조조는 어려서부터 기지와 총명함을 갖추었고 권모술수가 있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고 지혜로써 인물간의 갈등을 풀어주었다. 이와 같이, 조조는 사건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였다. 여기서 조조가 가지고 있는 본된 진심도 그러할 것이다. 자신으로 하여금 갈등의 진행을 해소시켜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후에도 이러한 지혜로움을 확실시켜 준다. 그 대목으로는,

〔 (조조가  말하기를)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지만 지혜는 적소. 겉모양새는 엄하지만 속마음은 겁이 많소. 질투심이 강하고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면서도 위엄이 적소. 그의 병사들은 많지만 부서가 마땅치 못하고, 장수들은 교만하며 명령에도 일관성이 없소. 비록 토지가 넓고 양식이 풍부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받들게 될 것이오.” ─ 정사 무제기 〕

사람을 다스릴줄 알며,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성품을 꿰뚤수 있는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혜가 아닐런지 생각해 본다. 원소의 이러한 상황과 성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위와 같이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렇다. 조조는 위의 유교 오상을 두루 겸비한 제왕의 기질이 있었다. 아니, 제왕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군자에서 그를 평한다면 지(智), 덕(德), 체(體)장중 지장에 적합한 인물일 것이다.


Ⅳ - Ⅰ.승자 조조와, 패자 원소.

후한 영제 시절부터, 삼국분열까지의 역사가 대략 55여년 이라 칠때, 사상자도 많으며 규모도 대체로 큰 전투를 따져볼 수 있다.「 하비전투. 관도대전. 형주전투. 적벽대전. 이릉전투. 남만정벌. 」등이 있다. 이번 주제를 독자분들께서 잘 읽어보셨다면, 이번 세부 파트, 조조와 원소와의 마지막 최대의 격전 관도대전에 승자와 패자를 말하려 한다. 전쟁에서 패자를 거론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는 패자의 이름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바로, 조조와 원소.

당시 조조는 여포를 쳐서 멸하고(하비전투), 유비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그 기세는 초반 거병때 보다 남달랐고 그만큼 성장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후들은 협상하에 모의를 하여 전쟁을 자주적으로 치루는 것에 의해, 세력의 숫자도 전보다는 줄어 들었음은 사실이다. 따라서 패권을 잡는 실권자가 뚜렷하게 생기게 되고, 똑같은 층의 세력끼리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이 중 하나가 조조와 원소이다. 당시, 원소는 공손찬을 멸하고 기주를 평정함으로 인해 기주를 포함한 북방에 최고단수에까지 이르렀다. 더하여 원소군에 무장으로는 안량. 문추. 장합. 고람 등이 있었으며, 문장으로는 저수, 심배, 전풍, 봉기 등이 있지 않는가?자원까지 충분히 갖춘 원소군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물질적 여건에서 조조는 원소보다 불리하였다. 그러나 어떠하였는가?조조는 원소 정벌을 고집하여 계획을 달성하지 않았던가?그렇다. 물질적인 수보다는 정신적인 강인함이 더욱더 시대에는 요구를 한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훗날의 화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소란 대상은 그가 중원의 패자가 되는것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조조는 시대적인 흐름에 대응하여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데다가 융통성이 있는 반면에, 원소는 어느 한가지를 몰두 할 수 없는 유우부단한 성격이기 때문에 세력을 경영하는것에 있어도 문제점도 천차만별 달랐다. 역시, 장수를 다루는 그들의 방식도 크게 달랐다. 조조는 여러 장수의 의견을 존중하여 수렴하려 노력하는 반면, 원소는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방식면에서 조조가 원소를 능가했기 때문에 시대는 원소의 타입보다는 조조의 타입을 선호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전쟁에서까지 조조에게 패배한 원소는, 성품에 차이에서도 조조에게 패배한 것이다.


Ⅳ - Ⅱ.강인함도 매력이다

혹자분들은 유비와 같은 인자함과 부드러움이 매력이라고 생각하시는가?인자함이 매력에 속하다고 봐야 하는지, 매력이 인자함에 속한다고 봐야하는지, 현대인들은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현대에서 요구하듯 유비형의 매력은 하속층에게 크게 선호를 받는다. 어떻하여, 조조의 강인함의 매력은 주위사람들의 시선에 매료시킬수 없는 것일까?강인함도 매력이다. 인자함도 매력이다. 사람을 휘어잡을 만한 능력이 있는 자. 그는 군을 통솔하는 것에도 성공한 것이다. 강인한 카리스마가 하속층을 크게 억압하지는 않는다. 윗사람이 강인해야 아랫사람이 약하지 않으며, 문제를 염려하지 않는다. 이를 보았을때, 조조는 유비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어쩌고 보면, 현대인의 눈을 매료시킬만한 능력은 인자함보다는 강인함이라고 볼 수 있다.


Ⅴ - Ⅰ.조조의 문학적 지약

조조의 분야는 군사와 정치이다. 더욱이 그는 후한말의 장군이다. 그러나, 문학적 지식도 상당히 풍부하였다. ≪다음(Daum)≫「백과사전」에서 증거 자료를 발췌해 보면,
〔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두 아들 조비·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을 가져오게 하였다. ─ 다음 백과사전 〕

자신의 아들 조비·조식과 함께 건안문학의 흥륭을 가져왔다는 대목을 봐서, 시문의 능력이 능통하였다고 사실을 점지어 볼 수 있다. 여러가지의 사실이 있겠지만, 오군과의 대전을 앞을 두고 뱃목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읇는것. 동작대에 올라 시문을 직접 낭독하고, 한시대회를 해마다 치루는 광경. 단순히, 취미생활로써 시문을 활동한 것이라면 그의 능력이 의심될 정도이다. 보통 한시는 여러차례의 수정을 거듭하여야 좋은 평판을 받을수 있다. 조조는 갑작스래 요청한 것이나, 자신의 스스로 지은 시를 자연스래 낭독함으로 인해, 좋은 평은 물론이고 시문이 요구하는 내용까지 좋아 문학의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조조가 실현적으로 시를 지어내어, 주위사람의 칭찬과 함성 우뢰를 들었다는 것은 후세에 들어 놀랍지도 않다.


Ⅴ - Ⅱ.조조에 아들의 문학적 지약

대개, 인물을 논할때, 붕(朋)·신(臣)·자(子)를 잘 본다. 시대에 주위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고, 이를 바탕으로 인물을 손쉽게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子)’ 조조의 아들 두명에 문학적 능력을 고찰해 보았다.

 ─ 둘째아들, 조비 자환

〔 조비의 자는 자환(子桓)으로 조조의 둘째아들이다. 조비는 시가와 문학에 능하였으며 업하 문학집단의 영수이다. 그의 학술 저작인 <전론(典論)> 가운데 <논문(論文)>은 중국 문학사와 문학 비평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비는 사언, 오언, 칠언, 잡언체등 각종 시체의 작품을 지었는데, 이 작품들에 간거하고 고통스러운 군사생활을 반영하였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하려는 정치적 이상과 국민에 대한 동정이 표현되어있다. 특히 사부(思婦)시가 잘 되었는데, 그중 <연가행(燕歌行)> 두 수는 문인 칠언시중 초기의 것으로 칠언시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내용의 범위는 좁지만 예술적 성과는 비교적 높다. 조비의 산문 가운데 <오질
에게 보내는 편지(與吳質書)>가 있는데 서간체 서정문으로서 잘된 작품이다. ─ 삼국지 넷 〕

위에 자료는 건안시기의 조비의 문학적 고찰을 보여준다. 당시에 문학이 예술로써 평판 받는 이유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건안칠자와 경릉팔우 등의 단체가 판을 칠 시기가 대략 170 ~ 220 년. 후한 시대와 삼국 시대에 중복된다. 더욱이, 후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고, 위나라를 세운 조비로써 문학에 대한 비중이 컷다는 것은, 문학이 꽃 필 무렵이라는 시대상을 근접적으로 알려준다.

조비(187~226) (1) 공융(153~208), (2) 왕찬(177~217), (3) 완우(?~212), (4) 서간 (171~217), (5) 진림(?~217), (6) 유정 (?~217), (7) 응창 (?~217) 이들 건안칠자의 일곱명의 현인과 쉽게 즐겼으며, 시적인 정보를 주고 받았다는것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 시대에 문학이 이렇듯 발전하게 된 의의에는 몇가지 요인을 살펴볼수 있다. 첫째, 유교의 쇠미와 함께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의 영향으써 ‘공용주의적 문학관’이 ‘개인주의적 문학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둘째, 종이가 발명되어 글을 작문하기가 쉬어졌고, 작품도 쉽게 유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문예창작을 전업으로 하는 문인들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건안칠자(建安七子), 경릉팔우(景陵八友) 등 문인집단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조비의 문학적인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조비의〈논문(論文)〉는 중국사상의 최초에 문학이론으로써 의의를 두고 있다. 시대와 조비의 문학적 관념을 들추어 보았을때, 유교의 문학관념 보다는, 유학의 문학관념을 위주로 순수관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문학이론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비의〈논문(論文)〉이 현대적 역사에 크게 미치는 영향은, 두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당시의 문학 비평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비평하였고(자신의 이점만을 이용하여 남의 시문을 깔보는 태도를 비평), 당시 작가의 작품을 평론하며 조비의 견해를 담았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아직까지, 문학 평론가는 없었다. 따지고 본다면, 중국 사상의 문학 평론가 1호는 조비가 되는 셈이다.

 ─ 넷째 아들, 조식 자건


〔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로 진(陳)왕으로 책봉받았다. 시호를 사(思)로 추상하였기에 후세에 그를 진사왕(陳思王)이라 부른다. 조비는 황제가 된 뒤, 조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 한 수를 짓지 못하면 참수하리라 하였는데, 조식이 응락하고 일곱 발자국을 채 걷기 전에 시 한 수를 지어 바쳤다는 일화가 있다. 이른바 칠보시(七步詩)가 그것이다. ─ 삼국지 넷 〕

삼국지 넷 에서 발췌한 조식의 시문에 대한 자료이다.(위 자료에 오류가 있다.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이 아닌, 넷째 아들이다. 조앙⇒조비⇒조창⇒조식⇒ … ) 문제 조비와 진왕 조식은 한 어머니의 자식이다. 배 다른 형제보다, 친형제의 정이 원만해야 정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비와 조식. 이 둘의 어린시절에 그리 순탄한 나날만 있지는 않았다. 조비는 아우 조식이 아버지인 조조의 부러움을 산 것이다.

「 콩을 삶는데 콩짚을 땐다, 콩은 가마 속에서 운다/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거늘, 서로 삶기를 어이 이리 재촉하는고.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조식의 시가는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건안 25년(220년. 조조사망)을
경계로 전, 후기로 갈라지는데 전기 시가는 공로를 세워 보려는 웅심과
나라일을 근심하는 호매로운 기개가 충만한 것이 특징이다. 전기 시가의
대표로 백마편(白馬篇)이 있다.


백마편(白馬篇)

금굴레 쓴 백마타고 / 나는 듯 서북으로 달리네

묻노니 뉘집의 자손인고 / 유주병주의 유협남아라

어려서 고향을 떠나 / 변새에서 이름 떨쳤거니

하냥 양궁을 손에 잡고 / 호시도 많이 지녔더라

활 당기면 왼쪽 과녁 깨어지고 / 오른쪽 월지과녁 부서지네

손을 들면 날랜 원숭이 쏘아잡고 / 몸 굽히면 말굽과녁 박살난다오

원숭이보다 민첩하고 / 표범보다 날래어라

변성에 급한 일 많노니 / 호기침노 잦고 잦아서

우격이 북에서 날아오네 / 말을 채질해 높은 둑에 오르노라

흉노를 짓뭉개며 내달리고 / 선비를 눌러서 외로 돌보네

칼 끝에 몸 맡겼으니 / 목숨을 돌볼소냐?

어버이도 못 돌보는데 / 처자를 운운하랴

장사적에 이름 있으니 / 사사를 돌보지 못하리

국난에 몸 바치어 / 죽음도 돌아가듯 하노라



白馬飾金羈 連翩西北馳

借問誰家子 幽幷游俠幾

少小去鄕邑 揚聲沙漠垂

宿昔겸良弓 약矢何參差

控弦破左的 右發催月支

仰手接飛유 俯身散馬移

狡捷過후猿 勇剽若豹리

邊城多警急 虜騎數遷移

羽檄從北來 歷馬登高堤

長驅蹈匈奴 左顧凌鮮卑

棄身鋒刃端 性命安可懷

父母且不顧 何言子與妻

名編壯士籍 不得中顧私

捐驅赴國難 視死忽如歸


조식은 국민의 질고를 반영하는 작품도 얼마간 썼다. <희우(喜雨)>,
<태산양보행(泰山梁甫行)> 같은 시가 그 예이다. 그 외에도 <칠애(七哀)>,
<원가행(怨歌行)> 등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반영한 시도 있다.
조식의 시 가운데 공명을 떨쳐보이려는 것이 전기의 내용이라 하면, 후
기 창작은 통치계급 내부의 아귀다툼과 자신의 자유 갈망이 주요 내용
이다.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 <우차편(우嗟篇)>, <증백마왕표(贈白
馬王彪)>등이 있다.


야전황작행(野田黃雀行)  높은 나무에 바람이 세차고, 바닷물에 물결이 드높다네/날선 장검 못 쥐고서, 벗은 많아 무엇하리/새매를 본 울밑 참새, 그물에 날아드네/참새 본 그물임자 기뻐하건만, 참새 본 소년은 슬퍼하면서/검을 뽑아 새그물 잘라버리니, 참새는 푸르르 날아가누나/푸른 하늘 헤가르며 날아예다가, 내려와 소년에게 인사를 하네  高樹多悲風 海水揚其波/利劍不在掌 結交何須多/不見籬間雀 見요自投羅/羅家見雀喜 少年見雀悲/拔劍소羅網 黃雀得飛飛/飛飛摩蒼天 來下謝少年

조식은 시가 창작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오언시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세련된 언어, 아름다운 사조, 정연한 댓구, 내용과 필법의 통일 등의 점에서 조식의 시는 형식미가 충분히 갖추어 졌다. 그런 면에서 조식의 시는 건안문학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조식은 사부와 산문에서도 뛰어났다. 산체대부에서 서정소부로 이행한 흔적을 보여주는 <낙신부(洛神賦)>는 낭만주의적 수법으로 낙수신에 대한 연모의 정을 나타내었다. <구자시표(求自試表)>, <양덕조에게 보내는 편지(與揚德租書)>, <다시 오계에게 보내는 편지(與吳季重書)> 등은 조식 산문의 대표작으로 언어가 아름답고 기세가 호방하며 내용이 충실하다. 조식은 <시경>과 악부시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발전시켜 아름답고 풍부한 시가로 오언시의 발전을 추동하였고 건안풍골(建安風骨)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후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Ⅵ.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아직 미정.

Ⅶ.맺으며

아직 미정.

━───── 자료 출저 및 도움 주신분 ────────────────────

※ 자료 출저;삼국지 사전. 역사 자료실(파성). 『三國志』의 영광(Daum 카폐).
       삼국지 고증학.삼국지 넷. 다음(Daum) 백과사전 및 국어사전.
※ 작성에 도움주신 명함;천공하후패(정삼연), 견초(파성), 육손(컴온), 법정(컴온)

* 정삼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0-07 15:45)

덧글 1개
 낙양조자건 운영자님. 수고로우시겠지만.... 이 글을 보신다면, 삭제해 주십시요. 정말,죄송합니다. 2003/08/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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