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연 :: 동호회


정삼연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자유게시판
 치기 어린 시절에 남겨...
 sbs 야구병법
 EBS 세계견문록 삼국지...
  EBS 세계견문록 아틀...
 정원기 소장와 함께 떠...
공지사항
 중화TV 삼국지 덕후 콘...
 sbs 야구병법
 EBS 세계견문록 삼국지...
  EBS 세계견문록 아틀...
 정원기 소장과 함께 떠...

삼국지 해제의 글 중2003-06-03 00:43:05
 천공하후패


삼국지 해제의 글 중 '위 황제 명제 조예는 원희의 아들인가.'에 대한 반론글.

서동훈씨, 김운희씨, 장정일씨 이 세분이 공저로 발간한 '삼국지 해제(출판사 : 김영사'란 책이 있다. 그곳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 보이는데 바로 '위 황제 명제 조예는 원희의 아들인가.'라는 주제로 쓴 글이다. 이 글은 다섯가지의 근거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 근거라는 것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설득력있고 사실과 같아 보이나 사실은 사료의 짜집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된다. 그로므로 필자의 수준에서 최대한 반론을 하려한다.  

첫번째 근거에 대한 반론.

『첫째, 조예(曹睿)의 탄생시기(誕生時期)에 관한 문제이다. 조예(曹睿)는 205년에 태어났고 원희(袁熙)는 207년에 사망하였다는 점이다. 조조(曹操)가 원담(袁譚)을 죽이고 원희(袁熙)를 공격한 것은 205년 말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원희(袁熙)는 아내인 견씨와 부부(夫婦) 사이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조조가 업도(鄴都)를 함락한 것은 204년 가을이었는데 이 때 조비가 견씨와 결혼했다면 조예가 205년 출생할 수 있지만 정사『삼국지』에는 이 부분에 관한 기록은 없다. 설령 조비(曹丕)가 견씨와 204년 겨울에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조예가 205년 출생한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사『삼국지』위서「무제기」에는 204년 음력 8월 “조조는 원소 진영의 수도인 업도(鄴都)를 함락하고 원소(袁紹)의 묘(墓)에 가서 제사(祭祀)를 지내고 원소의 부인을 위로했다”는 것만 기록되어있다. - 삼국지 해제』

정사에서는 황후 견씨와 문제(조비)의 만남의 시기는 문소견황후에 분명히 기록되어있다. 견씨는 원희가 유주자사로 임명되었던 199년에 원희와 별거하여 시어머니와 함께 기주에 남아있었고 그 후 조조가 기주를 함략한 204년에 문제와 만나 그의 아내가 되었다. 문소견황후에 버젓이 남아있는 기록을 왜 무시했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좀더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원희는 유주자사로 있으면서 원상과 원담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이 후에 판도가 급격히 변하면서 원희는 기주로 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예의 임신기간이 5년이나 걸리지 않은 이상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번째 근거에 대한 반론.

『둘째, 조비(曹丕)가 자신의 장자(長子)에 해당하는 조예(曹睿)를 싫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비가 조예(曹睿)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사『삼국지』위서「명제기(明帝紀)」에 따르면 조조(曹操)는 조예(曹睿)를 매우 사랑한 반면, 위 문제 조비(曹丕)는 조예를 싫어했다고 한다. 조비는 서씨(徐氏)의 소생인 경조왕(京兆王) 조례(曹禮)를 후사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장자인 조예를 오랫동안 태자로 세우지 않았다. 조예는 거의 스무살이 되어 조비(曹丕)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태자로 봉해지게 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정사『삼국지』위서「명제기」에는 조예(曹睿)의 생모인 견씨(甄氏)가 조비에게 주살(誅殺)되었으므로 조예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견씨가 죽은 것은 221년으로 그 때 조예(曹睿)의 나이는 16세이다. 그렇다면 조비는 자신의 제위 기간 동안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삼국지 해제』

정사에서는 황후 견씨가 죽은 이유에 대해서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문제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에 많은 부인들을 거느리면서 평소 깊이 총애했던 견씨에 대해서 소홀했기 때문에 견씨가 그것을 시기하여 문제를 원망하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비록 간략하게 나와있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견씨가 다른 부인들을 시기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때문에 그녀를 죽였고 그녀의 아들인 조예를 태자로 세우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폐출되거나 강등된 황후 혹은 비의 자식을 태자로 세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조비가 죽을 때 조예에게 제위를 양도한 것은 그가 태자로 세워졌을 시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신하들의 반발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점은 문제가 죽기 전에 당시 실권자였던 진군, 조진, 사마의에게 조예를 부탁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문제가 조예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배송지의 주에 의한 것으로 이 의견을 가만히 보면 말이 맞지가 않다. 문제가 정녕 조예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왜 견씨가 죽은 이후 총애를 받았던 곽황후에게 조예의 양육을 맡겼으며 왜 그에게 후사를 맡겼겠는가. 오히려 이 부분에 사리에 맞지 않다.


세번째 근거에 대한 반론.

『셋째, 조예(曹睿)의 용모는 조비(曹丕)와는 달리 용모가 수려하였다는 점이다. 정사『삼국지』위서「명제기」에는 조조는 조예(曹睿)의 용모가 수려함에 흐뭇해하면서 “나의 기반은 너에 이르러 3대째가 된다”고 조예에게 말하곤 했다. 물론 조예(曹睿)의 용모가 모계인 견씨(甄氏)를 닮았을 수도 있다. - 삼국지 해제』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주석은 '풍모'이다. 즉 풍채와 용모를 동시에 일컷는 것이다. 풍채라면 조비도 매우 수려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점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이 원희와 무슨 상관인가?


네번째 근거에 대한 반론.

『넷째, 조예(曹睿)가 자신의 후사로 삼은 조방(曹芳 : 231-274)의 문제이다. 조예는 조방(曹芳)의 출생에 대하여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조방(曹芳)이 종친(宗親)의 아들이었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조예(曹睿)가 죽은 후에라도 조방이 자신의 생부(生父)․생모(生母)에 관해 침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조예가 견씨(甄氏) 일족의 여인과 사통을 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손(孫)이 귀한 상태에서 조예가 그것을 숨길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 여인을 후궁(後宮)이나 황후(皇后)로 삼으면 되는 일이다. 정사『삼국지』위서「제왕기」에서는 조방(曹芳)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궁중의 일은 비밀(秘密)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조방(曹芳)의 즉위 칙서(勅書)에는 “나는 보잘것 없는 몸으로 대업을 계승했으나 혈혈단신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누구에게 말할 상대조차 없도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보면 조방(曹芳)은 원희(袁熙)의 후손(後孫)으로 견씨(甄氏) 집안의 친척들 가운데서 양육(養育)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조방(曹芳)은 원희(袁熙) 집안의 숨겨진 아이일 수 있다. 즉 전란이 발생하자 원희(袁熙)의 가족들은 대부분 몰살(沒殺)당했겠지만 원희(袁熙)의 아들 중 일부가 안전한 외가인 견씨(甄氏)의 집안에 양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39년 조방(曹芳)이 8세를 전후로 하여 제위에 오르는 것으로 보아 살아남은 원희(袁熙)의 아들의 아들, 즉 원희(袁熙)의 손자(孫子)일 가능성이 있다. - 삼국지 해제』

이 역시 정사에서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진수는 위국의 황실에 대해서 감옥과 같다고 말한다. 국토를 부여받았기는 하나 실질적인 실권이 없어서 평민남자와 같았고 여러가지 금기가 있어 행동의 제약도 따랐으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시켰다고 한다. 이는 배송지의 주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다.

이점으로 보아도 조방와 조예가 비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조예의 용모를 신하들이 보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에 조방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원희의 손자이기 때문에 숨긴게 아니라 위궁내부의 일이 비밀이기 때문에 궁성의 일에 대해서 무지했던 신하의 입장으로서 본 견해라고 해석해야 옳다. 사실상 진수의 입장에서 이 일을 어찌 알겠는가.


다섯번째 근거에 대한 반론.

『다섯째, 조예(曹睿)․조방(曹芳)은 모두 견씨(甄氏) 가문과의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정도의 긴밀도(緊密度)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예(曹睿)는 자신의 외조부였던 견일(甄逸)의 가문에 대해서는 끔찍이 아끼고 보호하였다. 이것은 조방(曹芳)대에 이르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견일의 가문은 견일(甄逸)-견상(甄像)-견창(甄暢)-견소(甄紹) 등으로 이어질 동안 조예(曹睿)․조방(曹芳)의 부자(父子)는 이들에 대해 철저히 지원하였다. 조예(曹睿)가 외가(外家)인 견일의 집안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썼는가하는 점은 정사『삼국지』위서 후비전「문소견황후전(文昭甄皇后傳)」에 상세히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오히려 견씨 가문이 왜 외척세력(外戚勢力)으로 성장하지 못했는지가 의심이 될 정도이다. 조예가 견씨 집안과 함께 했던 가장 극적인 일은 조예(曹睿)는 자기가 사랑했던 딸 조숙(曹淑)이 죽자 이미 죽은 종손(從孫) 견황(甄黃)과 영혼결혼(靈魂結婚)을 시키고 열후(列侯)에 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방(曹芳)은 견씨 집안의 딸을 황후로 맞았다. 조방(曹芳)의 비(妃)였던 견씨는 243년에 황후로 책봉되어 251년 죽을 때까지 조씨 집안과 견씨 집안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삼국지 해제』

이 부분에 대한 것은 너무 큰 과대해석이다. 조예는 자신의 생모였던 견씨의 가문 뿐만 아니라 자신을 길러준 곽씨의 가문에 대해서도 깊은 총애를 하였다. 명제가 즉위한 이후에 곽후를 황태후라 하고 곽후의 사촌 오빠인 곽표를 안양정후에 봉하고 오래지 않아 그를 경후로 승진시켰으며 식읍을 더하였고 중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게다가 곽표의 아들인 곽상과 곽훈을 기도위에 임명했고 이미 죽은 곽후의 아버지인 곽영을 안양향경후로 추증했으며 곽후의 어머니인 동씨를 도향군으로 추증했다. 게다가 곽후의 언니가 죽자 그녀를 위해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룰려다가 곽태후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으니 곽씨에 대한 총예가 얼마나 깊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꾸준한 배려를 했으니 더 할말은 없다.

이 부분은 모든 황후의 씨족에 대해서 같은 맥락으로 비슷한 대우를 했다. 명제의 황후였던 모황후의 집안에 대해서도 그렇고 곽황후의 집안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굳이 견씨의 집안에만 이러한 후대를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다섯가지 근거 모두 사료를 고의적으로 짜집기 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독자의 눈을 속이는 행위이며 다른 사료에 대한 검증을 하지 않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필자가 할 수 있는 수준내에서 반론을 해보았다. 많은 고수분들의 질책을 바라며 도움도 바란다.
* 정삼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0-07 15:45)

덧글 2개
 희지재 훌륭해^ㅡ^ 2003/06/04 10:06 
 난세간웅 ↑ 이 양반한테 문자로 이런 주장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 2003/06/06 09:06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green
연구소 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 무단수집 거부  |  고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