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연 :: 동호회


정삼연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자유게시판
 치기 어린 시절에 남겨...
 sbs 야구병법
 EBS 세계견문록 삼국지...
  EBS 세계견문록 아틀...
 정원기 소장와 함께 떠...
공지사항
 중화TV 삼국지 덕후 콘...
 sbs 야구병법
 EBS 세계견문록 삼국지...
  EBS 세계견문록 아틀...
 정원기 소장과 함께 떠...

알렉산더, 케사르, 칭기즈칸이 동시대에 함께 등장하였다2003-09-24 07:59:29
 유긴


    알렉산더, 케사르, 칭기즈칸이 동시대에 함께 등장하였다



손책은 알렉산더에 비견할 영웅이었다고 하면,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지 않은 과분한 평가라고 할 것인가. 서양에서는 가장 힘세고 용맹한 장사로서 삼손과 아킬레스를 들고 동양에서는 항우(項羽) 장사를 든다. 그런데 삼손과 아킬레스는 완전히 전설상의 인물인데 비해서 항우는 역사상 실재인물이다.

항우는 이십대의 나이에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으로 지금의 차이나라는 중국의 국제적 명칭을 낳게 한 진(秦) 제국을 불과 삼년 만에 멸망시킨 영웅중의 영웅이다. 그는 제왕(帝王)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건만 사기(史記)에서는 그를 여러 제왕들과 같은 자리에 올려 취급하고 있다. 이런 일은 중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며, 항우는 중국역사 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책을 그 항우에 비교하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알레산더는 이십 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그리스를 정복하고 페르샤 제국을 정복한 다음 인도 갠지스 강가에 이르는 만 리의 장정(長征)을 하고는 불과 삼십여 세에 죽은 세계사적인 영웅이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행운의 여신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다. 부친으로부터 왕위와 막강의 군대를 물려받았으며, 당시 그리스 제국(諸國)과 페르샤 제국(帝國)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일로에 있었다.

이에 반해 손책은 지방 군벌의 휘하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나마 그의 부친이 일찍 죽어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야 했다. 그는 불과 이십여 세의 나이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너 강동의 정복에 나섰다. 강남은 당시 미개한 지역이었다고 하지만, 중국 전토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옥하고 광대한 지역이다. 손책은 그 후로 장강을 넘나들며 정복을 하여 그의 영역은 수천 리에 이르렀다.

만약에 그가 알레산더나 항우처럼 서른 살까지 만이라도 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중원에서는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 손책이 참여했다면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손책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손책의 업적은 그야말로 항우와 알렉산더에게 뒤지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로마 사에 보면 케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나온다. 폼페이우스가 평생에 이룩한 정치적 군사적 위업은 케사르에 뒤지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싸움에서 천재적 기지의 케사르에게 패했을 뿐이다. 그런데 로마인의 두 사람에 대한 태도는 색다른 것이었다. 인민은 천재에 대해서는 존경은 하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도 보인다. 로마인은 케사르에 대해서는 애증(愛憎)이 시종 교차하였다. 케사르가 부르터스에게 암살당했을 때 로마 시민은 환호하며 기뻐하였으며 애통으로 변한 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에 대해서는 로마인은 시종 애정으로 일관하였다. 폼페이우스가 케사르에 패하여 죽자 케사르를 지지하던 로마시민들조차 애통해 하였다. 중국사를 로마사에 비하여 본다면 조조가 케사르라면 원소는 폼페이우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칭기즈칸은 사십여 세가 넘어 몽고를 통일한 뒤 금나라를 침공한 다음 서방 원정에 나섰다. 수만 리를 장정(長征)하여 그야말로 위도(緯度)와 경도(經度)를 드나들면서 서방 사십여 개 나라를 정복하였다. 당시 서방세계가 아무리 내분으로 허약하여져 있었다고 하지만 칭기즈칸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서방세계를 초토화할 수 있었는가하고 지금도 동서양 역사가들은 모두 불가사의해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시 중국 문명수준은 서방세계에 비해서 월등했으며 이런 높은 문명을 바탕으로 야만의 몽고 인들이 무장했을 때 서방의 국가로서는 당할 길이 없었다.

사실 칭기즈칸은 서방세계에게는 휘몰아치는 태풍이었지만 중국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못하였다. 칭기즈칸은 사십 세가 넘어 몽고를 통일하여 이미 제국 말기에 들어서 허약한 중원의 금나라를 공략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서방 원정에서 돌아와 다시 금나라를 공략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한 채 육십여 세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결국 칭기즈칸은 허약한 중원의 금나라를 이십여 년의 세월에도 정복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초를 칭기즈칸에 비견할 인물이었다고 하면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지 않은 과분한 것일까? 역사적 기록에도 마초를 한신(韓信)에 비견할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 한신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병선(兵仙)이라고까지 칭송되고 있는 사람이다.

연의(演義)에서는 최고로 용맹한 장군으로 여포(呂布)와 마초(馬超)를 쳐서 ‘앞에 여포 뒤에 마초’라고 한다. 요즘 컴퓨터 분석에 의하면 단연 여포가 최고로 용맹한 장군으로 나온다고한다. 연의에서는 마초를 여포에 비유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의거해서 이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조조가 일생의 전투 중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 것은 여포와 마초와의 싸움에서였다. 그런데 조조가 여포와 싸울 때는 조조도 여포와 마찬가지로 지방 군벌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에 비해 조조가 마초와 싸울 때는 중원을 통일한 제왕이었고 당시 마초는 관중도 통일하지 못한 하부 장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조를 죽기 직전에까지 몰아붙인 마초이기에 여포를 마초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에 칭기즈칸이 몽고도 통일하지 못한 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중원을 통일한 조조와 싸웠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역시 마초 이상으로 선전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 ‘정사소설 삼국지’ 중에서

* 정삼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0-07 15:45)

덧글 개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green
연구소 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 무단수집 거부  |  고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