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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인열전 - 위연2004-09-11 23:13:54
 무적위연http://


진수의 삼국지의 촉서, 위서, 오서를 간단히 촉지, 위지, 오지로 표기했습니다.


위연.
자는 문장으로 형주 의양군 사람이다.
그가 역사에 그 이름을 처음 들어낸 것은 부곡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갔다는 촉지 위연전의 기록이다. 촉지 선주전에 따르면 형주의 인사들이 대거 유비에게로 향한 시점은 2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유비가 형주에 정착하면서 형주의 호걸들이 대거 유비에게 향한 시점인데 유표가 이를 경계한 점을 고려해볼때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짐작케한다. 또다른 하나는 조조의 군대를 피해 유비를 따라 상당수의 형북 인사들이 남하한 시점으로 이 두가지 시점중 하나의 시점이 위연이 유비에게로 향한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유비가 입촉할 때부터 위연이 활약하고 있다는 점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쏠리게 한다.


부곡(部曲)이라는 말은 본래 군대의 편성 단위이다. 하지만 동한 말, 명문세족들은 봉건제를 채용하여 자신의 가족ㆍ빈객ㆍ전호ㆍ문생ㆍ고리등을 관할하여 통치하였고 이때부터 사병이 생겨났고, 이들 또한 부곡이라고 칭함으로써 관부곡과 사부곡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사부곡은 주장(主將)에 종속되어 가병(家兵)이라고도 했다. 위연이 부곡의 신분으로 선주를 수행했다고 하니 아마도 그는 빈객의 신분을 지닌 사부곡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그의 첫 관직이 조운과 같이 측근직인 아문장군이었다는 점과 유비와의 보통 이상의 유대관계가 없이는 발탁될 수 없는 독한중의 지위에 오른 점으로 보아 그가 유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1]


위연은 입촉 후 순탄을 넘어 거칠 것 없는 정치인생을 달리게 되는데 그 절정으로는 219년. 독한중 진원장군 한중태수로 임명된 것이리라. 당시 한중은 유비정권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땅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위와의 북방 경계선으로 익주의 목구멍에 비견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만일 이곳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비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또한 제갈량이 구상한 형주와 익주의 동시 북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물론, 강족과 저족등의 융적(戎狄)들을 도모하고 회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땅이었다. 한중은 경제적으로도 유비 정권에 있어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한 땅이었는데, 성도 분지와 비견되는 한중 분지의 경제력과 노동력은 훗날 최소한 촉한 정부 총 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집결되어 동원되었다는 제갈량의 북벌을 재정적으로는 물론, 병력의 보충 면에서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제갈량이 열악한 촉한의 환경에서도 기적같은 대규모 북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한중과 성도의 양극체제는 위연이 독한중에 임명될 당시에는 성도 분지, 위연의 한중 분지, 관우의 남군 일대로 나뉘어진 3세력이라 양세력으로 나위어진 때보단 들했겠지만, 그 중요성과 의미는 대단했다. 특히 위연이 독한중이 된 219년에 유비가 유방의 선례를 따라 한중왕에 오르면서 이곳은 상징적인 의미마저 띄게 되었으니 이런 중요한 자리에 위연이 발탁되었다는 것은 곧 위연의 정치적 위상이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뜻했다. 단숨에 권력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한가지 특이점은 이러한 예상치 못한 인사조치에 대한 긴장과 혼란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저 멀리서 마초라는 자가 투항했다는 소식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던 관우가 단숨에 권력의 핵으로 오른 위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관우 뿐 아니라 유비 정권의 그 누구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의아한 일이다. 이같은 점은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한중태수에 '위연'이 되었다는 점이 아닌 '장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팽양, 요립, 이엄등의 인사들이 퇴출당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욕과 시기심에 기인해있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마초, 황충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장비도 아닌 위연이 독한중이 된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았단 말인가?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할 때에도 관우등의 불만을 고려해 이를 말리고 우려한 점을 보아도 그렇다. 비록 관직 면에서는 사방장군직을 받은 이들에 비해 낮다고 하더라도 관직 서열과 권력서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시기 위연의 실권력은 마초와 황충을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항은 그가 벼락같이 떠오른 인물이 아닌 그 이전부터 유비정권 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다. 이 시기 유비 정권의 실세들이 모두 유비와의 의협적 관계로 맺어진 이들이엇음을 고려해 보아도 위연이 유비와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221년. 유비가 동오정벌을 감행하면서 대규모의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위연의 경우 진북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직위명으로 보아 동오정벌을 단행하는 동안 북방의 적 위(魏)로부터의 방위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 같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당시 유비를 따라 동오정벌에 참여한 황권의 지위 역시 진북장군이었다는 것이다. 그 직위명과 동오정벌 당시 황권이 조위의 공격을 방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두가지 점으로 미루어보아 위연과 비슷한 시점에 진북장군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사정장군과 사진장군의 경우 같은 관직에 2명 이상이 임명될 경우 경력과 능력 면에서 앞서는 자에게 '대'자를 붙인다. 훗날 230년 위연이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는데 위연의 직이 진북장군이었다면 사정장군으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대'자가 들어간 것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230년 위연이 정서'대'장군에 된 것으로 보아 유비가 동오정벌을 단행하던 시점 내지는 그 이후 기록되지 않은 시점에 진북대장군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비의 동오정벌로 인해 위연에게는 2가지의 변화가 오게 된다. 먼저 군사적으로는 자신에게 지원을 해주는 입장에 잇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에게 견제와 압력을 주는 존재인 상용의 유봉과 파서의 장비가 제거된 것은 위연을 좀 더 자유롭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유비의 죽음은 위연을 중앙 정치에서 소외시키고 고립시켰다. 이 후 위연이 230년까지 10년동안 계속 진북장군에 머무른 것은 중앙 조직에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 유선의 즉위와 제갈량으로의 권력 집중. 남중의 반란들이 겹치면서 조정은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되고 이러한 혼란은 위연에게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시기 위나라의 중신들이 제갈량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할 것을 종용한 것을 보아 그 혼란과 불안이 심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위연은 한중군을 장악해 나갔던 것 같다. 지방의 위연으로서는 자신이 있는 한중을 장악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2]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이 후의 인사이동에서 드러난다. 227년 제갈량을 북벌을 위해 한중으로 올라오는데 한중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연이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이때의 인사이동을 보면 위연은 독전부ㆍ승상사마ㆍ양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얼핏보면 승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독한중이었던 위연을 선봉부대를 담당하는 독전부로 이동시켰으며 촉지 여예전에는 이시기 위연의 한중태수직 역시 여예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준다. 한중을 장악했던 위연의 권력 기반을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인사이동이었다. 승상사마라면 승상부의 속한 사마라는 말인데 사마는 6품 내지는 7품의 관료인데 2품의 진북장군인 위연에게는 의미없는 직이다. 비록 속관직이라고는 하지만 위연에게 별다른 의미가 부여될 만한 직은 아닌 것이다. 조정에 별다른 연고나 기반이 없는 위연으로서는 한중군의 권력기반을 와해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양주자사라는 것 역시 이름만 좋은 명예직으로 의미없는 직으로 봐도 무방하다. 위연에게 있어 이 시기만큼 암울한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221년부터 230년까지 10년동안 그의 장군직이 진북장군에 묶여 있었다는 것 또한 그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북벌에 위연을 적극 기용했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그의 직은 선봉대를 이끄는 독전부와 정벌을 담당하는 사마이다. 그러나 정작 선봉이 되어 가정전에 나선 것은 마속이었다. 이 후 계속되는 북벌에서도 제갈량은 애초 중앙에서 대려온 인사들이나 새로 영입된 인물들인 진식, 왕평, 강유등을 적극 기용했지 한중군의 인물들은 이렇다할 활동이 없다. 위연뿐만 아닌 한중군의 인사들중 중책에 기용된 자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위연의 세력 와해에 제갈량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반대로 위연의 세력이 한중군 전체에 얼마나 퍼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3][4]


227년 말에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남정에서의 회의에서 나온 속칭 자오도 계책이라 불리는 위연의 작전은 이러한 위연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단기 5천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이 작전은 분명 뛰어난 작전으로 북벌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책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는 계책이지만 동시에 확실히 위험했다. 특히 실패할 경우 바로 위연 자신의 죽음이 확실시되는 이 작전을 스스로 제안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좁아진 정치적 위상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이 담겨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특이점이 발견된다. 이 제안을 거절한 제갈량을 위연이 겁장이라며 비난한 것이다. 당시 최고 집권자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제갈량을 겁장이라며 비난하다니 너무나 간 큰 행동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렇게 비난을 했음에도 그 어떤 압력이나 제제를 받은 흔적이 없으니 더욱 놀랍다. 제갈량같은 이를 비난하고도 퇴출당하지 않은 이는 촉한 정권에서 위연 하나일 것이다. 227년 말이라면 위연이 독한중과 한중태수직을 놓은지 1년도 안되는 시기이니 위연의 한중 세력은 건재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위연으로 인한 제갈량의 견제는 위기의식을 느낀 한중군의 세력이 위연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는 효과를 낳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믿었기에 위연이 저런 비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이 후 230년이 되면 또다른 특이점이 발견된다. 그의 성격적 결함과 양의와의 불과가 언급되고 있는 것인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촉지 위연전, 양의전, 비의전에서 모두 이같은 불화를 230년을 기점으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필 230년일까. 이것이 단순한 그의 성격적 결함이거나 단순한 인간관계의 묘사라면 여러 전들에서 이렇듯 230년을 기점으로 기록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219년 그가 독한중으로 임명될 시점. 그후 8년간 한중을 진무하는 동안.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올라온 시점. 이 세가지 시점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각 전들에서 230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내용을 공통적으로 적고 있음은 이러한 문제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230년을 기점으로 발생한 문제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더욱이 비의전에는 ''군사' 위연과 '장사' 양의'의 다툼을 적는데 위연이 군사가 되고 양의가 장사가 된것은 모두 230년의 인사이동에서였다. 따라서 이같은 기록은 특기할 만한 내용이며 단순한 개인의 인간관계로 치부할 것이 아닌 230년 이후 나타난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230년에는 촉한 정권 전체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들이 많았던 해였는데 북벌과 관련된 경우 이 해에 조위 정권의 대규모적인 침입을 받았다. 장합ㆍ사마의ㆍ조진등이 3방향에서 들어왔는데 제갈량이 직접 성고ㆍ적판에서 기다려 저지하려 했다. 이 때 조진과 사마의가 남정에서 합류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촉군이 전선을 뒤로 미루어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여 저지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진등이 이끌었던 위나라의 중앙군은 자연재해로 인해 퇴각하였다. 비록 중앙군은 퇴각했지만 옹주의 곽회가 이끌로 내려운 지방군은 남아있었는데 이를 토벌하도록 명받은 것이 위연이었다. 여기서 왜 하필 위연을 기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껏 위연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제갈량이 왜 갑자리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일까? 여기서 위연에게 토벌령을 내린 것은 제갈량의 책략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위연의 한중관련 직을 없앰으로 그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했고 그것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위연에게 어느정도 타격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제갈량 자신이 한중에서 따로이 승상부를 열므로 한중군을 장악하면서 한중군의 인사들을 배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갈량의 이러한 행동은 한중군에 흩어져있던 위연의 세력을 하나로 묶어 단일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던 것 같다. 권력의 핵심은 제갈량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위연은 북벌의 중심이 되는 한중군에 있어서 제갈량의 가장 큰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만일 위연이 한중군 영내로 들어온 곽회의 군대를 물리친다면 제갈량으로서는 좋은 일이고, 만약 진압에 실패하거나 어렵게 되면 위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이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그동안의 북벌에서 왕평, 마속, 진식, 조운, 등지등을 기용하다가 비교적 위험도가 적은 방어에 위연을 기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미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중앙군은 퇴각이 이루어졌고 남아있는 곽회의 군대만으로는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당시 위연과 곽회가 맞붙은 지역은 양계(陽谿)라는 곳인데 여기서 표현된 양(陽)자는 양양이나 남양의 경우와 같이 대체로 강이 있는 곳에 쓰인다. 또한 계(谿)자도 시내 계자이므로 이 양계라는 지역이 강가임일 알 수 있는데 한중군 일대에 강은 한수(면수)뿐이 없으므로 이 전장이 한수 강변까지 밀고 내려온 곽회군과 벌어진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갈량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벌어진다. 당시 전투를 위지 곽회전에 실린 조방의 조서에는 한천의 싸움에서 거의 전멸할 뻔하였다고 적고 있다. 제갈량으로서는 위연의 이러한 큰 전과가 예상 이상의 큰 승리였을 것이다.[5]


그러나 단지 위연이 대승을 거둔 것 자체는 제갈량에게 그리 위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작 230년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그 이후 위연의 인사이동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승리를 높이 평가한 후주 유선은 그를 전군사 정서대장군으로 승격시키고 남정후에 봉했으며 가절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연의 지위 격상은 결코 제갈량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이 이러한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갈량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동안 위연을 10년동안 진북장군에 묶어두고는 갑자기 이러한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아무튼 위연은 이 시기 10년만의 장군직 승진으로 정서대장군이 되므로 명실공히 최고의 무장으로 부상했으며 그가 받은 가절을 바탕으로 한중군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군사라는 지위를 통해 북벌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전군사는 승상사마였던 위연의 속관직이 사마에서 전군사로 승격된 것인데 촉지 양의전에서 알려주듯이 군사직은 한가로운 때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지만 당시 한중에서 북벌을 지속적으로 수행중인 상황에서는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으로 제갈량을 따르는 한중군에 올라온 승상부 사람들중 전군사 위의 직을 갖고 있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정서대장군이라는 직은 당시 한중군 내에서 가장 높은 장군직이었는데 제갈량이 이 시기 표기장군으로 승진한 이엄에게 한중군의 일을 맡기고 북벌에 나섰던 것은 바로 위연의 한중 세력이 그만큼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기서 위연이 받은 가절은 특기할만한 점이다. 아마도 위연은 이 가절을 바탕으로 사졸을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중군 관련 직이 없는 위연은 가절이 아니고서는 사졸을 양성할 권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졸의 양성은 북벌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위연의 세력 강화와 직결되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하는 승상부의 사람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사람들과의 불화라고 하지만 당시 한중군의 인사들은 제갈량을 따라 올라간 승상부의 사람들로 대체되어 있으므로 230년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대립과 갈등은 이러한 점들로부터 기인한 위연의 한중세력과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는 승상부의 사람들과의 갈등을 묘사해놓은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들이 위연을 피했다는 것은 그들의 지위나 역량이 위연과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유독 양의만이 대립했다는 것은 당시 양의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부면이다.  또한 그가 제수받은 작위인 남정후의 식읍은 한중군의 수부인 남정이라는 점으로 보아도 이러한 인사조치는 한중군에서의 위연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상당히 유효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오면서 불거진 다툼은 230년을 기점으로 더욱 심화되어 그 갈등의 폭이 커졌다. 234년 제갈량이 이끌었던 마지막 북벌 때 조직이라는 해몽가는 선봉장인 위연을 속여 이간하고 그의 입지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와같은 기록은 당시 갈등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제갈량의 후사조치와 위연의 최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갈등이 심화된 234년 가을. 촉한의 집권자 제갈량은 진중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은 병사하면서 비밀리에 양의, 강유, 비의등에게 철군의 임무를 부여하고 위연에게는 적의 차단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제갈량의 지시는 역시나 위연을 견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제갈량이 맨 처음 한중으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위연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제갈량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은 위연이 따르지 않을시에는 그를 남겨둔채 퇴각할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조치가 어떻게 위연을 압박했기에 위연이 철군을 반대했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었을까?


먼저, 제갈량의 퇴각명령은 지금까지는 언제나 한중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북벌기지인 한중에서 재정비하여 다시 북벌을 시도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상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했고, 한중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군대가 주둔했고 제갈량이 부서를 열어 조정의 일을 돌보았으므로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234년. 제갈량이 죽으면서 내린 철군명령은 북벌의 전면적인 퇴각령으로 성도로의 회귀를 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연이 이라한 명령에 거부한 것은 북벌의 중단보다는 다른것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군의 임무가 부여된 것이 '양의'였다는 것에 있다.


위연이 북벌을 내세운 실제적인 목적은 권력장악에 있었고, 북벌은 허울좋은 명분이었을 뿐이다. 당시 한중군의 세력은 양의로 대표되는 신세력과 비위로 대표되는 구세력. 위연으로 대표되는 한중세력, 오의등의 방관자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6]


이보다 앞서, 양의는 위연과의 다툼으로 위연의 칼에 죽을뻔하였고 양의는 눈물을 흘리며 비의에 의해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이것은 양의의 힘이 위연에게 미치지 못햇다는 것이다. 직위상으로도 그러했고, 능력면에서도 그러했다. 위연에게는 유선으로부터 부여받은 가절이 있었으므로 제갈량 이외에는 그를 제어할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미 위연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했던 양의에게 권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철군의 임부를 부여하고 위연에게 그 뒤의 일을 맡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후 위연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갈량의 초치였던 것이다.  위연이 그대로 따른다면 위연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고,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위연을 따돌린 채 철군을 감행하므로 위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될 테니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7]


이미 위연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힘에서 그를 당할 수 없었던 양의는 비의를 위연에게 보내어 그의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여기서 다른 이가 아닌 비의였다는 점에도 정치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양의와 같은 이들은 제갈량과 공생관계에 있는 그의 수족과 같은 이들이었다면 비의의 경우는 구세력으로 신세력인 양의등과는 그 정치적 입장에서 차이가 있었다. 비의가 위연과 양의 사이에서 중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양 세력과는 다른 정치세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양의, 강유, 비의중 양의와 강유등은 친제갈량세력이었기에 그들이 갈 경우 위연은 너무 부담스런 존재였으리라.


위연은 비의로부터 제갈량의 사망소식과 철군의 소식을 듣고 자신을 권력에서 소외시키는 것에 분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촉지 위연전 中


승상이 죽었지만 자신이 건재함을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연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승상부의 신임받는 관리들이란 양의등의 제갈량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 대립이 북벌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양 세력간의 권력다툼임을 알려준다. 위연은 양의등의 세력만을 내려보내고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제갈량을 계승하려했던 것이고 이 때 비의를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하엿던 것은 그가 바로 제 3세력으로 향후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잇었는데 그것은 바로 비의가 위연의 편에 서서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제갈량으로부터 양의등과 함께 철군의 임무를 부여받은 비의가 위연과 함께하기에는 그 이득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만 이미 비의는 돌아간 뒤였다. 결국 촉군은 위연의 부대를 남겨둔채 철군을 감행한다. 위연이 조정에까지 배척당한 것은 구세력과 신세력 모두를 아군으로 만들지 못한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에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던 위연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위연이 군을 이끌고 촉군과 격돌하게 되는 과정에서는 촉지 위연전과 위략의 내용이 서로 어긋나는데 양 측 모두 그다지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위연전에 따르면 단지 자신을 따돌리고 철군을 감행했다는 것 때문에 극단적인 군사적 행동에 돌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같은 점들이 분명 위연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겠지만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할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제갈량또한 이러한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무언가 위연의 행동에 대한 원인으로는 불충분하다. 더구나 위연의 행동을 본다면 더욱 의아함은 커진다. 위연은 양의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한중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그저 자신을 따돌리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일어난 무력충돌이었다면 패한 위연은 타국으로 망명을 가야함에도 한중으로 들어가 죽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촉지 위연전과 후주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북으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연은 다리를 끊어 양의군의 움직임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조정에서 양의의 편을 들어주었다. 사실상 이 때 위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촉한의 대장 위연은 단 한번의 교전에서 무너졌다.


위연이 패한 이유는 워낙 많지만 사실상 이미 패배가 결정된 전투였다. 군사의 양적인 면도 있겠으나 뒤에서는 양의가 밤낮으로 추격해오고, 앞으로 가자니 조정에서는 반역자로 규정하였으니 스스로 포위망 속에 같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추격해오던 양의군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미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위연의 병졸들의 하평의 질책에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흩어졌다는 말은 주목할만하다. 바로 여기에서 위연의 패배의 또 하나의 원인을 알 수 있다. 당시 제갈량 사후 촉군은 퇴각을 하지만 승상 제갈량의 죽음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위연과 양의 등의 고위급 인사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승상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철군을 감행했던 것이다. 더구나 북벌을 내세운 위연으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위연의 사졸들은 하평으로부터 승상의 죽음을 듣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하평의 선전은 주요하여 위연측 병졸들의 전의를 상실시켰던 것 같다.


이 후 위연이 한중으로 돌아 들어간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권력싸움에서 패했다면 응당 타국으로의 망명을 택해야 정상인데 위연은 한중으로 들어갔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위연의 군사적 행동이 단지 양의가 미워서 그랬다는 진수의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 발단이 된 것은 양의와의 권력 다툼이겠으나 무력 충돌이라는 극단적 움직임으로 치닫게 된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무력충돌까지 가서 패한 권력싸움이었다면 한중으로 돌아들어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연이 자신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이 무고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권력싸움에서 진 상황에서 자신이 무고하든 아니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 위연이 마지막에 한중으로 들어간것은 여러가지로 의문을 낳는다. 이런 행동은 위연의 무고가 입증될 경우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잇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그렇게 봤을때는 단지 자신을 따돌렸기에 군사를 들어 양의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위연을 확실히 제거하기 위한 양의의 무고로 인한 싸움이었다는 위략의 내용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한중으로 들어간 위연은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장완이 그를 장사지내준 점이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양의와 비의가 한직으로 이동된 것들을 보면 조정 당국으로부터는 자신의 결백이 받아들여졌던것 같다.



[1]위연과 조운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모두 유비와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아문장군을 거쳐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갔다는 점인데 한명은 중앙으로 한명은 지방으로 진출한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개인의 역량에 따른 유비의 판단으로 인한 차이였으리라.


[2]유비는 동오정벌을 단행하기 이전 유봉의 죽음과 파서의 장비를 데려오면서 221년. 오일을 관중도독으로 임명하였지만 오일이 위연을 견제하고 압력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단지 관중도독이라는 그 직위만으로 오일이 실권력을 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위연의 한중관련 직위에 변동이 없고, 이 후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보면 한중의 실권은 위연이 계속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오일의 경우 위연과 함께 한중 방위라는 임무와 함께 위연의 감시정도의 역할이 부여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219년부터 제갈량이 올라온 227년까지의 8년간의 기간을 고려해 보았을 때, 특히 221년부터는 별다른 견제세력이 없었음을 고려해 볼 때 위연의 한중 장악은 시간적으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오일은 위연과 제갈량의 다툼에서 최소한 위연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정도는 했으리라 생각된다.


[3]여예가 한중태수가 된 시점은 명확하지는 않다. 촉지 여예전의 기록으로 보건데 227년에서 230년 사이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편의상 임의대로 227년으로 적어넣었다.


[4]출사표등에서도 나타나지만 227년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가며 시작된 촉한의 북벌은 제갈량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가며 행하진 적지 않은 규모의 인사이동은 당시의 집권자인 제갈량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5]한천이라는 것은 한중군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써 이 싸움이 양계에서 벌어진 위연과의 싸움이었음을 뜻한다.


[6]신세력이란 유비와 함께 입촉한 세력이고, 구세력이란 유비보다 먼저 한중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세력을 지칭한다.


[7]만일 양의가 아닌 위연에게 철군의 임무가 부여되었다면 아마도 위연은 철군을 감행했을 것이다. 위연의 권력 승계에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정사삼국지, 삼국지사전, 삼국지고증학



written by 무적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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