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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인론 - 유기2004-08-15 13:39:14
 무적위연http://


유기. (?~209? 산양군 고평현 출생)

유표의 전처 진씨의 아들로 유표의 장남이자 유종의 형이다.
후에 동생 유종과의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 강하로 내려갔고,
이후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에서 승리하지만 질병에 걸려 죽었다.




유기는 기개가 있고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당당한 걸물이었다. 허나 그는 동생 유종에게 형주의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이유는 유종과는 달리 적극적인 호족의 지지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종또한 유기와 마찬가지로 진씨의 아들이었지만 유종은 유표의 후처 채씨의 질녀(조카딸)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후한서 유표전》에서는 알려준다. 아마 이때를 전후하여 유종은 채씨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채씨의 동생 채모와 장윤등이 당파를 만들어 유종을 적극 지지하고 유기를 몰아세웠다는 점에서도 당시 형주의 호족들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유표와도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채씨집안이 유종을 적극 지지하며 유표의 마음또한 큰아들 유기가 아닌 유종에게 기울어지게 했음을 알 수 있다. [1]


허나 유기라고 해서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음이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기록된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 또한 제갈양을 매우 중요시했다. 유표는 후처의 말을 듣고 작은 아들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항상 제갈양과 더불어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상의하려고 했지만, 제갈양은 항상 그것을 거절하고 함께 계획을 도모 하지 않았다.」라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2]


형주의 대 명사이자 여러 지역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갈량을 중시했다는 것은 유기가 기울은 노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이를 꺼려했다는 것은 그만큼 채씨집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파의 힘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상기의 내용 중 「유표는 '후처(채씨)의 말을 듣고'...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은 주목할만하다. 확실히 형주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집안이니 말이다. 결국 유기는 후계자에서 밀려 강하로 향하여 후일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유기가 비록 강하로 내려가긴 했으나 동생 유종에게 복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하에서 독자적인 군권을 획득하며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아마도 유기의 이동과 함께 그의 지지자들도 상당수 유기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3]


삼국지 노숙전에 의하면 노숙은 당시 형주의 주요 세력으로 유비, 유종, 유기의 삼세력을 언급하고 있으며 형주의 인사들이 모두 유기와 유종의 두 파로 갈라져 있다고 알려주는데 당시 유기는 이미 강하로 내려간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만큼 형주 내부에 유기의 영향력이 상실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강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는 조조의 남진에 당시 유표의 본거지였던 양양을 중심으로 하는 형북 일대가 유종을 따라 수많은 인사들이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멀리 손권의 양주에서조차 투항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점에 당당히 조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세력 기반이 유종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세력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조의 남진에 맞서기 위해 당대의 영걸 유비를 맞아들였다.[4]


조조라는 강대한 적 앞에 두 영웅이 힘을 합친 것이다. 유기가 유종과는 달리 반 조조를 향해 움직인것은 결코 그에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분명 당시에 객장의 신분으로 병력은 있지만 땅이 없던 유비를 맞아들여, 조조를 물리치므로 형주를 회복하고 유표를 계승하겠다는 것이 유기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바램은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제갈양이 말했다. "유예주의 군대는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배했지만, 현재 군대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병사 만 명이 있습니다. 유기가 강하의 병사들을 합쳐도 만 명보다는 적을 것입니다.」-《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이 내용은 제갈량이 조조와 대항하도록 손권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뜻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병존하기 어려운 두 영웅이 나란히 서 있던 시대에 제갈량(유비의 대변자)에게서 나온 이 제안에는 어떤 음모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를 외치며 유기를 폄하하고 유비를 영웅시함으로 반 조조의 동반자로서 유기가 아닌 자신의 주인 유비를 택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유기의 운명이 갈렸다. 반 조조 형주 세력의 리더로서 유비가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적벽대전을 전후하여 유기의 입지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유비는 손권과의 유기적인 군사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남은 형주세력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전장에 임했다. 그 과정 어디에도 유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외교적인 고립은 전장에서의 군권의 주도권을 잃게 했으며 이는 곧 내부적인 입지의 약화로 나타났다. 적벽에서의 승리 이후 유비에 의해 형주자사가 되지만 그의 영향력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형남 4군의 항복 역시 유비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유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시점에는 이미 병권을 포함한 유기의 대내외적인 영향력은 미비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유비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유기의 죽음 시점은 여러가지로 의문을 낳는다. 정말 그의 사인은 질병이었던 걸까? 철저한 각본이고 드라마가 아닌가? 혹 유비에 의한 제거는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이 누군가에 의한 제거이든 아니면 말 그대로 질병사이든 그의 마지막은 불우했으리라.


유기는 당대에 보기 드문 기개가 있었다. 강적 조조에 맞서 굴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를 뛰어넘는 모습이다. 그는 유비에 비할 만한 영웅이나 처세에 있어서는 기민하지 못하여 그의 동생 유종보다도 못했다. 그가 자신의 뜻을 크게 떨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다.


[1]채씨집안이 큰아들 유기가 아닌 유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를 지지한 것은 유기와 유종의 개인적 역량이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표는 당시 형주에서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중 하나인 채씨집안의 여자와 결혼하므로 채씨와의 긴밀한 협력체계 위에 형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이들 채씨집안이 계속해서 형주의 지배력있는 가문으로 남기 위해서는 유표의 후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이러한 현상은 후한 말기 황실의 상황과 유사하다. 외척과 환관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후사를 어리고 유약한 인물이 잇게 하는 것처럼 유기에 비해 비교적 유약한 유종에게 채씨(유표의 후처)의 질녀를 시집보냄으로 대를 이어 외척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유종이 유기보다는 다루기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조조의 남정군에 유종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주변의 의견에 의해 쉬이 항복한것과는 달리 유기는 유종의 투항으로 형주 북부가 완전히 날아가버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유비와 연합하여 굳건히 조조에 대항한 점에서 확실히 동생 유종과 비교해 보았할 때 인물의 기량은 한단계 더 높았다고 생각된다.


[2]제갈량의 큰 누이의 남편은 괴기였고, 작은 누이의 남편은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이었다. 그리고 처의 아버지는 황승언이었고, 황승언의 부인은 유표의 후처인 채씨와 자매이며 채모와는 남매이다. 이렇게 제갈량은 혈연적으로 형주의 실력자들인 괴씨 / 방씨 / 황씨 / 채씨와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의성의 마량과는 의형제를 맺는 등 마씨형제 등과 같은 젊은 인사들과도 깊게 사귀었다.


[3]이같은 상황은 원상과 원담의 경우와 유사하다. 원상이 원소를 계승했으나 원담은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고 청주에게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고 원상과 대립했다. 유기와 유종의 관계도 이와 같다.


[4]유비와 유기는 서로 별개의 세력으로 별다른 유대관계는 없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유기가 제갈량은 중시했다 하지만 이는 유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유기와 제갈량과의 관계만을 나타낼 뿐이다. 오히려 제갈량이 손권에게 반조조를 주장할 때 유기를 폄하하는 장면은 유비와 유기가 별개의 세력임을 증명한다. 유비는 남하하는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유기와의 어떠한 연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채 강릉으로 이동하려 했을 뿐이다. 당시의 강릉은 유종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강하의 유기의 영향력도 적은 양양 - 강릉 - 강하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세력권이었을 것이다. 이 강릉이 조조에 의해 막히면서 유기로의 행로를 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기는 당시 병력은 있지만 땅이 없던 유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적어도 유비가 강릉을 얻지 못한 시점에서는 유비는 유기에 미치지 못했다.




written by 무적위연

덧글 2개
 무적위연 원래 열전이라고 작성한건데...열전이라 칭할려면 객과적이어야 하는데 이와같은 글은 열전이라기 보다는 론이라고 해야 한다기에 론으로 바꾸었습니다. 역시 열전이라고 하기엔 맞지 않는걸까요? . 2004/08/15 01:08 
 서인준 음....열전이라기 보다는 론인듯...
무적위연님 말씀대로 열전은 객관적인 글이고/론은 자신의 생각을 곁들인 주관적인 글 이기때문입니다....
 2004/11/1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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