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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둔전제2006-10-24 20:15:22
 희지재


 화북은 본디 건조한 개활지라 한해 농사가 강우량에 좌우되었다죠. <삼국지>의 무대인 후한 말엽은 호족들에 의한 토지 병탄도 극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80전이던 쌀 한 석 값이, 동탁이 오수전을 거둬 마련한 금속으로 동전을 함부로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데다 각지에서 전란이 일어나 유민이 발생하면서, 조조가 서주에서 군사를 돌려 여포와 싸우던 때에는 50만전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메뚜기의 습격으로 중지된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둔전제를 시행하기 전이라 모든 군웅에게 병량 조달이 큰 문제였고, 이공범의 <위진남북조사>를 보면 "원소군은 상심(오디를 말함)을, 원술군은 강회지방에서 포라(수초나 소라류)를 군량으로 하였"다고 하네요. 후한의 군웅들 가운데 여남 원씨의 남형(南兄; 원술)과 북형(北兄; 원소)의 세력이 가장 성했는데, 이들조차 뽕나무 열매(오디)나 수초, 소라를 군량으로 삼았다니 충격적입니다. 군량의 많은 부분을 약탈에 의존했고, 많은 유민들이 따라서 오초(吳楚) 땅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양자강 유역은 삼림이 무성했고, 그 이남은 온난 습윤해서 벼농사가 가능한 기후입니다.



 제갈량의 글들을 모은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에, 당시 촉한의 북벌 비용은 오로지 비단을 수출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제갈량 스스로도 가산으로 뽕나무 팔백그루가 있다고 했죠. 뽕나무 열매인 오디는 술을 담그기도 하지만 날것으로 먹었는데, 촉한도 뽕나무 열매를 군량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추측컨대 삼국 가운데서도 촉한이 가장 군량을 조달하는 데 어려운 환경에 있지 않았을까요? 도호 이엄과 오고 간 글들, 이엄과 제갈량이 각자 맹달에게 보낸 글, 마침내 이엄을 면직시키기를 후주에게 청하는 글이 모두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에 실려 있습니다. 깊고 풍부하며 공명의 인품이 내비치는 글들입니다. 이엄이 면직된 것은 군량 수송의 임무를 소홀히 하고 외려 공명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려 획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량 수송은 대군에게 몹시 중요한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한직으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관도 싸움에서 오소의 군량을 지켰던 순우경은 신세가 한스러 술만 마셨지요. 조조, 원소와 동렬에서 서원팔교위를 지낸 순우경은 후방의 군량 관리를 맡긴 원소의 대우가 못내 불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엄도 처지는 마찬가지로, 제갈량의 문집을 보면 이엄이 여러 번 자신과 아들에게 중직을 요구한 일들이 쓰여 있습니다. 파군 등 몇개 군을 떼어내 파주(巴州)로 만들어 자신을 자사로 삼아달라는 이엄의 주장을 보면 출세욕이 많은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공명은 그가 육손과 필적하는 인재라 하여 우대했고, 북벌 때마다 한중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이엄은 한중에서 공명 북벌군의 군량을 지원해야 하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그가 군량 수송에 문제를 빚어 면직되는 과정은 연의에서도 대체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가 제갈량과 함께 유비의 임종을 했던 탁고대신이라 제갈량도 그의 처우를 함부로 할 수는 없어, 여러 대신들과 함께 논의하고 마침내 올린 상소를 아직 읽어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고관들 이름이 반이나 생경한 것을 보면(원림, 상관옹, 번건 등 생애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위연, 등지, 강유 등의 인물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촉한은 과연 사료가 부족합니다.


 군웅할거의 시대로 돌아가면 조조에게 처음 둔전을 건의한 것이 조지(棗祗)와 한호(韓浩)입니다. 조지는 벼슬이 우림감, 한호는 중호군으로서 모두 무관입니다. 둔전제 발의가 처음부터 병량 확보에 목적을 둔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지요.



 둔전으로 위나라는 유민들을 흡수하면서 병량과 병역자원을 동시에 확보하는 이익을 얻습니다. 후일 위나라는 내지에 민둔(民屯)을 시행하면서 촉과 오에 대한 전선에는 군둔(軍屯)을 실시했습니다. 가와카스 요시오의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는 이 때의 민둔지가 조씨정권의 기반이었고, 반대로 군둔지는 사마씨가 정권을 잡는 기반이 되었다고 하는데, 기술이 간략하여 자세한 내용은 추론해볼 따름입니다.

덧글 9개
 희지재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던 무렵에 세금제도를 변혁하면서 화폐납을 현물납으로 대신한 것은 당시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여 쓸모없어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06/10/25 08:10 
 정삼연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 가 아닌지요? 물론 저는 아직, 아니 처음 접하는 책입니다...^^ 2006/10/25 11:10 
 희지재 아, 맞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 제갈량 문집은 문지(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난세를 건너는 법>도 있습니다만, 역자의 주석이 충실해서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가 더 읽기 좋은 것 같습니다. <난세를 건너는 법>을 번역한 오수형씨가 정리한 조조 문집 <천하 경영>도 문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2006/10/26 10:10 
 천공 당시 사람들에게는 한직으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한직이라고 볼 수는 없어. 원소가 순우경에게 군량을 맡긴 것은 나름대로 탁월한 선택이야. 유비가 동정 때 조운을 강주에 남겨 군량 수송을 맡긴 점이나, 평소에 제갈량으로 하여금 군수를 담당하게 한 것을 보면 군량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고 그것을 담당하는 자들은 대체로 능력있는 자들을 기용하는게 대부분이지. 관우의 북벌때 미방과 사인이 남군과 공안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구. 2006/10/29 10:10 
 희지재 오소의 참패가 관도대전에서의 승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듯이 중요한 역할이지만, 순우경이나 이엄은 불만이 있었음을 말한 것임 :-) 제갈량과 함께 촉과를 제정한 공로에다 선주의 탁고대신으로서도 스스로 제갈량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했을 이엄은 한중에서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제갈량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지. 2006/10/29 10:10 
 천공 순우경도 원소와 조조와 함께 한때 서원팔교위에 올랐던 인물인데 오죽하겠냐, 이엄도 그렇고. 허나 그것은 군량을 맡고 있다라는 역할 상의 불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불만의 표출로 보이는데, 아닌가? 2006/10/29 10:10 
 희지재 물론 오랫동안 누적해온 불만이고, 공명은 승상이 되어 전군을 지휘하는데 자신은 후방에서 군량미를 맡았다는 것도 그런 불만의 '일부'겠지요^^;; 그래도 이엄씨, 선주 때 상서령에 후주 때 표기장군이면 만족할 법도 한데, 제갈량의 상소를 보면 이엄은 (북벌의 병참선을 담당하는) 한중에 오기 싫어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명은 비록 그를 파주자사로 올려줄 수는 없었지만 아들 이풍에게 강주를 맡기는 등 집안을 우대해서 그를 달랬지요. 이엄은 사욕을 앞세운 인물이라 비록 재능은 있었으나 나라 일에서 제갈량을 대신할 수 있는 인재는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몰랐을 뿐. 2006/10/29 11:10 
 천공 이엄이 '군량'을 맡아서 그런게 아니라 함께 제갈량과 자신을 동등하게 보는 입장에서 권력이 제갈량에게만 집중되고(제갈량의 의지 및 행위도 있었지만) 또 자신은 점점 권력의 주축에서 멀어져가니까 아마도 그것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지. 지금 몇개 잡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제갈량의 권력집중에서 보이는 기존 권력자들의 축출과 집중과정인데 나중에 시간되면 정리해서 올려줄께 2006/10/29 11:10 
 희지재 선주는 이엄과 요립과 팽양을 쓸 수 있었지만, 공명은 끝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지존의 지위요, 한 사람은 그들과 같은 인신(人臣)이었기 때문일까요.
관우가 죽은 해(219)부터 선주가 죽은 해(223) 사이에 촉한이 잃어버린 우수한 신하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을 잃었고 이릉에서 풍습과 마량이 죽었으며 미방과 반준은 오에, 맹달과 황권은 위에 투항했습니다. 미방의 투항 이후 미축이 분으로 죽었고, 220년에 죽은 법정은 선주가 공명만큼 의지한 신하라 누구보다 아까운 인물입니다.
공명은 법정과는 줄곧 좋은 사이였고, 방통은 팽양과 친했는데, 서서, 방통, 법정 등이 공명 곁에 있을 수 있었다면 촉한 후기의 권력지형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후주는 선주의 자식일 뿐 선주의 유지는 실상 공명이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엄, 요립, 팽양 등은 재승박덕하여 공명과 재능을 겨루려고 했을 사람들이지요. 공명이 양의 대신 장완을 선택한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일후에 천공이 정리된 논지를 올려준다면 좋은 일이 되겠지요 :-)
 2006/10/2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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