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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2006-10-21 22:50:09
 희지재


 관우의 아들들. 관평(關平)과 관흥(關興). 평(平)은 평화(平和)인 동시에 천하를 위무하는 평정(平定)이다. 흥(興)은 유비의 흥기(興起)와 한조 부흥(復興)의 대의가 된다. 사료가 부족한 촉한에서 평의 자(字)는 전해오지 않지만, 이후에 활동한 흥의 자는 안국(安國)으로 전해진다. 아들들의 이름을 살피고 있으면 관운장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믿고 기대던 세계.


 조자룡이 남긴 자식 조통(趙統)과 조광(趙廣)도 이름이 무인의 자식답다. 연의 97회에서 두 사람이 호분중랑장과 아문장이 되는데, 호분(虎賁)은 우림(羽林)과 같이 황제를 모시는 근위군을 의미했고, 아문(牙門)은 군문(軍門)과 같은 뜻이라 모두 무관직이다. 당시에 중원에는 이미 구품중정제가 생겨 귀족사회가 형성되었으므로 사회지도층은 후한말의 청류를 위시한 문인들이었다. (영천의 청류 순욱 순유 종요 진군, 북해의 청의파 화흠 왕랑 등이 위나라의 고관대직을 모두 차지했음을 보라. 희지재가 죽고 조조가 순욱에게 새 인재 추천을 하문한 글을 보아도 여남과 영천에 옛부터 인재가 많았다고 했다. 청류세력을 대변해 환관을 척살한 원소의 가문도 여남에 뿌리가 있었다. 북해는 당대의 석학 정현(鄭玄)이 문하를 배출하던 땅이다. 그 후 청류세력은 정치의 중심을 장악했고 중정제를 통해 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사마의의 주대중정 설치는 이 경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중정제에 관해서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의 연구>를 참조.) 세족(勢族)의 자제들은 모두 학문으로 입신하고자 했다. 강남은 세병제(世兵制)가 발달해 대체로 무관이 되어 부형(父兄)의 사병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오나 회계에는 주(朱) 장(張) 고(顧) 육(陸), 우(虞) 위(魏) 공(孔) 하(賀) 같은 가문이 호족으로 이름났는데 이런 가문에서도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인을 많이 배출했던 것은 세병제 전통이 있어서였다. 촉한은 청류파의 허정을 사도로 기용했고(허정(許靖)은 유장이 항복하기 직전에 유비에게 투항하려 성벽을 넘다가 잡혔으므로 유비는 그에겐 허명뿐이라며 경시하여 쓰지 않았는데, 허정의 명성을 얻어야 한다고 간한 제갈량의 기록이 보인다. 입촉한 후 유비가 공명을 고굉(股肱)으로 삼고 법정을 모주(謀主)로 썼는데, 법정 역시 의견이 같았다. 유비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허정을 태부 벼슬에 크게 임용했다. 허정은 사촌지간인 허소(許劭)와 함께 여남에서 달마다 인물평을 잘 해 유명했다. 이 여남월단평을 이야기하면 조조가 허자장을 찾아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평가를 들은 일화가 꼭 언급되는데, 자장(子將)은 바로 허소의 자(字)다. 환관들이 공공연히 관직을 매매하던 시대에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오탁한 풍속을 멀리하고 은일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른바 청류가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관직의 서열이 뇌물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청류파 명사들의 서열이 따로 유행했는데 허정 허소 두 사람의 월단평이 가장 유명했으니 허정은 실상 청류 지식인층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안한장군 미축이나 승상 제갈량 등 외지인물이 요직에 있어 풍습이 강남보다는 중원과 더 가까웠다. 그래도 아들들이 대를 이어 무장이 되었으니 조자룡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덧글 8개
 희지재 <구품관인법의 연구>를 번역한 임대희씨는 또 가와카스 요시오의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를 번역하셨는데, 이 글에는 그 책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천공의 소개로 접하게 된 책입니다. 이 두 권만 읽어도 제가 쓰는 글들은 기껏해야 독후감에 지나지 않겠지요. 2006/10/22 09:10 
 희지재 여기서 말한 강남의 세병제란 ‘부형의 사병(私兵)을 세습하는 제도’라는 용례로 한정해 말한 것입니다.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손정의 차남 손유가 죽자 삼남 손교가 그 병사를 물려받았고, 손교가 죽은 후에는 다시 사남 손환이 그 병사를 이어받았습니다. 감령 사후 반장이 그 병사를 물려받아 합친 것처럼 장령들 사이에 병사가 오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능통은 소요진에서 장료의 습격에 맞서 손권을 호위하면서 수하 정예 삼백명을 모두 잃고 혼자서 겨우 살아남는데, 손권이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두 배나 되는 병사를 내린 것은 능통의 죽은 용사들이 당연히 능통의 사병(私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병을 희생해서 손권을 구함으로써 그 충성을 보여준 것이지요. 눈치채시겠다시피 능통의 병사는 또 그 아비 능조의 병사입니다.
조조가 만든 병호제(兵戶制)는 일반 백성과 별도로 직업병사들을 호적을 달리해 일정한 지역에 따로 살게 하는 제도였는데, 부형(父兄)이 죽으면 자제(子弟)가 병역을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런 집은 남자들이 여럿 전장에서 죽어나간 일도 부지기수였겠지요. 어느 정도 생활을 보장해주었고, 독신의 병사들에게는 민간의 과부를 징발하여(…이게 무슨 짓입니까-_-) 대 이어 병역을 질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때 부사자대(父死子代), 형사제대(兄死弟代)로 병역이 세습되었기 때문에 이를 세병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이러한 의미의 세병제는 조조가 처음 시행하여 손권과 유비에게도 받아들여졌고 이후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도 민병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2006/10/25 04:10 
 천공 수헌군의 의견에 사족을 붙이자면 촉나라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할 장군직으로는 거기장군과 아문장군이 있습니다. 이유인 즉 거기장군은 장비를 시작으로 제갈량이 권력독점을 행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척이 차지하게 되는데 거기장군의 지위나 당시 거기장군에 임명된 인물들의 활약을 볼 때 황권과 신권의 비율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문장군은 조운을 시작으로 하는데 조운이 맡고 있는 역할의 특수성을 제외하고 본다면 아문장군은 대체로 유비의 수족으로서 추후에 군권을 장악할 중요한 포석으로 성장시키기 위한(일종의 정해진 과정) 수단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조운에 대해 사족을 더 붙이자면 조운이 아문장군을 맡은 것은 아문장군이 가지고 있는 역할도 있지만 개인의 호위에서 집안의 호위라는 역할의 확대 측면이 강합니다. 조운이 유선과 감부인을 장판에서 구한 이후에 받은 직위가 아문장군인데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체로 가신으로서 집안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물론 다른 역할도 병행했습니다.). 그리고 조운 사후 이 역할은 조광과 조통에게로 이어지는데 조광이 호분중랑장 독행영군에 오른 점, 조통이 아문장군에 오른 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호분중랑장은 궁중의 수비를 담당하는 직위이고 아문장군은 장군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직위인데 모두 야전과 후방에서 황실을 보호할 여지가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후 시간이 나면 자세히 논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06/10/29 10:10 
 희지재 위연도 원래 선주의 부곡(部曲)에서 발탁돼 아문장군에서 승진했지요. 선주는 입촉 과정에서 주로 적벽대전 전후에 새로 얻은 인재들을 인솔해 들어가는데, 탁응과 황충, 위연 등은 파촉 정벌에서 특별히 공로가 높았던 장령들입니다. 황충이나 위연이 벼슬 오르는 것 좀 보세요. 형주에만 있었던 관우가 '그 늙은 졸개가 누구길래' 할 만큼 황충의 공로는 입촉과 한중쟁탈에 집중되어 있고 하후연을 벤 뒤 정서장군, 후장군에 올랐습니다. 위연은 한중왕이 한중을 맡긴 장령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006/10/29 10:10 
 천공 위연이 담당한 아문장군은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유비는 아마도 위연의 능력을 믿고 처음부터 주요한 요직에 임명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후에 한중태수 겸 도독에 올릴 때 극명히 들어나는데 유비는 여러모로 유방의 행적을 많이 참고하고 모방했는데 이때도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비 대신 위연을 승진 시키는 면도 그렇지요. 나중에 여기에 대해서 다룰 기회가 있을 껀데 그때 올려드리겠습니다. 2006/10/29 10:10 
 희지재 그런데 파촉을 서천(西川), 한중을 동천(東川)이라고 불렀다고 오래 알아왔는데 정원기 교수님이 번역하신 심백준의 책에는 서천(西川)이 위진시대보다 후기에 만들어진 말이고,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쓰여 있더군요. 하기는 분명 사서에도 농(隴)이나 촉(蜀) 운운할 뿐 동서천으로 기술한 곳은 못 보았습니다. 한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군요. 2006/10/29 11:10 
 희지재 참, <자치통감 삼국지>의 주석을 보면 '호분'은 황제의 행렬을 시위하고, '우림'은 궁전을 숙위합니다. 2006/11/01 07:11 
 희지재 어떤 기록에 의하면 조조가 그 때 허자장에게 들은 말은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이 아니라 ‘치세의 간적(奸敵), 난세의 영웅’이었다고도 하는데, 첫째 말은 치세 쪽이 상찬이고, 뒷말은 난세 쪽이 듣기 나아 이러한 차이점을 지적하는 논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웅은 원래 간특한 것 아닌가요?
허자장이 조조를 평가하는 일을 마뜩치 않게 본 것은 탁류 출신인 조조의 배경에 대한 불쾌감이 작용한 것인지. 겨우 인재의 출신으로 청탁(淸濁)이나 가리고 있다면 한심스런 노릇입니다. 방통이 그를 찾아온 허소에게 남긴 말이 배송지주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세속을 교화시키고 인물의 우열을 판단하는 점에서는 나는 그대보다 못 하지만, 제왕의 비책을 생각하고 인간의 돌고 도는 운명의 요체를 파악하는 점에 있어서는 내 쪽에 하루의 느슨함이 있는 듯 합니다.” 방통이 육적, 고소, 전종 등 오인(吳人)들과 나눈 인물평도 <정사>는 기록하고 있고, 방통이 인물평을 할 때 칭찬만 했던 이유 등이 적혀 있는데, 시대와 대결했던 방사원이 이름이나 까다롭게 따지던 허문휴 허자장의 무리보다 낫습니다.
 2006/11/17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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