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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2007-02-13 14:53:07
 희지재


 유표의 처세를 비난하는 글을 자주 봅니다. 코에이 게임에 너무 젖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190년의 연맹군 가운데 동탁을 극도로 위협한 것은 손견일 겁니다. 동탁이 사위로 들어오라고 제안했을 정도니까요. 손견은 북상하면서 형주자사 왕예니, 남양태수 장자니 하는 인물들을 싹 죽이고 그 세력을 다 흡수하는데요. 이 권력의 공백기에 발흥한 여러 세력들의 괴수 수십명을 한 자리에서 죽이고 형주의 혼란을 단번에 정리한 인물이 왕예의 뒤를 이어 자사가 된 유표입니다.


 유표는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 아닙니다. 동탁도 두려워한 장군 손견은 유표군의 화살에 죽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표는 필요할 때는 무력을 동원해서 영지의 안녕을 보장한 통치자입니다.


 그는 청류의 성망을 받아 팔준으로 꼽혔음을 잘 아실 겁니다. (비록 강하팔준이라는 명칭 자체에 다소 의문이 있고, 여러 사료에서 팔준 대신 팔급八及이나 팔우八友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별명들이 모두 어쨌건 청류인사 사이에서 유표가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유표는 키가 여덟자였는데, 리동혁의 정리를 기억나는 대로 되짚어보면 이 시대에 사서에서 팔척 이상의 장신으로 기록한 인물은 제갈양, 만총, 정욱, 초주, 마융, 정현, 노식, 팽양, 손소, 조운, 허저, 관녕, 유표 등 모두 열세명이라지요. 의외로 거의 문관들인데, 이 시절은 신장을 포함하여 관상이 다른 도덕적인 범주들과 나란히 인물품평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유표는 201년 이후 형주로 쫓겨들어온 유비를 잘 대접했습니다. 연의에서 비육지탄이나 마약단계(유비가 채모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울 때 적로가 삼장이나 되는 단계를 뛰어넘은 고사를 가리킵니다.)로 요약되는 이 시기는 소설에서 유비에게 매우 암담했던 시기처럼 비춰지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유비는 이 시기에 유례 없는 정착기를 보내면서 형주의 많은 명사들과 인연을 맺었고(향리 공동체로 조직된 호족사회였던 후한에서 그들과 인맥을 형성하는 정지작업 없이 한 지방을 확고한 연고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단견입니다. 예를 들어 조조는 유대가 죽은 직후 포신 등의 권유로 연주를 차지했는데, 얼마 안 되어 서주를 공격하다가 그만 연주의 호족들이 모조리 여포에게 항복하는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소설에서도 부호 전씨니 하는 인물들이 나오지요? 이때는 영지의 주인이 숱하게 바뀔 수 있는 난세고, 호족들은 당연히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하게 됩니다. 호족의 확고한 지지가 없으면 장기적인 통치는 어렵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오지요. 만일 유봉이 천공의 주장대로 형주의 명문가 자제라면 유봉은 바로 이런 과정으로 얻은 양자가 됩니다. 유비가 조조에게 쫓기며 노숙을 만나기 이전에 유표 밑의 창오태수 오거에게 의지하려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얻은 인맥 덕택이겠지요. 그때 유비가 교주에 갔다면 어땠을까요.), 특히 유표의 장자 유기와의 인연은 장차 그가 형주의 권력을 승계하는 데에 대단한 명분이 되어주었습니다. 개인사로 보더라도 유비는 바로 이 시기에 적자 유선을 낳았습니다. 천하를 전전하면서 처자를 숱하게 잃어버린 유비는 형주의 안정된 생활이 아니었다면 유선도 결국 잃어버리게 되지 않았을까요? 형주는 이때 유비 뿐 아니라 전란으로 황폐해진 화북을 떠난 많은 문인이나 민중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조조를 괴롭혔던 남양의 장수와 연합하고, 장수가 사라지자 신야에 유비를 주둔시키는 등 외부세력을 이용하는 다소 음흉한 전략을 사용할지언정, 무력을 함부로 써서 내부의 자원을 소모하지는 않았습니다. 덕택에 기른 십만의 병사와 강릉에 비축한 물자들은 조조와의 투항협상에서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조조는 당연히 그들을 대환영, 옛 유표의 아들과 신하 수십명을 열후에 봉하는 거지요.



 관도대전이 발발한 200년을 기점으로 208년까지 조조는 원가의 삼형제와 고간, 오환을 공격하느라 줄곧 북방에 있었습니다. 형주의 전진거점에 해당하는 신야에 머무르던 유비는 조조의 후방을 공략하고 싶어했지만 유표는 이런 계획을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코에이 게임이 아니고, 코에이 게임은 이 시대 정치의 특정한 성격을 시뮬레이션한 것에 불과합니다. 유표의 처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당시의 정세에서 정복전쟁과 천하통일만이 유일한 정치적 목표이자 전제인 것처럼 가정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유표의 중립적 처신 덕분에 형주의 백성들은 수십년을 전란 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을 동원하여 전란에 몰아넣은 것은 이 땅을 두고고 서로 침략을 거듭한 조조와 유비, 손권이지요. 개인의 야욕 때문에 동원과 유리, 강도, 강간, 살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민중들의 눈으로 본다면 삼국이 형주를 갈라놓고 있던 시절이 좋았을까요, 유표가 다스리던 시절이 좋았을까요? 사정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평화로운 기간에 발달한 학문과 예술은 유표 치하의 형주에서 살아온 건안문학의 필두 왕찬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유종의 평화로운 항복 결정으로 손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종이 조조 아래서 열후가 되고 청주자사가 되는 것이 조조, 유비, 손권 사이에서 불안한 형주자사 벼슬을 하는 것보다 못할 것이 뭐 있을까요? 유비가 후방에서 조조를 괴롭혀 원소나 그 아들들이 반사이익을 얻는다 한들, 이 심화된 혼란이 천하를 위해서 과연 좋은 일일까요.


 유표를 둘러싼 비난의 기저에 있는 전제들은 한 시대의 복잡한 성망사를 한갖 시뮬레이션 게임의 수준으로 낮춰버리는 조건에 불과할 겁니다. 정치는 적어도 일본인들이 만든 게임의 전쟁 커맨드보다는 복잡합니다.

덧글 7개
 천공 유표가 가진 군사력의 특성과 운용방법 그리고 각지로 배치해둔 군사력의 분배 등을 보면 그다지 군사에 눈이 어두운 인물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는데, 다만 그 부하들 중에서 군사적으로 확고히 보좌해줄 인물이 몇 없다는 것과 군권이 너무 친족 위주로 돌아갔다는 것이 흠일 뿐이지. 2007/02/14 01:02 
 희지재 어떻게 보면 ‘제하후조전’이라는 별도의 전까지 만들어진 위나라의 경우도 친족들이 군권을 잡았지. 명단을 보면 하후현을 제외한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조휴, 조진, 조상, 하후상 등은 모두 군권을 잡았고, 요절하는 바람에 명단에 들어가지는 못 했으나 조순도 호표기를 통솔했고. 손권도 손유, 손교, 손환, 손환, 손소 등 일족을 중요한 지위에 많이 기용했어. 유비처럼 뿌리 없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종족이 호족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유표는 산양 출신이라 형주 본토 출신이 아니므로, 채씨나 괴씨와 같은 형주의 전통적 호족들과 혼인 등을 통해 결탁해야 하고, 그런 뒤에는 그들에게 군권을 맡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 2007/02/14 01:02 
 천공 당연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인물들의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위나라의 하후씨나 조씨 같은 경우에는 능력이 검증된 자에 한해서 기용했는데 이는 조조의 능력중심적인 인재기용이 한몫한 경우이고, 오나라의 손씨의 경우 기존 호족들을 견제해야하는 측면에서 기용되었다가 후에 세력이 커져서 난감하게 변했던 경우이지. 유표의 경우에는 물론 네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 기반이 되어주기 때문에 채모나 장윤, 괴월 등을 기용해서 군권을 맡겼지만 그 효과는 빛을 발하지 못했어. 게다가 문빙과 황조 역시 확고하게 유표를 보좌해줄만한 '반석'은 아니었지. 인재가 없음이 아쉽고 친족들에게 군권을 분배해야만 했던(사실 유표는 꽤 오래 형주를 통치했어) 유표의 처지가 아쉬울 뿐이라네. 2007/02/14 06:02 
 희지재 한고조 유방의 공신 대부분이 그 고향 땅 사람들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의 천재들이 그 시대에는 모두 패 땅에서만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신임하고 발탁함으로써 그 재능이 더 계발되고 탁마되는 것 아닐까. 처음부터 준비된 장군이 있을까. 조인은 한 시대의 위대한 장군이 되었지만, 정사를 본다면 조인은 처음에는 그리 좋은 장군이 아니었지. 조조의 신뢰와 경험이 조인을 명장으로 성장시킨 것이고, 조인이 그런 군사경험을 쌓은 것은 조조의 정치노선이 외부지향적이었던 덕택 아닐까. 하후돈은 이류 호족으로서 어느 정도의 부곡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초기 군대를 구성한 것이지 당연히 전쟁귀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진짜 전쟁터의 악마 여포를 만나면 포로로 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고… 조조의 장점인 재능만 있으면 병졸 중에서 장군을 뽑아 썼다는 것도 부곡을 다스리는 종족, 호족층이 중심이 된 초기 군대의 성과가 있은 이후의 일이야. 왜 정사를 보면 가끔 세단가(世單家; 대대로 가난한 집안이었다)라는 말이 나올까? 이 시대 실력가가 되는 조건이 일반적으로 당연히 호족이라는 배경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경우 저처럼 특필하는 거지. 정치와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구조로서의 호족을 이야기할 때 아날학파의 레토릭을 빌리자면 인물론은 거대한 바다 위의 포말 같은 것… 물론 요새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본다면 아날학파도 한물 간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소한 플루타르크 영웅전식 역사보다는 나은 것 같네.
괴량 괴월 형제가 공적이 없나? 사실 자기중심적 역사기록이 유난스러운 오나라의 사료들에서는 황조가 번번이 변변치 못 한 전쟁을 하는 것처럼 나타나지만, 도대체 황조가 몇 년 동안 강동에서의 침입을 막아주었나를 생각하면, 끙. 채모나 문빙 등도 유표가 기용한 인물들인데, 그들의 재능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유표의 내부지향적 정치노선 때문일 뿐이지, 문빙만 해도 위나라에 간 뒤에는 제사에 올려지는 공신이 되지 않았나? 유표의 통치기간 동안 강동의 손가가 형주에 이를 갈았지만 어디 뜻을 성취했나? 손견이 피살된 것이 192년인데 손권이 황조를 죽여 복수한 것이 적벽대전이 일어난 208년이야. 내가 보기엔 208년의 이 전투도 오나라에게는 아주 인상 깊은 총력전인데… 기록을 보면 능통과 동습이 아예 목숨 걸고 돌격하지 않았다면 오나라의 승전은 이 때도 어려웠을 터프한 전투였더군. 뭐 겨우 황조 목을 땄으니 체면치레는 했으나 형주 남군 치소까지 들어가지 못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표가 형주목으로 부임한 동안 형주는 외침을 막고 내분을 진압하는 군사적 성과를 냈는데, 단지 조조와 같은 활발한 정복전쟁에서의 성과가 없었던 까닭으로 군사적으로 실패한 정권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연할 수밖에…
 2007/02/14 09:02 
 천공 유방의 공신들 중에서는 패군 출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사걸이라 불리는 한신, 장량, 진평-소하 제외-만 하더라도) 논외이고, 조조의 초기 군대를 구성한 친족들의 경우 조조에 의한 일종의 검증(임협이라는) 받은 경우라네. 그런데 유표의 장군들 중 괴월, 괴량은 참모성이 강한 이들이고 채모와 장윤은 별다른 활약이 없으며 문빙은 조조에게 가서 빛을 발한 인물이고 황조는 지형적 이점이 받춰졌기 때문에 손씨들에게서 승리 아닌 승리를 취한 인물이기 때문에 군권의 완성도를 놓고 보면 결코 유표의 군권구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어. 의문점이 생긴다면 주말에 보충해주겠네. 대신 장문이 될 것을 각오해야될꺼얌. 2007/02/16 10:02 
 희지재 써준 이야기에 대해 내가 할 답변은 이미 전에 쓴 답변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그만 하기로 하지. 유표가 형주를 다스리면서 곳곳에서 군사적 분쟁을 겪지 않은 것이 아닌데, 내가 그 분쟁들의 경과를 통해 유표 정권의 군사적 역량을 간접 추측하자고 한 것은, 그를 위한 큰 규모의 독립된 편찬이 없는 만큼, 傳 규모의 기사를 통해 그 시절 형주의 모든 고위인사를 포함한 엄정한 인물론은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
고작 위서에 傳 규모로 실린 정도─유표전, 원소전을 위서, 오서, 촉서처럼 다룰 수도 없는 일이고, 장합과 문빙 같은 항장은 위서에 傳을 남기지만 저수 안량 문추는 후대에 字도 알 수 없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엄정한 논의를 위한 정보의 전일성exclusiveness이 결여되었다는 건 자네도 동의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데. 자네라면 당장 채모 장윤이 구체적으로 어떤 군권을 장악하고 어떤 군사학적 오류를 저질렀는지 사서의 근거를 들면서 논술할 수 있나? 아니면 내가 말하는 정보의 결여를 활약이 없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내 말뜻은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일세.
심해와 포말의 아날학파 레토릭까지 운운하면서 마지못해 개진한 인물론에 대한 답변만 온 것이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군. 인물론이 유의미하지 않은 까닭에, 형주 군권의 배치가 바람직했는지 그렇지 못 했는지는 유표 통치기간 동안 군사력이 의도대로 기능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살핌으로써 간접적으로 추측하는 것이 옳다는 뜻일세. 장제를 죽였으면서도 장수를 이용한 수완, 손견을 죽였으면서도 손책과 손권의 침공을 방어한 공적, 몇 해에 걸친 장선 장역 부자와의 분쟁에서의 승리.
자치통감 200년 기사를 살피면, 장역을 궤멸시키고 장사, 영릉, 계양을 세력권에 합병한 뒤 사방 수천 리를 다스리고 10여만의 병사를 기르게 된 유표는 조정에 대한 공납을 끊고 교외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낸 뒤 주택과 복식 등을 모두 천자와 같게 했다는데, 이 기사를 읽을 때 내 감상은 두 가지. 첫째는 그의 의식이 팔준과 같은 청류 명사로 분류될 만큼 유교도덕에 충실하지는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태연히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 이런 면모는 유우와 비교하여 유표가 분명히 못한 점처럼 보이며, 이 방향에서 가해오는 비판이 본문의 논지를 파열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네. (그리고 나는 양습이나, 유복, 가규, 유우와 같이 선정의 사례를 남긴 이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겠지.)
 2007/02/16 08:02 
 천공 정치적으로 접근하는구랴. 난 정치적인 지식과 안목은 없으니 군사적으로 접근해보도록하지. ^^ 2007/02/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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