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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와 사마의2006-11-14 22:42:58
 희지재


 조조의 인재등용방침은 유재시거(唯才是擧)─재능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것으로서, 그의 포고문에 보이는 ‘불인불효(不仁不孝)’ 등의 대목들은 한조의 유학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청류 지식인들과 실리주의자인 조조의 가치관은 크게 달랐습니다. 조조는 인신(人臣)의 제일가는 지위로서 뭇 인재를 거느리면서도 젊은 날 건석의 아재비를 곤장 치던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조 아래 있으면서 장을 맞는 선비들이 많아, 조조의 속리로 벼슬길에 오른 하기(何夔)는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늘 독약을 품고 출사했다고 하지요. (이로써 하기는 장을 맞지 않았다는데, <삼국지>나 <자치통감>에서 볼 수 있고, 이공범의 <위진남북조사>에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하의 내용도 이공범이나 가와카스 요시오의 연구를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그의 인재경영방식은 비록 단시일 안에 난세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청류 호족 세력의 지위를 보장해주지 못 하는 방식인 까닭에 그의 정권을 장기적으로 지탱할 기반을 잃어버리는 길이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수백년동안 영속한 한조의 민중들도 당대의 관념을 지지했겠지요? 결국 조비의 대에 구품관인법이 제정된 것은 부친 대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입니다.


 구품관인법은 군마다 향론을 듣고 인재를 추거하는 군중정(郡中正)을 두어 지방의 인재들에게 향품을 매기고 이를 장차 관품과 일치시키는 제도입니다. (향품과 관품의 상관관계를 밝힌 연구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것이 선도적이었습니다. 그의 <구품관인법의 연구>는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후한 말 허정 허소 두 사람이 자주 열던 여남월단평이 향론의 대표적인 예이므로, 향론의 주요한 생산자는 청류 지식인들로, 경제적으로는 대개 호족 계층입니다. (사세삼공 명가의 원소조차 존경했다는 정현을 보면 빈한한 가문에서도 대학자가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이것을 예로 들어 청류의 경제적 기반이 호족이었음을 아예 부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논리입니다.)


 사마의가 고평릉에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로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설치해 군중정을 관할하게 하니, 주대중정제는 결국 향리의 인사권을 중앙에서 틀어쥐는 결과가 되어 육조귀족의 고착화로 이어집니다. ‘상품무한문 하품무세족(上品無寒門 下品無勢族)’이 공공연한 세태가 된 것도 사마씨에 의해 구품관인법이 한 차례 변성된 이후의 일입니다. 수당제국까지 이어진 중국 상류사회의 귀족적 성격은 이때 노정한 것입니다. <위진남북조사>의 저자 이공범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는데, 기실 이 글을 쓰는 것은 다만 이 몇 줄을 옮기기 위한 정지작업입니다.


 “사마씨의 가계는 하내(河內)의 일류 대족으로 의(懿)의 처는 하내산씨(山氏)이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조고(祖姑)이다. 의의 큰아들 사(師)의 처는 태산양씨(泰山羊氏)로 거유(巨儒) 채옹(蔡邕)의 외손녀이고, 둘째 아들 소(昭)의 처는 경학(經學)으로 유명한 동해왕씨(東海王氏)로 세가(世家) 출신이다. 조조의 처 변후(卞后)는 창가(倡家) 출신, 조비(曹丕)의 처 곽후(郭后)는 노비출신인 것과 견주면 사마씨와 조씨의 출신은 확연히 이질적임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인의 한 오픈백과가 이와 관련한 좋은 글이라서 주소를 옮겨봅니다.
 오픈백과 : 사마사의 후궁들 
 실제로는 황후로 추존된 여성들에 대한 글입니다.

덧글 1개
 희지재 조조는 탁류인 환관 집안에서 출발해(사서는 그가 한나라 조참曹參의 후예라고 적고 있지만, 환관이 들여온 자손이고, 조등에게 입적되기 이전의 근본도 알 수가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왕업에 정통성을 주려는 후대 유학들의 부질없는 가필입니다.) 오히려 당고지화에 관한 상소를 올리며 정치적 출생과 정치적 입장을 분리했습니다. 아버지가 별 치적 없이도 삼공의 한 자리인 태위 벼슬을 살만큼 집안의 재산은 대단했지만, 한편 형신(刑臣)의 자손으로 당대의 협량한 청류들에게 백안시 받기도 했지요. 낙양북부위만 해도 현위의 일종이라 조조는 처음에 그리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낙양현령을 바랐지요. 그를 낙양북부위로 뽑은 사마방司馬防과의 대화는 제가 청주병에 관해 쓴 글에서 전술했습니다.) 조조의 배경이 그에게 득이 된 지점과 실이 된 지점을 살피고 논의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2006/11/1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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