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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병2006-11-04 10:06:33
 희지재


 조조는 스물셋이 된 아들 자건(子建: 조식)에게 이런 글을 써준 적이 있다. “내 나이 스물셋이었을 때 돈구에서 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 이제 너도 스물셋이니, 애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돈구현령(177)으로서 조조가 한 치적은 정사의 기록이 간략해 알 수 없지만, 일곱해 뒤 서른에 제남상(184)이 되어 임지의 간인(奸人)들을 퇴출하고 사당을 폐해 온갖 헛된 제사를 금한 것이 알려져 있다. 스물에 이미 낙양북부위로 중상시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인 조조이니 돈구에서 했던 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팔달司馬八達의 아버지 사마방司馬防은 조조를 북부위에 추천한 인물이다. 처음에 조조는 북부위보다 낙양현령이 되고 싶어했다. 북부위는 그리 높은 지위가 아니었다. 현령 아래 현위를 하나씩 두어 현의 치안을 맡기는데, 낙양은 큰 곳이므로 현위를 다섯 두었고, 북부위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후에 더없이 고귀해진 뒤에 조조는 낙양에서 사마방을 만나 이야기하며 “이제 내가 북부위를 할 만하겠소?”하고 물었다. 사마방은 “그때는 마침 북부위를 할 만했습니다.” 하고 대답했고, 조조도 웃으며 이후 다시 괘념치 않았다.)


 기이한 일이 있었다. 조조가 죽은 유대(후한의 연주자사 유대劉岱. 양주자사 유요劉繇의 형이다. 두 사람 다 동래 모평 사람이다. 삼국지연의는 죽은 유대를 패국 사람 유대와 혼동하여 199년에 유비 토벌군으로 다시 등장시키고 있는데, 둘은 다른 사람이다. 이름과 자가 같아 이런 혼동이 일어났다.) 대신 연주목을 맡아 전임자를 살해한 청주의 황건적을 소탕하던 무렵에(192) 청주의 황건적들이 토포군의 수장에게 호의를 보인 것이다. 사당을 부순 제남에서의 일이 중황태을(中黃太乙)의 도(道)와 같은 것이라고 그들은 조조에게 써보냈다. 조조가 그들을 물리치자 그들은 조조에게 귀순했다. ‘위무지강(魏武之强: 위왕魏王으로 죽은 조조의 시호가 무황제武皇帝이므로, 조조의 강성함을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사서는 전한다. 실로 청주병을 받아들인 뒤 조조는 민간의 모병을 그만두었다. 청주병과 조조 사이의 사적 유대는, 조조 사후 청주병이 조비를 따르지 않고 북을 울리며 성을 떠나간 것을 보고도 짐작된다.


 황건적의 바탕은 호족의 토지겸병이 극심해진 후한말의 유민들로, 이들은 자구책으로 도적질이라도 해야 했다. 종교는 이들에게 새 왕조의 이상을 불어넣기도 했다.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黃天當立: 한왕조는 적제赤帝의 아들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나라로 오행의 화덕火德을 받은 왕조였으므로, 오행의 화생토火生土 원리를 따라 다음 왕조는 토덕土德을 받아야 한다는 설이 유행했다. 토土를 상징하는 색은 황색이다.)’의 노래가 그렇게 나왔다. 북한이 홍경래를 우상시하는 것처럼 사회주의 중국은 황건적을 태평도의 농민봉기로 보고 연구한다. 그래서 조조가 황건란을 진압하고 청주병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입장이 분분하다. 태평도의 농민봉기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어느 수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조조에 대한 평가가 나뉜다. 태평도가 균산균전(均産均田)의 공산주의 원리를 주장하지 않았고 다만 새 왕조 수립과 생계 유지의 봉건적 한계에 머물렀다고 한다면, 조조의 둔전제(屯田制)가 그들의 여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도 있다.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하여, 그 정당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지위에서 오는 것이지 그들 개인의 도덕적 우월성에서 오는 것이 아님은 여러 사회주의자들도 주지하고 있다. <구토>를 쓴 사르트르도 이러한 충고를 들었다. 그래도 청주병의 양민학살기록(정사 우금전. 이 때 우금의 행동은 매우 존경스러워 조조도 그를 익수정후益壽亭候로 올렸다. 관우의 작위인 한수정후漢壽亭候를 한의 수정후로 보는 태도는 비록 고의성이 짙으나 명백히 오독이다. 우금의 작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조조가 위공에 취임하기 전이라 공국公國이 있던 것도 아니며, 따라서 한의 신하나 조조의 신하를 따질 이유도 없다. 익수정의 후, 한수정의 후라는 뜻이다. 당시 군국郡國 아래 현縣, 현 아래 향鄕이 있었고, 십리일향十里一鄕이라 하여 향 아래 리里가 있었다. 향에는 또 몇 개의 정亭을 두었다. 후한의 열후列候는 현후, 향후, 정후의 순서였고, 열후보다 아래에 관내후關內候가 있었다. 열후는 세습이 인정되었고, 봉지가 있어 봉지의 세금을 향유했다. 현후, 향후, 정후는 그 봉지의 규모를 의미하며, 앞에 봉지의 이름을 붙였다. 관내후는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고 봉지가 없었으며, 다만 관중關中 즉 관내關內에서 약간의 조세를 거둬 받았으므로 관내후라고 했다. 관내후는 봉지가 없으므로 따로 작호가 없다. 그러므로 인터넷에 ‘작호를 관내후라고 했다’고 쓴 글은 모두 과문의 소치이다.)과 조조의 양민학살기록(서주를 진군하며 백성들을 몰아대어 강물에 빠져죽은 시신으로 인해 강이 흐르지 못 할 지경이었다는 기록. 그 위에 여포를 정벌하면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를 끌어대어 하비성을 수장했으니 서주의 민심이 조조를 따를 리 없었다. 199년에 유비가 조조를 배반한 것은 이런 민심의 덕택이다.)을 보면 그들의 여망이 의심되고, 그들을 받아들이기 두려워진다.

덧글 2개
 희지재 사회주의자들의 여망을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잘못 읽힐 수도 있겠군요. 음- ‘빨갱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오히려 그쪽에 호의적이지만 요즘은 레닌과 페미니즘 사이에 오간 ‘물 한 잔 논쟁’ 같은 것이 재미있더군요. 계급이론의 환원주의적 태도는 다소 두렵습니다. 대학강의에서 북한문학을 한참 읽을 때는 임화의 죽음이 두려웠고. 2006/11/04 10:11 
 희지재 한때 이문열에게 <삼국지>를, 황석영에게 <수호지>를, 최인호에게 <서유기>를 맡기고자 했다는 출판인의 말에 솔깃했었습니다. <장길산>을 읽고 나서야 황석영이 <수호지>를 번역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죠. 그래도 <장길산>을 중도에 내려놓은 것은 결국 같은 두려움입니다. 이념이 폭력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두려움, 그런 이들에게는 금기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윤리가 없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 폭력은 지배와 피지배를 혼동하게까지 합니다. 더욱이 <장길산>의 서사에서도 여성에게 섹스가 억압이자 자원인 가부장제적 요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두려움. <삼국지>를 커서 읽었다면 역시 내던졌겠죠. 조비의 두 황후 진씨와 곽씨에게 일어난 일들. 그녀들의 죽음은 그들의 지위가 처음부터 남성에게 귀속되어 있었음을, 즉 섹스가 그녀들에게 자원인 동시에 억압이었다는 점(처음부터 그녀들에 대한 주체가 오직 남성들이었음을 의미)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엄의 황후조차도 이름을 갖지 못 하는 시대. 장홍이 애첩을 죽여 장사들과 고기를 나눠먹은 일, 원소가 죽은 뒤 원소의 첩들이 당한 일, 조비가 하후상의 아내를 죽이고 이어 하후상이 무덤을 파헤친 일, 또 <연의>에서 사냥꾼 유안이 아내에게 저지른 일. 저는 정말 두렵습니다. 2006/11/0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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