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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료)열전2001-01-02 02:05:26
 요화원검


안녕하세요 요화원검입니다..희지재님도부탁하구 도무님도 장요가 알고싶다고 하길래 특별히 구해서 올립니다..

장요는 자가 문원(文遠)이고,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본래 섭일(攝壹)의 후예인데,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다. 그는 젊어서 군리(郡吏)가 되었다.
동한(東漢) 말, 병주자사(幷洲刺史) 정원(丁原)은 장요의 무예와 힘이 다른 사람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불러서 종사(從事)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수도로 가도록 했다. 하진(何進)은 또 그를 하북(河北)으로 보내 병사를 모집하도록 했는데, 천여 명을 모았다. 수도로 돌아왔을 때, 하진은 환관에게 패하였으므로 장요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탁에게로 귀의했다. 동탁이 환관들에게 실패한 후에는 장요는 병사를 이끌고 여포에게로 귀의하여, 기도위(驥都尉)로 승진했다. 여포가 이각에게 패하자, 장요는 여포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서주(徐州)로 달아났으며, 노국(魯國)의 상(湘)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28세였다.
조조가 하비성에서 여포를 무찌르자, 장요는 그 병사들을 인솔하여 조조에게 투항해 중랑장(中郞將)의 관직을 받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 싸움에서 공을 여러 번 세웠으므로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했다. 조조는 원소를 무찌른 후, 또 장요를 파견하여 노국의 각 현을 평정했다. 하후연과 동해(東海)에서 창희(昌稀)를 포위하여 공격했는데, 몇 달 후에 양식이 다 떨어져 병사를 물릴 것을 상의하게 되자, 장요가 하후연에게 말했다.
"며칠 내로 매번 포위하고 있는 동해성을 순시하면, 창희는 문득 나를 응시하게 될 것이오. 또 그들이 화살을 쏘는 것이 점점 적어질수록, 이것은 창희가 결정하지 못하고 미룬 것이기 때문에 힘들여 싸우지 못할 것이오. 나는 그를 만나 대화를 하여 투항을 권유할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창희에게 말했다.
"공(公 ; 조조)이 명령을 내려, 장요로 하여금 그것을 전하도록 했소."
창희는 과연 성을 내려와 장요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장요가 그에게 권하여 말했다.
"조공은 신같은 위무(威武)를 갖고 있고, 인자한 덕으로 천하를 편안히 어루만지고 있소. 먼저 그에게 의탁하는 자가 큰 상을 받을 것이오."
그래서 창희는 투항하기로 했다. 장요는 단신으로 삼공산(三公山)에 올라 창희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만났다. 창희는 매우 기뻐하며 그를 따라가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창희를 돌려보내고, 장요를 꾸짖으며 말했다.
"이것은 대장(大將)이 하는 방법이 아니오."
장요는 잘못을 시인하고 말했다.
"명공의 위엄과 신의가 사해에 빛나고 있으므로, 저 장요는 명공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었던 것이며, 창희는 감히 저를 해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장요는 조조를 따라 여양에 가서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중성장군(中聖將軍)을 대행하게 되었다. 조조를 따라 업성으로 가서 원상을 공격하였는데, 원상이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공략하지 못했다. 조조는 허창(許昌)으로 돌아왔지만 장요와 악진(樂進)을 보내 음안(陰安)을 공격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황하 남쪽가로 옮기도록 했다.
또 조조를 따라 업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또 병사들을 인솔하여 조국(趙國). 상산(常山)을 점령하고, 산을 따라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과 흑산적 손경(孫經) 등을 불러 투항하도록 했다. 조조를 따라 원담을 공격하자 우너담이 패배하였고, 또 병사를 이끌고 해안지대를 공략하였으며, 요동(遼東)의 적 유의(柳毅) 등을 격파했다. 업성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친히 나와 장요를 맞이하여 그와 함께 수레를 탔으며, 장요를 탕구(湯究)장군에 임명했다. 또 따로 형주(荊州)를 공격하여 강하(江夏)의 여러 현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임정(臨精)에 주둔하였으며, 도저후(都亭侯)로 봉해졌다. 조조를 따라 유성(柳城)에 가서 원상(袁尙)을 정벌하는데 갑자기 적과 마주친 장요는 의기가 격양되어 조조에게 싸울 것을 권하였고, 조조는 그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자신이 사용하던 큰 기를 장요에게 보내주었다. 마침내 공격하여 원상을 크게 이기고, 선우(禪于) 답돈(踏頓)의 머리를 베었다.
당시 형주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장요를 보내 장사(長社)에 주둔하도록 했다. 출발하려고 할 때, 군중(軍中)에서 어떤 자가 모반을 하여 밤 사이에 군중은 혼란스러웠으며, 불을 놓았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불안해 했다. 장요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망동하지 마라. 이것은 한 진영 전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반을 하려는 자가 있어 인심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일 게다."
그리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모반하지 않은 자들은 편안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 장요는 친히 병사 수십 명을 이끌고 군영 중앙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을 평정시키고, 모반을 주동한 자를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진란(陣蘭). 매성(梅成)이 저족(低族)의 거주지인 여섯 현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우금(牛禁). 장패(藏覇) 등을 보내 매성을 토벌하도록 하고, 장요는 장합(張合). 우개(牛蓋) 등을 감독하여 진란을 토벌했다. 매성이 거짓으로 우금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우금은 돌아왔다.  매성은 그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진란에게로 달려가 첨산(籤山)으로 돌아들어갔다. 첨산 속에는 높이가 20여 리나 되는 천주산(天柱山)이 있는데 길이 좁고 험난하여 걸어서만 통과할 수 있는 곳이다. 진란 등은 산 위에 진영을 설치했다. 장요가 나아가 공격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병사들이 적고 길도 험난하므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곤란합니다."
장요가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 대 한 사람의 전투요. 용맹한 사람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소."
그리고 산 아래로 진군하여 진영을 두고 공격하여 진란과 매성을 죽이자, 그들의 부하는 전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많은 장수들의 공을 논하면서 말했다.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험준함을 밟고 진란과 매성을 취한 것은 탕구장군의 공이오."
식읍을 늘려주고 부절을 주었다.
조조는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후, 장요를 파견하여 악진(樂進)과 이전(李典) 등에 7천여 명을 인솔하여 합비(合肥)에 주둔시키도록 하였다.
조조가 장조(張曹)를 토벌할 때, 호군설제(護軍薛悌)에게 명령서를 주며 겉봉에 이렇게 썼다.
"적이 오면 뜯어 보시오."
오래지 않아, 손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였으므로 여러 장수들은 함께 편지를 뜯었는데,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만일 손권이 오면 장요와 이전 장군은 나가 싸우고, 악진 장군은 성을 지키며, 호군(護軍 ; 설제)은 싸움에 참가하지 마시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의심스러워 했지만, 장요가 말했다.
"조공께서는 밖으로 원정갔으니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면 적은 반드시 성을 공격하여 즉시 부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오. 때문에 그들의 예기를 꺾고 뭇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평안하게 한 연후에는 성을 지킬수 없소. 성패의 관건은 이 싸움에 있는데, 당신들은 또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오?"
이전도 장요와 의견이 같았다. 그래서 장요는 밤에 있을 용기있는 병사들을 모아 8백 명을 얻었으며, 소를 죽여 장사들에게 상으로 주고 다음날 큰 싸움에 대비했다. 날이 밝을 무렵 장요는 갑옷을 입고 긴 화극을 갖고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장수 두 명의 목을 베고는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외치며 적의 진영 안으로 뚫고 들어가 손권의 큰 깃발 아래 도착했다. 손권은 매우 놀랐으며,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물러나 작은 산 위로 올라갔으며, 장요는 긴 화극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장요는 맞아 싸우지 않는 손권을 질타하였으나 손권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장요가 이끄는 병사가 적은 것만을 관망하다가 병사를 집결시켜 장요를 몇 겹으로 포위했다. 장요는 좌우로 맹렬히 적을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었고, 부하 수십 명을 인솔하여 나왔는데, 남아 있던 사병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장군! 우리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장요는 또 포위망을 뚫고 나아가 남아 있던 사병들을 구출하였다. 손권의 병사와 말은 모두 무너져 내려 감히 대항하려는 자가 없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전투를 하여 오나라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였으므로, 장료는 병사를 줄여 수비를 공고히 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곧 안정되었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장요에게 감복했다. 손권은 합비성을 10여 일 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공략할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장요는 여러 군사를 인솔하여 추격하여 하마터면 손권을 다시 사로잡을 수 있었다. 조조는 장요의 용맹함을 매우 칭찬하고 정동(征東)장군을 수여했다.
건안 21년(216)에 조조는 또 손권을 정벌하려고 합비성에 도착하여 그 해 장요가 전투했던 곳을 순시하고 오랫동안 감탄했다. 곧 장요의 병사를 증가시키고, 군사를 많이 머물게 하며 주둔지를 거소(居巢)로 옮겼다.
관우(關羽)가 번현(樊縣)에서 조인(曹仁)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을 때, 마침 손권이 위나라의 신하라고 일컬었으므로, 조조는 장요와 여러 군사들을 불러 모두 돌아가 조인을 구하게 했다. 장요가 도착하지 않아서 서황(徐滉)이 이미 관우를 격파하고 조인의 포위망을 풀어주었다. 장요와 조조는 마피(摩陂)에서 회동했다. 장요의 대군이 도착하자, 조조는 수레를 타고 나와 그들을 위로하고는 돌아가 진군(陳郡)에 주둔했다. 문제(文帝)가 즉위한 후, 장요는 전장군(煎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왕은 장요에게 비단 1천 필과 곡식 1만 석을 하사했다. 또 영지를 나누어 형 장범(張汎)과 한 아들을 열후로 삼았다.
손권이 또 모반하자 장요를 합비로 돌아가 주둔하도록 하고, 장요의 작위를 도향후(都鄕侯)라고 했다. 황제가 타는 수레를 장요의 모친에게 보내고, 병사와 말을 보내 장요의 식구들을 주둔지로 보내도록 하면서, 아울러 장요의 모친이 도착했을 때 의장대가 나가 영접하도록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장요의 지휘하에 있는 여러 군사. 장리(將吏)는 모두 길 옆쪽에 줄지어 인사를 하였고, 보는 사람들은 모두 장요가 영예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황제의 작위에 오른 후, 장요를 진양후(晋陽侯)에 봉했으며, 식읍 1천 호를 증가시키니, 이전의 것과 합펴 2천6백호가 되었다.
황초(黃初) 2년(221)에 장요는 낙양객(洛陽客)으로 조(朝)하였는데, 문제는 건시전(建始殿)에서 장요를 접견하고, 친히 오군(吳軍)을 무찌를때의 상황을 물었다. 문제는 장요의 말을 들은 후 감탄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또한 고대의 용장 소호(召虎) 같구나."
그를 위해 저택을 짓고, 또 특별히 장요의 모친을 위해 어전(御殿)을 만들었고, 장요를 따라 오군을 무찌른 사졸들을 모두 호분랑(虎賁郞)으로 임명했다. 손권은 다시 신하라고 칭했다.
장요는 군사를 돌려 옹구(雍丘)에서 주둔하였는데, 질병에 걸렸다. 문제는 시중(侍中) 유엽(劉曄)을 보내 태의(太醫)를 데리고 가서 그의 병을 보도록 하였다. 근위병들은 똑같이 소식을 물어 길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질병이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문제는 장요를 영접하여 그가 사는 곳으로 친히 수레를 타고 가서 장요의 손을 잡고, 황제가 입는 옷을 주었으며, 태관(太官)들은 매일 황제가 먹는 음식을 보냈다. 질병이 조금 좋아지자 장요는 주둔지로 돌아갔다. 손권이 또 모반하자, 문제는 장요를 보내 조휴(曹休)와 배를 타고 해릉(海陵)에 도달하여 강가에 주둔하도록 했다. 손권은 매우 두려워하며 장수들에게 경계의 말을 했다.
"장요가 비록 병이 들었지만, 용맹함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를 조심하시오!"
이 해, 장요는 장수들과 손권의 장수 여범(呂範)을 무찔렀다. 장요는 병세가 위독해 강도에서 죽었다. 문제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으며, 시호를 강후(剛侯)라고 했다. 아들 장호(張虎)가 작위를 계승했다.
황초 6년, 문제는 장요. 이전이 합비에서 전공을 세운 것을 추념하며 조서를 내렸다.
ㅡㅡ 합비성 전투에서 장요와 이전은 병사 8백 명을 인솔하여 적 10만 명을 무찔렀으니 예로부터 용병(用兵)에 있어 이것을 뛰어넘는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 적의 전의를 잃게 만들었으니, 국가의 수호자라 고 할 수 있다. 장요와 이전의 식읍 가운데 각기 1백 호를 분할하여 한 아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라.
장호는 편장군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장호의 아들 장통(張統)이 작위를 계승했다.
이상으로 촉의용장 요화원검이었습니다..

덧글 1개
 천공하후패 요화님... 알게 모르게 덕을 보고있는 천공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2001/01/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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