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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紹本初 님이 예전에 쓰신 글- 원소의 장(長)2001-06-11 19:23:55
 난세간웅


이번에는 이어지는 2편.. 본초님이 원소의 장점을 논한 글입니다.

상당히 훌륭한 논지라 여겨집니다. 강추~





-하북(河北)을 통일하고 조조와 자웅을 겨루며 화북(華北)의 양대세력 중 하나로 천하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원소....삼국지연의에서 관도전투 부분을 보면, 조조와 원소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원소에게는 성격상의 결함이 있었고, 후에는 그의 패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소에게는 조조가 갖지 못한 이점이 있었습니다(물론, 이런 이점들을 가지고도 패한 데에는 그의 잘못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1. 원소는 사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 점은 분명 원소에게 커다란 이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때는 실력이 우선시되는 난세였으나, 아직도 도처에 호족(豪族)들과 사인(士人) 세력이 산재하여 지방 토착 세력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으며, 천자(天子) 주변에도 중앙의 명문 귀족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방의 호족들과 중앙의 귀족들에게는, 후한을 쇠(衰)의 길로 접어들게 한 환관 세력의 거두(巨頭) 조등의 손자인 조조보다는 삼공을 배출한 대명문가 출신의 원소가 훨씬 나은 인물로 비쳤을 것입니다.
또, 관도전투 무렵 원소의 세력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해있었고, 군사력도 조조의 배 이상이었습니다. 뛰어난 전략적 식견과 안목을 갖지 못한 범인(凡人)들에게는 원소의 승리가 자명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만큼 원소는 지방의 호족을 비롯한 지방 토착 세력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고, 천자와 가까운 대귀족들의 협력을 얻을 수도 있었으며, 승자에게 붙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을 끌어모을 수도 있었습니다.

2.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 경제력, 군사력에서의 우위
관도전투가 일어난 서기 200년 당시, 원소는 하북 4주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기주 3군 6국, 청주 2군 4국, 병주 9군 전체와 유주 10군 1국에서 요동과 요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에 원소의 세력이 미치고 있었는데, 현대에는 양자강 유역에 비해 훨씬 척박한 땅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가장 살기 좋은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조조가 천자를 모시고 새로운 기반으로 삼은 허창 부근 - 예주 영천군 일대는 황건적의 난 당시 하남 최대의 황건적 근거지였으며, 관군과의 오랜 대치로 그만큼 척박해져 있었습니다(물론 기주 거록군은 황건적의 난이 시작된 곳이지만, 관군과 황건적 사이에 정말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주로 하남입니다. 낙양 가까운 곳에 접근해 와야만 그나마 싸운 시늉을 한 게 당시의 부패한 관군이었죠). 게다가 동탁에 의해 낙양이 초토화되는 등, 하남은 하북에 비해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겁니다.
그러니 경제력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었죠. 원소는 이러한 경제력의 우위를 발판삼아 군사력에서도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조조와 원소가 균형을 유지했던 것은, 하남에 많은 황건적 잔당이 남아있던 것을 조조가 흡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하북과 하남의 전략적 위치
한 때 원소와 하북을 양분했던 공손찬이 패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새외민족(塞外民族)에 대한 강경책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손찬의 멸망에서 교훈을 얻은 원소는 오환족을 비롯한 유주, 병주의 이민족들에 대해 회유책을 사용했으며, 요동의 호족 공손씨와도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 결과 배후가 안정된 원소는 정면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조조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조조가 차지한 중원(中原)은 말 그대로 천하의 중심으로, 그만큼 포위되기도 쉬운 곳이었습니다. 동남에는 강동의 손책이, 남에는 형주의 유표가 버티고 있었으며, 서로는 한실(漢室)의 재흥(再興)을 꿈꾸는 마등이 서량에 웅거하고 있었습니다. 손책이 원소와 손잡고 조조를 치려던 찰나에 죽지 않았다면, 조조는 하북과 강동의 협공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조조에게 위협적인 요소였는데, 즉 조정의 반(反)조조 세력이 보다 많은 조조의 적과 연합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조조가 동승 일파의 숙청을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입니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방대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조조의 많은 적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었던 원소는 결국 그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축록(逐鹿)에 뛰어들어 두각을 나타냈던 일세의 영웅이었고, 천하통일의 대업에 가장 먼저 다가갔던 인물이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글 1개
 난세간웅 본초님이 강한 부분= 원소론과 지리!! 2001/06/1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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