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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학살2008-11-02 01:19:18
 희지재


 1
 조맹덕이 혁신가 카이사르라면 제갈공명은 공화파 키케로였다. 키케로가 보호한 공화주의적 미덕이 귀족지향적이라는 점도 그들은 닮아 있다. 카이사르가 결코 스스로는 제왕의 왕관을 사양했다는 점도 그들은 닮았다. 그들은 모두 명문장가였다. 키케로가 <우정론>을 썼고 카이사르가 <갈리아전기>를 쓴 것처럼 맹덕에겐 <호리행>과 <단가행>이 있고 공명에겐 <전출사표>와 <후출사표>가 있다. 조조가 장군이면서 시인이었다면, 제갈량은 재상이면서 발명가였다. 위무제는 중앙정권의 승상 녹상서사였고, 제갈무후는 지방정권의 승상 녹상서사였다. 두 사람은 모두 유가적 소양 위에 법가적 정책을 시행했고, 재능과 포부가 넘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당대인들에게 증오 받고 후대인들에게 간적이 된 반면 다른 사람은 당대인들의 흠모를 사고 후대인들에게 지혜의 거울이 되었다.




 2
 그런 차이를 만든 중대한 사건은 조조의 서주 학살이다. 이 사건은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조조는 청주의 농민군들에게 종교적 비전 대신 정치적 비전을 제공했다. 조조의 장례 때 북을 울리며 업성 밖으로 떠나간 이 독특한 집단은 조조와 계약관계에 매여 있었다. 전임 연주자사를 죽일 만큼 강력한 군사적 집단을 자원화함으로써 조조는 정사에 기록된 ‘위무의 강’을 펴나갈 수 있었다. 적대했다면 조조가 이길 공산은 없었다.
 사서에 그들의 인구가 백만으로 전한다. 농업생산을 위한 경제적 노동력이자 군사적 자원이었다. 1인당 전투력이 고만고만하던 시절에 수적 확충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조조에겐 보상해줄 토지가 없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약탈경제 세력이었다. 하후돈 통솔 하에서 심각한 민간 약탈을 일으켜 우금이 처벌한 사례가 남아 있다.
 계속된 민란으로 토지생산성이 저하되고 중국 전역이 제 2차 한랭기에 있던 시기였다. 더구나 메뚜기떼가 발생했고, 중앙정정불안에 의해 유발된 인플레이션은 화폐를 사실상 못 쓸 것으로 만들었다. (조조는 하북 통일 후 화폐납을 현물납으로 대체했다.)
 서주 대학살은 경작권자로부터 유리된 토지를 획득하려는 시도로 이해돼야 한다. 원래 황하와 회수 사이의 황회평원은 두 강이 하류로 날라온 비옥한 퇴적토로 인해 중국 동부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이 군사작전은 유비와 여포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그러자 군관인 한호와 조지가 제안한 것이 둔전제였다. 군인이면서 경작자가 되는 토지제도다. 이 때 창안한 둔전제와 직업군인제인 세병제가 조조 정권의 기반이었다.
 이 시기 서주를 승계한 유비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희소했을 것이다. 그것이 조조에게 쫓겨난 여포를 서주 입구에 영입한 이유이다.


덧글 13개
 무적위연 서주 대학살이 청주병에게 줄 땅을 얻기 위함이라는 건가요? 2008/12/27 12:12 
 희지재 네, 조금 건방지게 써서 그렇지 그냥 제 생각입니다. (권위자의 확인이 없었다는 뜻이지 비판하지 말아달란 뜻이 아닙니다. 모든 생각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당화하는 논지로 읽히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normative한 의미에서 기술한 게 아니니까요. 2008/12/30 05:12 
 룰룽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조조의 서주 진공 당시 조조의 행보를 보면 청주병에게 줄 땅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보긴 망설여집니다. 후한서, 통감, 삼국지에서 대충 선후관계를 추려보더라도, 대체로 조조가 서주의 공략에 실패할 경우에 소위 "서주민들을 개돼지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식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청주병을 위한 근거지 마련이었다면 굳이 공략 실패시에 백성들을 잔륙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원래 조조야 얻은 땅의 백성들이나 이민족들 싸그리 이주시켜서 빈땅을 채우는 일을 종종 자행하긴 했었는데(대체로 기록이 남아 있지요), 조조가 서주를 얻은 뒤에 이러한 기록이 따로 보이는 것도 아니구요

적어도 서주학살건은 성정이 거칠고 잔혹한 조조의 한 일면을 나타내는 일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04/02 09:04 
 희지재 모자란 글을 읽고 좋은 의견까지 남겨주신 데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위무제의 성정이 엄격하고 강퍅했던 부분은 사료에서 확인됩니다. 그는 사람을 의심하는 성격으로 그려져 있고, 수하 중에 늘상 독약을 품고 출사하는 인물이 있을 정도로 사대부들에 대해 태형을 가하는 일이 흔했고, 공신인 순욱, 최염, 모개를 제거한 과정이나 서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을 살펴보아도 전부 조조의 의심 많고 잔혹했던 일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터에서 민간에 대한 약탈은 거의 당연히 벌어지는 일이라서 보통은 그 부분의 언급은 굳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손책이 약탈을 안 해서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었다'는 식의 기록이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위무제는 서주에서 특별하게 많이 백성을 살육해서 특별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왜 조조가 다른 때가 아니라 그 때, 다른 곳이 아니라 서주에서 그런 학살을 행했냐는 것이고, 그건 설명돼야 하는 부분입니다. 위무제의 성격이 영향을 끼쳤다는 건 인정하지만 한 역사적 인물의 성격이라는 것은 보통 그의 일생동안 유지되는 상수인데, 서주학살사건이라는 (종속)변수를 설명하는 것은 (독립)변수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저 글은 그 부분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답변입니다. 주어진 토지에 대한 인구 압력의 증가에 대해서 조조가 정책적으로 반응한 것이 서주 학살이라는 얘깁니다. 토지와 식량이 필요한 새로운 인구가 대거 유입될 경우에 한 가지 방법은 토지를 주는 겁니다. 자기 내부의 것이든 자기 외부의 것이든 주어야 하는데 전자가 약탈이고 후자가 전쟁입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토지생산성을 올리는 것입니다. 조조는 연주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연주의 전통지역질서 자체를 해치는 것은 금기시되므로 맨 첫 번째 가능성은 제외됩니다. 그 다음 조조가 선택한 게 서주에 대한 전쟁이었고, 마지막 방안을 실천한 게 둔전제였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연주 내의 좋은 토지를 빼앗아서 줄 수는 없었고, 서주의 좋은 토지를 전쟁을 통해서 획득하려고 했는데, 이 시도가 실패하고 나자 다시 자기 세력권의 나쁜 토지를 개간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제의 잔인한 군사행동은 궤를 넘어선 것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형주에서 10만 인구가 유비를 따라 도망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겠습니다.
삼국지 무제기만 봐서는 공략 실패시에 백성을 잔륙한 것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불행히도 자치통감은 다른 곳에 보관해서 지금 갖고 있질 않네요.) 몇 차례의 진공과 함락 기록 뒤에 잔륙 기사가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확히 언제 잔륙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고, 서주작전 전반에 걸쳐서 이런 살육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제가 후한서를 읽어보지 못 했으니 해당 내용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2009/04/03 05:04 
 희지재 승상이 될 때 공융, 위공이 될 때 순욱, 위왕이 될 때 최염을 죽인 과정 역시도 조조의 잔인함만이 아니라 정책적인 계산까지도 갖고 있는 듯한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기회가 닿으면 논의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건들이 단순히 조조의 인격적 결함 혹은 정보실패나 실수로 치부되는 전형적인 해석방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2009/04/03 05:04 
 룰룽 일단 희지재님과 백성 잔륙에 대해서는 컨센서스를 이루는 것 같아서 그 부분에 대해선 말씀 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삼국지의 경우 조조에 대한 곡필로 인해서 후한서 도겸전 등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주에서의 백성들에 대한 잔륙에 대해서 대체로 그 인상을 흐린 듯한 느낌이 강하거든요. 예를 들면, 조조의 서주 1차 공략뒤 백성에 대한 잔륙 부분에 있어서, 삼국지 위서 도겸전의 경우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라고 표현되어, 그 잔륙 대상자를 불분명하게 처리한 반면에, 조만전의 기사에서는 "태조가 당도하여 사수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후한서 도겸전의 경우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도겸전의 기술은 진수의 곡필로 보인다는 거죠. 실제로 통감에서는 조만전의 기사를 대체로 수용하였구요.

결국,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후한서나 아니면 이런 텍스트들을 바탕으로 정리한 통감이 중요한 소스가 될텐데요(그렇다고 삼국지 소스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 이러한 소스들을 바탕으로 볼 때, 서주공략은 크게 193년과 194년에 2차례 있었습니다.
1차 침공은 193년이었는데, 이떄는 크게 두차례의 잔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팽성에서의 갱살(시체로 강물이 막혔다는 표현)과 하비일대에서의 잔륙(개돼지까지 도륙하였다)이 기록으로 남아 있구요, 특히 하비일대의 잔륙의 경우는 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담현을 공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이내 떠나서 취려, 수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해 차지하고 이들을 모두 도륙하였다" 또한, 후한서 도겸전의 경우 "도겸이 담성(郯城)으로 물러나 지키니, 조조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되돌아갔다.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취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城保=城堡]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 는 표현과 같이 점령 실패 뒤에 그 일대를 잔륙한 것으로 나와 있지요.

194년 2차의 경우, 낭야, 동해 일대를 공략했었습니다. 무제기에서는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륙)한 곳이 많았다", 순욱전의 배주 조만전의 기사에 따르면 " 조조가 사마 순욱, 수장령 정욱을 시켜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땅을 공략하며 마침내 낭야, 동해에까지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시켰다"라고 나와 있듯이, 여포의 연주습격으로 회군 할 때 까지 행군 중 수차례 백성들을 잔륙하였습니다.

조조의 행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딱히 근거지를 확고하게 점거한 적도 없을 뿐 더러 1차의 경우 담현 공략이 실패하자 돌아가면서 그 일대를 도륙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2차의 경우는 더욱 극에 달해서, "지나는 곳 마다 잔멸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구요.

조조의 서주공략은 사실상 전략적으로 성공한 케이스가 아니기에, 그 의도를 알기야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근거지를 마려하기 위한 전쟁에서 확실한 근거지가 없는 상태에서 행한 백성들에 대한 잔멸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 목적이었더라도, 적어도 공략 실패시에 백성들을 잔멸한 것은 분풀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구요.
 2009/04/09 12:04 
 룰룽 후한서 도겸전은 파성에서 子明역 후한서 도겸전에서 발췌, 그 밖에 모든 소스는 파성 정사자료실 및 권중달 선생님의 자치통감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09/04/09 01:04 
 희지재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아주 꼼꼼하게 적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룰룽님의 입장이 이미 충분히 제 주장에 대해서 반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기왕 내친 걸음인 만큼 논의를 조금 더 발전시켜보기 위해서 앞서 제가 펼친 논리를 연속시키면서 해당 사료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193년, 194년에 공습중을 포함해 회군하기까지 계속해서 백성들과 동물들까지 잔륙하고 약탈한 것으로 해석되는 기사입니다.
지도자의 심리적 난폭성으로만 문제를 환원시키는 것의 어려움은, 194년까지 지속적으로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것에서 나타나는데, 이렇게 장기적으로 한 곡창지대에서 소탕작전이 지속됐다면 개인 감정을 넘어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전쟁범죄이고, 중립적으로 말한다면 정책적 성격도 개입해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구 증가로 전쟁을 위한 곡량이 부족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해와 전해 밑의 유비가 도겸을 구원하러 왔을 때도 유비가 소패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조조는 군량미가 떨어져서 회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기사가 있는데(자치통감 194년조), 군사작전을 하면서도 군량미를 확보하지 못 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생각을 뒤집어 보면 오히려 부족한 곡량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전쟁과 약탈이 시도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거점을 다 잃어버린 상태로 여포와의 전쟁도 치러야 하게 되는데, 그럴 때는 새로 개척해서 식량을 길러낸다는 자연의 1년 사이클을 기다릴 시간은 없으니 곡창지역 백성들을 잔륙하고 곡식을 빼앗는 것이 급한 대로 가장 신속한(물론 후유증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입니다만) 방안은 될 수 있습니다. 회군 중의 잔륙은, 어차피 이후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계속해서 군사적으로 개입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다면 최소한 해결될 수 없는 의문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조조는 상당히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나 추론하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 때문에, 이 위기를 잘 처리하면서 조조는 중원 최강의 군사집단 중 하나를 확보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설명으로는, 원래 약탈집단이었던 청주병에 대한 장악 및 통제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들이 종교집단이었기 때문에 초기적이나마 자기들의 교단체계를 지휘체계로 이용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들을 처음부터 완전히 조조 세력의 원래 심복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완성에서 우금이 청주병의 약탈을 처벌하자 청주병들이 조조에게 찾아가서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재미있죠. 청주병은 조조가 죽은 해에 북을 울리면서 업성에서 일제히 떠나갔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 보면, 청주병은 심지어 220년까지도 완전히 융화되지 않은 별개의 조직체계를 갖춘 집단으로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신앙인 태평도는 한중 오두미교 세력의 중원 이주로 인해서 하나로 합쳐져서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요한 종교인 천사도라는 것으로 통합되기도 하죠. 그렇게 본다면 청주병은 독자적 조직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초기에는 이 집단의 성격을 조조가 완전하게 규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조는 생애에 장수, 손권, 마초 등의 집단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실패를 겪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주와 같은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만약 제 가설이 빗나간다면, 서주학살이라는 변수를 설명하는 다른 변인이 원인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조조의 잔인한 성격은 상수이기 때문에 변수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 과학적 설명의 기본 공리입니다. 부친상이 그의 잔인성을 증폭한 원인의 일부분일 수는 있지만 한고조 유방이 보여줬듯 전란기의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네가 내 아버지를 죽인다면 내게도 국 한 그릇을 보내다오’하는 종류의, 범인이 가질 수 없는 윤리초월적인 성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완벽한 설명 제공이기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변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룰룽님께 고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2009/04/10 01:04 
 희지재 그리고 제가 최근에 수업의 일부로 중국중세사를 듣고 있는데 예전에 썼던 글들의 오점들이 눈에 밟혀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글도 아니고 많이 읽히는 글도 아니라서 남들한테 덜 민폐이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룰룽님 같은 분의 많은 비판 부탁드립니다. 지식이라는 건 사후성이 허용되는 영역이라서 나중에 보면 틀렸다고 생각되는 걸 고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 장점이죠. 여전히 범하고 있는 초보적인 실수, 가설 설계의 무리수, 결론 도출과정에서의 오류와 맹점, 사실관계의 누락 혹은 왜곡, 이런 것들을 콕콕 짚어주세요 :-) 2009/04/10 11:04 
 룰룽 ㄱ. 질문글에 대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 어차피 논의라는 게 진득허니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ㄴ. 겸양하는 말씀이 아니라, 희지재님의 위진남북조사에 대한 지식은 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고 넓은 것 같습니다. 다만, 희지재님 활동무대가 워낙에 사람들 인적이 드문 정삼연 동호회다 보니깐 다른 사람과의 인터렉션이 작아서 때떄로 오점이 생기는(희지재님 입장에서 말이죠 ^^) 글들이 있는 거겠죠.
저도 삼국지가 좋아서, 국역된 사서라도 뒤져 보고, 기타 온라인 동호회도 기웃거려보고 있습니다만, 결정적으로 한문 에 까막눈이고, 위진남북조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해서 아직 배워야될 입장에 불과합니다(사실 정삼연에서도 많이 배우고 있구요)
 2009/04/11 01:04 
 룰룽 제가 그나마 가진 지식 역시 디씨 삼국지 갤러리에서의 수많은 난상토론 및 그나마 몇개 뒤져본 위진남북조사 관련 개설서(정삼연에서도 종종 소개 되는 미야자키 이치시다씨의 중국중세사, 구품관인법의 연구, 이공범씨의 중국중세사 등의 개설서 등)에서 많은 부분 기인 되었고, 아시다시피 이정도 지식으로는 사실 초보라고 불리우기도 민망할 정도이니, 희지재님의 글에 얼마나 보탬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 하여간 사회생활을 하는 지라 자주 방문하기는 힘들겠지만, 종종 와서 글도 계속 읽겠습니다 ^^ 2009/04/11 01:04 
 희지재 정삼연도 예전에는 상당히 붐볐는데요, 제가 동호인계에 처음 흘러들어왔을 때는 10년도 더 전이라 白眉라든지 삼국지웹진(daum 삼국지클럽에서 만든) 같은 개인적 도메인을 가진 좋은 웹페이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정원기 교수님이 올려주시는 글들이 좋아서 여기 정착했었는데, 몇 번의 리뉴얼을 거쳤지만 구회원들은 상당히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白眉, 삼국지웹진 같은 곳들은 피로현상을 겪으면서 사라져 버렸어요. 정삼연은 다행히 정원기 교수님이 연의문학 전공자이시기 때문에 성격상 동호인들의 사적 동호회 이상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집니다. 역시 인터네트의 네트워크 속성 상 시간이 지나면서 포탈이라는 거대 허브를 이용하는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들을 자기 내부로 포섭하는 경향이 있어 왔는데, 고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지난 10여 년간 추가 시리즈물을 많이 내보내면서 문학과 역사에 더해서 게임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공간의 성격을 가진 동호회들이 점차로 동호계를 우점해왔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DC갤은 영상문화세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 온갖 분야를 포괄하는 박물지적인 공간이 되어 가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네이버에 있는 <도원결의>에 글은 안 쓰지만 가끔 들어가봅니다. 그곳에도 좌하단에 정삼연이 링크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훌륭한 회원분들이 많으시니까, 들어오시는 분들이 여기서는 다른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저는 여기에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써 왔다는 것이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에 혼란만 더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이번 학기에는 중국중세사 강의를 신청했습니다. 조금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시대사를 들여다 보면 시대사 자체에 대한 이해도 나아지지 않을까 해요. 사실 이번 학기에 중국중세사를 신청한 건 정원기 선생님이 이번에 출간하신 정역삼국지를 읽은 것도 한 계기가 되었구요. 하여간에 한 학기가 지나고 나면 조금 나아지겠지 기대를 해보고 있어요.
밀도가 높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곳들은 그곳들의 순기능이 있는 것처럼 약간 한적한 분위기로 차분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이 공간의 성격도 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하도 오래 된 곳이라 그런지 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거든요. 룰룽님도 글 써주세요^^
 2009/04/11 05:04 
 무적위연 제가 생각할때는 조조는 부친의 죽음을 빌미로 삼아 잔학행위를 한 것으로 봅니다. 조조는 사대부이기는 하지만 환관계통인지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유난히 그런 쪽으로 괴상한 집착을 가졌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반대로 그 시대에 융화되고 싶어하는 강렬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당시 사대부에게 인정받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한가지는, 지극한 '효' 였습니다. 20년상같은게 나온건 바로 그러한 사회분위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죠. 조조가 자신을 높게 평가해준 교현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느낀 점이나 허소를 협박까지 해가면서(논란이 될 수도 있음) 평가를 얻어내려고 한 것은 모두 그가 사대부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의 정치생활이 가능할테니까요. 조조가 서주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한 것 역시 자신의 지극한 효성을 나타내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일찍이 관리를 지내면서 법률을 어겼다고 해서 당시 권력자를 믿고 까불던 이를 죽여버린 퍼포먼스를 통해 사대부들을 놀라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거죠. 2009/07/2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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