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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대 장비, 여포 대 혼다2008-05-24 19:36:34
 희지재


 1
  만부부당의 용맹이 있었다는 기록은 관우와 장비에게 공히 있는 것이라 해도, 두 인물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차등이 있었습니다.

  장비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장판교를 일시적으로 막아서는 것이라면, 관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독자적인 외교로 극적인 순간에 함대를 인솔해 와 민중을 배에 옮기고 유비를 궁극적으로 구출하는 일입니다. 장비도 장합과의 국지전을 승리로 이끄는 명지휘관이지만, 관우는 그 위에 유비가 없는 형주라는 광역을 수비하는 행정책임자 역할도 겸합니다.

  관우에게 인격적으로 결여된 부분 때문에 관우는 오직 유비 아래서만 인정받을 수 있었던 협량의 인물이라는 답글을 최근에 받았습니다만, 적어도 관우는 200년부터 201년이라는 짧은 기간 사이에 조조 밑에 있는 동안 편장군이라는 상당한 관직과 한수정후라는 작위를 받은 인물입니다. 이 당시 항장으로서 곧장 편장군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장합이고, 정후 작위에 올라 있던 대표적인 인물은 익수정후 우금입니다. 관우가 한중왕에게 전장군 벼슬을 받았듯이 우금은 칠군을 이끌 때 좌장군이었고 아들조차 열후가 되었으며 장합은 후에 벼슬이 좌장군을 거쳐 정서거기장군에 이르렀습니다. 주유는 적벽 · 오림의 승전 이후 손권에게 관우와 장비를 유비에게서 떼어놓아 직접 지휘하고 싶다는 표문을 올렸고, 조조는 관우의 예봉을 피해 업성으로 피난할 것을 고려했으며, 믿기는 어렵지만 손권은 관우의 항복을 받고 싶어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서황은 관우와 인간적으로 친밀한 사이였고, <유엽전>에서 위나라 신하들은 다들 유비의 대장은 오직 관우 뿐이었다고 했는데,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해 있던 기간동안 조조의 핵심 막료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사실이 이와 같습니다. 적어도 관우는 적들에게도 존경 혹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비 집단에서 관우가 차지한 지위가 오로지 유비 집단의 협소한 인재풀만을 반영한 결과이며, 심지어 오직 유비만이 특히 인물을 부리는 기량이 뛰어나서 관우를 부릴 수 있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저는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다소 인격적인 문제가 있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중용한 경우는 유비만이 아니라 조조와 손권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비의 경우 유파의 예가 있다면, 조조의 경우에는 곽가, 손권의 경우 반장 등이 궤를 같이 하는 사례입니다.) 물론 반론은 환영입니다.



 2
  여포와 혼다 타다카츠를 비교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질문글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일단 연의와 정사에 기록된 여포의 일신상의 무용을 비교하는 부질없는 작업은 건너뛰기로 합시다.
  저는 이 질문의 핵심이, 중국과 일본에 유명한 무사가 출현한다면 그 둘의 기량 사이에 메이저리그와 KBO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격차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인간의 물리적 기량에는 도달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것이 100m 경주와 같은 종목에서 더 이상 신기록 갱신이 전과 같은 빈도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 그리고 통계적으로 보다 복잡한 수단을 사용해서는 메이저리그에서 더이상 4할타자가 출현하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기술과 훈련의 발전으로 인해 한국야구와 일본야구 사이의 격차가 줄어든 것처럼, 어느 정도 극복 가능한 장벽은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는 운동능력의 한계는 결국 비슷한 수준에서 나타납니다. 이걸 통계의 보이지 않는 오른쪽 벽으로 설정하면, 통계적 집단이 커질수록 변이의 폭이 늘어나 자연스럽게 통계의 오른쪽 벽에 근접하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여포나 혼다 타다카츠, 이승엽을 통계학적으로 설명하면 그렇게 됩니다.

  기술 발달과 경쟁종목의 규칙이 정착된 기간, 훈련의 수준 등은 고려해야 하는 변수에 포함됩니다. 일단 무기제련기술에서는 시계열상 후기에 있는 센고쿠 일본이 더욱 앞서 있었을 것입니다. 규칙에 있어서는 양쪽 모두 전란의 시대로서 동일한 살육전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무기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도 이 시기는 일본에서 무술이 무도 즉 일종의 예도로 성립될 만큼 체계화되던 시기이며 검성으로 추존되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검객이 출현한 시기로서, 훈련의 정도가 적어도 서기 190년대의 중국보다 못 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기 200년 무렵의 중국 인구는 앞서 밝혔다시피 서한 무렵의 6,000만에서 급격히 추락하던 추세였습니다. 진서 지리지의 다소 부정확한 기록을 어쨌거나 그대로 인용하면 이 시기를 통과한 후의 중국 인구는 약 1,600만으로, 1/4 정도입니다. 이보다 높여 읽어야 하는 원인과, 인구 감소에 대해 흔히 누락하고 생각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약 3,000만 안팎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한편 서기 1600년 무렵 센고쿠시대 일본의 인구가 어땠냐면, 1,800만에서 2,000만 정도입니다. 그리고 인구는 증가 추세라서 1750년에는 2,600만에서 3,200만 정도가 됩니다. 이 18세기에는 일본의 도시 인구는 중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많습니다. 이 정도면 일단 여포와 혼다 타다카츠를 맞붙여볼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리오리엔트> 안드레 군더 프랑크, 이산
     <풀하우스> 스티븐 제이 굴드, 사이언스북스
     <正史 삼국지> 진수, 김원중,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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