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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인구2008-05-24 18:57:56
 희지재


 서한대의 기록에서 약 6,000만명에 육박했던 인구는, 전란의 시기를 거쳐 진서 지리지에서 약 1,600만명으로 하락합니다. 이 숫자는 물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통계는 아닙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 외에 도망, 은닉 등도 통계수치의 감소에 크게 일조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에서만 하더라도 유비에게 제갈량이 찾아와 건넨 첫 조언이 형주의 호구조사를 다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서 지리지의 통계치로부터 실제를 추측해본다면 다소 올려서 잡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최근에 알게 된 바 네티즌 동호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저 숫자를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구는 더 증가했다고 보는 논자들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인구통계가 도주, 은닉한 인구를 지목하지 못 하고 있는 약점을 지적하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인구감소에 대한 네티즌의 이해에는 결여된 것이 있기 때문에, 지나친 매도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락된 요소는 바로 기후입니다.

 자연세계를 통제하는 인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믿음은 겨우 몇백년 전에 나타난 것으로, 선사시대부터 고중세사회까지 신비주의와 종교의 근원은 인간의 통제능력의 결여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 인류조차도 기후의 변화를 견뎌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점입니다. 가령 지구온난화는 과격 이슬람주의의 팽창, 창궐하는 AIDS와 조류독감을 비롯한 유행성 질병들, 핵전쟁의 위협, 석유자원과 수자원의 부족만큼이나 심각한 지구촌사회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하게는 사실 우리는 한랭화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홀로세 간빙기의 가을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약 1만년 전부터 인류가 이뤄낸 성공적인 생태적 확장은 홀로세 간빙기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질학자들은 빙하기가 찾아오는 시기에 대해 정확히 예측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편의상 홀로세라고 부르고 있는 이 시기도 문화적 구분에 가까워서 실제로 신생대 빙하기가 끝난 이후의 시기인지, 아니면 빙하기 내에서 빙기와 교대로 나타난 일시적 간빙기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지질학적 정의를 쉽게 설명하면 빙기는 빙하기 가운데 보다 추운 시기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판(Pan)속으로부터 호모(Homo)속으로 따로 분류해낸 것이 생물학적인 요인보다는 문화적인 요인이듯, 홀로세 즉 충적세는 아직 플라이스토세 즉 홍적세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세(世)라는 충분한 증거는 갖고 있지 못 합니다. 홀로세의 온난한 기후가 플라이스토세와 단절적인 안정적 추세인지, 아니면 지구의 일시적 변덕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홀로세 간빙기 내에서도 얼마간의 기온 변화는 존재했습니다. 중세 최적기로 불리는 가장 안정적으로 온난했던 시기에 유럽에는 로마제국이, 중국에는 한제국이 출현했지만, 인류에게는 또한 소빙기라는 위기도 몇 차례 찾아왔습니다. 유럽과 중국을 동시에 기근에 몰아넣었던 가장 유명한 소빙기는 14세기에 찾아왔으며,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진화적 압력 속에서 농업기술도 더욱 발달해갔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소빙기란 인류에게 매우 혹독한 시기였습니다. 기근 속에서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명한 함선 건조를 포기했고, 1606년부터 1622년 사이 제임스타운과 버지니아로 이주한 영국인 정착민의 2/3가 사망했으며, 그린란드의 취락들은 급속히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군대는 가장 혹독한 시기의 겨울에 러시아에서 싸웠으므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위기는 다행히 19세기 중반에 끝났으며 새로운 플라이스토세 빙하기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우리의 교과서에서 홀로세라는 명칭은 그 취약한 정당성마저 완전히 상실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인 중국의 경우로 돌아오면(더이상 독자들의 관심은 고대 중국에 있지 않고 지금 우리의 세계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서한 말부터 서기 7세기까지 중국에는 제 2차 한랭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때의 기후는 현재보다 섭씨 2~4도 가량 낮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재보다 그 정도 높은 기온을 가졌던 온난기에 상하이 지방의 기후가 광둥 지방과 유사했고 물소, 코끼리 등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음을 보면서, 한랭기의 식생을 추측해보시기 바랍니다. 온난기에 쓰여진 <맹자>와 <순자>는 중국 북부지방에서 곡물을 한 해에 두 번 기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도는 식물의 식생에 아주 커다란 차이를 미친다는 것을, 고등학교 한국지리만 제대로 공부했던 분이라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한말에 동탁의 난으로 살기 어려워진 삼보지방의 인구는 대거 형주와 파촉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광무제의 고향으로서 남양 즉 남쪽 도읍으로 성장한 완 땅의 인구도 이때 마찬가지로 이주해갔습니다. 조조와 도겸의 전쟁에서 조조가 행한 소개작전으로 황하와 회수 사이 황회평원은 텅 비게 되었으며 회남으로 이주한 이 지방 인구는 다시 원술의 학정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소빙기에 농업생산성이 하락했을 것이 분명한 화북지방에서는 큰 규모의 황건적과 비적들이 활동을 지속했는데 이를 단지 도교적 비전이라는 이념적 요인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도교적 비전이 근본적으로 무슨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 필요성으로부터 이 시기의 민란을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우리 역사의 갑오농민전쟁에서 종교적인 성향이 짙었던 북접이 전라도의 남접에 비해 무력행동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대표적 지도자인 전봉준은 천도교보다 유학적 소양이 더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북의 원소가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군량으로 사용하고 회남의 원술 역시 수초와 소라류를 군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이 시기 인구를 부양하는 농업적 기반이 대단히 취약해졌으며 군사 정복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대두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서주에서 학살을 진행한 조조가 회남의 인구를 경내로 이주시키려고 할 때 백성들이 모두 강남으로 도주한 사실이 <위지 장제전>에 남아 있고, 유비가 남하하는 조조를 피해 번성에서 떠날 때 형양의 인구가 모두 줄지어 유비를 따라간 사실이 <촉지 선주전>에 남아 있으므로, 이때의 이주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쉬운 일일 것입니다. <위지 도겸전>에 기록된, 조조가 서주에서 과도한 학살을 진행한 사건 역시도 군량 문제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이 듭니다. 서주에서 소개 작전을 행하기에 앞서 조조는 청주의 황건 유민들을 (기록 대로라면 백만이나)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도입한 둔전제와 세병제는 그러한 진화적 압력 속에서 제기된 지혜이며, 그 제도적 식량 관리 능력 차이가 조조의 결정적인 패권을 확립해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형주, 익주, 양주로 이주한 인구가 삼국시대의 인구지리학적 기초를 형성했다는 지적은 이미 한 바 있습니다.

 서기 225년 조비와 손권 간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의 기후가 어떠했는지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조비가 광릉에서 남정할 때 병졸을 10만이나 데려갔지만, 강물이 얼었기 때문에 배를 띄울 수 없어 싸워보지도 못 하고 회군해야만 했다는 <문제기>의 내용입니다. 이 유역은 온난기에는 십년 동안 단 한 번도 눈이 오지 않기도 했던 지역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적한다면, 근본적으로 빙하기라고 해서 기온의 차이가 수십도를 상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단 몇 도의 기온 차이로도 인류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깁니다.

 아직 온난기의 영향 하에 있었던 서한시대에 인구가 한 정점을 찍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반대로 한랭기의 영향에 들어갔던 위진시대에 인구가 추락한 것은 전란이 없더라도 당연했습니다. 그렇기에 기후는 하나의 중요한 변수로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또한 전란, 폭동, 혁명 등 인류 유사의 불안정성이 한랭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발생한다는 가설이 점점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유사의 (거의) 모든 전쟁은 자원 전쟁이며, 결국 인간은 자연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 <분노의 지리학> 하름 데 블레이, 천지인
     <중국 역사 지리> 류제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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